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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아. 맛있어?”
남수현이 양주잔을 좌우로 흔들며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정희연은 목 짧은 와인 잔에 입술을 대고 있다가 난데없이 등장한 알파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내려다보는 여자는 술에 잔뜩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네. 맛있어요. 커피우유 맛 나요.”
“연우범은 이런 거 안 해 주잖아, 그치?”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 향이 나는 맥주도, 쓴맛이 나는 양주도 알고 있었지만, 지금처럼 커피우유 맛이 나는 술이 있는 줄은 몰랐다. 옅은 초콜릿색 액체를 홀짝거리자 달콤한 맛과 함께 코코아 가루 특유의 냄새가 혀끝을 맴돌았다.
“자주 놀러 오라니까? 올 때마다 맛있는 거 사 줄게. 응? 연 대표는 예쁜이한테 술 잘 안 먹이잖아. 원래 스무 살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셔 줘야 하는 거거든.”
꼭 어린아이를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납치범 말투였다. 험담 아닌 험담에 정희연은 와인 잔을 쥔 손가락을 가만히 꼼지락거렸다.
“대표님은 제가 마시고 싶다고 안 해서 안 주시는 거예요. 그리고 술 많이 마시면 건강에 나쁜데…. 사장님도 조금만 드세요.”
시끄러운 음악과 말소리가 잔뜩 뒤엉켜 소음만이 존재하는 공간에서 오직 정희연의 목소리만이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제가 다른 알파 집에 가는 거 싫어하시는 것 같던데…? 원래 알파는 자기 오메가가 다른 알파랑 친하게 지내는 것도 싫어한대요. 오늘도 제가 졸라서 오신 거예요.”
유순한 눈매가 남수현의 등 뒤를 훑었다. 연 대표는 김철우와 할 이야기가 있다며 잠깐 자리를 비운 참이었다.
“아, 어쩐지. 걔가 웬일로 내 집에 왔나 했네.”
남수현은 턱 대신 볼을 괴며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정희연은 칵테일을 홀짝이며 집주인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남수현의 집은 정원이 딸린 단독 주택이었다. 정원이 워낙 넓어 상대적으로 집이 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규모가 상당했다. 정희연이 홈 바 근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것도 넓은 공간 덕분이었다. 놀러 온 인간들이 워낙 많아 북적이기는 해도, 장소 자체가 넓어 홈 바 근처는 그나마 조용한 편이었다.
사람이 너무 많은 데다가 음악 소리와 대화 소리가 잔뜩 뒤섞여 시끄럽고 정신없었지만, 이런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럼 예쁜이는 내 집에 오는 거 오늘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겠네.”
바에 기대어 선 남수현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그녀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자 홀랑 사라져 버렸다.
“희연아. 어지럽진 않아?”
그녀의 빈자리를 채우듯 이해진이 무척이나 피곤한 기색으로 다가와 옆에 앉았다. 정희연은 힐긋 이해진이 들고 있는 잔을 살폈다. 커다란 머그잔에 투명한 액체가 출렁이고 있었다. 소주인 것 같았다.
“사람들 많아서 정신없긴 한데 어지럽지는 않아요. 이런 자리 처음 와 봐서 나름 재미있는 것 같아요.”
“다른 페로몬 때문에 머리 아프진 않고? 아, 너 각인했다고 했지.”
이해진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머그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남수현에게 초대받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여기저기서 페로몬 냄새가 진동을 했다. 다들 술을 마시고 취한 탓에 조절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남수현이 그의 사업장 중 하나인 수려에 깽판 치겠다고 협박 아닌 협박을 한 탓에 반강제적으로 참석한 자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오메가 페로몬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한데 뒤섞인 알파 페로몬 때문에 속이 거북해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연 대표가 너 데리고 여기까지 올 줄 몰랐는데, 의외네.”
이해진과 달리 정희연은 또랑또랑해 보이기만 했다.
“대표님은 별로 안 내켜 하셨는데 제가 궁금해서 와 보고 싶다고 했어요. 남수현 사장님께서 저한테 파티라고 하셨거든요. 나름 재미있긴 한데, 너무 정신없어서 다음부터는 안 올 것 같아요.”
