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0
세상에 온전한 비밀이 어디 있을까.
인한은 자신의 인생에서 불행은 늘 가장 행복한 순간에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수한 - [너 지금 어디야?]
귀찮아 넘겨 버린 메시지 하나가 이후에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미처 예견하지 못했다.
언젠가 벌어질 일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사랑에 눈이 멀어 주변을 둘러보지 못한 탓이었다.
유호는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동시에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인한과 눈이 마주쳤다.
“잘 잤어요?”
유호가 대답 없이 눈만 깜빡이고 있자 인한은 얼굴을 가까이 해 유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유호는 한껏 갈라진 목소리로 인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는 왜 운동복 차림이야?”
“요새 누구 때문에 마음이 들떠서 그런가, 눈이 자꾸 일찍 떠지네.”
인한은 유호의 목에 얼굴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유호는 간지러워 어깨를 움찔댔다.
“오늘 드라마 전체 대본 리딩 날이랬죠?”
“응.”
“선찬이 형 보겠네.”
“……그렇겠지.”
“회식도 할 테고.”
“그러지 않을까?”
“목에다 자국 남겨도 돼요?”
인한은 유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목에다 입을 맞추고 이를 세웠다. 유호는 놀라 인한의 어깨를 밀어냈다.
“당연히 안 되지.”
“그럼, 여기는?”
이번에 인한은 유호의 어깨를 이로 살짝 깨물며 질문을 던졌다. 유호는 바로 고개를 도리질 쳤다.
“거기도 안 돼.”
“그럼, 여기다 남겨야겠네. 아무한테도 안 들키고 나만 보게.”
어느새 이불 속으로 들어간 인한이 유호의 허벅지에 얼굴을 가져갔다. 유호는 잠시 움찔대다가 인한에 의해 손쉽게 벗겨진 바지로 손을 뻗었다. 다시 끌어올리려고 시도해 봤지만 곧바로 다리가 허공에 들려졌다.
“나, 나갈 준비…… 해야 돼.”
“알겠어. 빨리 끝낼게.”
자고 일어나기만 하면 체력이 만땅으로 충전되는 모양인지 인한은 아침부터 힘이 과하게 넘쳤다.
연한 살을 잘근대는 느낌에 유호는 별수 없이 허리를 들썩이며 달뜬 숨을 뱉어 냈다. 아무래도 오늘 미팅에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가야 할 듯싶었다.
“오늘 숙소 가도 못 보겠네.”
인한은 유호와 헤어지는 게 아쉬워 유호의 허리를 감싸 안은 채 등에 딱 붙어 한 몸처럼 따라다녔다. 유호는 귀찮지도 않은지 인한을 매달고 차근차근 나갈 준비를 마쳤다.
“나 출연 회차도 적고 술도 못 마셔서 금방 갈 수 있을걸?”
“그럼 오늘도 집으로 올래요? 회식 핑계 대고?”
“네가 숙소로 와. 회식 핑계 대고 네 방으로 갈게.”
유호의 말에 인한은 기분이 좋아져 어깨에 얼굴을 비비적댔다. 유호는 손을 뻗어 인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도 못 잡게 할 거라면서.”
“키스 정도는 해도 되지 않을까?”
“이미 키스로는 부족한 몸이 되어 버렸는데?”
“그렇다고 자꾸 핑계 대고 외박할 수도 없잖아. 무려 다섯 명이나 되는 동거인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걸?”
“재계약하게 되면 숙소 얘기부터 다시 해 봐야겠다.”
“어떻게?”
“셋, 셋으로 나눠 살게 해 달라고. 테일러 형은 당연히 혼자 살 테니까 형이랑 나랑만 같이 사는 거지.”
“그럼 매니저 형들은?”
“…….”
인한은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는지 다시 절망하며 유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유호는 주승의 전화를 받고 서둘러 현관을 나섰다. 인한은 아직 여유가 있음에도 현관까지 따라와 유호에게 작별의 키스를 남발했다.
인한은 유호의 입술을 손으로 닦아 주고 헝클어진 옷과 머리를 정리해 준 후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인물과 마주하게 됐다.
“……형.”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수한은 현관 바로 앞에서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인한에게 머물렀다가 유호를 향했다. 유호는 다급하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수한이 형. 또 뵙네요.”
“그래, 유호야. 자주 보네?”
“그러게요.”
불륜 현장을 들키기라도 한 것처럼 긴장돼 유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인한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반응했다.
“어쩐 일이야? 연락도 없이.”
“연락했으면, 또 거짓말하려고?”
인한은 수한이 일부러 초인종을 누르지 않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혹시나 없는 척을 하거나 거짓말로 둘러댈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속셈인 게 뻔했다. 인한은 수한의 치밀함에 환멸을 느끼며 대답했다.
“제대로 정리되면 말하려고 했어.”
“작년 여름부터 나와 살았다며.”
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수한은 인한의 독립 시기까지 꿰고 있었다. 회사에서 말이 샌 건지 사생팬 사이에나 돌던 소문이 퍼져 나간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완전히 나온 건 아니고 숙소랑 왔다 갔다 하는 중이고.”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말 안 했는데?”
계속되는 수한의 날 선 반응에 인한은 얘기가 길어질 것을 직감했다. 우선은 유호부터 먼저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호 형, 먼저 가요. 스케줄 늦겠다.”
“어, 그래. 이따 숙소에서 봐.”
유호 역시 서둘러 자리를 피해 주고자 했다. 유호는 수한에게 마저 인사를 건넸다.
“형. 그럼, 다음에 뵐게요.”
