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6
“인한이가 저 좋아하는 거…… 형은 알고 있었어요?”
유호는 혹시나 싶어 테일러에게 물었다. 인한의 성격상 먼저 그에게 털어놨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
“언제부터요?”
“처음부터.”
“……어떻게요?”
“왜 몰라? 눈에 뻔히 보이는데.”
뭘 당연한 걸 묻냐는 테일러의 반응에 유호는 할 말을 잃었다. 그동안 자신이 착각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제 와 진심이 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하다 여겨졌다.
“이제는 너도 알지 않아?”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유호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전한 고백에 혼란스러워하던 인한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기어이 거짓으로 결론지은 후에야 끝이 났던 과거의 사건들이 여태 유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냥 조금 더 특별히 아껴 주는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너도 한동안은 헷갈렸을 거잖아. 네 마음이 정말로 사랑인지, 아닌지.”
테일러의 말이 맞았다. 같은 남자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유호 역시 인한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고 나서도 끊임없이 자신의 감정을 의심했다. 차라리 사랑이 아니길 바랐던 순간도 무수히 많았다.
“걔는 세상 물정을 몰라서 그게 더 오래 걸린 거지.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 시기가 최대한 나중이길 바랐고.”
“…….”
“그래서 나도 너한테 사과하고 싶어. 네가 지난 몇 년간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면서 모른 척했으니까. 리더가 돼서 너무 내 생각만 했어.”
테일러는 이제 자신의 욕심을 내려놓을 때라고 생각했다. 곧 데뷔 6년 차를 앞두고 있는 마당에 아직까지 두 사람의 연애를 반대하는 건 아무래도 지나쳤다.
“아니에요. 형이 왜 미안해요? 형이야말로 저희 때문에 마음고생 심했을 텐데.”
“그러니까 이제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네 인생에서 너보다 다른 게 더 중요하면 안 되잖아?”
예상치 못한 테일러의 말에 유호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울컥해 눈물이 날 뻔한 걸 겨우 참아 냈다.
“……형. 고마워요. 제가 더 잘할게요. 그룹에 피해 안 가게 정말 잘할게요.”
“할 말 다 했으면 사라져. 곡 작업 해야 돼.”
테일러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유호를 잡상인 취급하기 시작했다. 테일러가 민망해하는 걸 눈치챈 유호는 순순히 작업실에서 퇴장하기로 했다. 그러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돌아서서 질문을 던졌다.
“형은 요새 어때요?”
“뭐가?”
“저번에 말했던 그 도명 선배…….”
“너는 그게 왜 궁금한데?”
“그럼 가 볼게요.”
테일러에게 한 소리 들을세라 유호는 서둘러 작업실을 벗어났다. 나름 야심 차게 건넨 질문이었는데 얻는 것도 없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유호는 그대로 미련 없이 연습실로 향했다. 테일러를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나름 속앓이를 했는데 수월하게 해결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는 일만 남았다.
인한 - [점심은?] [잘 챙겨 먹었어요?]
인한 - [브이앱 잘 봤어요 ㅋㅋㅋ 보는 내가 숨 막히던데]
그새 유호의 핸드폰에는 인한에게서 온 메시지가 남겨져 있었다.
유호 - [나 진짜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ㅜㅜ]
유호는 옅게 미소 띤 얼굴로 바로 답장했다.
작업실에 남겨진 테일러는 다시 곡 작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르는 솔로 앨범이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유일하게 알림 설정을 해 놓은 특정인의 메시지가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다.
테일러는 확인하지 않고 핸드폰을 뒤집었다.
밤 9시, 유호는 숙소 거실 소파에 앉아 라울리, 주언과 함께 연예대상 시상식을 시청하는 중이었다.
“정인한. 오늘 머리에 힘 좀 줬는데?”
“여민이도 옷 예쁘게 입었네.”
라울리와 주언은 카메라에 잡힌 인한과 여민을 발견하고 한 마디씩을 주고받았다.
유호는 말없이 인한의 착장을 감상하고 있었다. 올 블랙 정장 패션에 머리카락을 전부 뒤로 넘긴 인한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잘났다고 생각했다.
“오늘 수상하려나?”
“그래도 참석했는데 뭐 하나 주지 않겠어요?”
“우수상 받기에는 후보가 너무 쟁쟁한데.”
“인기상 주겠지, 그럼.”
주언과 라울리는 계속해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세 사람은 이제 막 치킨을 시켜 놓고 시상식이 끝나는 시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방송이 끝나는 대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인한이 연기대상에서 베스트 커플상은 확정 아닌가?”
그러다 대뜸 라울리가 말했다. 주언은 바로 반응했다.
“손은설 배우님이랑?”
“응. 그 드라마 해외에서 터져서 요새도 난리잖아.”
이야기의 주제는 갑작스럽게 연기대상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랜만에 듣게 된 익숙한 이름에 유호는 마음이 뒤숭숭해졌다. 두 사람이 공중파 채널 연기대상의 베스트 커플상 후보이자 유력 수상자인 건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 그 투 숏이 TV로 송출될 걸 생각하니 유호는 벌써 아찔해졌다. 아무래도 연기대상은 지켜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진짜 잘 어울렸는데.”
왜 연예 대상을 보면서 인한의 열애설 상대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지만 유호는 귀를 닫고 TV 화면에 집중하기로 했다.
하지만 라울리는 눈치도 없이 유호의 동조를 바랐다.
“형도 그렇게 생각하지?”
“어?”
“손은설 님이랑 정인한이랑 잘 어울리잖아.”
