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
“아니면 너 뭐, 쟤 좋아하기라도 해?”
운성은 왜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확인하지 못해 안달인 걸까. 인한은 이미 바닥에 처박혀 버린 자신의 마음을 다시 꺼내 놓을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썩어 문드러질 감정이었다.
결국, 인한은 최후의 방법으로 죽어도 전하기 싫었던 최신 근황을 털어놨다.
“저 유호 형한테 차였어요.”
“뭐? 근데 너 왜 그걸 나한테…….”
그럼 그렇지. 운성이 의리를 저버릴 만큼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인한은 알고 있었다.
혹시나 했지만, 유호를 따로 불러낸 것도 자신을 도발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도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음이 놓이지는 않았다.
“언제?”
“얼마 안 됐어요. 그러니까 저 때문에 유호 형 끌어들이는 건 하지 말아 줘요. 그렇다고 형이 친한 동생 구남친한테까지 손대는 쓰레기는 아닐 거잖아요.”
“사귀기까지 했어?”
“……네.”
시늉에 불과한 연애였지만. 괜한 말로 오해를 살 필요는 없으니 인한은 뒷말은 몰래 삼키기로 했다.
“너 뻥치는 건 아니지?”
“그럼 제가 숙소를 왜 나왔겠어요? 숙소에 유호 형이 있는데.”
어쩐지 갑자기 독립한다고 할 때부터 이상하더라니. 운성은 이제야 예능 촬영장에서 거리감이 느껴지던 두 사람이 이해됐다.
“어쩌다 그새 차였냐.”
“제가 생각보다 후진 놈이라.”
“뭘 또 그렇게까지 가?”
운성은 다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인한은 속으로 안심했다.
“나는 네 말만 듣고 쌍방인 줄 알았지, 너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인 줄은 몰랐네.”
사람 속 긁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도 여전해서 인한은 속으로 화를 삭여야 했다.
“근데 짝사랑이 그렇지 뭐. 말 한마디도 과대 해석하고 혼자 기대하다 실망하고 그렇게 되는 거지.”
“꼭 짝사랑해 본 적 있는 것처럼 얘기하네요.”
“아니. 없는데?”
그렇게 말하는 운성의 얼굴에는 더 묻지 말라는 경고가 엿보였다. 저번부터 묘하게 말에 모순이 있는데. 인한은 거슬렸지만 운성이 바라는 대로 모른 척하기로 했다.
“너는 애가 멀쩡하게 생겨서 왜 그러냐.”
“그러니까 괜히 유호 형 들쑤시지 말아요.”
“진짜 같이 합주하려고 부른 거거든?”
“네. 저 형 믿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인한은 계속해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인한이 먼저 녹음실을 나섰고 밖으로 향하기 전 유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형. 저 가요.”
“응. 잘 가.”
유호는 의례적으로 반응했다. 인한은 무거운 발걸음을 겨우 옮겨 연습실을 나섰다.
“사이다. 오렌지 주스. 토마토 주스. 뭐 마실래?”
녹음실에서 나온 운성은 제일 먼저 냉장고로 향했다. 그리고 놀라울 정도로 유호가 좋아하는 음료들만을 골라 질문을 던졌다.
“토마토 주스요.”
유호는 고민도 안 하고 단번에 대답했다. 호불호가 갈리는 토마토 주스가 있다는 게 신기했지만, 방문 선물로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품목이라 딱히 의구심을 갖지는 않았다.
“연습은? 좀 해 왔어?”
운성은 유호의 맞은편 소파 자리에 앉아 유호에게 음료를 건네주며 물었다. 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답을 들려주었다.
“네. 원래 할 줄 알던 곡도 몇 개 있어서. 기타 코드는 다 외워 왔어요.”
“아. 진짜? 그새 그걸 다 외워 왔어? 기특하네, 유호.”
“제가 연습할 시간이 많아서.”
운성의 칭찬에 유호가 쑥스러워하며 핑곗거리를 찾았다. 그다음 운성의 콜라보 제안 이후 내내 묻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요, 형.”
“응. 왜?”
“혹시 인한이 때문이에요? 저랑 같이 라이브 방송하시려는 거.”
유호는 모른 척 넘어가고 싶었다. 인한이 덕분이면 뭐 어떤가, 합리화해 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해소하고 싶었다.
“글쎄.”
운성은 애매한 대답을 들려줬다. 그리고 유호에게 역으로 질문을 해 왔다.
“유호는 그게 왜 궁금한데?”
“그게, 인한이가 형한테 부탁한 거면…….”
“부탁한 거면?”
대답을 망설이는 유호에게 운성은 객관식 답안을 여러 개 제시했다.
“1번 자존심이 상한다. 2번 부담스럽다. 3번 감격스럽다. 자, 그대의 선택은?”
“……3번?”
“그게 제일 아닌 거 같은데.”
호락호락하지 않은 운성의 반응에 유호는 입을 꾹 다물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후회도 해 봤다.
“부탁일 리는 없지. 아까 걔 반응 못 봤어?”
“그건 그러네요.”
“그렇다고 아주 영향이 없다고는 볼 수 없고. 애초에 내가 너에 대해 잘 아는 이유가 인한이 때문인 건 맞으니까.”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인한과의 연관성이 아니었다면 운성이 유호에게 합주 제안을 할 이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타 연주를 직접 본 적도 없는데. 다만 유호는 인한의 부탁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인한의 반응으로 보아 절대 아닌 거로 결국 결론이 났지만.
“그래서 하기 싫어? 인한이 덕 보는 게 자존심 상해서?”
