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예상치 못한 유호의 반응에 인한이 당황해 주변을 살폈다.
한참 떨어진 거리에서 스태프 두 명이 가까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인한은 서둘러 유호의 손목을 붙잡았다.
“형. 잠시만.”
인한은 유호를 일으켜 수형의 차로 이끌었다. 인한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쳐야 하는데 유호는 그마저도 해내지 못하고 속절없이 끌려가고 있었다.
인한은 유호를 운전석 뒷자리에 앉힌 후에야 잡았던 손목을 놓아주었다. 차 문이 닫히자 유호는 소리를 내 울기 시작했고 인한은 바로 옆자리에 앉아 안절부절못했다. 인한이 휴지라도 가져다주려고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찰나였다. 유호는 어느새 손을 뻗어 인한의 옷소매를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인한은 다시 자리에 앉아 유호를 달래기 시작했다.
“형 나 어디 안 가요. 여기 형 옆에 있을게.”
“……거짓말하지 마.”
유호는 뮤직비디오 촬영도 아직 안 끝났으면서 무턱대고 거짓말을 하는 인한이 짜증 났다.
“촬영만 하고 다시 올게요. 응? 촬영 다 끝나면 계속 형 옆에 있을 테니까…….”
“한 달에 한두 번은 숙소에 와.”
유호는 투정이 섞인 목소리로 인한에게 말했다.
인한을 못 보면 죽을 거 같은 건 유호도 마찬가지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가끔 얼굴이라도 봐야 숨통이 트일 거 같았다. 진작 이럴 줄 알았다면 탈퇴니, 독립이니 그딴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거였다.
예상치 못한 유호의 말에 인한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네. 그럴게요.”
“너 매주 올리던 월요인한…… 그것도 빼먹지 말고 올려.”
유호는 계속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인한에게 말했다. 인한은 지금, 이 순간 그게 왜 중요한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올릴게요.”
대답을 마친 인한은 유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대신 나한테 잘해 주지는 마. 친한 척하는 것도 안 돼.”
하지만 이어진 유호의 말은 인한의 기대와는 다른 말이었다. 인한은 대답 대신 침울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왜 대답 안 해?”
유호가 대답을 채근하자 인한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싫다고 반항했다가 상황을 다시 악화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럼 이제 가.”
“저 아직 더 있어도 되는데.”
“가라고.”
“네.”
유호의 성화에 인한은 마지못해 차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그러다 다시 돌아서서 유호에게 말했다.
“가지 말고 기다려요.”
딱히 어디 갈 데도 없을 텐데 인한은 유호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다짐을 받고자 했다.
“응? 형. 기다릴 거죠?”
애원이 섞인 인한의 물음에 유호는 뾰로통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집에 가려면 기다릴 수밖에 없다느니 그런 얘기는 속으로 넣어두기로 했다.
“짜증 나.”
인한이 차 문을 닫고 사라지자 유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째 인한과 엮이기만 하면 제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다행히 유호의 눈물은 금세 멎었다.
잠시 후 인한은 차 키를 가지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유호가 운전석 문을 열고 올라타는 인한을 눈을 흘기며 째려봤으나 인한은 모른 척 시동을 걸로 히터를 작동시켜 놓고 사라졌다.
유호는 정말 인한이 짜증 난다고 생각했다.
뮤직비디오 촬영은 예상보다 늦은 시간에 끝이 났다.
인한은 유호에게 먼저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말을 전해주러 갔다가 잠든 유호를 발견하고 조수석 창문만 살짝 내려 준 후 다시 촬영장으로 돌아갔다. 입고 있던 패딩도 유호에게 덮어 주었다.
유호는 소란스러운 주변 소리를 듣고 깨어났다. 창문 밖을 보니 다들 촬영 장비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때마침 수형이 운전석에 올라타 뒷문을 열었다. 유호는 잠에 취한 상태로 수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형. 끝났어요?”
“어. 오래 기다렸지?”
“아니에요. 좀 잤어요.”
“그래. 이제 집에 가자.”
유호는 몸이 뻐근해 기지개를 켰다. 그제야 몸 위를 차지하고 있는 인한의 패딩을 발견했으나 더 화낼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형. 잘 있었어? 나 안 보고 싶었어?”
여민은 열린 뒷문으로 차에 올라타며 유호에게 물었다. 떨어져 있은 지 얼마나 됐다고 호들갑을 떨며 유호에게 애정을 갈구하기 시작했다. 유호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응. 안 보고 싶었어.”
“으아. 말도 안 돼.”
“촬영하느라 고생했어. 추웠지?”
“나는 형이 안 보여서 추웠지.”
여민은 냉큼 유호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에 인한까지 차에 탑승했다.
“유호 형. 깼네요?”
“응. 이거.”
유호는 덮고 있던 패딩을 인한에게 내밀었다. 인한은 군말 없이 패딩을 받아들었다.
“고마워.”
“네.”
인한은 뭐가 좋은지 미소를 띤 얼굴로 뒷좌석으로 향했다.
수형의 차는 촬영장을 벗어나 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유호가 다시 자려고 창문에 머리를 기대려던 순간이었다.
“수형이 형. 저 오늘 숙소에서 잘게요.”
