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뭐?”
급작스럽게 던져진 유호의 고백에 인한의 걸음이 뚝 하고 멈췄다. 유호를 돌아보는 인한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드러나 있었다.
“내가 너, 좋아해.”
연이어 이어지는 유호의 고백에 인한은 잠시 동요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어림없다는 듯 유호를 나무랐다.
“고작 그딴 말로 내가 넘어갈 줄 알고?”
“멤버로 말고, 동생으로 말고. 남자로 너 좋아해.”
의중을 알 수 없는 유호의 말에 인한의 미간이 급격하게 좁아졌다. 유호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짐작도 못 하는 눈치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좋아해서 그랬어. 좋아해서 너 자꾸 밀어냈던 거야. 예전에 너 피해 다니고 심술부리고 그랬던 것도 네가 여자 친구 생겨서 그런 거 맞아. 그땐 내가 어리고 사랑도 잘 몰라서, 너도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했어.”
유호의 충격적인 발언에 놀란 인한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인한에게 잡혔던 유호의 손목이 자유로워졌다.
“내가 바보라서, 네가 나한테만 잘해 주고 나만 특별하게 생각한다고 착각했어. 아니었는데. 네가 좋아하는 건 내가 아니었는데.”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말도 안 되지? 미안해.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혼자 묻으려고 했는데. 네가 오해하고 상처받으면 안 되잖아. 나쁜 건 난데 네가 나쁘다고 생각하면 안 되잖아.”
인한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가 느끼고 있을 배신감을 감히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어렵게 시작한 이야기인 만큼 제대로 끝을 맺어야 한다고 유호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네가 미웠고 그다음에는 미안했어. 너한테 거짓말한 것도 미안하고 이런 감정 갖고도 아무렇지 않게 네 애정을 받고 친한 형인 척 연기하는 게 너무 미안해서. 그리고 그다음에는 너무 힘들었어. 금방 포기가 될 줄 알았는데 잘 안 돼서. 너는 사랑도 하고 이별도 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계속 제자리라서, 그래서 너무 힘들었어.”
이야기를 이어 가면서 계속 차오르는 눈물을 유호는 애써 참아 내야만 했다.
유호가 울면 제일 먼저 다가와서 달래 주던 인한이었는데. 유호는 점점 굳어져 가는 인한의 얼굴을 보며 현실을 직시했다.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게 맞는데. 내가 바라는 게 이런 거였는데.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였다.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인한은 배신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유호에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유호는 놀라 뒷걸음질을 쳤다.
“……어?”
“왜 그동안 한 번도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 왜 혼자 묻으려고 했던 건데?”
“그걸, 어떻게 말해? 네가 여자를 좋아하는 걸 뻔히 아는데.”
“그래서 형이 내린 결론이 이거야? 나를 끊어 내는 거?”
인한은 잔뜩 격양된 목소리로 유호에게 말했다.
“그럼 여태 나 혼자 뭘 한 거야? 형이 힘들고 괴롭고 혼자 고민하는 동안 나는 뭐 한 건데? 형은 계속 나를 끊어 낼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속없이 굴었던 거잖아. 등신같이.”
“그래서 나는 거리를 두려고…….”
“그럼 난 또 이유도 모른 채 형 옆에서 밀려나 주면 되는 거고?”
인한의 말에 유호는 할 말을 잃었다.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뱉은 말들이 더 큰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 나는, 형 말을 듣고 기뻐해야 돼? 내가 싫어서가 아니라 좋아서 나를 밀어냈다는 사실에 안도해야 해?”
수습은 불가능해 보였다.
“형. 나는 지난 몇 년간 형 옆에서 밀려나지 않으려고 매 순간 애썼어. 형이 날 또 버릴까 봐 미움받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매달렸어. 알아?”
“알아. 알아서 네 옆에서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여태 있었던 거야. 근데 이제는 나도 힘들어서…….”
“그렇게 힘들면 말했어야지. 어차피 이렇게 끝낼 거면 말했어야지. 적어도 나한테 선택할 기회는 줬어야 하잖아. 형은 고백하는 거보다 나를 끊어 내는 게 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던 거야?”
이루어지지 않을 게 뻔한 고백을 무턱대고 뱉을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고백이 모든 걸 다 망칠 수도 있는데.
하지만 깨닫고 보니 지금 관계를 망치고 있는 건 유호였다. 인한은 영문도 모른 채 유호에게 계속 내쳐지고만 있었다.
“그럼, 나는 이제 뭘 하면 되는데? 형 고백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되는 건가? 근데 형, 그런 거 바라고 나한테 고백한 거 아니잖아. 나랑 잘해 보자고 이러는 거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는 인한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라 있었다.
평소에 잘 울지 않는 인한인데 유호는 벌써 몇 번이나 인한을 울리고 말았다.
“말해 봐, 형. 내가 형한테 뭘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는데?”
인한은 곧 무너져 내릴 거 같은 표정으로 유호에게 물었다.
처절하기까지 한 인한의 질문에 유호는 답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유호가 지금 당장 바라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숙소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리고?”
“내일부터 스케줄 잘 나갔으면 좋겠어.”
“하.”
“그냥 계속 네가 하고 싶은 일 하면서 행복했으면 좋겠어.”
