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아프지 마. 인한아.”
모든 게 인한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건 어쩌면 정말 유호의 비겁한 변명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전히 유호는 자신의 이기적인 사랑에 인한을 끌어들이지 않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나만 아프면 되는데 너까지 엉망진창이 되지는 마.”
- 이걸로 끝이야. 형.
유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한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 이제 형한테 다른 선택권은 없어.
경고와도 같은 인한의 말을 들으며 유호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꼈다.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늪지대에 발이 빠져 버린 심정이었다.
- 참고로 나는 충분히 엉망진창이고 이제 형 때문에 아플 생각도 없어.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어졌다. 유호는 정말 늪에 빠진 사람처럼 주언이 방에 찾아와 꺼내 주기 전까지 한참을 침대에 앉아 있었다.
* * *
이틀 뒤의 밤이었다.
“인한. 오늘 우리 방에서 자게?”
“응. 내일 새벽 촬영이라.”
여민의 질문에 인한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정작 침대의 주인인 유호에게는 허락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나갈 때 우리 효 형 깨우지 마라.”
“왜? 나도 이참에 유호 형 배웅 좀 받아 보려는데.”
“그건 룸메의 특권이야. 꿈도 꾸지 마.”
당당하게 방 안으로 들어서는 인한을 보며 유호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인한이 말하는 끝이라는 게 관계의 끝은 아닌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든 좋은 쪽으로 해석되지는 않았다.
“잘 준비 다 한 거지?”
“응.”
인한의 질문에 유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인한이 침대 앞까지 다가가 유호에게 말했다.
“안으로 가 보지?”
“뭐야? 효 형한테 허락받은 거 아니었어?”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에 여민이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인한에게 물었다. 인한은 유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여민에게 대답했다.
“당연히 받았지. 그렇지, 형?”
“……응. 내가 된다고 했어.”
아니라고 하면 큰일 날 거 같은 인한의 눈빛에 유호는 순순히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냉큼 침대 안으로 몸을 뉘었다. 인한이 몸을 눕히기도 전에 유호는 벽 쪽으로 바짝 붙어 인한과의 거리를 벌렸다. 그 행동을 인한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도 여민이 있으니 별일 없겠지. 유호는 안심했지만, 세상일이 꼭 유호의 생각대로 돌아가지는 않는 법이었다.
“여, 여민아. 너 어디 가?”
갑자기 방문으로 향하는 여민의 행동에 유호가 상체를 일으키며 다급하게 물었다. 여민은 의아해하며 유호에게 대답했다.
“화장실이요. 왜요? 뭐 갖다줄까?”
“아니. 그냥, 조심해서 다녀오라고. 거실 깜깜할 수도 있으니까 핸드폰 챙기고.”
“역시 우리 유호 형. 알겠어요.”
유호의 말에 여민은 손에 들린 핸드폰을 흔들어 보이며 방문을 나섰다.
여민이 나가고 나자 방 안은 정적이 감돌았다. 유호는 미동도 없이 숨죽이고 있다가 눈동자만을 굴려 인한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인한과 눈이 마주쳤다. 헉. 아주 공포 영화가 따로 없었다.
“내가 불편한가 봐?”
“그, 그럴 리가.”
“불편해해. 내가 형 감정까지 어떻게 해 줄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게 말하며 인한은 침대에 한쪽 무릎을 대고 몸을 숙였다. 그리고 손을 뻗어 유호의 손목을 강한 힘으로 끌어당겼다. 유호의 상체가 인한의 쪽으로 딸려 갔고 손바닥은 침대를 짚게 됐다. 인한은 유호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한 채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제 나는 형한테 부탁도 애원도 안 할 거야. 그러니까 형도 후회하지 않을 제대로 된 선택을 해. 나는 이제 우리가 어떤 결말을 맞던 끝까지 가 볼 생각이니까.”
두 사람의 사이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웠다. 서로의 감정이 낱낱이 느껴지는 그 상태에서 유호는 무방비하게 인한의 말에 할퀴어지고 있었다.
“왜 나한테 못되게 굴어?”
결국 유호는 견뎌 내지 못하고 인한을 향해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는 게 이렇게까지 괴롭힐 당할 일이야?”
그렇게 말하는 유호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차오른 눈물에도 인한은 싸늘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내가 형을 괴롭히는 거 같아?”
오히려 인한은 유호를 나무랐다. 모든 게 유호의 탓이라는 듯 그를 향한 원망을 그대로 쏟아 냈다.
“응? 말해 봐. 아직도 내 옆에 있는 게 형한테는 괴로운 일이야?”
“응.”
“왜?”
“네가 바라는 일이 아니니까.”
결국, 유호의 두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비라도 내리는 것처럼 뺨이며 턱 끝이 흥건히 젖어 들었다.
“맞잖아? 너는 그냥 내가 좋은 형으로 있어 주길 바라잖아. 소중한 가족이자 친구이길 바라잖아. 근데 나는 그러기 싫었어. 네가 여자 친구 생긴 것도 축하해 주고 싶지 않았고 네가 여배우들이랑 썸 타는 것도 알고 싶지 않았어. 나중에 네가 결혼하게 되도 나는 진심으로 축하해 주지 못할 거야. 근데 그걸 어떻게 말해? 네가 이렇게 실망할 걸 아는데 내가 어떻게 얘기를 해?”
