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아이돌 멤버가 유죄인 이유 (62)화 (62/120)

#062

선찬은 아쉬워하며 인한에게 되물었다.

“왜?”

“당분간은 유닛 활동 때문에 바쁠 거 같아서.”

“아. 그래?”

“네. 나중에 여유 생기면 같이 봬요. 석재 형한테는 제가 잘 말할게요.”

“그래. 그러자.”

인한 역시 유호와 같은 생각이었다. 한 번 더 같은 상황에 놓여 제 처지를 실감할 자신이 없었다.

테이블 위를 채웠던 많은 요리는 어느새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사람씩 포크를 내려놓았다.

“나 잠시 화장실 좀.”

때마침 선찬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덕분에 유호와 인한은 단둘이 남겨졌다.

인한은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주제를 고르기가 어려웠다. 그때 유호의 입이 먼저 열렸다.

“괜찮아? 안 불편해?”

유호의 물음에 인한은 생각이 많아졌다. 정말 안 불편할 거라 생각하고 건넨 질문이 맞는지 의문도 들었다.

“네. 전혀요. 앞으로 종종 같이 봐요.”

인한은 아무렇지 않은 척 유호에게 말했다. 그 순간 유호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린 건 알아채지 못했다.

“그래. 선찬이 차도 있으니까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도 좋겠다.”

“네. 그래도 되죠.”

설레 보이기까지 하는 유호의 말을 들으며 인한은 그제야 자신이 오지 말아야 할 자리에 왔다는 걸 깨달았다.

“저 이제 연습실 가야 하는데.”

“응. 알아.”

“형은 같이 안 갈 거죠?”

인한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호에게 물었다.

“응. 선찬이랑 더 있다 가려고.”

역시나 기대했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네. 마저 재밌게 놀다 와요.”

그렇게 말하며 인한은 예쁘게 웃었다.

유호 형이 행복한 건 좋은 거니까. 다른 사람에게 유호를 뺏기더라도 괜찮을 거라고 여겼던 지난날의 바보 같은 생각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어 보였다.

당연히 겪어 보지 않아서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깨달았다.

세 사람의 식사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선찬과 인한은 레스토랑을 나서기 전 핸드폰 번호를 교환했고 건물을 빠져나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아쉽네. 너무 짧게 봐서.”

선찬은 인한과의 짧은 만남에 서운함을 드러냈다.

“다음에 길게 보면 되죠. 연락드릴게요.”

“그래. 조심히 들어가.”

“유호 형. 저 갈게요.”

인한은 유호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유호도 바로 인사에 화답했다.

“응. 숙소에서 봐.”

“네.”

인사를 마친 인한은 미리 도착해 있던 수형의 차에 몸을 실었다. 자리는 굳이 가장 뒷좌석을 택해 앉았다.

“유호야. 너무 늦게 오지는 마.”

수형은 창문을 내리고 어김없이 유호에게 잔소리를 했다.

유호는 웃으며 대답했다.

“네. 12시 전에는 들어갈게요.”

“10시.”

“아. 형.”

“그래. 12시.”

장난스럽게 이어진 수형과 유호의 대화를 들으며 인한은 가면과도 같았던 웃음을 지워 냈다.

곧 차는 출발했고 인한은 굳이 창문 밖을 내다보지 않았다.

“재밌게 놀았어?”

수형은 뒷좌석의 인한에게 말을 걸었다. 인한은 간단하게 대답했다.

“네.”

“오늘 저녁은 또 굶어야겠네.”

“그러게요.”

두 사람의 대화는 싱겁게 마무리됐다.

“형. 저 피곤해서 그런데 좀 자도 되죠?”

인한은 피곤을 핑계로 수형의 관심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어. 당연히 되지. 한숨 자.”

수형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동 시간은 30분이 채 안 됐지만 인한이 짬을 내서라도 자 주는 게 수형의 입장에서도 안심이 됐다.

“네.”

인한은 대답하고 곧바로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 뭐가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생각했다.

‘……가지 마.’

뮤직비디오 촬영장에서 자신을 붙잡았던 유호를 떠올리며 인한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혼자 해 봤었다.

어쩌면 유호가 과거에 전한 고백이 진실이고 자신이 멍청하게 그 사실을 오해한 거라면, 이제라도 유호에게 애원해 기회를 달라고 해 볼 생각이었다.

애써 좋아진 관계를 다시 망치는 선택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유호에게 묻고 싶었다.

내가 형을 좋아해도 되냐고. 그마저도 하지 말라면 안 하겠다고.

그렇게 말이라도 해 볼 생각이었다.

곧 인한의 허벅지 위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 나 왜 울지?

인한은 서둘러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수형이 알아채면 어쩌나 숨을 죽이고 옷소매로 눈가를 박박 닦아 냈다. 다행히 수형은 콧노래를 부르며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왜 이러냐. 정인한.

유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다 상관없다고 그랬으면서.

왜 그 말을 지키지도 못하는지 저 자신이 추하게 느껴졌다.

유호한테 친한 친구가 생긴 게 뭐 별거라고. 자리를 뺏긴 것도 아니고 자신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인한은 서러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움직이지 않아도 숨이 가빠 왔던 며칠 전 그날처럼 심장이 뛰고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래. 사랑이었다. 결국엔 사랑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깊은 곳에 감춰 뒀던 마음이었다. 그 위험한 감정을 인한은 내내 품고 있었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연습실에 도착한 인한은 내내 굳은 얼굴로 수록곡 안무 연습에 참여했다.

