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2
유호는 침대에 누워 계속해서 잠을 청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때는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이어 나갔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지에 대한 생각. 한번 시작한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다음 날 오후가 될 때까지도 유호를 괴롭혔다.
중간중간 엄마가 상태를 확인하러 방에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유호는 자는 척을 하며 대화를 피했다.
유호는 지금 아무하고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수형 - [인한이 숙소로 데리고 왔어 내일부터 스케줄 나가겠대]
인한의 가출은 다행히 이틀 만에 막을 내렸다. 어제의 기세라면 장기전도 각오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책임감 강한 정인한다웠다.
고작 마음먹고 한다는 반항이 친한 형 집에 가서 만취하는 거라니.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겨졌으나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수형 - [유호도 돌아올 거지?]
수형의 메시지를 받고 유호는 걱정부터 앞섰다.
돌아갈 수 있을까. 돌아가서 인한과 마주할 수 있을까.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아 봐도 자신이 없었다.
자신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인한의 얼굴이 계속 머릿속을 떠다녔다.
유호 - [다행이에요]
결국, 돌아간다는 대답은 전하지 못했다.
수형에게 답장을 보낸 유호는 핸드폰을 머리맡에 내려놓았다. 다시 잠을 청할 기세로 눈을 감았지만, 곧바로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다시 눈을 떴다.
수형인가 싶어 액정을 확인하니 의외의 인물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전화를 건 이는 다름 아닌 웹 드라마를 함께 촬영했던 배우 선찬이었다. 유호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유호야. 잠깐 전화 돼?
“어. 선찬아. 괜찮아. 얘기해.”
- 너 혹시 다음 주 수요일에 시간 돼?
“다음 주 수요일? 그날 별거 없긴 한데. 왜?”
- 혹시 내 영화 시사회 와 줄 수 있어?
“시사회? 너 이번에 개봉하는 작품 말하는 거야?”
- 어. 그거 VIP 시사회 수요일에 하거든. 너도 와 주면 좋을 거 같아서.
“내가?”
유호는 진심으로 당황해 되물었다. VIP 시사회에 지인으로 참석해 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가서 겪게 되는 과정들이 만만치 않아 선뜻 수락하기가 어려웠다.
유호가 여태 영화 VIP 시사회에 참여해 본 건 단 한 번뿐이었다. 여민이 조연으로 출연한 영화 시사회였고 다행히 그때는 멤버들이 함께라 문제될 게 없었다.
인한 덕에 레드 카펫을 걸어 포토 존에 서는 게 두렵지 않았고 VIP 대기실에서도 멤버들과 뭉쳐 있으니 의지가 됐다.
그때 인한은 안면이 있는 감독과 배우들하고 인사하느라 혼자 바빴고 유호를 포함한 나머지 멤버들은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아 힐끔힐끔 배우들 구경하기 바빴다. 그런데 그곳을 혼자 가라니. 유호는 벌써 정신이 아찔했다.
- 응.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유호 네가 제일 유명해서.
“내가 그렇게 인지도가 있는 편이 아닌데.”
- 나보다 더 없으려고. 곤란하면 거절해도 되는데, 아무래도 내가 인맥이 없기도 하고 네가 꼭 와 줬으면 좋겠어서 그래. 어려울까?
선찬의 간절한 부탁에 유호는 더 곤혹스러워졌다.
홀로 뻘쭘하게 포토라인에 들어설 그 순간이 얼마나 끔찍할지 벌써 두려웠으며, VIP 대기실에 아는 사람 없이 혼자 내버려질 그 상황도 눈에 선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에 멤버들을 대동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웃는 얼굴로 사람들 북적거리는 곳에 갈 기분이 아니었다.
“알겠어. 수요일에 시간 내 볼게.”
그렇다고 친구의 안타까운 상황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유호는 결국 선찬의 제안을 수락했다.
- 진짜? 와. 역시 유호. 진짜 고마워.
“근데 나 멤버들하고는 못 가고 혼자 가야 할 거 같아.”
- 당연하지. 나는 너만 오면 돼. 내가 끝나고 맛있는 거 사 줄게.
“응. 알겠어. 그럼 시간이랑 장소 톡으로 알려 줘. 매니저 형한테도 미리 말해야 해서.”
- 어. 진짜 고마워. 내가 나중에 제대로 보답할게.
“아냐. 이게 뭐라고. 그럼 그날 봐.”
- 응. 유호야. 우리 그날 만나. 밥 잘 챙겨 먹고.
“응. 안녕.”
선찬과의 통화는 금세 마무리됐고 유호는 심란한 마음에 한숨을 몰아쉬었다.
내가 지금 태연하게 영화 시사회나 다닐 때가 아닌데.
그래도 기분 전환 겸 한 번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 * *
선찬의 데뷔작인 영화 ‘일꾼’의 VIP 시사회 날이었다.
개인 스케줄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일정이었지만 수형의 입김 덕에 유호는 주승의 케어를 받으며 아침부터 메이크업 숍에 들렀다가 시사회가 열리는 영화관 건물에 도착했다.
