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6
“다 같이 회사 옮기면 돼요.”
이사가 자리를 뜨고 제일 먼저 입을 뗀 이는 인한이었다.
“그룹 잘 유지하고 있다가 계약 종료되면 다른 회사로 넘어가면 된다고요. 독자적으로 회사 차려도 되고요.”
인한의 말에 누구 하나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인기 멤버들에게 너무 리스크가 큰 결정이었다. 하지만 당사자가 괜찮다고 나서는데 반대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저랑 여민 형은 이미 그러기로 결정했어요. 형들만 결정해 주면 돼요.”
아직 2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으니 계약 종료 이후의 문제는 우선 보류하기로 했다. 그사이에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고 굳건했던 마음 역시 변하는 계기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특히나 유호는 다른 멤버들보다 더 큰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 * *
“왜 거기로 앉아?”
사무실의 빈 테이블에 가장 먼저 자리를 잡고 앉은 인한은 자신의 대각선 자리에 앉은 유호를 향해 물었다.
“어? 어, 그게…….”
갑작스러운 인한의 질문에 유호는 당황했다. 동시에 일부러 자리를 피해 앉은 것을 들킨 거 같아 두려웠다.
“뭘 그런 걸 따져? 빈자리 아무 데나 앉으면 그만이지.”
다행히 라울리가 먼저 불만을 드러내며 유호의 대답을 가로챘다. 유호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네가 자꾸 옆에서 치대니까 유호 형이 네 옆에 안 앉는 거 아니야. 눈치 없기는.”
“아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데…….”
사실은 맞는 말이라 유호는 더 변명할 수 없었다.
“아싸. 나 유호 형 옆자리.”
여민은 신나서 유호의 옆자리를 차지했고 인한은 굳은 얼굴로 유호를 바라봤다. 유호는 눈을 내리깔며 인한의 시선을 피했다.
“점심 뭐 먹을래?”
“제육 어때요?”
테일러의 물음에 제일 먼저 대답한 이는 라울리였다. 주언과 여민의 입에서 긍정적인 반응이 나왔고 유호는 모두의 결정이 끝나기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유호 형은? 괜찮아?”
“어? 어. 나도 좋아.”
인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놀란 유호가 얼떨결에 대답을 전했다.
“그래. 먹자, 제육.”
인한은 아무렇지 않게 유호에게 말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 미묘한 차이가 있었다.
늘 유호의 옆자리에 붙어 앉아 말을 걸기 바빴던 인한은 유호의 대각선 자리에 앉아 말없이 핸드폰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이따 정아 누나 보러 갈 때 뭐 좀 사가야 되는 거 아니야?”
“가다가 꽃다발이랑 마카롱 좀 사가지 뭐.”
옆자리의 여민이 말을 걸자 인한은 간단하게 대답하고 다시 핸드폰 화면에 집중했다. 참다못한 라울리가 인한의 행동에 딴지를 걸었다.
“뭐 하냐, 너?”
“아. 카톡 해.”
“누구랑?”
“주아 누나랑.”
“설마 네가 말하는 주아 누나가 유주아 님은 아닐 거야.”
“맞는데?”
“아 미친.”
인한의 대답에 라울리가 절규했다. 차세대 청순의 아이콘이라고 일컬어지는 배우 유주아는 라울리가 인생 드라마라고 노래를 부르던 힐링 드라마 ‘여름 멜로디’의 여주인공이었다. 그런 주아 님이랑 정인한이 연락을? 라울리의 입장에서는 환장할 만한 이야기였다.
“주아 님한테 내가 팬이라고 얘기했냐, 안 했냐?”
“당연히 안 했지.”
“해. 여러 번 해. 귀에 딱지가 앉도록 해.”
“아 알았어. 말할게.”
“지금 당장 해.”
라울리가 호들갑을 떠는 사이 여민은 배신감으로 물든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한에게 따져 물었다.