그 남자를 설득한 정희연이 무서운 건지, 정희연의 한마디에 순순히 넘어와 준 남자가 무서운 건지 도통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남수현이 신나게 준비한 파티는 일명 ‘정영길 그 개새끼를 족친 기념’으로 열린 파티였다. 그 단어를 듣자마자 인상을 팍 찌푸린 이해진과 달리 남수현은 진심으로 신이 난 기색이었다.
“거기… 갔다 왔어?”
이해진은 바 테이블에 비스듬히 상체를 기울이며 물었다. 순한 얼굴로 사람들을 구경하던 정희연이 이해진을 따라 몸의 방향을 바꿨다. 고성방가로 집 전체가 왕왕 울리는데도 두 사람이 있는 홈 바 주변은 나름대로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네. 대표님이랑 같이 다녀 왔어요.”
각인까지 시킨 오메가를 거기 데려갔다고? 이해진은 얄팍하게 눈을 접었다. 그 남자가 이 쓸데없는 파티에 참석한 것보다 더 의외였다. 연 대표는 정희연 앞에서만큼은 내숭을 떨어 대는 남자였다. 밑바닥까지 보여야 하는 일이라 꼭꼭 숨길 줄 알았는데.
“안 갔으면 하는 눈치셨는데, 제가 따라가겠다고 했어요.”
의아함이 얼굴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는지, 정희연이 달콤한 술을 홀짝거리며 대답했다.
“형은요?”
겁먹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순한 얼굴은 단단하기만 했다.
“…오늘.”
이해진은 머그잔 안에 든 소주를 흔들며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진작 뜬장에 다녀온 다른 이들에 비하면 퍽 늦은 방문이었다.
“네가 제일 처음 봐서 다행이네.”
“네?”
“아니야. 혼잣말.”
정영길은 여태 잘 살아 있었다. 어쨌거나 살아 있다는 건 목숨이 붙어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이해진은 노인의 비참한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대로 등을 돌렸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 쩍쩍 갈라진 늙은 피부도, 피딱지가 앉은 입술도, 잔뜩 부어올라 눈동자를 볼 수 없는 눈두덩이도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이해진은 그저 확인했을 뿐이다. 자신과 다른 오메가들을 팔아 치운 개새끼만도 못한 인간의 비참한 말로를.
기분이 더러워져 소주를 물처럼 마셔 대는데 빤히 쳐다보던 정희연이 입술을 달싹였다.
“해진이 형. 술 많이 드시면 안 돼요. 그만 마시세요.”
남수현도 안 하는 잔소리를 고작 스무 살 된 오메가가 퍼부었다. 이해진은 황급히 입 안에 든 액체를 삼켰다. 하마터면 입에 든 걸 모조리 내뱉을 뻔했다.
“큽…. 콜록, 콜록.”
정희연은 심지어 사레들린 그의 등을 토닥여 주기까지 했다.
“…알았어. 그만 마실게.”
어린애를 상대로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 것도 우스울 것 같아, 이해진은 대충 소매로 입술을 닦아 냈다. 그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정희연이 희게 웃었다. 심수천이 정희연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일을 냈다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 저 형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어요.”
“물어보고 싶은 거?”
“저도 대표님 각인시키고 싶은데 잘 안 돼요.”
지나치게 솔직한 발언에 이해진은 두통이 밀려오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각인?”
“네.”
연 대표는 그렇다 쳐도, 고작 스무 살에 각인이라니. 이미 각인당한 상태라는 걸 고려하면 정희연 역시 그 알파를 각인시키는 편이 좋긴 하지만…. 어린 나이에 발목 잡힌 오메가를 보고 있자니 한숨부터 나왔다.
이해진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뜬장에서 길러진 다른 알파와 오메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페로몬 관리에 능통한 편이었다. 페로몬 조절에 서투른 오메가들을 제법 많이 가르친 것도 이해진 자신이 효율적인 페로몬 관리법을 알고 있어서였고.
하지만 각인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알파 혐오증 때문에 각인에 관심이 없는 건 둘째치더라도, 사실상 각인이 이루어지는 케이스 자체가 극히 드물었다.
“그 부분은 나도 잘 모르겠는데. 상대를 각인시키려면 자기 페로몬을 상대 페로몬에 얽어야 하니까…. 지금보다 페로몬 조절에 익숙해지면 할 수 있을 거야.”
