#091
수한은 계속해서 언성을 높였다.
“나는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게 해 주려고 내 꿈은 포기하고 살았어. 그래도 너 미워하거나 귀찮아한 적 없었어. 근데 너는 이제 다 컸다고 내가 필요 없다는 식으로 굴어?”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형.”
“뭐가 아니야? 너 지금 내 의견은 다 무시하고 네 멋대로 살겠다는 거잖아.”
“나는 그냥, 형도 내 의견을 좀 존중해 달라는 거야.”
“내가 언제 네 의견을 무시했는데?”
수한은 한껏 격양된 채로 계속해서 인한을 몰아붙였다. 이대로 계속 언쟁을 이어 가다가는 최악의 결말을 맞게 될지도 몰랐다. 결국 이번에도 인한은 한 수 물러나는 것을 택했다.
“……알겠어, 형. 내가 잘못했어.”
“…….”
“내가 말이 좀 심했어. 앞으로는 형하고 상의할게.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
“한 번만 더 그래 봐. 진짜 연 끊고 사는 거야.”
인한의 사과에도 수한은 화가 안 풀리는지 소파에 앉아 씩씩댔다. 인한은 한 번 더 수한을 재촉했다.
“형. 나 이제 진짜 가 봐야 돼.”
“난 더 있다가 갈게.”
“뭐?”
“왜? 숙소도 아니고 동생 혼자 지내는 집인데 형이 있지도 못해?”
막무가내인 수한의 태도에 인한은 할 말을 잃었다. 게다가 이대로 안 된다고 하기에는 의심만 키울 게 분명했다.
다행히 집 안 어디에도 유호와 사귀고 있다고 확신할 만한 건 남아 있지 않았다. 전날 유호의 컨디션을 생각해 끝까지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지금 수한의 기세라면 쓰레기통을 뒤져 흔적을 찾고도 남아 보였다.
“그럼 그러든가.”
인한은 서랍에 있을 몇 가지의 물품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여자 친구가 있었다고 둘러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미성년자도 아닌데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다니. 인한은 씁쓸했지만 수한을 형으로 둔 이상 언젠가는 치를 일이라 여겼다.
“숙소는 이대로 따로 써. 어차피 지금 숙소, 조만간 정리될 거 같으니까.”
인한은 수한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재계약 문제로 논쟁을 벌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나 올 때까지 계속 있을 거야?”
“아냐. 이따 애들 어린이집 데리러 가야 돼.”
“그럼 나중에 통화해.”
“그래. 스케줄 잘 가고. 밥 잘 챙겨 먹어.”
한풀 꺾여 누그러진 수한의 말투에 인한은 마음이 더 심란해졌다. 차라리 수한이 못되기만 했으면 외면하기 쉬웠을 텐데, 그 속에 숨겨져 있는 애틋함이 인한을 더더욱 옭아맸다.
인한은 언젠가 수한과 유호를 두고 저울질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올까 봐 너무 두려웠다.
유호 - [괜찮아? 별일 없지?]
인한은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핸드폰을 확인했다. 유호에게서 온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인한은 바로 답장했다.
인한 - [응 숙소 얘기로 잠깐 말다툼하고 말았어요]
유호 - [혹시 들킨 건... 아니겠지?]
인한 - [전혀요 의심하는 게 이상하지]
유호 - [당분간 너네 집 가는 것도 조심해야겠다]
인한 - [왜요? 친한 형, 동생 사이에 집에 놀러 올 수도 있지]
유호 - [그래도...]
인한 -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우리 형은 그냥 모든 인간을 불편해해]
대답을 망설이는 모양인지 유호의 답장에 텀이 생겼다. 인한은 유호를 달래기 위해 한 번 더 메시지를 보냈다.
인한 - [그러니까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형은 그냥 나만 봐 줘요]
유호는 인한의 절절한 메시지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다음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유호 - [이미 그러고 있는데]
인한 - [한눈도 팔면 안 돼요]
유호 - [너 하는 거 봐서]
인한 - [앗 나 말고는 아무도 눈에 안 들어오게 해 줘야겠네]
유호 - [ㄷㄷ 벌써부터 무서운데]
인한 - [리딩 장소는? 가는 중?]
유호 - [바로 앞이야] [이따 또 연락할게]
인한 - [응 잘하고 와요]
유호 - [응응]
인한과의 대화를 마친 유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화살표 안내에 따라 대회의실로 향했다.
유호는 대본 리딩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감독과 작가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다음 원로 배우들에게도 예의상 인사를 드리고 이름이 적힌 자리를 찾아가 앉았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에 괜히 긴장됐다.
이후에는 아는 얼굴이 없어 제본된 대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있었다.
“안녕하세요, 주선찬입니다.”
선찬은 자리가 거의 채워진 후에야 매니저와 함께 등장했다.
유호가 아는 체를 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선찬은 곧장 앞자리로 향해 제작진과 선배 배우들에게 인사를 건네기 바빴다. 주연 배우라 그런지 인사가 꽤 길게 이어졌다.
그대로 앞에 마련된 자리에 앉겠다 싶어 유호가 시선을 거두려는데 선찬이 다시 돌아서서 유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유호는 행여나 자신을 향한 게 아니면 어쩌나 고민하면서도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선찬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유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와 어깨를 짚으며 인사를 건넸다.
“유호. 그동안 잘 지냈지?”
“어, 선찬아. 너는 영화 촬영 잘하고 있어?”
