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인한은 다시 한번 유호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화가 났어?”
“화 안 났어.”
“혹시 내 개인 팬들 때문에 그래?”
“그거야 뭐,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아니면 내가 연애하는 거 때문에 그러는 거야?”
“내가 왜 그런 거로 화가 나야 하는데?”
갑자기 격양된 유호의 목소리에 두 사람 사이에 냉기가 흘렀다. 유호는 얼굴을 찌푸리고 평정심을 찾으려 애썼다.
“아니, 나는…… 형이 내가 여자 친구 생겼다고 한 그때부터 나를 피하는 거 같아서. 말이 안 되는 거 아는데 이유가 도저히 생각이 안 나서 그래. 그러니까 형이…….”
“귀찮아서.”
돌아온 유호의 대답은 각오했던 어느 말보다 인한을 놀라게 했다. 예상한 수많은 답지 중에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던 문장이었다.
“뭐?”
“내가 형인데 네가 자꾸 동생 취급 하는 것도 싫고.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알아주는 사람 없이 욕이나 먹는데. 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사니까 배알이 꼴려서.”
드디어 의자를 돌려 인한을 마주 본 유호는 상상도 못 했던 폭탄 발언을 늘어놓고 있었다.
“……형.”
“나도 팬들 사랑받고 싶고 인지도도 쌓고 싶고 연애도 하고 싶어. 근데 나는 그럴 자격도 안 되잖아.”
“그게 무슨 소리야, 형.”
“그래서 너만 보면 속상해. 내가 더 작아 보여서.”
싸늘하게 식어 있는 유호의 두 눈을 바라보며 인한은 직감했다. 버림받는다. 이대로라면 유호에게 가차 없이 내쳐지고 말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인한은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형.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응? 내가 더 잘할게. 형 기분 안 상하게 내가 더 노력할게.”
“아냐. 노력하지 마. 나 그런 거 필요 없어.”
“형이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해?”
결국은 인한도 참지 못하고 원망의 말을 내뱉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는데. 어떤 심정으로 여기까지 왔는데. 형이, 형이 어떻게 그래?”
“그러니까.”
어렵게 뱉은 인한의 속내조차 유호는 제 알 바 아니라는 듯 딱 잘라 마무리를 지었다.
“우리는 서로 입장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니까. 그러니까 인한아. 그냥 우리, 비즈니스 파트너 하자.”
차갑기 그지없는 유호의 말에 인한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마치 꿈과도 같은 상황에 현실감이 떨어졌다.
“가족 말고 친구 말고 그냥 동료. 그냥 동료 하자, 인한아. 그렇게 생각하는 게 팀 계속 유지하는 데도 좋다더라.”
이어지는 유호의 말에 인한은 도망치고 싶었다. 애초에 물어보지 말걸. 그냥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릴걸.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대로 못 들은 척 상황을 모면하고 싶었다. 하지만 유호는 그럴 틈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우리 이제 서로를 위해서 괜찮은 척하는 거 그만하자.”
“나는 척한 적 없어. 정말로 그랬던 거지. 형들 생각하면 힘 나서…….”
“그럼 너는 계속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나는 다 그만할 거니까.”
“뭐를?”
“너한테 맞춰 주는 거.”
유호의 그 말은 두 사람이 함께한 모든 날을 부정하는 말이었다. 인한이 이끄는 대로 유호는 휩쓸리기만 했다는 뜻이었다. 정말 그랬나, 돌이켜 보면 그랬던 것도 같았다. 애정을 준 것도, 아껴서 어쩔 줄 몰랐던 것도 항상 인한이 먼저였다. 유호는 그냥 제가 하는 것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인한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그게 꿈이든 사랑이든 현실이든, 다 필요 없다고 여겨졌다.
* * *
“너희 진짜 둘이 무슨 일 있냐? 싸웠어?”
단독 콘서트 연습 첫날, 연습실에서 한 몸처럼 딱 붙어 있어야 할 유호와 인한이 눈에 띄게 내외하자 참다못한 테일러가 두 사람을 추궁했다.
“아뇨. 아무 일도 없었어요.”
태연하게 뱉어지는 유호의 대답에 인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테일러는 그런 인한을 못마땅해하며 다시 한번 질문을 던졌다.
“진짜야? 정인한, 너는 왜 아무 말 안 해?”
“진짜 아무 일도 없었어요.”
인한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환장할 노릇이었지만. 인한은 속내를 숨긴 채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뭐지, 얘들?”
“뭐긴요. 사춘기인가 보죠.”
슬슬 열이 뻗치는 듯 보이는 테일러에게 엉겨 붙은 여민이 애써 상황을 무마시키려고 했다. 사실 두 사람 사이에서 제일 죽을 맛인 사람은 바로 여민이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할 말도 여민을 거쳐서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렇다고 대놓고 나무랄 수도 없는 게 카메라 앞에 서면 사이좋은 멤버 행세를 완벽하게 해내서였다.
같은 그룹이라고 해서 마냥 사이가 좋을 수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테일러 역시 라울리와 싸운 전적이 열 손가락은 넘었다. 심지어 카메라 앞에서 티 낸 적도 여러 번이었다.
“적당히 해.”
그런데도 테일러는 두 사람을 향해 경고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
유호는 이번에도 아무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그 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인한은 시선을 돌려 대답을 회피했다.
이것들이 진짜 사춘기인가. 테일러는 찝찝했지만, 우선은 두고 보기로 했다.
