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정한 아이돌 멤버가 유죄인 이유 (55)화 (55/120)

#055

“유호 너 더 있을 거야?”

먼저 세트장에 도착해 여민의 촬영을 구경하고 있던 테일러는 대뜸 유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개인 촬영을 모두 마친 도명은 인한에게 가지 않고 테일러의 옆에 서서 여민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민이랑 처음 보는 사이일 텐데도 그랬다.

“왜요? 형 지금 가게요?”

“어. 나 지금 갈 건데 너는 어떡할래?”

촬영장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테일러는 벌써부터 돌아간다는 소리를 하고 있었다. 옆에 선 도명은 흥미 없는 얼굴로 계속해서 여민을 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멍을 때리는 것에 더 가까웠다.

“누구 차 타고요?”

유호의 질문에 테일러는 뭘 당연한 걸 묻냐는 얼굴을 한 채 엄지손가락으로 도명을 가리켰다. 주승은 라울리의 스케줄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유호는 갑자기 도명의 캐릭터 해석에 실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는 누가 부른다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며. 실컷 비싼 척을 하던 도명은 이미 여러 명의 기사 노릇을 자처하고 있었다. 특히 안 친하다는 테일러를 왜 작업실까지 친히 데려다주는지는 유호가 한동안 풀지 못할 난제일 것 같았다.

“저는 더 있을게요.”

유호는 눈치껏 알아서 빠지기로 했다. 이대로라면 촬영이 끝날 때까지 떠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전날과 같은 불편한 상황에 자처해 뛰어들 마음은 들지 않았다.

“그럴래?”

“네.”

“그래, 그럼.”

“형. 조심히 들어가요. 선배님도요.”

“네. 유호 형도요.”

“여민아. 형 간다.”

“네? 벌써요?”

여민이 황당해하며 물었지만 테일러는 그대로 돌아서 손을 대충 흔들었다. 여민은 별수 없이 허리를 숙여 도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히 가세요. 도명 선배님.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네.”

도명도 고개를 대충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에 답했다.

촬영은 한동안 계속됐다. 주승은 볼 일을 마치고 금세 촬영장으로 복귀했지만 이래저래 일 처리를 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유호는 숙소로 다시 데려다주겠다는 주승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기실 의자에 앉아 노래 가사를 외우는 중이었다. 이번에도 변명을 하자면 주승을 고생시키기 싫었고 연습실 스케줄은 다 차 있었으며 집에서는 집중이 잘 안 되니까.

“유호 형. 가사 다 외웠어요?”

“아니. 이 곡 저 곡이 서로 짬뽕 되는 중이야.”

유호는 괴로워하며 맞은편 의자에 앉아 있는 여민에게 대답했다. 여민은 촬영 중간 중간 틈날 때마다 대기실에 들러 유호에게 말을 걸었다. 수형과 주승도 자주 대기실에 들러 춥다고 호들갑을 떨다가 가고는 했다.

“정 안 되면 한 곡 정도는 빼 달라고 그래요.”

“안 돼. 다 해야지. 할 수 있어.”

“맞아요. 우리 유호 형은 할 수 있어!”

여민은 양손을 야무지게 쥐고 유호를 응원했다. 유호는 그런 여민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인한이는?”

“밖에 있겠대요.”

“왜?”

“여기 너무 답답하대.”

문제는 인한이었다. 여러 사람이 대기실을 수십 번 들락날락하는 동안 인한은 의상을 갈아입을 때 빼고는 유호 앞에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었다. 이유야 뻔했다.

“나도 차에 가 있어야겠다.”

“응? 왜?”

“노래 부르면서 외워야 잘 외워지잖아.”

유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대기실 밖으로 향했다.

인한은 패딩은 입은 채로 촬영장 구석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었다.

유호는 아예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밖은 이미 해가 져 어둑해져 있었다. 유호는 바로 근처에 주차된 수형의 차로 향했다. 진작 가 있을 걸 하는 후회도 해 봤다.

“유호 형.”

인한의 목소리가 유호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렇게까지 다급하게 부를 일인가. 유호는 애써 태연한 척하며 뒤를 돌아봤다. 상기된 표정의 인한이 유호를 쫓아오고 있었다.

“왜?”

“가는 거예요?”

“아니. 차에 가 있으려고.”

“아.”

유호의 대답을 듣고 인한은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촬영장으로 향했다. 유호는 울컥하는 마음에 인한을 불러 세웠다.

“야.”

“네? 형, 왜요?”

막상 인한을 불러 놓고 나니 유호는 할 말이 없었다. 왜 나 피하느냐고 따질 거야, 뭐야. 피하는 게 당연한 건데.

“아무것도 아니야.”

유호는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차 키 가지러 가려고요.”

인한은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유호는 옅은 한숨과 함께 인한에게 말했다.

“열려 있댔어.”

“시동 걸어 두려고요. 촬영 곧 끝나는데 히터 미리 켜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인한의 핑곗거리는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었다. 유호는 어이가 없어 인한에게 말했다.

“내가 가지러 갈게.”

유호가 걸음을 옮겨 인한의 옆을 지나치려던 순간이었다.

“형.”

이번에는 인한이 유호를 불러 세웠다.

