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5
“어?”
- 사귀자고. 왜? 무슨 문제 있어?
유호는 자신이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닌가 싶었다.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얘기를 인한의 목소리로 듣는 게 과연 현실인가 싶었다. 그래서 유호는 계속해서 인한에게 되묻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 아. 혹시 지금 사귀는 사람 있는 거야? 그럼 헤어져. 나랑 사귀자.
고백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구나. 유호는 새삼 깨달았다.
다 끝내려고 하는 고백이 있는가 하면 거짓뿐인 고백도 있다는 걸 유호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사랑이 담긴 고백만 빠진 채였다.
- 왜? 형 나 좋아한다며. 그럼 사귀면 되잖아. 형은 고백했고 나는 받아 줬고. 이보다 더한 해피 엔딩이 있을까 싶은데.
과연 이게 해피 엔딩일 수 있을까. 두 사람이 사귄다는 결말은 유호가 상상으로도 내 본 적 없는 결말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한이 자신을 좋아할 리 없다는 걸 유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왜?”
그래서 인한에게 이유를 물을 수밖에 없었다. 꿈에도 바란 적 없던 해피 엔딩을 맞을 기회가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 왜라니?
“왜 네가 나랑 사귀어? 너 나 안 좋아하잖아.”
- 내가 왜 형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하는데?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인한의 화법에 유호는 머리가 아파졌다. 인한이 말하는 좋아함과 제가 말하는 좋아함이 같을 리 없었다. 그런데도 인한은 계속해서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현실로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 형이 그걸 어떻게 아는데?
“……인한아.”
-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으면 내일 다시 숙소로 돌아와. 스케줄 끝나고 왔는데 형 없으면 나도 다시 나갈 거야. 그리고 영원히 안 돌아오겠지. 위약금 물 생각하고 있어.
“너 왜 자꾸, 네 인생을 가지고 협박을 해?”
- 유일하게 그거만 먹히는 거 같아서.
인한의 말에 유호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인한에게 저질렀던 지난 행동들에 대한 후회가 급격하게 밀려왔다.
- 애정도 애원도 안 먹히는데 이런 건 늘 먹히잖아. 내가 아프거나 망가져야 형이 그나마 나를 봐 주니까.
“그런 거 아니야.”
- 알고 보면 좋아한다는 말도 다 거짓말 아니야? 어떻게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렇게 굴지?
날카롭게 솟아 있는 인한의 말들에 유호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인한의 서글픔을 유호는 눈치챌 수 있었다.
- 내일 봐.
그렇게 말하는 인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어서 유호는 대답을 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딱 잘라 거절해야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 응? 유호 형. 우리, 내일 꼭 만나.
“……응.”
인한의 애원하는 투에 결국 유호는 백기를 들었다. 해내겠다고 마음먹은 건 뭐든 해내고야 마는 인한이 제 인생을 망치는 일까지 잘 해낼까 봐 유호는 두려워졌다.
“알겠어. 인한아. 우리, 내일 꼭 만나.”
그리고 무엇보다 유호는 인한이 보고 싶어졌다.
* * *
드디어 약속했던 월요일이었다.
“사랑하는 우리 유호 형. 진짜 너무 많이 보고 싶었어요.”
유호가 현관문을 열고 숙소로 들어서자 여민이 신발장 바로 앞까지 나와 유호를 반겼다. 마치 몇 년은 떨어져 살았던 것처럼 유호를 끌어안으며 한참을 들러붙어 있었다.
“이제 나 두고 어디 가면 안 돼요. 나는 형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어.”
“하루도 살 수 없기는. 잘만 먹고 자고 싸고 했으면서.”
계속되는 여민의 투정에 라울리가 딴지를 걸었다. 여민은 일순간에 표정을 바꿔 라울리에게 불만을 드러냈다.
“너는 어쩜 그런 말을 대놓고 하니? 애가 섬세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
물론 라울리는 가볍게 여민의 말을 무시했다.
“역시 우리 효 형. 약속을 어기는 법이 없지.”
라울리는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유호에게 하이 파이브를 건넸고 유호는 바로 손바닥을 마주쳐 줬다.
“라울아. 잘 지냈지?”
“응. 형이 며칠 없다고 못 지내는 건 말이 안 되지.”
“유호야. 잘 지냈어? 일주일 새 얼굴이 많이 상한 거 같은데?”
주방에서 한창 요리 중이던 주언까지 얼굴을 내밀어 유호를 반겼다. 유호는 민망해하며 주언에게 말했다.
“살은 더 쪘어요.”
평소보다 3kg 정도 찐 상태였다. 스트레스로 인한 극단적 굶기와 폭식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네. 살이 좀 올랐네. 어쩜 이십 프로 정도 더 귀여워졌어.”
그렇게 말하며 여민은 유독 말랑거리는 유호의 볼로 손을 가져가 제멋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유호 형 그만 괴롭히고 가서 태윤이 형이나 불러와.”
“이라울 네가 가면 되잖아. 왜 나한테 그래?”
“숟가락으로 한번 맞아 볼래?”
“아니.”
여민은 냉큼 유호에게서 떨어져 테일러의 방으로 향했다. 라울리는 주언을 도와 숟가락과 젓가락을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유호도 거실 바닥에 가방을 내려놓고 라울리를 도왔다.
“아냐. 여섯 개면 돼.”
“어?”
유호가 앞접시 여덟 개를 식탁의 고정 자리에 두려는데 라울리가 그 행동을 만류했다. 매니저 둘까지 포함해 숙소 생활을 하는 사람은 총 여덟 명이었다. 그런데 주언과 라울리는 두 명을 제외한 여섯 명의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왜? 매니저 형들 안 먹는대?”