“안에까지 못 데려다줘서 미안해.”
“아니에요. 형. 괜히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시고.”
“괜찮다니까. 약속 끝나고 전화 한 번 주고.”
“네 형. 데려다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인한은 주승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건네고 차량에서 내렸다.
주승은 여민의 스케줄 탓에 곧바로 드라마 촬영장으로 향했고 유호는 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시사회장으로 향했다.
나름 화려한 출연진에 유명 감독의 작품인지라 시사회장은 온갖 인파로 북적였다. 유호는 그 수많은 사람의 사이를 가로질러 겨우 VIP 대기실에 당도할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대기실 내에 아는 얼굴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유호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가장 구석 테이블의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유호처럼 홀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몇 명 보였고 덕분에 걱정했던 만큼 민망하지는 않았다.
유호 - [나 도착했어]
선찬 - [고생했어 오는데 안 힘들었어?]
유호 - [응 매니저 형이 데려다줘서 편하게 왔어]
선찬 - [다행이다 영화 잘 보고 이따 보자]
유호 - [응 오늘 시사회 파이팅]
선찬 - [응 고마워]
시사회 시작 시각까지는 20여 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포토 존 입장 차례를 기다리는 중이라 이어폰을 끼고 있을 수는 없었다. 유호는 대충 핸드폰이나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때우고자 했다.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근처에서 들려왔지만 유호는 착각이라 여기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방송으로 접한 목소리가 귀에 익은 걸 수도 있으니 민망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또 보네요. 유호 형.”
결국 이름이 불리고 나서야 유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대각선 자리에 앉은 미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상대는 다름 아닌 서도명이었다. 유호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깍듯한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혼자?”
“네. 저 혼자…….”
“인한이도 데리고 올 걸 그랬네.”
“아뇨. 굳이 그럴 필요는…….”
유호는 아차 싶어서 입을 다물었다. 인한과의 사이가 완전히 끝난 걸 굳이 도명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유호는 서둘러 변명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지금 인한이 화보 촬영 중이라서요.”
“그거 이미 끝났는데.”
“네? 언제요?”
“한 시간 전에.”
“밤에나 끝난다고 그랬는데?”
유호는 망했다고 생각했다. 해명하기는커녕 인한의 스케줄을 몰래 꿰고 있는 사실마저 도명에게 들키고 말았다.
“어. 그러니까…….”
“아직 화해 안 했나 보네요.”
“저희가 싸운 거는 아닌데…….”
유호는 말끝을 흐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다행히 도명은 더 캐묻지 않았다. 유호는 도명의 입이 부디 무겁기를 바라며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선배님은 오늘 누구 보러 오신 거예요?”
“몇 명 돼요.”
“하긴. 그럴 만하시죠.”
“유호 형은요?”
도명은 소파 팔걸이에 턱을 괸 채 나른한 목소리로 유호를 향해 물었다. 올 블랙으로 차려입은 채 다리까지 꼬고 비스듬하게 앉아 있는 도명의 모습은 마치, 광고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덕분에 유호가 혼자 있을 때는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점 유호의 쪽을 향하고 있었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유호의 얼굴을 훑는 이들도 생겨났다.
“아. 저는 친구 보러 왔어요.”
“친구 누구?”
“주선찬이라고 신인 배우인데, 오늘 영화에 막내 형사 역으로 나온대요.”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이번 작품이 데뷔작이래요.”
“많이 친해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
“조금?”
“그게, 웹 드라마 찍으면서 만난 친구인데 촬영장 밖에서 보는 건 처음이라.”
계속해서 이어지는 도명의 질문에 유호는 얼떨결에 대답을 술술 뱉어 내고 있었다. 어째 취조를 당하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럼 조금 친한 거 맞네요.”
“그렇죠.”
모처럼 나누게 된 두 사람의 대화는 이상한 결론을 내고 마무리됐다.
동시에 유호는 의문이 들었다.
어째서 도명이 대기실에 차고 넘치는 지인들을 내버려 두고 가장 안 친할 것 같은 자신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무엇보다 연이어 질문을 던지면서도 한결같이 유지되는 도명의 무표정한 얼굴이 제일 신경 쓰였다.
당연하게도 유호가 떠올릴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유호는 조심스럽게 운을 띄웠다.
“선배님. 저 그런데요.”
“왜요?”
생각해 보면 도명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이 누구에게 전해질지 뻔했다. 유호는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만들어 보이며 도명에게 사정했다.
“인한이한테는 오늘 저 만난 거 얘기 안 하시면 안 돼요?”
“기사 날 텐데.”
“아.”
“영상도 찍힐 테고.”
“그러네요.”
“인한이한테 얘기할 생각도 없었는데.”
“……죄송해요.”
시무룩해진 얼굴로 사과를 건네는 유호를 보며 도명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역시 성격까지 무뚝뚝한 냉미남이 가끔 흘려 주는 미소는 반칙이었다. 이래서 도명이 악역일 때도 다들 도명 편을 드는 거구나. 유호는 납득하며 도명을 오해한 걸 반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