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인한은 다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대표님한테 허락받았어요. 형들도 원하는 대로 하면 될 거 같아요.”
“와. 재수 없다. 정인한? 상의도 안 하고 허락까지 받았어?”
라울리가 한 번 더 인한을 비난했다. 그리고 인한은 여지없이 반격을 시작했다.
“연애할 때 불편하다고 독립하고 싶다고 한 게 누구…….”
“야. 축하한다. 집들이할 때 꼭 부르고.”
라울리는 냉큼 인한을 향해 악수를 건넸다. 이어서 테일러에게도 축하의 말을 건넸다.
“테일러 형 이제 독방이네요?”
“나도 곧 나갈 거야. 인한이랑 같이 허락받았는데?”
“엥? 그럼 숙소에는 누가 남는데?”
“나는 있을 건데?”
라울리의 질문에 여민이 제일 먼저 대답했다. 그리고 주언도 곧 자신의 의견을 드러냈다.
“나도 별생각 없는데.”
“유호 형은요?”
그리고 여지없이 여민의 질문이 유호에게로 향했다.
“아. 나는…….”
유호는 잠시 답을 망설였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자신을 쳐다보는 여민의 얼굴이 부담스러웠지만 그렇다고 어렵게 내린 결정을 번복할 수는 없었다.
“나가려고.”
유호는 단호하게 말했다. 덕분에 여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아. 진짜요? 왜? 내가 싫어졌어? 말도 안 돼.”
“아니. 여민아. 그게…….”
“왜요, 왜? 내가 잘할게. 효 형. 그러지 말자.”
“그런 거로 조르면 어떡해? 유호 형도 어렵게 결정한 걸 텐데.”
여민의 행동을 만류한 건 인한이었다. 여민은 어림없다는 듯 인한에게 말했다.
“정인한 너만 나가. 우리 유호 형은 안 돼.”
그렇게 말하며 여민은 옆에 있던 유호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인한은 옅은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저는 할 말 다 했으니까 들어가서 좀 쉴게요. 형들 잘 자요.”
“그래.”
“어. 잘 자.”
인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유호가 자리에서 냉큼 일어났다.
“형은 왜 일어나? 안 돼. 아무 데도 못 가.”
“아. 나 화장실 좀. 배 아파서.”
여민의 질문에 유호는 저도 모르게 거짓말을 해 버렸다. 그리고 안방 화장실을 향하는 척 인한의 뒤를 따랐다.
“왜요?”
방문 앞에 다다른 인한이 대뜸 뒤를 돌아보며 유호에게 물었다. 유호가 놀라 주춤댔으나 이내 용기를 내서 인한에게 말했다.
“잠깐 들어가도 돼?”
인한은 대답 없이 방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유호가 먼저 방에 들어섰고 인한이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인한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바깥쪽 침대에 앉아 커다란 짐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유호는 문 옆 벽에 붙어 선 채 그 모습을 지켜보다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어제 무슨 얘기 하려고 했어?”
“그냥. 별거 아니었어요.”
인한은 싱거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결국 다시 질문을 꺼낸 건 유호였다.
“혹시 나 때문이야? 숙소 나가려는 거.”
유호의 물음에 인한은 짐 가방을 내려놓고 자세를 바르게 해 앉았다. 그리고 유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부터 나가고 싶어서 회사에 몇 번 얘기했었어요.”
“나한테는 그런 얘기 없었잖아.”
“얘기할 기회가 없었어요.”
“얘기할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고?”
다시 한번 두 사람 사이에 날 선 감정들이 오갔다.
어디서부터 관계가 꼬여 버린 건지 둘 중 누구도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저는 당연히 형이 기뻐할 줄 알았는데요?”
“내가 왜?”
“제가 알아서 사라져 주는 게 형도 편할 거잖아요.”
“그걸 왜 네가 판단해?”
날카롭게 돋아 있는 유호의 말이 다시 인한을 향했다.
“왜 항상 나는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어?”
싸우려던 게 아닌데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그런 생각으로 나가겠다고 한 거 아니에요.”
계속해서 이어지는 유호의 냉담한 반응에 인한은 지친 듯 머리를 짚었다. 그리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호를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려는 거예요. 원래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는 게 덜 힘들 거 같아서.”
인한의 말에 유호는 반응하지 않았다. 인한은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주아 누나랑 개인적으로 연락한 건 석재 형 생일 파티 준비하느라고 그랬던 거예요. 석재 형 소개로 한참 전부터 아는 사이였고 평소에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어요. 어제 그거 말하려던 거예요.”
인한은 이제 와 이런 변명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유호는 여전히 입을 다문 채였고 인한의 입이 다시 열렸다.
“형.”
인한은 다시 눈을 맞추며 유호에게 물었다.
“형은 아직도 내가, 형 없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질문을 던지는 인한의 얼굴에는 책망과 서글픔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유호는 그 마음을 외면하기로 마음먹었다.
“응.”
“내 옆에 있으면 계속 괴로울 거 같아요?”
“응.”
“알겠어요.”
인한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눈가는 슬픔으로 붉어졌다. 무표정하던 유호의 얼굴도 점점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그냥, 내가 형 인생의 한 부분이길 바랐어요. 그냥 그뿐이에요.”