“아니. 수형이 형이랑 인한이는 드라마 스케줄 갔어. 새벽에야 온다던데?”
라울리의 말에 유호의 얼굴에 실망감이 드리워졌다. 나한테는 그런 말 없었는데. 사귀자고 해 놓고 연락 한번 없는 인한이 야속했다.
“인한이가 말 안 해 줬어?”
“응.”
“걔 아직 형한테 삐쳤나 보다. 그러니까 상의도 없이 탈퇴하겠다고 그러면 어떻게 해?”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는 뭐 상관없으니까 인한이나 잘 달래 줘 봐. 걔가 우리 팀 얼마나 아끼는지, 형도 잘 알잖아.”
“응.”
한결같이 직설적인 라울리의 말에 유호는 죄책감을 느끼며 다른 멤버들을 배려하지 못한 것을 반성했다.
한낱 제 짝사랑에 피해자가 너무 많이 발생했다. 물론 짝사랑만 걸려 있는 문제는 아니었지만.
“선유호. 왔냐?”
저녁 식사 자리에 참여하는 일이 드문 테일러가 여민에게 이끌려 방에서 나왔다. 양어깨를 잡고 있는 여민의 손을 귀찮다는 듯이 털어 내는 건 당연한 행동이었다. 테일러는 애교뿐 아니라 스킨십 역시 질색하는 고양이형 인간이었다.
“네. 태윤이 형.”
“미션 제대로 완수하고 제때 돌아왔으니까 잔소리는 생략해 줄게.”
“네, 감사해요. 형.”
난관이 예상됐던 테일러 형의 잔소리 타임을 건너뛰었으니 유호의 숙소 컴백 수순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인 인한과의 독대만을 남겨 두게 된 셈이다.
유호는 벌써 걱정이 앞섰지만 우선 멤버들과의 저녁 식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곧 주차를 마치고 올라온 주승까지 식사 자리에 합류했고 여섯 명은 화기애애한 식사를 이어 갔다.
식사를 마친 후 주당 주언과 라울리에 의해 거실에서 술 파티가 이어졌고 술이 약한 테일러가 곯아떨어져 거실 바닥에 대자로 뻗는 것으로 술자리가 마무리됐다.
그리고 수형과 인한은 날이 넘어간 후에도 숙소로 돌아오지 않았다.
* * *
꼭 보기로 약속했으면서. 인한은 벌써 3일째 유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으로 바쁘니까, 라는 이유로 합리화하기에는 연락 또한 4일 전을 기점으로 뚝 끊겼다.
정작 피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데. 유호는 속상했지만, 자신도 연락을 안 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라 불만을 드러내기도 뭐했다.
유호가 인기척에 눈을 뜬 건 새벽 네 시쯤이었다.
놀라서 소리를 지르지 않은 건 전에도 몇 번 같은 일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미리 언급 정도는 해 줬는데.
켜 둔 기억이 없는 수면 등은 전원이 들어와 있었다. 덕분에 유호는 잘생긴 인한의 얼굴을 한눈에 알아봤다.
얼굴 많이 상했네.
일주일 새 수척해진 인한의 얼굴을 보면서 유호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수형에게 듣기로는 이틀 치 촬영을 빼먹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고 했다. 그래도 이 정도로 마무리된 게 정말 다행이었다.
인한의 한쪽 팔은 유호의 어깨에 둘러져 있었다. 뭐든 껴안고 자는 게 인한의 잠버릇이니 크게 의미 부여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제 침대에 찾아와 함께 잠을 청할 줄은 예상도 못 했다.
사귀자는 건지 더러우니 거리를 두자는 건지, 둘 중 하나만 해 주면 좋으련만. 인한은 유호를 냉탕 온탕에 번갈아 담가 놓는 중이었다.
그래도 유호는 인한에게 더 다가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이 지나가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거 같아서.
다음 날 유호가 눈을 떴을 때 인한은 이미 예능 스케줄로 숙소를 나선 후였다. 여민과의 동반 스케줄이라 여민 역시 방을 비운 상태였다.
핸드폰에는 아무런 연락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공식적으로는 유지고 비공식적으로는…….”
“해체인 거네요?”
회사 엔터테인먼트 사업부 담당 이사의 말에 여민이 토를 달았다. 여민의 말에 뜨끔한 이사는 서둘러 말을 정정했다.
“해체라기보다는 개인 활동을 밀어주겠다는 입장이지. 그룹 활동은 좀 미뤄 두고.”
“해체할 때까지요?”
“상황 봐서 내자는 얘기야.”
“그게 안 내주겠다는 말이잖아요.”
이사와 여민의 팽팽한 기 싸움이 계속됐다. 이사는 머리가 아팠다. 여민은 평소에는 순한 양처럼 굴어도 불합리한 일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애였다.
평소에 고분고분한 녀석들이라 해체가 수월할 줄 알았는데 완벽한 오산이었다.
“너희도 이제 장기적으로 봐야지. 다른 멤버들도 빨리 자리 잡아야 하지 않겠어?”
이사는 기어이 화살을 멤버들에게 돌렸다. 다 너희를 위해서 이러는 거야.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덧붙여 가며. 과연 그 대표에 그 이사다웠다.
“이제 뭘 하든 자유인 건 맞는 거죠?”
도저히 끝나지 않을 거 같은 논쟁에 주언이 입을 열었다. 이사는 주언의 말을 반기며 냉큼 답을 들려주었다.
“사생활만 좀 조심하고. 주언이는 학교 졸업해야지?”
“아. 그건…… 상황 봐서요.”
“그래. 연기 오디션도 꾸준히 볼 수 있게 해 줄게. 따내는 건 각자의 몫이겠지만.”
결국 아무것도 안 해 주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