“뭐야, 정인한? 연락처 언제 주고받았냐.”
“저번 촬영 때. 형도 옆에 있었잖아.”
“네가 먼저 연락처 물어봤어?”
“아니. 누나가.”
“와. 더럽다.”
여민의 발언에 건너편에 앉은 유호가 움찔했다. 저 표현이 저렇게 쉽게 쓸 수 있는 표현이었나. 괜히 마음이 뒤숭숭했다.
“더럽긴 뭐가 더러워? 저번에 여돌들 왔을 때는 형이…….”
“덥다고! 더러운 게 아니라 덥다고. 하하.”
인한의 반격에 여민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역시 정인한은 함부로 건드는 게 아니었다. 알면서도 왜 같은 실수를 저지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에어컨을 켰는데도 참 덥네. 온도 좀 더 내릴까?”
“아니. 유호 형 감기 걸려. 안 돼.”
무심하게 툭 뱉어진 인한의 발언에 유호의 시선이 인한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여전히 인한의 시선은 핸드폰을 향해 있었다. 유호는 괜히 민망해져 손가락만 꼼지락댔다.
“인한아. 유호 건강만 챙기지 말고 연애사도 좀 챙겨 주고 그래. 너 혼자만 자꾸 썸 타지 말고.”
뜬금없는 말로 유호를 당황시킨 이는 주언이었다. 유호는 다급하게 주언을 말려 보려고 했다.
“아뇨. 형 저는 괜찮…….”
“형. 썸이라뇨? 우리 주아 님이랑 인한이가 썸이라뇨? 인정할 수 없어요.”
라울리가 발끈하며 주언의 말을 반박한 덕분에 유호의 발언은 묻히고 말았다. 차라리 없었던 일처럼 만들자는 생각으로 유호는 자연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받아들여. 이렇게 종일 연락하는데 썸이 아니고 뭐겠어?”
“아뇨. 저는 주아 님 말만 믿어요. 다른 사람 말은 듣지 않겠어요. 특히 정인한 말이라면 더욱더.”
“유호 형은 내가 챙겨 줄 필요 없잖아.”
“어?”
주언과 라울리가 소란스러운 논쟁을 벌이는 사이 인한의 말은 유호를 향했다. 시선도 유호를 향하고 있었다.
“알아서 잘할 테니까.”
인한의 애매모호한 말에 유호는 혼란을 느꼈다. 주아와의 관계를 왜 변명하지 않는지도 의문이었다. 유호는 애써 마주친 시선을 피하며 인한에게 대답했다.
“그렇지.”
“알아서 잘하기는 뭘 잘해? 굴러 들어온 인연도 제 발로 뻥 차 버리는데.”
“라울아. 내가 언제…….”
“그럼 그 웹 드라마 같이 찍은 여배우랑은 왜 안 사귀었는데?”
여기서 소이 얘기가 왜 나올까. 가만 보면 라울리도 꽤 집요한 면이 있었다. 유호는 괜히 눈치가 보여 인한의 표정을 한 번 살폈다.
심기가 불편한지 인한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유호는 죄 없는 소이를 이용해 인한을 떠봤던 과거를 반성하며 라울리의 말을 부정했다.
“아무 사이 아니었다니까.”
“그러니까 왜? 우리의 모태솔로, 아니 여자랑 손은 잡아 본 선유호 씨가 무려 5년 만에 여자랑 연락하는 사이가 됐는데 왜 무슨 사이가 되려는 노력조차 안 했던 건데?”
속사포로 던져진 라울리의 질문에 유호는 정신을 못 차렸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 대충 에둘러 대답하기로 했다.
“그거야, 그냥…… 내 이상형이 아니었으니까.”
“이상형이었으면?”
이번에 유호에게 질문을 던진 건 인한이었다. 인한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유호를 추궁하고 있었다.
“그럼 꼬셨을 거야?”
“뭐래, 정인한? 유호 형이 먼저 나서서 누구 꼬시고 그럴 사람이야?”