“글쎄. 난 잘 모르겠는데.”
유호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차마 안 어울린다고 대놓고 말은 하지 못했다.
“정인한, 그 답답이는 왜 그 좋은 근무 환경을 두고 연애 한 번을 제대로 안 하나 몰라. 아주 배가 불렀지.”
“그러게.”
유호의 생각에도 그랬다. 인한이 여태 자신의 눈치를 보느라 연애를 안 했다는 건 돌이켜 보면 정말 이상한 행동이었다. 이제야 그 사실이 제대로 보였다.
‘TMB 연예대상 인기상 수상자는 ‘달려야 산다’의 정인한 씨, 그리고 이여민 씨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봐 봐요. 인기상 받았잖아.”
라울리의 말대로 인한과 여민은 나란히 인기상을 수상했다. 두 사람은 함께 단상에 올랐고 인한이 먼저 수상 소감을 얘기했다.
‘프로그램 제작진분들 너무 감사드리고요. 2년 동안 함께한 정아 누나, 선우 형, 운성이 형에게도 늘 감사하다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인한은 떨리지도 않는지 의례적인 말들을 술술 늘어놓았다. 마지막으로 세븐스팟 멤버들을 언급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 세븐스팟 멤버들. 주언 형, 테일러 형, 여민 형, 라울리 형…….’
인한은 네 명의 이름을 말하고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유호 형, 사랑합니다. 아주 오래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유호는 민망해져 고개를 푹 숙였다.
멤버들 이름을 나열할 때는 이름순으로 하는 게 나름의 규칙이었다. 그걸 5년이나 해 왔는데 이제 와 헷갈린다는 건 말도 안 됐다. 유호는 뻔히 보이는 인한의 수가 새삼스러우면서도 낯 뜨거웠다.
“쟤 긴장했나 보다. 이름 순서도 막 헷갈리네.”
“하마터면 유호 네 이름 빼먹을 뻔한 거 같은데?”
아니라 다를까 라울리와 주언이 인한의 행동에 곧바로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게요. 저 혼자 서운할 뻔했네요.”
유호는 애써 태연한 척 주언의 말에 대꾸했다.
‘그리고 조만간 세븐스팟 완전체로도 여러분께 꼭 찾아가고 싶네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인한은 아예 다음 앨범에 대한 포부까지 밝혔다. 이어서 여민도 수상 소감을 시작했다.
‘우리 세븐스팟 멤버들 정말 많이 사랑하고요. 내년에는 다 같이 더 좋은 무대로 돌아올 테니까 다들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여민 역시 인한에게 질세라 의미심장한 멘트를 던져 놓았다. 보란 듯이 뱉어진 두 사람의 발언에 숙소에는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쟤네 진짜 다음 앨범 내게 만들 기세인데?”
제일 먼저 입을 연 건 역시나 라울리였다. 유호는 그 말에 십분 공감했다. 인한이라면 기어이 그렇게 만들 게 분명했다. 과연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세븐스팟 (7SPOT)
멤버 677,739
● LIVE |메리 크리스마스! 줜&효&뢀
45: 34 >
연예 대상이 끝난 직후 시작한 라이브 방송은 자정을 넘겨서 끝이 났다.
시상식의 여파 때문인지 원스팟들은 대부분 세븐스팟의 컴백 일정을 궁금해했다. 어쩐지 해명만 하다가 방송이 종료된 느낌이었다.
시간이 너무 늦어져 세 사람이 자리를 마무리하고 일어나려는 찰나였다.
“여민이 왔습니당.”
현관문을 열고 여민이 귀가했다. 주언은 바로 반기며 말을 걸었다.
“여민이 왔어? 인기상 축하해.”
“넹. 다녀왔어요. 축하 감사해용.”
여민은 해맑게 대답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손에는 캐리어가 하나 들려 있었다.
라울리가 의아해 물었다.
“웬 캐리어?”
“인한이 거.”
“걔 거를 왜 가지고 왔어?”
“나도 같이 왔으니까.”
인한은 여민에 이어 숙소로 들어서며 라울리에게 대답했다. 손에는 대형 캐리어와 큰 짐 가방이 들려 있었다. 누가 봐도 다시 숙소에 입성하려는 모양새였다.
그 모습에 유호는 당황했다. 크리스마스 날이니까 혼자 있지 말라고 인한을 부른 거였는데 아예 짐까지 싸서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 막둥이도 왔어?”
“네, 주언이 형. 보고 싶었어요.”
“뭐냐, 정인한? 여기가 숙박업소냐?”
곧바로 반겨 주는 주언과 달리 라울리는 불만을 드러내며 인한에게 말했다. 인한은 바로 대응했다.
“당분간만. 연말인데 혼자 있기는 쓸쓸하잖아.”
역시나 변명 하나만큼은 막힘이 없었다. 라울리는 계속해서 시비를 이어 나갔다.
“나갈 때는 네 마음대로였지만 들어오는 건 네 마음대로가 아니란다.”
“내일 밤에 보족 세트에 소맥 어때? 내가 살게.”
“환영한다, 우리 막내. 네가 없으니까 숙소가 썰렁하더라.”
라울리와의 실랑이는 인한이 술 한잔을 사는 것으로 간단하게 결론이 났다.
“유호 형. 저 왔어요.”
인한은 금세 태도를 바꿔 다정한 말투로 유호에게 말했다. 얼굴에는 기분 좋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응. 잘 왔어.”
유호 역시 웃는 얼굴로 인한을 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