이해진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교과서적인 대답이 전부였다. 페로몬을 제대로 다룰 줄 안다는 가정하에 알파가 목을 내어 준다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네에. 열심히 배울게요.”
“뭘 열심히 배워.”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정희연은 뒤를 돌아보았다.
“아, 각인하는 거요.”
“매일 깨물라니까.”
“그건 안 돼요. 지금도 멍드셨잖아요.”
이해진은 머그잔을 든 채 몸을 일으켰다. 연 대표는 훌륭한 공조자였으나, 굳이 가까이 있고 싶지는 않았다. 남수현에게 대충 얼굴도 비쳤으니 슬슬 돌아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여기저기 뒤섞인 페로몬 냄새를 맡고 있으려니 속이 울렁거렸다.
“희연아. 먼저 갈게. 나중에 봐.”
“네? 네. 안녕히 가세요. 술 더 드시면 안 돼요.”
“알았어. 그만 마실게.”
이해진은 머그잔을 홈 바 위에 올려 둔 뒤 연 대표에게 까딱, 인사를 건네고는 등을 돌려 사라졌다.
연 대표는 이해진이 완전히 자리를 뜬 걸 확인하고 나서야 정희연을 향해 시선을 내렸다. 새 모이만큼 마시더니, 혼자 내버려 둔 시간이 제법 길었는지 자그마한 손에 들린 와인 잔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맛있어?”
웃음기를 섞어 묻자 정희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우유 같아요. 대표님도 드셔 보실래요?”
연 대표는 정희연이 내민 와인 잔에 입술을 대는 대신 허리를 숙여 부지런히 조잘거리는 입술을 가볍게 핥았다.
“응. 커피우유 같네.”
“다른 사람들 있는데 뽀뽀하시면 안 돼요….”
제법 엄하게 다그치는 어조에 남자는 느슨히 웃었다.
“다들 취해서 정신없을걸.”
남수현의 집에 도착한 순간, 정희연에게 들러붙던 시선은 지금은 흩어진 지 오래였다. 정영길의 손자가 아닌, 연 대표가 각인시킨 오메가에게 들러붙던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었다.
“안 시끄러워?”
“조금요.”
“잠깐 밖에 나갈까.”
연 대표는 바깥으로 통하는 테라스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제안했다. 정희연은 남자의 손을 잡고 일어섰다. 입술에서 코코아 가루 맛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시끌벅적한 내부와 달리 정원은 눈이 내려앉은 것만큼이나 고요했다. 오후 내내 내린 눈이 죽어 누렇게 변한 잔디 위를 소복이 덮고 있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음과 달리 한적하고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추워?”
“안 추워요. 저 눈 밟고 싶은데…. 같이 걸어 주시면 안 돼요?”
“이리 와.”
먼저 정원으로 내려선 남자가 손을 잡아끌었다. 정희연은 연 대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하얗게 눈 쌓인 정원을 걷기 시작했다. 뽀드득뽀드득 눈 밟히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까 김철우 비서님이랑 무슨 얘기 하셨어요?”
“일 시킨 게 있어서 보고받았어.”
“그렇구나.”
연 대표는 옆에서 걷고 있는 오메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차가운 겨울 공기 때문인지 얕게 솟아오른 하얀 뺨이 붉은빛을 띠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조금 전 김철우와 나눈 대화 주제를 꺼내 들었다.
“희연아.”
“네?”
“아빠들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 있어?”
정희연은 하얀 눈 위를 걷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다가 연 대표를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김철우와 나눈 이야기가 아빠들에 관한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정희연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얕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너무 어릴 때 헤어져서 잘 기억 안 나요.”
사고로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두 분과 함께 조용한 시골 동네에서 하루하루를 보낸 기억이 있긴 하지만, 전부 단편적인 기억들이었다.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때와 낯선 손에 이끌려 커다란 집으로 들어가던 날 사이의 기억은 누군가 잘라 낸 것처럼 깨끗하게 도려진 상태였다.
“궁금한 거 있나 해서.”
“잘 모르겠어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사고로 돌아가신 건 알아요.”
“나중에라도 괜찮으니까 혹시 궁금한 거 생기면 고민하지 말고 물어봐.”