“인한아. 어디 아파?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

“아. 점심 먹은 게 좀 체한 거 같아서.”

여민이 걱정돼 물었지만 인한은 금세 핑곗거리를 찾아 대답했다.

사실은 정말로 점심 식사 이후 내내 속이 좋지 않았다.

“괜찮아? 소화제 좀 사다 줄까?”

수형이 놀라 인한을 향해 물었다. 인한은 잠시 고민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답하면서 인한은 가슴 언저리가 꾹 막혀 답답한 기분이 그저 체기이길 바랐다. 소화제 하나로 해결될 아픔이라면 좋을 텐데. 아닌 줄 알면서도 인한은 괜한 기대를 해 봤다.

“그러게, 나 빼고 몰래 데이트 가래?”

여민은 인한에게 어김없이 시비를 걸어 왔다. 인한은 유연하게 반응했다.

“그러게, 누가 스케줄 있으래?”

“와. 두고 봐라. 너 바쁠 때 유호 형이랑 맨날 놀러 다닐 거다.”

“그러든가.”

싱겁게 이어진 인한의 대답에 여민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졌다.

“야. 오늘 연습 끝나고 숙소 갈 거지?”

인한은 고민 끝에 대답했다.

“아니.”

인한은 당분간 유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마음이 기어이 넘쳐 나 유호를 또 곤란하게 할까 봐 두려워졌다.

어쩌면 이번엔 영영 유호를 잃게 될지도 몰랐다.

인한은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왜?”

“가면 안 될 거 같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게 있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이 마음은 어떻게 눌러 담아야 하는 걸까.

이미 손쓸 수 없을 만큼 커져 버려서 다시 숨겨 놓을 수도 없을 텐데.

결국엔 모든 걸 망치고 나야 끝이 날 마음일 걸 알아서 인한은 스스로가 두려워졌다.

이제는 정말로 유호의 옆에 좋은 동생으로 남아 있을 자신이 없어졌다.

사실은 오래전부터 그랬다.

유호는 점점 시야에서 멀어지는 수형의 차를 보고 착잡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이렇게 인한이 모든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가끔 굳어지는 그의 얼굴을 보며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었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유호. 우리 이제 뭐 할까? 너 뭐 하고 싶어?”

“어…… 글쎄.”

선찬이 물었으나 유호는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뭘 하든 즐거울 자신이 없었다.

술을 마실 줄 알았더라면 낮술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리 그럼 바람 쐬러 갈까?”

“그래. 그러자.”

그래도 유호는 선찬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의도치 않게 선찬을 이용하고 말았으니 나머지 시간은 전부 그에게 맞춰 주고 싶었다.

유호의 대답을 들은 선찬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유호는 선찬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거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두 사람이 택한 장소는 근처의 한강 공원이었다. 선찬은 바다라도 갔다 오길 바랐으나 당일로 다녀오기에는 시간이 애매해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한강 공원에서 두 사람은 한적한 시간을 보냈다.

일부러 인적 없는 곳을 택하기도 했고 둘 다 인지도가 높은 편이 아니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다.

아마 인한과 함께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쟤 걔 아니야?”

“누구?”

“그 정인한 그룹 막내.”

“아닐걸. 걔는 금발이잖아.”

“아. 그런가.”

두 사람을 알아보는 사람들마저 긴가민가하고 지나쳐 가기 일쑤였다.

정인한 그룹 막내는 정인한인데. 유호는 속으로만 생각하며 자신의 이름이라도 알려 주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선찬이 유호를 다시 숙소로 데려다준 시간은 밤 9시였다.

선찬은 정말로 12시가 되어서야 유호를 보내 주고 싶었으나 지쳐 보이는 얼굴에 차마 욕심을 부릴 수 없었다.

유호는 차에서 내리기 전 선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

“재미는?”

“재미도 있었어.”

“그럼 됐어. 다음에는 정말로 바다 보러 가자.”

선찬은 오늘도 어김없이 다음 약속의 확답을 받고자 했다. 유호는 선뜻 긍정의 답을 들려주었다.

“그래. 다음에는 바다 보러 가자.”

“오늘 못 먹었던 햄버거도 먹고.”

“그래. 그것도 해.”

기뻐하는 선찬의 모습에 만족하며 유호은 그만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선찬의 입이 열렸다.

“유호야.”

“응?”

“너 지금 만나는 사람 없다고 했지?”

“아. 응.”

유호는 이 시점에 선찬이 왜 이런 걸 궁금해하나 싶었다. 설마 여자라도 소개해 주려고 그러나 하는, 태연한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그럼 나랑 만날래?”

선찬은 표정 변화도 없이 웃음 띤 얼굴로 유호를 향해 말했다. 말투마저 덤덤했다. 유호는 선찬이 무슨 얘기를 하나 싶었다.

“어?”

“나랑 한 번 사귀어 보는 건 어때?”

유호가 대응할 새도 없이 가감 없는 선찬의 고백이 유호에게로 전해졌다. 유호의 머릿속이 그대로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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