수한은 유호의 자리 이탈이 못마땅한 눈치였다. 그의 매서운 시선이 유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갔다.
옷으로 꽁꽁 싸맨 덕에 전날의 흔적이 드러난 곳이 없을 텐데도 유호는 수한의 앞에 발가벗겨져 있는 기분에 휩싸였다. 더 뻔뻔하게 굴어야 의심을 사지 않을 텐데도 그랬다.
“그래. 수고해.”
“네, 그럼.”
수한은 유호에게 형식적으로라도 다음에 또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유호는 사랑하는 이의 가족에게 주는 거 없이 미운 포지션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이 씁쓸했다.
게다가 앞으로는 수한이 언제 들이닥칠 줄 모르니 인한의 집조차 안전한 데이트 장소가 될 수 없었다. 점점 더 두 사람이 설 자리가 줄어들고 있었다.
“들어와서 얘기해.”
인한은 서로 언성이 높아질 것을 우려해 수한을 현관 안으로 들였다. 수한은 기다렸다는 듯 인한의 뒤를 따랐다.
“마실 것 좀 줘?”
인한이 자리를 권할 새도 없이 수한은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방문을 열어젖히고 집 안 곳곳을 헤집기 시작했다. 말린다고 말을 들을 사람이 아니니 인한은 그냥 수한을 내버려 뒀다.
“나 스케줄 가야 해. 집은 다음에 보고 할 얘기 있으면 빨리하고 가.”
그 대신 인한은 시간을 재촉했다. 그러나 수한은 대꾸도 하지 않고 방이며 화장실을 살피기 바빴다.
큰 방 침대에 나란히 놓인 베개 두 개와 화장실에 놓인 칫솔 두 개에는 사용감이 가득했다. 특히 창고처럼 보이는 작은 방에 유호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한데 모여져 있는 게 상당히 거슬렸다.
뿐만 아니라 실내화부터 잠옷, 각종 컵과 식기류가 딱 두 세트로만 맞춰져 있는 게 얼핏 보면 신혼집이라고 착각할 만한 모양새였다. 수한은 그 불편한 진실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인한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누가 보면 둘이 살림이라도 차렸는지 알겠어?”
인한은 짜증이 난 얼굴로 이마를 짚으며 대답했다.
“무슨 살림을 차려? 친한데 놀러 올 수도 있지.”
“하루 이틀 놀러 온 게 아닌 거 같은데.”
“유호 형만 놀러 오는 거 아니야. 다른 형들도 수시로 드나들어.”
“칫솔 두 개뿐이던데?”
“어제는 유호 형만 놀러 왔으니까. 내가 이런 변명까지 해야 돼?”
인한은 수한의 유난스러운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독립 얘기를 안 한 거야 나무랄 이유가 충분했지만, 자꾸 유호를 걸고넘어지는 건 다른 문제였다. 대체 어떤 부분이 그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는지 짐작되지 않았다.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유호 형이 뭐 어쨌다고.”
“네가 문제지. 네가 걔 얘기만 나오면 지나치게 싸고도니까.”
“그거야 형이 자꾸 못마땅해하니까.”
“나 다른 애들도 못마땅해해.”
그게 그렇게 자랑스럽게 내뱉을 말은 아닌 거 같은데. 요즘 들어 인한은 세상에 수한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라도 있을까 싶었다. 저도 한결같이 못마땅하게 여기니 말이다.
“그러니까. 뭐가 그렇게 맨날 불만족스러워서 트집을 잡냐고.”
“너 괜히 또 걔들한테 발목 잡힐까 봐. 그러다 너까지 주저앉혀질까 봐.”
“형. 말 그렇게 하지 말랬지.”
인한은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다른 멤버들을 짐처럼 취급하는 수한의 태도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다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잖아.”
“필요 없으니까, 그런 말 좀 하지 마.”
“그래서, 이유가 뭔데?”
“뭐가?”
“이사까지 해 놓고 나한테 말 안 한 이유.”
그 이유야 당연히 수한이 이렇게 쫓아와 잔소리를 늘어놓을 것을 알아서였다. 더불어 연애하는 데 방해가 될 테니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그가 아니더라도 엄마가 시시때때로 찾아올 게 뻔했고 그렇게 되면 숙소보다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될 거였다.
“연애해?”
“연애하면? 내가 애도 아니고 뭐가 문제야?”
“그렇다고 계약 기간도 안 끝났는데 숙소를 나와 살아? 이거 다 경비로 들어가서 정산할 때 빠질 텐데.”
“다 큰 남자 여덟 명이서 부대끼면서 사는 거 보통 일 아니야. 나 나올 때 태윤이 형도 독립했고. 내가 잠도 못 자고 쉬지도 못하면서 번 돈으로 독립도 마음대로 못 해?”
“그걸 왜 나하고 상의도 없이 결정하냐는 거야.”
“그럼 내가 언제까지 형 허락받으면서 모든 걸 결정해야 하는데?”
“뭐?”
인한은 홧김에 기어이 참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사실은 내내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수한은 충격받은 얼굴로 인한에게 되물었다.
“뭐야? 이제는 다 컸으니까 너한테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야?”
“형, 그만 좀 하자.”
“뭘 그만해? 내가 뭘 어쨌다고?”
“제발 내가 형 미워하게 만들지 좀 마. 형이 이러니까 내가 독립한 거 말 안 한 거야.”
“뭐라고?”
“형.”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
“네가 지금 누구 때문에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누리고 사는 건데, 나한테 어떻게 그런 식으로 말해?”
두 사람의 말다툼은 결국 감정싸움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몇 년 전까지는 서로 애틋한 마음이 더 많았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서로를 버거워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