유호는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쳐 내며 말했다. 그 모습을 인한은 반응 없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근데 너는 왜 계속 내가 나쁘대? 결국, 나는 도망치지도 못하고 너한테 매번 붙들려서 이렇게 휘둘리고만 있는데. 왜 너는 계속 나한테 나쁜 말만 해?”
“내가 형한테 좋은 사람인 적은 있어?”
유호가 다시 인한의 얼굴을 마주 봤을 땐 인한의 두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유호는 인한이 품고 있었던 설움과 상처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 때문에 행복했던 순간이 있기는 해?”
인한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유호에게 물었다. 어쩌면 유호는 이런 순간을 가장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욕하고 화내는 건 견딜 수 있었지만, 배신감에 아파하는 인한의 모습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까 정말 그랬더라고. 형은 계속 불편해서 나를 밀어냈는데 내가 그걸 몰랐더라고. 눈치도 없이 혼자만 행복에 겨웠더라고. 차라리 그러지 말라고 더 단호하게 말해 주지 그랬어. 나한테 소중했던 그 순간들을 가짜로 만들지는 말지 그랬어.”
“그래서 지금 나한테 똑같이 갚아 주는 중이야? 나랑 가짜로 사귀어서?”
유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인한에게 물었다. 당한 만큼 되돌려 주겠다는 심보일까. 아니면 자신을 미워하게 만들어서 사랑을 멈추게 하려는 걸까.
어떤 이유에서건 그 끝에 도달할 결말은 뻔했다. 둘 중 누구도 행복할 수 없었다.
“그러겠다고 하면 응해 줄 생각은 있고?”
그런데도 인한은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계속해서 가고자 했다.
“아니.”
유호는 단박에 대답했다. 엉망으로 얽혀 버린 이 관계를 끊어 내려고 자신이 얼마나 노력했는데, 이제 와 모든 것을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렇게 말하며 인한은 씁쓸하게 웃었다. 기어이 인한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의 의미를 유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형.”
인한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유호를 불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의중을 알 수 없는 질문을 이어 나갔다.
“정말로 날 사랑해?”
여기서 그렇다고 대답해 봤자 뭐가 달라질 수 있을까. 아직도 제 사랑을 의심하고 있는 인한을 바라보며 유호는 한 번 더 제 처지를 실감했다. 잠깐이나마 가졌던 희망조차 바닥에 처박힌 기분이었다.
“아니.”
그래서 유호는 이 빌어먹을 사랑을 그만두고자 했다.
유호의 단호한 대답에 인한은 눈을 질끈 감았다. 절망스러워 보이는 그 얼굴에 유호는 한 번 더 독한 말을 쏟아 냈다.
“안 사랑해.”
마치 다짐과도 같은 말이었다.
“이제 안 사랑해.”
“거짓말하지 마.”
인한은 유호의 말을 딱 잘라 부정했다. 그다음 생각지도 못한 발언으로 유호를 놀라게 만들었다.
“형은 한 번도 나 사랑한 적 없잖아. 나한테서 벗어나려고 거짓말하는 거잖아.”
유호가 여태 해 왔던 노력들이 모두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형이 계속 샘냈던 건 내 여자 친구가 아니라 나였잖아. 형은 그냥 내가 끔찍하고 싫은 거잖아. 아니야?”
“……뭐?”
“나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 게 배알이 꼴린다며. 내가 귀찮고 손대는 것도 싫다며. 내 들러리로 사는 것도 지겨우니까 제발 형 인생에서 비켜 달라고…… 형 입으로 직접 그렇게 말했었잖아. 벌써 잊었어?”
인한의 입을 통해 나열되는 모든 말들이 유호를 날카롭게 찔렀다.
이제야 유호는 인한이 왜 거짓 연애까지 강행해 가며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깨닫게 됐다.
인한은 지금 유호의 고백을 거짓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저 자신을 상처 입히기 위한 수단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유호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행동으로도 매 순간 그렇게 확인시켜 줬잖아. 그런데 이제 와서 사랑? 아니지. 방금은 그것도 아니라며. 근데 나는 또 그 말에 속아서 휘둘릴 뻔했어. 정말로 형이 나를 사랑한다고…… 잠시나마 믿을 뻔했어. 등신같이.”
마치 양치기 소년과도 같은 최후였다. 인한을 밀어내기 위해 뱉었던 거짓말들이 결국 유호의 진심마저 왜곡해 버리고 말았다.
“기왕 속일 거면 싫어하는 티는 내지 말지 그랬어. 한 번이라도 사랑하는 척은 해 주지 그랬어.”
서러운 눈물과 함께 건네지는 인한의 원망 어린 말에 유호는 할 말을 잃었다.
생각해 보면 정말로 그를 사랑했었나 싶었다.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바란 적이 있었나, 스스로조차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알아서 망가져 주겠다는데 그건 또 싫었어? 형한테 피해라도 갈까 봐 그게 걱정이었던 거야? 말해 봐. 형. 이제는 좀 솔직해질 때도 됐잖아.”
“……그래. 맞아.”
그래서 유호는 한 번 더 도망을 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