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5
“그러니까 이제 제가 그만할게요.”
인한은 생각했다.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든 건 결국 자신이었다.
유호에게 집착하고 끊임없이 애정을 갈구해 그를 내내 곤란하게 만들었다.
사랑인 걸 깨닫고 보니 그랬다. 유호를 몰아붙이고 심지어는 억지로 곁에 두려고도 했다. 그 삐뚤어진 마음에 힘들었을 유호가 이제야 보였다.
“뭐를?”
“형 옆에서 형 곤란하게 만드는 거.”
인한은 오래 고민했다. 몇 번을 되뇌어 봐도 쉽게 그만둘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다. 끊어 내고 잘라 내도 다시 돋아날 감정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마음이 유호를 다치게 둘 수는 없었다.
“이제 진짜로 형이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는 소리예요.”
유호는 인한이 무슨 말을 하는지 단박에 알아들었다.
항상 자신이 무턱대고 저질렀던 말과 행동들은 이렇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그걸 알면서도 유호는 매번 실수를 했다.
유호가 인한을 있는 힘껏 밀어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언제든 인한이 붙잡아 줄 걸 알아서였는지도 몰랐다.
기를 쓰고 달아날 수 있었던 것도 다시 돌아가면 언제나 그 자리에 인한이 기다리고 있을 걸 알아서 가능했는지도 몰랐다.
유호는 인한을 짝사랑하면서도 인한에게 버림받을까 봐 두려웠던 적은 없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독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 냈던 거였다. 돌이켜 보면 자만이었다.
왜 예상하지 못했을까.
인한이 먼저 자신을 놓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왜 간과하고 있었던 걸까.
“안 그래도 돼.”
그래서 유호는 인한에게 말했다.
“네?”
“이제 안 그래도 돼.”
유호는 이제 인한을 괴롭히는 걸 그만두기로 했다.
“나 이제 너 안 미워.”
아니, 이제 정말 인한을 좋아하는 마음을 관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눈치 보는 거 이제 안 해도 돼.”
유호의 말을 들은 인한은 너무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무엇보다 왜 갑자기 유호의 태도가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요?”
인한은 혼란스러운 얼굴로 유호에게 물었다.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우리 다시 안 보고 그런 거 하지 말자.”
유호는 애처로운 눈으로 인한에게 말했다.
유호의 그 간절한 말에 인한은 대답을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였다.
단박에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줄 알았던 인한의 반응이 시원치 않자 유호는 두려움을 느꼈다.
“여민아. 인한아. 이제 카메라 리허설 하러 가야 돼.”
그때 수형이 인한을 찾으며 재촉했고 인한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 나중에 다시 얘기해요.”
인한은 여전히 당혹스러운 얼굴로 유호에게 말했다.
결국 유호는 인한에게 바랐던 긍정의 답을 끝내 듣지 못했다.
그 나중이 언제인 걸까. 유호는 인한에게서 어떤 답을 듣게 될지 두려웠다. 동시에 거절의 답을 듣고 울지 않고 태연하게 버텨 낼 수 있을지 걱정됐다.
유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엇보다 이 좋은 날 인한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라울아. 나 먼저 갈게.”
“어? 애들 무대 안 보고 가?”
“어. 나 선약 있었던 걸 깜박했네.”
“잉? 갑자기?”
라울리가 놀라 물었지만, 유호는 도망치듯 대기실을 빠져나왔다.
유호는 방송국을 벗어나자마자 바로 택시를 잡아탔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곧바로 선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찬아. 바빠? 혹시 오늘 시간 돼?”
핸드폰을 잡은 유호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찬과 유호는 저녁 시간이 다 돼서야 유호의 숙소 앞에서 만나게 됐다. 만남 장소는 공교롭게도 선찬의 차 안이었다.
“미안. 스케줄이 이제 끝나서.”
선찬은 조수석에 올라타는 유호를 보자마자 사과부터 전했다. 유호는 오히려 민망해하며 선찬에게 말했다.
“아냐. 내가 갑자기 보자고 한 건데.”
차 안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 사이에는 잠시 어색한 정적이 감돌았다. 유호는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그때 선찬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유호는 의아해 선찬에게 물었다.
“뭐가?”
“혼자 자신만만한 척은 다 해 놓고 너한테 연락이 안 오면 어쩌나 덜덜 떨고 있었거든.”
선찬은 웃으며 유호에게 말했다. 유호는 서둘러 선찬의 말을 부정했다.
“내가 왜 그러겠어? 네가 얼마나 좋은 친구인데.”
유호는 말을 뱉어 놓고 아차 싶었다. 동시에 말을 정정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니. 그게…….”
“괜찮아. 아직은 너랑 좋은 친구인 거에 만족하거든. 앞으로는 안 그럴 거지만.”
선전 포고처럼 느껴지는 선찬의 말에 유호는 고민이 많아졌다. 인한을 잊어 보겠다고 무턱대고 선찬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결국 유호는 누구에게도 전해 본 적 없는 고백을 선찬에게 꺼내 놓았다.
“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알아.”
곧바로 이어지는 선찬의 대답에 유호는 크게 당황했다.