유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라울리가 먼저 나서서 대답을 가로챘지만, 유호는 인한을 빤히 쳐다본 채 대답했다.
“응. 꼬셨을 거야.”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이었지만 아니라고 하기에는 사람이 우스워졌다. 나도 남자인데, 사랑하는 사람 하나 못 꼬셔 낼 만큼 만만하게 보고 있다니 짜증도 났다.
“올. 유호 형. 간만에 남자답다.”
“우리 소중한 유호 형은 먼저 누구를 꼬실 필요 없거든? 정인한. 괜한 말로 우리 효 형 부추기지 마.”
라울리는 유호의 대답에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고 여민은 유호를 껴안으며 인한을 타박했다. 인한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 진짜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데?”
“뭐야, 정인한. 진짜로 유호한테 누구 소개해 주게?”
인한의 질문을 반기며 주언이 호들갑을 떨었으나 유호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대체 어떤 대답을 바라고 던지는 질문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농락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있으면요.”
“넌 모르는 사람이야.”
결국 유호는 인한의 말에 발끈하고 말았다.
“모르는 사람, 누구?”
“말해 주면 알아?”
“알 수도 있잖아.”
“알아도 너한테는 말해 줄 생각 없어.”
계속되는 인한과 유호의 신경전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뭐야, 둘이? 갑자기 왜 이래?”
라울리가 놀라 두 사람에게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야. 정인한. 너 효 형한테 왜 그래?”
여민 역시 날이 선 목소리로 인한을 나무랐지만 인한의 시선은 계속해서 유호를 향해 있었다.
흠, 흠. 주언의 헛기침이 이어졌고 테일러가 한 소리를 하려고 나서려는 찰나 라울리의 입이 먼저 열렸다.
“제육, 올 때 됐겠지?”
라울리는 분위기를 환기하기 위해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어, 어. 그럴걸? 내가 시간 확인해 볼게.”
주언이 서둘러 동조했으나 한번 망한 분위기는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 결국 주언은 자리에서 일어나 이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을까 봐. 유호야. 같이 갈래?”
“아. 네.”
유호는 냉큼 주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유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언에게 다가가자 인한도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언에게 말했다.
“제가 갈게요.”
“어? 네가?”
“네. 유호 형이랑 제가 갈게요.”
인한의 말에 주언은 당황한 눈치였다. 어. 그게, 그러니까. 말을 망설이다 결국 인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 둘이 다녀와. 어, 근데 사실 도착하려면 아직 20분 남아서. 지금 꼭 안 가도 돼.”
“상관없어요.”
“어, 그래. 인한아. 그럼 다녀오렴.”
유호는 주언을 쳐다보며 구해 주길 바랐지만 주언은 고개를 미세하게 저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함께 건물 1층에 도착한 인한과 유호는 복도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대기하기로 했다.
유호는 인한이 앉은 자리에서 두 칸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왜 거기 앉아? 옆으로 와.”
인한의 말에 유호가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유호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자 인한이 손을 뻗어 유호의 손을 잡았다. 방금까지 대차게 말싸움을 해 놓고 손을 잡고 있자니. 유호는 어이가 없어 인한의 손을 뿌리쳤다.
“왜? 아직도 나랑은 손도 잡기 싫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
“연애하자니까? 그러기로 했잖아.”
“유주아 배우님이랑 썸 탄다며?”
이런 얘기까지는 하고 싶지 않았는데. 아까부터 내내 얹힌 듯 유호의 가슴에 쌓여 있던 마음이 기어이 바깥으로 터져 나왔다.
“그럼 안 돼?”
인한은 뻔뻔한 얼굴로 유호에게 물었다. 그리고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또 나 혼자 내버려 두고 도망가기라도 하게?”
뾰족하게 날이 선 인한의 말이 혐오에서 비롯된 것인지 서운함에서 비롯된 것인지 유호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