유호의 대답을 들은 인한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유호를 향해 물었다.
“나한테 너무 과한 걸 바라는 거 아니야?”
“…….”
“내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형은 진짜 모르나 봐? 아니. 이제는 알아도 상관없다는 건가?”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유호는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턱대고 던진 고백의 결과가 이렇게 잔인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내가 다시 돌아가겠다고 하면, 형도 같이 갈 거야?”
인한의 물음에 유호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유호의 망설임을 눈치챈 인한은 눈을 질끈 감으며 기어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왜 대답을 못 해? ……왜 대답을 안 해? 형은 왜 매번 나를 내팽개치기만 해.”
애원하듯 내뱉어진 인한의 말에도 유호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소한 반응에도 인한은 계속해서 상처 입고 있었다.
“그래. 형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우리, 동료도 하지 말자. 그냥 아무것도 되지 말자. 나도 이제 형한테 버림받는 거 그만할래.”
절대 유호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말했던 인한이 유호에게 그랬다. 이제 끝이라고.
유호가 그토록 바라던 끝을 인한이 맺고 있었다.
“혹시 나한테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형 혼자만 힘들기는 억울해서?”
“그랬나 봐. 내가 그랬나 봐. 미안해. 인한아. 나 혼자 힘들면 되는데 너까지 힘들게 해서. 그러니까 인한아. 이런 나 때문에 네 인생 망가뜨리지 마. 내가 나쁜 건데 너까지 아프지는 마.”
잔뜩 일그러진 인한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유호는 이 순간이 빨리 지나가길 바랐다. 어쩌면 지금 이 상황이 그들이 맞을 수 있는 최선의 결말 같았다.
유호의 대답을 들은 인한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시 문밖을 향했다.
“어디 가?”
유호는 놀라 인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인한은 그 손을 뿌리치지도 못하고 유호에게 말했다.
“놔. 무슨 상관이야?”
“숙소로 돌아가자? 응?”
“형이 뭔데? 나한테 이럴 자격이나 있어?”
“인한아. 돌아가자. 응? 내가 원하는 대로 한다며. 너 계속 이렇게 스케줄 펑크 내면 진짜 큰일 나. 여태 힘들게 이뤄 놓은 거 다 무너져. 제발. 인한아.”
인한은 유호의 말이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 와중에 걱정하는 게 고작 스케줄이라니. 엿 같아서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사람을 이렇게 기만을 해 놓고.”
“그니까. 나 같은 인간 때문에 네 인생을 망칠 필요는 없으니까.”
“더럽네.”
“……알아.”
“엿 같고.”
“미안해.”
“뻔뻔하기까지 해.”
유호는 계속해서 사과의 말을 전했다. 유호에게 일방적으로 밀쳐졌던 인한의 기분이 어땠을지 낱낱이 실감하는 중이었다.
“그래. 다 형 말대로 해 줄게.”
“그래. 고마워. ……고마워, 인한아.”
“어때? 형이 원하는 대로 되니까 기뻐?”
차라리 독한 말을 쏟아 내서 풀릴 기분이라면 얼마든지 받아 줄 수 있을 텐데.
유호의 생각과는 달리 인한은 오히려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응. 기뻐.”
“형한테 나는 대체 뭐였던 거야?”
“그냥. 연애 상대?”
유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사실 정답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첫사랑.
“정말 더럽네.”
지독히도 더러운 첫사랑이었다.
* * *
인한은 유호를 내버려 둔 채 홀로 방문을 나섰다. 유호는 그 이상 인한을 막을 방법을 떠올리지 못했다.
“인한아!”
아예 현관 밖으로 나가려는 인한을 수형이 서둘러 따라가려고 했지만 도명이 말리는 게 먼저였다.
“제가 따라갈게요.”
그렇게 말하며 도명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밖을 향했다.
수형은 별수 없다고 생각했다. 억지로 끌고 간다고 순순히 따라 줄 인한이 아니란 걸 오랜 경험으로 깨닫고 있었다.
아. 내일 스케줄도 망했다. 혹시 몰라 3일 치 스케줄을 모두 빼 둔 건 신의 한 수였다. 장염이라니 다들 납득하는 분위기였지만 그 여파는 어마어마했다. 자칫 거짓이라는 게 들통나는 날에는 정말 모두가 끝장나는 거였다.
이쯤에서 등장해야 할 유호가 감감무소식이라 수형이 먼저 유호를 찾아 나섰다.
복도 맨 끝 방 한가운데 홀로 남겨진 유호는 몸을 말고 앉아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훔쳐 내는 중이었다.
수형은 이제 두 사람의 싸움이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하나가 울고 하나가 다쳐야 끝이 나는 싸움이라니. 담당 매니저의 입장에서는 공포가 따로 없었다.
“형. 저 집에 갈래요.”
유호는 수형을 올려다보며 애처롭게 말했다. 겉보기에는 어리숙해 보여도 나름 강단 있고 앓는 소리 한 번을 안 하던 아이였는데.
수형은 유호가 안쓰러워 어떤 말이든 들어주고 싶어졌다.
“그래. 데려다줄게. 집에 가자.”
그렇게 인한과 유호를 모두 데리고 숙소로 돌아가려던 수형의 계획은 처참히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