“알아?”
“응.”
“어떻게?”
“네 얼굴에 쓰여 있는데?”
누군지도 아는 걸까. 유호는 궁금했지만, 굳이 선찬에게 묻지 않았다.
동시에 저번의 식사 자리가 선찬에게 얼마나 최악의 자리였을지 상상만 해도 죄스러웠다.
유호는 계속해서 솔직한 마음을 털어놨다.
“그래서 아직은 너를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것도 알아. 그래서 얌전히 기다리는 중이야.”
어떻게 선찬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잘 아는 걸까. 유호는 궁금하면서도 아직은 그의 마음이 버거웠다.
하지만 그마저도 선찬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전에 내가 말했잖아. 대답은 아주 천천히 줘도 된다고. 그사이에 네가 희망 고문 같은 거 막 해도 원망하지 않을게.”
선찬은 유호를 안심시키며 말을 이었다.
“그냥 여태까지처럼 가끔 만나 줘. 대신 내가 너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만 알아 주면 돼.”
선찬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유호에게 한 번 더 진심을 전했다. 유호는 그런 선찬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그래서 유호는 선찬에게 물었다.
“안 무서워?”
“뭐가?”
“나한테 거절당할까 봐.”
“그런 걸 왜 무서워해야 돼?”
선찬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유호에게 되물었다. 오히려 유호는 선찬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네 말대로 내가 다시는 연락을 안 할 수도 있었잖아.”
“그럼 많이 아프겠지. 술과 눈물로 며칠 밤을 지새우다가 새벽에 질척대는 메시지를 보내게 될 수도 있고.”
선찬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래도. 좋아하면서 아닌 척 친구로 남아 있는 게 훨씬 더 무서울 거 같은데.”
선찬의 말에 유호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은 유호의 지난 5년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다.
나름 변명을 하자면 인한과 자신은 같은 팀이니까. 섣부른 고백으로 모든 걸 망칠 수는 없었다. 물론 결과는 똑같이 최악이었다.
“유호야.”
선찬은 다정한 목소리로 유호를 불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야.”
선찬의 그 말은 자신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무리 연예계에 다양한 사람이 많다지만 함부로 자신의 성향을 드러내기란 쉽지 않았다. 오히려 연예인이기에 소문이 무서워 더 거짓으로 감춰야만 했다.
“그러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는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사람에게까지 마음을 전하지 못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 사실을 선찬은 알고 있었다.
선찬의 말을 들은 유호는 울컥 설움이 치밀었다.
그저 온 마음으로 누군가를 좋아했을 뿐인데. 유호는 죄스러운 마음으로 5년을 견뎌야 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아야 하는 더러운 감정인 듯 필사적으로 숨겨 놓기 바빴다.
돌이켜 보니 어리석은 짓이었다. 선찬의 말대로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닌데.
사랑은 아프라고 하는 게 아닌 건데 왜 그렇게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자신을 옥죄었는지 후회스러웠다.
결국 유호의 뺨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왜 울어?”
선찬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다정한 얼굴로 유호에게 물었다.
“……고마워.”
“뭐가?”
“그렇게 말해 줘서.”
내가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해 줘서. 유호는 선찬이 너무 고마웠다.
하지만 선찬은 유호에게 고맙다는 말보다 다른 말이 더 듣고 싶었다.
유호와 선찬은 저녁 식사로 그토록 함께 먹고자 했던 햄버거를 먹으러 갔다.
“드디어 이걸 먹네.”
선찬은 눈앞에 햄버거를 보며 신이 나 유호에게 말했다. 유호는 민망해하며 대답했다.
“그러게.”
“너 잘 먹는 거 보니까 기분 좋다.”
선찬은 유호의 입에 햄버거가 들어가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그런 선찬의 시선을 눈치챈 유호는 머쓱해하며 선찬에게 말했다.
“너도 얼른 먹어.”
“우리 바다도 가야 하는 거 알지?”
선찬은 잊힐 뻔한 지난 약속을 다시 화젯거리로 꺼내 놓았다. 두 눈동자는 기대로 가득 차 있었다. 유호는 그런 선찬의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응. 알지.”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느새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걱정거리는 사라져 있었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카페에 들렀다가 밤 10시가 넘어서야 헤어졌다. 선찬은 차로 유호를 숙소 앞까지 데려다줬다. 유호는 차에서 내리기 전 선찬에게 인사를 건넸다.
“데려다줘서 고마워. 조심히 들어가.”
“연락할게.”
“응.”
“매일 할게.”
“……응.”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할게.”
“알겠어.”
“잘 자고.”
“응. 너도.”
유호의 대답을 들은 선찬은 기분 좋게 웃었다. 유호는 잠시 쭈뼛대다가 겨우 차에서 내렸다.
선찬의 차는 유호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모습을 감출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유호는 그런 선찬의 차에 대고 마지막까지 손을 흔들었다.
유호가 숙소로 들어섰을 땐 거실의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유호는 거실에 누가 있나 싶어 방으로 곧장 가지 않고 거실을 한 번 둘러보았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인한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유호 형. 이제 와요?”
인한은 소파에서 일어나며 유호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