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아이돌 멤버가 유죄인 이유 (83)화 (83/120)

#083

“6단계 이상은 언제 할 수 있어요?”

다음 날이었다. 함께 아침 식사를 하면서 인한은 유호에게 대뜸 이상한 질문을 해 왔다.

유호는 처음에 무슨 말인가 하다가 스킨십 단계를 뜻한다는 걸 깨닫고 눈을 흘겼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내년쯤에나.”

“아. 내년에.”

인한은 만족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유호는 아차 싶었다. 올해가 3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한 발언이었다.

“새해 첫날에 우리 집에 올래요?”

“무슨 소리야? 그런 날은 가족하고 보내야지.”

“구정 때는 보내 줄게요.”

“너 새해 첫날 은설 배우님이랑 있을 거잖아.”

유호의 거침없는 발언에 인한은 먹던 음식을 그대로 뱉을 뻔했다. 어쩐지 유호의 적극성과 비례해 공격력까지 상승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건 시상식 때문에…….”

“그래도 까짓것 내가 기다려 줄게.”

“…….”

“나 너 기다리는 건 천만년도 할 수 있어.”

“형. 키스해도 돼요?”

인한은 조금 전 공격당한 건 까맣게 잊고 감격에 겨워 유호에게 물었다. 유호는 어이없어하며 대답했다.

“올해는 안 된다니까.”

“못 참겠는데.”

“너는 좀 기다리는 척이라도 해 봐. 아예 뽀뽀도 못 하게 한다.”

“에이. 스킨십에 후퇴가 어디 있어요?”

“한번 보여 줘?”

“아니욥.”

인한은 냉큼 대답했다. 지금도 닿지 못해 애달파 죽겠는데 입맞춤 금지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인한아. 잠시만…….”

스킨십에 후퇴가 어디 있냐는 제 말을 증명하듯 인한은 식사 후에 몇 번이나 유호에게 입술을 맞붙였다. 포옹을 빙자해서 목 언저리를 깨물었을 때 유호는 진심으로 인한의 집에서 계속 자고 가는 게 옳은 일인가 고민했다.

“나 오늘은 숙소에서 잘래.”

“어째서.”

“이따 숙소에서 보자.”

유호의 냉정한 반응을 얻어내고 나서야 인한은 반성이란 걸 하는 눈치였다.

“그럼 한 번만 더.”

아니. 조금도 개선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래도 유호는 인한을 밀어내지 않고 얌전히 있었다. 인한에게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히고 나서야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인한의 등을 퍽 때렸다.

“이게 어떻게 뽀뽀야?”

“그럼 키스는 어떻게 다른지 알려 줄까요?”

“아니.”

인한은 몇 번 더 얻어맞고 나서야 유호를 놓아주었다.

* * *

운성 - [이 프로듀서 음악 좀 들어보고 와]

[https://nu.tube/skjd00ko]

유호 - [혹시 기타 코드도 따 가야 할까요?]

운성 - [아냐 들어보기만 하고 와]

유호 - [넹넹]

운성 - [인한이 달고 오지 말고]

유호 - […네]

일과 관련된 미팅이니 인한을 떼놓고 오라는 운성의 당부에 유호는 어쩔 수 없이 홀로 합정동의 작업실로 향하기로 했다.

절대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릴 줄 알았던 인한은 운성과의 한 차례 통화 후 태도를 바꿔 유호를 순순히 보내 주었다.

다만 10분 단위로 전화와 메시지를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유호는 상황을 봐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인한은 못 들은 척을 했다.

유호는 운성의 작업실까지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이미 두 번을 방문해 익숙해진 건물의 지하 계단을 내려간 다음 망설임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곧 운성이 작업실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유호는 운성을 마주하자마자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운성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유호의 등 뒤를 살핀 후 인한이 없다는 사실에 만족하며 유호를 작업실 안으로 들였다.

“진짜 떼놓고 왔네.”

“따라오고 싶어도 못 그럴 거예요. 워낙 바빠서.”

“그 와중에 불같은 연애도 하고 대단하네, 우리 인한이.”

“아뇨. 딱히 불같지는 않은…… 네?”

“어?”

“……혹시 아세요?”

“응. 대충 감으로.”

“아.”

유호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운성이 알면서도 자신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는 걸 보니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다. 응원은 못 받더라도 인정을 해 주는 게 어디인가 싶었다.

동시에 더더욱 인한을 단속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혹시 언제부터…….”

“너네 둘이 쌍방으로 삽질할 때부터.”

“아.”

유호 본인 또한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여기는 비조라고 우리 회사 레이블 소속 프로듀서. 인사해.”

“아. 안녕하세요. 세븐스팟 선유호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비조입니다.”

운성 혼자 있는 줄 알았던 작업실 소파에는 낯선 사람이 한 명 앉아 있었다. 회색으로 머리카락을 염색한 20대 중반의 남자였다. 운성이 일전에 유호에게 보내 준 음악 목록의 주인공이었다.

유호는 운성의 권유에 따라 비조의 맞은편 자리에 앉게 됐다.

그리고 곧 운성이 초대의 목적을 밝혔다.

“얘가 요새 언더 신에서 좀 핫한 애인데 이번에 새 앨범 작업 들어가거든. 그래서 객원 보컬로 유호 네가 참여해 주는 게 어떨까 싶어서.”

“제가요?”

“어. 한 6곡 정도 들어갈 건데 타이틀곡은 내가 작업할 거고. 수록곡 중에서 하나 맡아 달라고.”

“너무 좋아요.”