인한의 발언에 유호는 멈칫했다. 한 달에 한두 번이랬지 맨날 오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의도와는 다르게 흘러가는 전개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뭐야? 너 왜 자꾸 숙소에서 자?”
여민은 어김없이 인한의 말에 시비를 걸었다. 인한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내 마음이지.”
“진짜 아주 제멋대로네. 수형이 형. 독립한 멤버들 앞으로 숙소 출입 금지시키면 안 돼요?”
“어. 여민아. 안 돼.”
“에잇. 너무해.”
단호한 수형의 반응에 여민은 서운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리고 애먼 유호에게 화살을 돌렸다.
“유호 형은 어떻게 생각해?”
“나? 나는…… 별로 상관없는데.”
“잉. 왜 내 편이 하나도 없지?”
여민은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유호는 여민의 눈치가 보였으나 그보다 더 인한이 신경 쓰였다. 인한은 만족스러운 듯 여민을 향해 말했다.
“원래 형 편은 아무도 없었어.”
“아닌데? 유호 형은 항상 내 편인데? 그렇죠?”
“뭐 대체로 그렇기는 한데…….”
“그럼 얼른 내 편 들어줘.”
여민의 투정에 유호는 곤란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한 사람의 얼굴에 적합한 답변을 찾을 수 있었다.
“근데 나 태윤이 형 무서운데.”
“아. 그건 나도 그래. 인정.”
유호는 냉큼 테일러의 핑계를 댔고 여민 역시 빠르게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인한이나 테일러나 오지 말란다고 순순히 말을 들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근데 인한이 왜? 너 내일 오후 스케줄이잖아.”
그대로 인한이 숙소로 향하는 게 확실시되려는 가운데 수형이 인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인한은 태연하게 수형에게 대답했다.
“아. 그냥 형들이랑 맥주나 한잔할까 해서.”
“나 안 마실 건데? 내일 새벽 콜인데?”
여민은 인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클을 걸기 시작했다. 인한은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그럼 라울 형이나 주언이 형하고 마시지 뭐.”
“둘 다 요새 금주하는데?”
“왜?”
“나야 모르지.”
철벽같은 여민의 수비에 인한은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타깃을 바꿔 수형에게 말을 걸었다.
“수형이 형. 저랑 맥주 한잔하실래요?”
“글쎄. 오늘은 좀 피곤하긴 한데.”
수형마저 거절한 상황에 인한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남아 있지 않았다. 주승은 술을 잘 안 마시니 혼술만이 답이었다. 근데 혼술하자고 숙소에 가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 인한은 어쩔 수 없이 야심찼던 계획을 수정했다.
“그럼 그냥 집으로 가죠, 뭐.”
씁쓸하게 말끝을 흐리는 인한에 유호는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야. 장난이야. 나랑 마셔.”
유호는 다급하게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나서는 건 진짜 오버인데. 다행히 여민이 중간에서 끊어준 덕분에 유호의 경솔한 발언은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마무리됐다.
유호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다행히 인한은 유호의 말을 못 들었는지 여민에게 불만을 드러내고 있었다.
“됐거든?”
“그리고 라울이랑 주언이 형이 금주할 리 없잖아. 간만에 넷이 한잔해.”
“그럼 그러든가.”
인한은 더 반항하지 않고 여민의 말을 수긍했다. 그렇게 평화롭게 대화가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여민은 갑자기 유호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근데 유호 형. 무슨 말 하려고 하지 않았어?”
“아니.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래?”
“응.”
유호는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유호의 말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곤했는지 여민과 인한은 금세 잠이 들었다. 유호는 핸드폰을 만지다 대각선 뒷자리에 앉은 인한을 한 번 돌아봤다. 순하게 잠든 얼굴이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게까지 느껴졌다.
“나 인한이 진짜 오랜만에 봐.”
주언은 숙소에 도착한 인한을 마주하고 감격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인한 역시 반가워하며 주언을 끌어안았다.
“주언이 형. 보고 싶었어요.”
“어. 나도. 우리 막내 잘 지냈지?”
“네. 나름대로요.”
맏형인 주언은 멤버들 중 유일하게 인한을 막내 취급하는 인물이었다.
다섯 살이라는 큰 나이 차 탓도 있지만, 키도 엇비슷해서인지 주언은 인한의 근육과 덩치를 개의치 않아 했다. 인한이 애기잖아. 언젠가 주언이 무심코 했던 발언이 멤버들 사이에서 파문을 일으킨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인한도 주언 앞에서는 대체로 순한 양이 되는 편이었다. 물론 승부가 걸린 상황에서는 얄짤 없이 굴었다.
“인한아. 숙소 좀 자주 와.”
“그럴게요. 형도 저희 집 또 놀러 와요.”
“그래. 형 이번 뮤지컬 첫공 끝나면 한 번 갈게.”
“너 진짜 세븐스팟 버린 거 아니지?”
라울리는 인한을 보자마자 시비를 걸었다. 인한 역시 금세 태도를 바꿔 단칼에 라울리의 말을 받아쳤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아무리 돈과 인기가 좋아도 사람이 의리가 있어야 하는 거야.”
“형이나.”
“이게 한 마디를 안 져.”
라울리는 인한에게 헤드록을 시도했으나 반대로 팔이 꺾이는 바람에 항복을 선언했고 그렇게 두 사람의 실랑이는 빠르게 마무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