연 대표는 제 손에 잡힌 손등을 다정하게 쓸었다. 정희연이 굳이 과거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가 말하지 않는 것과 당사자가 궁금해하지 않는 건 다른 문제였다.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해 주기로 했으니, 알기를 원한다면 무엇이든 알려 줄 생각이었다.
어린 애인이 원하는 것을 모두 해 주기 위해서는 그에게 그만큼 넓은 세계를 보여 주어야 했다. 비좁은 세계에서 원하는 게 생겨 봤자 얼마나 더 생길까. 어쨌거나 연 대표에게는 아무것도 모르는 오메가를 데려온 책임이 있었다.
“어디서 돌아가셨는지 궁금해요.”
정희연은 남자와 맞잡은 손을 꼼지락거리다 멈춰 섰다. 새삼스레 슬픈 마음이 든 건 아니었다. 15년이나 지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두 분의 마지막 순간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곳에서.”
“바다요?”
뜻밖의 말에 정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뺨에 달라붙은 눈송이를 부드럽게 걷어 내는 것과 동시였다. 남자의 손은 그 후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추위로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체온을 나누어 줄 뿐이었다.
“정 회장 피해서 밀항하려고 했던 것 같아. 너도 차에 타고 있었고. 병원 기록 보니까 충격으로 기억을 잃었다고 하던데.”
“아….”
그래서 기억이 뚝 잘린 느낌이었구나.
“저는 대표님 처음 만났을 때 바다도 처음 본 줄 알았어요.”
“응. 나한테 여기가 바다냐고 물어봤었잖아.”
연 대표는 피식 웃으며 하얀 뺨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걱정이 무색하게도 말간 얼굴은 괜찮아 보였다. 한없이 말랑말랑하게 구는 애인이 이런 식으로 단단하게 보일 때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저도 여기가 바다냐고 여쭤본 거 기억나요. 그런데 어릴 때 가 본 적이 있구나.”
“왜 서운한 표정이야.”
“그냥, 저한테는 대표님이랑 처음 본 거니까….”
“나랑 처음 한 거 많을 텐데.”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목덜미로 내려 은근히 쓸어내리자 작은 몸이 얕게 튀어 올랐다. 간지러운 듯 옅은 웃음과 함께 긴 속눈썹이 팔랑거렸다.
“아빠들은 바다에서 헤어졌지만, 대표님 만났으니까 좋게 생각할래요.”
정희연은 남자의 너른 품에 폭 안기며 중얼거렸다. 남자의 코트에 얼굴을 파묻자 희미한 페로몬 냄새가 그를 달래듯이 번져 나갔다. 알파에게 각인당한 오메가만이 느낄 수 있는 완전한 충족감이었다.
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돌아가신 두 분을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정희연은 두 팔로 연 대표의 허리를 꽉 감싸 안으며 고개를 슬쩍 뒤로 젖혔다.
“다음에 대표님이랑 또 가고 싶어요.”
“바다?”
“네.”
“알았어.”
하얀 눈송이와 남자의 입술이 동시에 동그란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사고는…. 회장님이 하신 거예요?”
정희연은 연 대표를 빼꼼 쳐다보며 물었다. 남자의 짙은 눈썹이 슬쩍 찌푸려졌다.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가 없는 반응이었다.
“역시 그렇구나. 회장님 때문에 도망가려고 하신 거니까…. 그래도 두 분이 함께 가셨으니까 거기서는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정희연은 남자의 코트에 다시 얼굴을 파묻으며 혼잣말을 하듯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희연아.”
연 대표가 느른한 어조로 이름을 불렀다. 사람을 유혹하듯 은밀하고 고요한 속삭임이었다.
“똑같이 해 줄까.”
“네? 아니요. 괜찮아요.”
“으응. 괜찮아?”
“네. 지나간 일이니까 괜찮아요. 그래서 대표님 만났잖아요.”
느릿하게 뻗어 나간 손이 정희연의 귀에 닿았다. 날렵하게 뻗은 손가락은 부드럽게 휘어진 귓바퀴를 지나 하얗고 말랑말랑한 귓불을 아프지 않게 짓눌렀다.
“그냥 이대로 둬?”
연 대표의 품에 안긴 자그마한 오메가는 코트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시면 저는 다 좋아요.”
“응. 알았어.”