* * *
“유호 형. 이거 어떤 색이 나은 거 같아요?”
“노란색? 아니다. 특이하게 초록색은 어때?”
인한은 자신을 바라보며 배시시 웃는 유호의 얼굴을 바라보며 울컥하는 기분을 억눌러야 했다.
자체 콘텐츠 영상을 촬영 중이었고 하필 두 사람이 한 조가 돼서 앨범 꾸미기를 하는 중이었다.
“꽃잎을 초록색을 하면 줄기는 무슨 색으로 해요?”
“빨간색? 아냐. 나한테 묻지 말고 네가 해야지. 네 건데.”
그렇게 말하며 유호는 다시 자신 앞에 놓인 앨범으로 시선을 옮겼다. 인한은 유호의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고 앨범 꾸미는 데 집중했다. 유호의 말대로 꽃잎은 초록색을, 줄기는 빨간색을 칠했다.
“어때요? 잘했죠?”
정또잘(정인한 또 잘한다)이라는 별명답게 정인한은 앨범 꾸미기에도 엄청난 예술혼을 불살랐다.
열댓 개의 꽃송이가 수놓아진 앨범에는 딱 하나의 그림만 유독 어울리지 않았다.
유호가 말하는 대로 색을 칠한 초록색의 꽃이었다.
유호는 그 꽃을 가리키며 인한에게 말했다.
“이건 다른 색으로 하는 게 나을 뻔했다.”
“아닌데. 나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그래?”
“응.”
“내 건 어떤 거 같아?”
유호는 더 반응하는 대신 자신이 꾸민 앨범을 들어 인한에게 보여 줬다.
손으로 하는 건 기타 연주 말고는 다 젬병인 유호의 그림 실력은 미취학 아동보다 못한 수준이었다. 30분 동안 애써 꾸민 앨범 역시 조카가 낙서해 놓은 게 아닐까 의심이 되는 결과물이었다.
“이 돼지 같은 건 뭐예요?”
“고양이야.”
“그렇구나.”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감돌았다. 유호가 하는 일에는 무조건 칭찬부터 뱉고 보는 인한이지만 차마 그 그림을 보고는 찬사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인한은 애써 머리를 쥐어짜 유호에게 말을 건넸다.
“어. 음. 그림에서 순수함이 느껴지네요. 색이나 선 쓰는 것도 과감하고. 역시 유호 형다워요.”
“칭찬이야?”
“칭찬이죠.”
“흠.”
“우리 여기 뒤에다 멘트도 쓸까요?”
“그래.”
인한은 서둘러 말을 돌리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유호도 별 반박 없이 인한의 말을 수긍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세 팀 중 제일 먼저 촬영을 마친 인한과 유호는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촬영 중 어색한 정적이 몇 번 감돌기는 했지만 두 사람은 누가 봐도 사이좋은 형, 동생으로 보였다. 물론 인한이 형 같고 유호가 동생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촬영 스태프 중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사를 마친 두 사람은 다른 팀들이 촬영 중인 아래층 사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가는 내내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형. 저 지아 누나랑 헤어졌어요.”
단둘이 계단을 내려갈 때였다. 급작스레 인한의 입이 열렸고 그 말을 들은 유호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사귄다는 얘기를 들은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시점이었다.
“그걸 왜 나한테 말해?”
유호는 여전히 냉랭한 태도를 보이며 인한에게 말했다.
“그러게요.”
인한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아래층에 당도할 때까지 두 사람 중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형. 저 차에 가 있어도 돼요?”
사무실 복도에 나와 있는 수형을 발견하자마자 인한이 말을 걸었다.
요즘 자리를 피하는 일이 잦은 건 인한 쪽이었다.
수형은 차 키를 건네며 인한에게 물었다.
“왜? 피곤해?”
“네. 좀 자려고.”
“그래. 내려가 있어. 유호도 가서 좀 쉴래?”
“아뇨. 저는 멤버들 기다릴래요.”
“그래. 그럼 여기 같이 있자.”
유호는 수형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 유호를 빤히 쳐다보던 인한은 옅은 한숨과 함께 몸을 돌렸다.
인한은 차에 도착해서도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 * *
“그러게, 먼저 씻으라니까.”
숙소 방 침대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인한을 보며 테일러가 말했다. 일주일 만에 숙소로 돌아온 인한의 얼굴은 전보다 더 야위어 있었다. 테일러는 걱정스러워 인한에게 물었다.
“요새 잠은 좀 자냐?”
“잠이 오면요.”
대답이 애매했다. 어느 곳에서든 머리만 대면 잠드는 인한답지 않았다. 피곤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의 인한은 쓰러지듯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냥 안 씻고 잘까 봐요.”
“그러든가.”
말만 그렇게 할 뿐 인한은 눈을 깜박이며 허공을 보고 있었다. 테일러는 그런 인한이 안타까워 애정 어린 잔소리를 했다.
“회사에다 스케줄 좀 줄여 달라고 그래. 어떻게 하루를 안 쉬어?”
“조금만 더 있다가요.”
“왜? 형들 돈 많이 벌라고?”
3년 차 때까지는 개인 스케줄도 멤버 수대로 나눠 정산을 받았지만, 인한의 형의 요청으로 4년 차부터는 개인 정산으로 바뀔 예정이었다.
개인 스케줄이며 수익이 압도적으로 많은 인한이나 여민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요구였기에 그 결정에 불만을 가진 멤버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인한은 지나치게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을 혹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