유호는 인한의 부름에 걸음을 멈추고 옆을 돌아봤다. 그리고 서글퍼 보이는 인한의 얼굴과 마주하게 됐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그래도 형이 계속 보고 싶으면 어떻게 해요?”

서로 볼 수 없는 순간에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가끔 이렇게 마주치게 될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요동치는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유호는 해일 같은 그 마음에 떠밀리지 않게 다리를 꼿꼿이 세워 버티고 있어야 했다.

“그냥 견뎌요?”

“응.”

“그래도 안 되면요?”

“다른 사람 만나. 그럼 괜찮아질 거야.”

자신이 정답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서 정답을 찾아야 할 텐데 인한은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 외로움은 어디서 해소해야 하는 거냐고. 그럴 때마다 유호는 직접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가서 답을 찾으라고.

“형도 그래서 다른 사람 만나는 거예요?”

“다른 사람 누구?”

“그 배우 분.”

유호는 인한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러다 인한이 말하는 그 배우 분이 선찬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챘다. 유호 주변에 배우라고 지칭할 만한 사람은 선찬과 소이뿐인데 근래에 소이와는 만난 적이 없으니 선찬인 게 분명했다. 설마 도명일 리는 없을 테고.

“선찬이 말하는 거야?”

“네.”

“선찬이는 그냥 내 친구야.”

왜 생전 만난 적도 없을 선찬의 이름이 자꾸 인한의 입에서 튀어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 여민이도 바람피우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었지. 딱 그 정도의 마음이겠지. 친한 친구를 빼앗기기 싫어하는 어린애 같은 마음.

“부럽네요. 그냥 친구여서 형 옆에 있을 수 있다는 게.”

딱 그 정도의 마음. 친한 동생으로 곁을 지키고 싶은 그 정도의 갈망.

“나는 안 부러워.”

유호는 인한의 지인들이 더는 부럽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인한과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네 친한 형들도 네 친구도 하나도 안 부러워.”

“그렇겠죠. 형은 제 옆에 있는 것도 끔찍해하는데.”

인한은 허탈하게 웃으며 유호에게 말했다. 그리고 씁쓸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애초에 형은 누구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잖아요. 내가 제일 아끼는 게 형인데.”

그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면서 옆에 있어 주길 바라는 건 인한의 과욕이라고 유호는 생각했다. 그런 말 한마디가 얼마나 자신을 주저앉히는지 인한은 알 필요가 있었다.

유호는 울컥해 인한에게 따졌다.

“내가 언제 그래 달랬어?”

인한은 대답하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나한테 잘해 주지 마.”

“이미 그러는 중이잖아요.”

“뭐가 그러는 중이야?”

다시 격분한 유호의 반응에 인한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풀이 죽은 목소리로 변명을 내뱉었다.

“노력 중이에요. 지금은 이게 최선이고.”

습관이란 게 하루아침에 쉽게 고쳐질 리 없었다. 유호 역시 피할 수 있는데도 갖가지 핑계를 대며 인한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을 인한이 못 알아챌 리 없었다.

“그러는 형은 내가 그렇게 미우면서 왜 여기 있는데요?”

결국 유호는 인한에게 들키고 말았다. 기껏 기를 쓰고 도망가 놓고 멀리 가지도 못하고 제 발로 돌아가는 중이라는 걸 인한이 눈치채게 했다.

“최선을 다해 도망가야지. 왜 그러지도 못하고 있는데요?”

“착각하지 마. 나는 진작부터 그러고 있었어.”

유호는 화가 나 자리를 뜨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진 인한의 말에 그마저도 못하게 됐다. 차마 외면할 수는 없었다.

“형이 자꾸 그렇게 보이는 데 있으면…… 내가 못 놔줘요.”

인한은 곧 무너져내릴 거 같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내가 없어야 형이 웃는 거 아는데, 그러니까 놓아줘야 하는 거 아는데…… 그런데요, 형. 나는요. 형을 못 보면 진짜로 죽을 거 같아.”

인한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모르는 사람이 보면 사랑 고백과 같은 말들을 절절하게 늘어놓았다.

“형이 나 한 번만 봐주면 안 돼요? 좋아해 달라고 안 할 테니까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안 돼요? 숨소리도 안 내고 그냥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을게요. 그냥 가끔,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게 해 줘요.”

누가 누구한테 해야 말인지 모르겠네. 유호는 어이가 없어 울고 싶어졌다.

“나는 네가 이럴 때마다 죽고 싶어.”

진심이었다. 사랑도 아니면서 인한이 이런 날 것의 고백을 할 때마다 유호는 딱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인한은 유호의 발언에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잘못했어요.”

인한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머릿속에는 또 괜한 소리를 해서 모든 걸 망쳤다는 생각뿐이었다.

“미안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인한은 서둘러 자리를 피하고자 했다. 유호와 계속 같이 있다가는 무릎이라도 꿇고 빌게 될 거 같았다. 소용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또 한 번 유호를 곤란하게 만들 것만 같았다.

인한이 몸을 틀어 촬영장으로 향하는 순간이었다.

“……가지 마.”

유호는 결국 목 언저리까지 쌓여 있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인한이 놀라 걸음을 멈추고 다시 유호를 향해 돌아섰다.

“왜 자꾸 가려고 해.”

내가 가라고 안 했는데. 나 아직 할 말 안 끝났는데.

유호는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전조도 없이 유호의 두 뺨으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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