남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교묘하게 본심을 감췄다.
***
시체 썩는 냄새. 대놓고 콧잔등을 찌푸린 김철우와 달리 연 대표는 무심한 낯이었다. 한여름철, 썩어 빠져 파리떼가 꼬이는 고깃덩어리의 냄새가 코를 마구 찔러 댔다. 차에서 내려선 남자는 별다른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땅이 어는 겨울에도 이 정도의 냄새라면, 봄만 되어도 썩은 내가 진동을 할 터였다.
뜬장 위로 발걸음을 디딘 남자는 무감한 표정으로 시선을 흘려보냈다. 쇠 구조물 사이로 내다보이는 노인은 제대로 씻지 못한 것은 물론,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엉망이었다. 벌레처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어서인지 장대한 기골이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정 회장님.”
선명한 목소리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가르며 땅 아래로 내리꽂혔다. 그제야 남자의 존재를 눈치챈 것처럼, 정영길이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네, 네놈…!”
실핏줄이 터졌는지 하얀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악귀 같은 모습이었으나 연 대표는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회장님 아직도 기력이 팔팔하신가 봐.”
완벽한 스리피스 슈트에 딱 맞아떨어지는 코트를 걸친 남자가 내뱉기에는 지나치게 빈정거리는 어투였다. 뜬장 위에 올라선 고급 구두는 녹슨 우리와 완전히 동떨어져 보였다. 이 상황과는 지독히도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연 대표는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노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마나 많은 알파와 오메가들이 개인적인 앙갚음을 위해 다녀갔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정확히는 관심이 없는 것에 가까웠다.
“차, 라리….”
색색거리는 쇳소리가 깊은 땅 안쪽을 공허하게 울렸다.
“날, 죽…. 커헉!”
퍽 고통스러운 삶일 것이다. 제대로 된 음식은 먹지 못하고, 추위에 떨며 밤을 지새우고, 뜬장 안으로 누가, 언제 들이닥칠지 몰라 하루 종일 두려움에 떨어야 할 테니까. 그나마 한겨울의 땅속은 따뜻한 편이라는 게 노인에게는 위안일 터였다.
“내가 왜.”
연 대표는 무료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죽음을 원하는 사람에게 죽음을 내려 주는 것만큼 자비로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친절을 베풀어 줄 만큼 좋은 성격이 되지 못했다.
남자는 얕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꺼내 들었다. 지포 라이터 불빛이 싸늘한 낯을 붉게 물들이다 스러졌다. 오랜만에 맛보는 매캐한 연기가 긴 숨결을 따라 느릿하게 내뱉어졌다. 흡연 욕구를 억누른 지 오래라 이렇다 할 감흥은 느껴지지 않았다.
연 대표는 몇 번의 연기를 내뱉은 후에야 눈꺼풀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느른해진 시선 속으로 무언가를 갈망하는 듯한 정영길의 얼굴이 비쳤다.
“아.”
연 대표는 피식 웃으며 짧은 음절을 내뱉었다. 남자의 손이 고급 지포 라이터를 열었다 닫길 반복했다. 붉은 불꽃이 새파란 공기를 가르며 피어올랐다가 모습을 감췄다.
“이게 절실하신가 봐.”
살을 에는 추위에 고작 손톱만 한 온기가 절실한 모양이었다. 연 대표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여 손가락 사이에 걸린 담배를 그대로 떨어트렸다. 툭하면 품에 안겨 오는 오메가 때문에 멀리하느라 제법 오랜만에 맛본 연기였으나, 미련은 남지 않았다. 지금은 담배 연기보다 제 오메가의 페로몬 향기가 더 고팠다.
불티가 점멸하며 뜬장 아래로 추락했다. 얇고 가는 담배는 노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땅 밑으로 금세 꺼져 버리고 말았다. 연 대표는 제게 못 박힌 늙은 시선에 재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툭, 지포 라이터를 아래로 던졌다. 적선하듯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대표님.”
김철우가 당황한 목소리로 불렀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늙은 알파의 운이 어디까지인지 가늠해 볼 뿐이었다. 철장에 부딪친 지포 라이터가 가벼운 공명음을 자아냈다. 회색 머리통이 걸신들린 사람처럼 화급히 움직인 것과 동시였다. 가볍게 튀어 오르나 싶던 네모난 물건은 금세 땅 밑으로 자취를 감췄다.