운성은 웃으며 유호에게 질문을 던졌다. 유호의 처지에서는 고민할 것도 없는 문제였다.
“아뇨. 하고 싶어요. 하게 해 주세요.”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유호의 대답에 운성이 하이파이브를 건넸고 유호도 얼떨결에 손을 맞부딪혔다.
“기회가 꼭 정석대로만 오는 건 아니잖아. 이용할 수 있는 건 이용해야지.”
“그래도. 인한이나 여민이한테 맨날 묻어가는 거 같아서요.”
“무슨 소리야? 너 요새 상승세잖아. 그 화제성을 내가 이용하는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유호의 입지가 예전보다 좋아진 건 사실이지만 워낙 인지도가 바닥이었으니 높아져 봐야 운성의 발끝도 못 따라갔다. 유호는 운성의 배려 섞인 말에 더는 합주 제안의 숨겨진 의도를 캐묻지 않기로 했다.
운성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멤버들한테 묻어가는 게 어때서? 난 과거로 돌아가잖아? 그럼 보컬 다른 애 세워 놓고 열심히 묻어갈 거야. 인지도는 없고 돈은 많고 싶다고.”
“저는 인지도도 없고 돈도 없는데.”
유호의 해맑은 대답에 운성은 잠시 당황했다.
“어? 그러니?”
“네. 저희 그룹 적자라.”
“너 아직 어리잖아. 괜찮아.”
운성은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서둘러 기타를 가지러 갔다.
“그럼 우리, 첫 번째 곡부터 맞춰 볼까?”
“네. 좋아요.”
운성과 유호는 4일 뒤인 다음 주 수요일에 라이브 방송을 함께하기로 한 상황이었다.
선곡은 운성이 속해 있는 그룹인 메테오의 히트곡 세 곡과 세븐스팟의 노래 두 곡, 그리고 팝송 두 곡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곡 수에 시간이 빠듯했지만 노래할 기회가 간절했던 유호에게는 그 버거움마저 기쁘게 느껴졌다.
“이 부분은 한 음으로 가고 여기부터 형이 화음 쌓을까?”
“네. 좋아요.”
“그럼 이 부분은 유호가 애드립 좀 생각해 와. 내가 기본 멜로디로 부를게.”
“네. 알겠어요.”
“유호가 음역대가 넓네. 고음도 잘 내고.”
“앗. 감사합니다.”
연습 내내 운성에게 협조적인 유호 덕분에 파트 분배는 수월하게 끝났다.
“형 목소리도 진짜 최고예요. 기타 연주도 최고고.”
유호는 쌍 엄지를 치켜들며 운성을 찬양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 운성이 유호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었다가 금세 다시 거뒀다. 어쩐지 인한이 지켜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호가 준비 잘해 와서 연습 여기까지만 해도 되겠다.”
“근데 아직 가사를 다 못 외워서.”
“정 안 되겠으면 악보 보고 하면 되지.”
“그래도요.”
“그럼 해 보고, 그래도 안 되면 보고 하는 거로.”
“네. 좋아요.”
연습은 세 시간 만에 끝이 났다. 오랜만의 합주에 유호는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운성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한 번 엄청난 제안을 해 왔다.
“여기 근처에 유명한 화덕 피자집 있거든? 저녁은 거기에서 배달시켜 먹는 거 어때?”
“네. 너무 좋아요!”
유호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정크 푸드야말로 유호의 삶의 낙이자 한 줄기 빛이었다. 다이어트와 건강상의 문제로 자주 먹지 못해 더 그렇게 느껴졌다.
이제 유호에게 운성은 존경하는 선배 그 이상이 되어 있었다. 인한이 절대 바라지 않았을 전개였다.
화덕 피자를 계기로 방어벽을 무너뜨린 유호는 운성에게 조잘조잘 사적인 얘기를 잘도 털어놨다. 물론 인한과 관련된 얘기는 쏙 빼 둔 채였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게?”
“우선은 드라마 오디션 보러 다니고 있기는 한데.”
“배우 하려고?”
“배우도 기회가 된다면 계속해야죠.”
“음악은?”
“음악은…… 그것도 기회가 되면요.”
“유호가 은근 결단력이 부족하구나.”
“아. 그래 보여요?”
유호는 새삼스럽게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결단력이 부족한 거였어. 라울리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상대적 어른인 운성이 하니 다 맞는 말 같았다.
“더 높이 날아올라 너에게 닿을 수만 있다면~ 남몰래 숨겨 왔던 내 마음 그때는 전할 수 있을까~”
“노래 괜찮은데?”
유호는 아예 자신이 작사·작곡한 노래까지 운성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누구에게도 들려준 적 없던 곡이었다.
“진짜요?”
“멜로디 라인이 엄청 좋은데? 가사도 좋고. 잘 다듬어 봐. 형이 나중에 편곡 도와줄게.”
“정말요?”
유호는 또 한 번 눈을 반짝이며 어깨를 들썩였다. 꼬리라도 있으면 흔들 기세였다.
그 모습을 보고 운성이 덩달아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사람이 이별을 해야…….”
“예?”
“어?”
“방금 뭐라고…….”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운성이 평소답지 않게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운성은 다급히 수습을 시작했다.
“아니, 나는 이별을 하면 곡이 잘 써지더라고. 내 곡 대부분이 그랬어. 그러니까 너도 헤어져서 죽고 싶을 때, 그때 그냥 넘기지 말고 가사로 꼭 남겨 두라고.”
“아. 네! 그럴게요.”
유호는 선배의 가르침을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하마터면 사고 칠 뻔했네. 운성은 위기를 넘겼음에 안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