“응. 얼마 전에 낙마해서 손목 인대 늘어난 거 빼고는 문제없어.”
“뭐? 괜찮아? 어느 쪽? 깁스는 왜 안 했어?”
유호는 놀라 선찬의 손목을 잡아 살폈다. 허둥대는 그 모습에 선찬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거의 다 나았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전과 다름없는 선찬의 태도에 유호는 저도 모르게 안심했다. 내심 아는 체도 안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던 중이었다.
“요즘 어때? 괜찮아?”
선찬은 미소 띤 얼굴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이었다.
“응. 좋아.”
유호는 단박에 알아듣고 대답했다.
선찬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유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래. 이번 작품도 같이 잘해 보자.”
“응. 너도 너무 무리하지 말고.”
그대로 선찬은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홍보 영상을 촬영하느라 첫날임에도 대본 리딩은 장시간 진행됐다. 중간에 주승이 여민의 스케줄 때문에 자리를 떴고 유호는 고사 현장과 회식 자리까지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간혹 옆자리에 앉은 열세 살의 아역 배우가 말 상대가 돼 주고는 했다. 회식 자리에서는 아역 배우의 엄마들과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유호는 아역 무리들이 고기만 먹고 자리를 뜰 때 덩달아 일어나 감독에게 인사를 건넸다.
“저희 먼저 가 보겠습니다.”
“아. 그래요. 다들 조심히 들어가요.”
“네. 안녕히 계세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감독은 어린이들 틈에 섞여 있는 유호를 아무렇지 않게 보내 줬다.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던 선찬만이 유호의 이른 귀가를 아쉬워했다.
“유호. 벌써 가?”
“어. 먼저 가 볼게.”
“저 친구랑 인사 좀 하고 올게요.”
굳이 안 그래도 될 텐데 선찬은 자리에서 일어나 유호를 따라나섰다. 유호는 얼떨결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회식 장소를 벗어났다.
“매니저님은?”
“아. 다른 멤버 스케줄 때문에.”
“그럼 택시 타고 가게?”
“응.”
“그렇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유호는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택시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다음에 또…….”
“택시 불렀어?”
“어? 아니. 이제 부르려고.”
“얼른 불러. 이 근처 택시 잘 안 잡혀.”
“아, 응.”
선찬의 말에 유호는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 콜택시를 불렀다. 장거리 이동이라 그런지 다행히 5분 거리의 택시가 수월하게 잡혔다.
“잡았어. 5분이면 오네.”
“그래? 다행이다.”
간단히 인사만 하고 돌아갈 줄 알았던 선찬은 계속해서 유호의 옆을 지켰다. 아무래도 택시를 함께 기다려 주려는 모양이었다.
“얼굴 좋아 보이네.”
“아. 그래? 요새 잠을 잘 자서 그런가.”
“인한이는? 잘 지내고?”
“응. 걔는 너무 잘 지내서 탈이지.”
그렇게 말하며 자연스럽게 지어진 유호의 미소에 선찬의 마음이 심란해졌다. 정말 기쁠 때의 얼굴을 이제야 알게 됐다는 사실이 못내 씁쓸했다.
“너는 어때?”
“나?”
“응. 잘 지내지?”
“글쎄.”
선찬은 유호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잘 지낸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아니라고 하기에는 유호가 부담을 느낄까 봐 걱정됐다.
“이렇게 보니까 또 좋고 그러네.”
“어?”
“말 그대로야. 그냥 보니까 좋다고.”
결국 선찬은 애매한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괜한 변명을 덧붙였다.
유호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해 당황하기 시작했고 마침 타이밍 좋게 콜택시가 등장했다.
어쩔 수 없이 선찬은 유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아, 응. 선찬이 너도 회식 마저 잘하고.”
“응.”
결국 선찬이 먼저 자리를 떠났다. 유호는 서둘러 택시에 올라타 숙소로 향했다. 선찬의 말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게 괜히 마음에 걸렸다.
유호는 생각보다 일찍 숙소에 도착했다. 다행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유호는 곧장 인한의 방으로 향했다.
인한은 방문 앞에서부터 유호를 반기며 품속 가득 끌어안았다. 유호도 안정감을 느끼며 인한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리딩 잘하고 왔어요?”
“응. 뻘쭘한 거 빼고는 괜찮았어.”
“형한테서 고기 냄새 난다.”
인한이 유호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였다. 유호가 놀라 반응했다.
“그새 뱄나 보다. 얼른 씻고 올게.”
“왜? 식욕 돋고 좋은데.”
“너 식단 관리 중 아니야?”
“형을 먹는다고 살이 찌지는 않을 거 아냐?”
인한은 장난스럽게 말하며 유호의 목을 깨물었다. 유호는 움찔대며 뒤로 물러났지만 인한은 더 다가가 유호의 귀를 깨물고 얼굴을 가까이 해 아랫입술도 잘근 씹어 댔다.
어느새 방문 앞까지 내몰린 유호가 곤란한 표정으로 인한을 올려다봤다.
“키스만 하기로 했잖아.”
“응. 키스만 할 거야.”
인한은 유호의 양 볼을 감싼 뒤 얼굴을 내려 입을 맞췄다. 곧 짙은 키스가 이어졌고 인한의 손에 의해 문이 딸깍 잠기는 소리가 났다. 유호는 인한이 얼마나 격정적인 스킨십을 이어 나갈 생각이길래 문까지 잠그나 싶어 걱정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