유호는 고민할 필요도 없이 바로 긍정의 답을 들려주었다. 오히려 감사하다고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게, 제가 그렇게 유명한 건 아니어서 화제는 안 될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요.”

멋쩍어하며 건네진 비조의 말에 유호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대답했다. 운성은 유호의 격렬한 반응에 놀라 말을 보탰다.

“네가 그동안 개인 활동이 진심으로 고팠구나.”

“네. 완전요. 그리고 프로듀서님 작업물 너무 제 취향이라.”

“아. 감사합니다.”

비조는 얼떨떨해하며 반응했고 유호는 의아해하며 운성에게 물었다.

“근데 왜 저예요?”

운성의 주변에 자신보다 노래 잘하는 사람이 발에 채이고도 남을 텐데 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자신에게 넘겨주나 싶었다.

“네 화제성 좀 이용해 보려고.”

“제 화제성이요?”

웹드라마와 라이브 방송 덕에 살짝 빛을 보는가 했던 유호의 화제성은 몇 번의 예능을 노잼으로 만든 후 다시 사그라들었다. 인생에 세 번쯤 온다는 한 방이 유호에게는 아직 안 온 듯했다. 유호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너 아이돌이잖아. 이번에 새로 드라마도 들어간다며.”

“그다지 효과는 못 보실 텐데.”

“사실은 일종의 미끼야.”

“미끼요?”

“응. 새롭게 제안할 게 있어서.”

“뭐를요?”

“계약 종료되면 우리 레이블 오는 건 어떤가 해서.”

“네?”

연속으로 이어진 예상치 못한 제안에 유호는 얼떨떨했다. 지금 회사를 나오게 되면 소속사나 찾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먼저 이적 제안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운성의 회사는 나름 유명한 밴드들이 속해 있는 음악 레이블이었다.

“배우 활동하는 데는 다른 회사가 더 낫겠지만, 우리 회사는 자유롭게 음악 활동에 매진할 수 있으니까. 뭐 딱히 지원해 주는 건 별로 없는데 그래도 같이 공연하고 공동작업하고 그런 건 즐겁게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유호는 운성이 뱉는 모든 말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사실 아이돌 제안을 받기 전까지는 밴드로 데뷔하는 게 꿈이었으니 뒤늦게나마 원하는 걸 이루게 되는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다.

“너무 감사하고 좋기는 한데…… 제가 아직 계약 기간이 남아 있어서요.”

“그건 알지. 물론 그룹 유지되는 게 제일 좋기는 할 테지만 혹시 모르니 보험 하나 삼아 두라고.”

“보험이라뇨. 저한테는 너무 영광이죠.”

“그럼 남은 기간 동안 고민해 봐. 그사이에 더 좋은 회사에서 제안 들어오면 당연히 거기 가는 게 맞고.”

“네. 진짜 감사드려요.”

운성의 말에 유호는 생각이 많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룹 유지에 대한 가능성은 희박해지고 있었고 멤버들 대부분이 그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편한 진실을 가장 먼저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인한이한테는 같이 곡 작업하는 것만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회사 옮기는 얘기는 네가 잘 생각해 보고 상의하던가 해.”

“네. 그럴게요.”

이제야 유호는 왜 운성이 인한을 떼어놓고 오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도 완전체 활동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한이 이 얘기를 들으면 얼마나 화를 낼까 싶었다.

두 사람의 우정을 위해서 당분간은 입을 다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곡 작업 얘기, 마저 해 볼까?”

“네. 좋아요.”

“비조야. 네가 설명해 줘.”

“아. 네.”

그 뒤로 유호는 비조와 음악 얘기를 한참 나누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구체적인 녹음 날짜까지 잡았다. 다행히 대화가 잘 통해 2시간 만에 작업 얘기는 마무리됐다.

문제는 그사이에 폭주해 버린 정인한이었다. 유호의 핸드폰에는 인한에게서 온 7통의 부재중 전화와 41개의 메시지 기록이 남아 있었다.

인한 - [작업실 도착했어요?]

인한 - [운성이 형이 뭐래요?]

인한 - [형] [혀어ㅓㅓㅓㅓㅇ]

인한 - [바빠요?]

인한 - [연락 좀 줘요 걱정되네]

인한 - [형아]

인한 - [전화 좀…]

인한 - [혹시 나 차단했어요? ㅠㅠ]

인한 - [형… 나 버린 거 아니지? ㅜㅜㅜㅜㅜㅜ]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다 기어이 이별에까지 도달해 있는 인한의 메시지를 보며 유호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단 하나의 메시지를 전송했다.

유호 - [인한아 제발 진정해]

인한에게서는 곧바로 전화가 왔다. 유호는 운성에게 양해를 구하고 녹음실로 가 전화를 받았다. 다행히 인한의 불안은 유호의 몇 마디로 금세 해소됐다.

- 그 프로듀서 잘생겼어요?

“아니. 내 눈에는 너만 잘생겨 보여.”

- 작곡은? 잘해요?

“그래도 네가 훨씬 더 멋있어.”

- 형. 나 사랑해요?

“응. 사랑해.”

- 그럼 작업 잘하고 와요.

“응.”

순식간에 얌전해진 인한의 태도에 유호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유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인한은 숙소로 돌아갈 때까지 단 두 개의 메시지만 남겨 놓았다.

인한 - [내 눈에도 형밖에 안 보여요]

인한 - [사랑해요]

유호는 다급하게 메신저 화면을 벗어났다.

아무래도 인한을 당해 내는 건 유호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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