인한은 허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때늦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결국에는 이렇게 놓칠 걸 알아서. 형이 바라는 게 결국은 끝인 걸 알아서. 억지로라도 붙잡아 보고 싶었나 봐요.”
인한은 낮게 읊조리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인한은 결심한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유호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유호에게 말했다.
“가요. 형. 가서 잘 지내요.”
그렇게 말하는 인한의 얼굴이 너무 슬퍼 보여서 유호는 절망했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가서, 형도 나 없이 행복하게 지내요.”
기어이 인한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인한은 아랫입술을 꾹 다문 채 소리도 없이 눈물을 줄줄 흘렸다.
유호는 덩달아 터져 나갈 것 같은 울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인한에게 말했다.
“네 옆에 있는 게 꼭 괴롭기만 했던 건 아니야.”
솔직하게 행복한 시간이 더 많았다. 짝사랑을 깨달은 이후에도 아프면서도 함께할 수 있는 모든 순간이 소중했다. 기간이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랬다.
“행복한 순간도 많았어. 네가 나를 얼마나 아껴 주는지 알아서 마음이 간지럽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 들 때도 있었어.”
결국 유호의 두 눈에도 눈물이 가득 차 흘렀다. 틀어막을 새도 없이 뺨을 타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서 그래. 주제도 모르고 가질 수 없는 걸 욕심내서 그래. 그러니까 네가 괜히 나 때문에 상처받을 필요는 없어.”
끝을 바라면서 상처받지 말라는 말을 하는 게 얼마나 모순적일까. 유호는 알면서도 그렇게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유호는 여전히 이 관계에서 아픈 건 자신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누구한테나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야. 내가 너를 떠나더라도 그 사실은 안 변해. 그러니까 더는 애쓰지 않아도 돼.”
유호는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말했다.
인한은 잔뜩 상처받은 얼굴을 한 채 유호를 바라봤다. 그리고 울음과 함께 서글픈 말을 토해 냈다.
“그거 알아요? 모두가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옆에 남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
자신이 바란 건 그냥 곁에 있어 주는 것뿐이었는데. 사랑까지는 바란 적도 없었는데.
인한은 자신이 가진 게 전부 허상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사랑한다면서 다들 손쉽게 인한을 떠났다. 누군가는 이용했고 누군가는 비난했다. 그리고 인한은 계속 혼자 남겨졌다. 이제는 이런 상황이 당연하게까지 느껴졌다.
“저를 위로하는 건 그쯤이면 됐으니까 형이야말로 더는 어떤 일로도 상처받지 말아요. 앞으로는 누구 때문이든 그렇게 울지 말고. 내가 형 옆에 없었을 때처럼, 많이 웃어요.”
인한의 마지막 말을 듣고 유호는 무너져 버렸다. 더는 참아 내지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유호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데도 인한은 달래 줄 수가 없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인한의 턱 끝으로도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단 몇 걸음이면 도달할 거리를 두고 두 사람은 그렇게 한참 동안을 울었다.
* * *
인한은 일주일 후에 숙소를 떠났다.
유호는 고민 끝에 숙소에 남기로 했고 한동안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인한의 집들이 자리에도 유호는 참석하지 않았다. 여민의 입을 통해서 후기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방이 두 개야?”
유호는 여민의 핸드폰 사진첩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유호는 침대에 엎드려 있었고 그 옆을 여민이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여민은 손가락으로 사진을 몇 개 넘기며 유호에게 말했다.
“아니. 총 세 개. 여기가 침실이고 여기가 옷방이래요. 방 하나는 그냥 비어 있어서 안 찍었어요.”
“잘 꾸며 놨네.”
급하게 이사를 해서인지 전체적으로 휑한 감이 있지만 깔끔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다.
“혼자 방 쓰는 것도 싫다고 태윤이 형 못 나가게 붙잡을 땐 언제고 이제 돈 벌었다고 살판났지, 뭐.”
“이제 혼자 사는 예능도 출연할 수 있겠네.”
“그건 안 된다던데.”
“왜?”
“형한테 독립한 거 말 안 했대요.”
여민의 말에 유호는 놀랐다. 부모와 다름없는 친형에게까지 비밀로 하고 독립한 이유가 무엇일까 싶었다.
“왜?”
“에이. 형. 딱 봐도 그거잖아요.”
“응? 뭐가?”
“작정하고 연애라도 하려나 보죠.”
“그렇구나.”
유호는 괜한 걸 물었다고 생각하며 여민에게 핸드폰을 돌려줬다. 그래도 잘 지내는 거 같아 안심됐다. 이렇게 쉽게 끊어질 인연인데 여태 왜 그렇게 악착같이 붙잡고 있었나, 그런 의미 없는 생각도 해 봤다.
그리고 가끔 유호는 그랬다.
주방 식탁에 앉아 주인을 잃어버린 구석 끝 방의 방문을 한참 바라보고는 했다.
가끔 인한도 그랬다.
자신의 집 복도에 턱을 괴고 앉아 아무것도 채워 놓지 않은 빈 방문을 한참 바라보고는 했다. 그러다 드물게 울기도 했다.
그런 날들이 며칠이고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