“안 돼, 안 돼…!”
쩍쩍 갈라진 정영길의 손등이 철장 사이를 파고들기 위해 애처롭게 꿈틀거렸다. 너덜거리는 손톱과 잔뜩 터 피가 흐르는 손등은 안중에도 없는 눈치였다.
“흐억, 허억, 헉.”
손가락이 꿈틀거리길 몇 번, 늙은 알파는 이내 포기한 듯 철장 사이로 집어넣으려던 손을 물렸다. 그리고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낡은 점퍼 안에서 약통을 꺼내 들었다. 연 대표가 사람을 시켜 하루에 한 통씩 지급하는 ‘합법적인’ 진통제였다. 손이 떨리는 이유가 저 진통제 때문임을 모르는지 정영길이 황급히 약을 털어 입에 넣었다.
까드득!
잇새 사이로 부서지는 알약의 소리는 마치 철장이 뒤틀리는 소음처럼 들렸다. 진통제를 삼키는 데 혈안이 되어 노인은 뜬장 안으로 내려오는 사다리와 커다란 인영을 눈치채지 못했다.
뜬장을 짓밟고 선 남자는 무감한 얼굴로 내부를 응시했다.
안쪽으로 들어오자 위에서부터 느껴지던 탁한 공기가 한층 더 텁텁해졌다. 연 대표는 눈동자만 아래로 굴려 뜬장 바닥이 아닌, 무저갱과 닮은 그 밑의 흙바닥을 응시했다. 빈 약통과 오물, 여러 찌꺼기가 뜬장 아래쪽의 흙더미에 고여 있었다. 봄이 되면 구더기와 파리떼가 꼬일 터였다.
눈썹을 조금 찌푸렸을 뿐, 남자의 얼굴은 뜬장 위에서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뭐, 뭐야!”
연 대표의 존재를 뒤늦게 발견한 정영길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몇 날 며칠을 뜬장에 갇힌 채 고스란히 쏟아지는 분풀이를 견딘 것치고는 제법 카랑카랑하고 억센 목소리였다.
“뭘 그렇게 겁을 먹어요.”
예의 바른 말투와 달리 늘어지는 말꼬리가 조롱처럼 들렸다.
정영길은 꿀꺽 침을 삼키며 눈앞의 젊은 알파를 응시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차림새의 남자는 결점 없는 외모를 담아낸 조각상처럼 느껴졌다. 칼끝조차 들어가지 않을 만큼 견고하고 단단한 조각상. 표정 없는 얼굴을 보자 본능이 도망치라고 소리를 질러 댔다.
“내가 무슨 짓을 했나….”
삐딱한 자세로 선 남자가 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누구나 겨울에 흔히 사용하는 가죽 장갑이었다.
“왜 늦게 온 줄 알아요?”
커다란 손 위로 짐승의 가죽이 덧씌워질 때마다 정영길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직면해야만 했다.
“나 인내심 긴 거 아시잖아요.”
느른하게 이어지는 말투만큼이나 느릿한 움직임이 인간의 피부 위로 잔혹한 짐승의 꺼풀을 뒤집어씌웠다.
“내가 먼저 손보면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아쉽겠어. 건드릴 만한 데가 없을 텐데. 안 그래요?”
“저, 저, 정희연.”
약에 절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뇌가 내뱉어서는 안 될 이름을 내뱉었다.
“정희연?”
알파의 손을 감싼 가죽 장갑이 서로 맞물리며 빠드득,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너, 넘김세. 내가, 내가, 자네한테 넘긴다고…!”
“하하.”
연 대표는 목을 울려 웃었다. 누가 누구에게 정희연을 넘긴다는 건지.
그는 목이 졸려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던 오메가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악! 아악!”
저벅저벅 걸어간 남자는 망설임 없이 노인의 멱살을 잡아 뜬장 중앙으로 질질 끌고 갔다. 버석버석 갈라져 하얗게 터진 몸이 철장에 쓸려 고통을 호소하는데도 자비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손속이었다.
“후우….”
늙은 몸뚱이를 그대로 내팽개친 남자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잘 정돈된 머리카락이 가죽 장갑에 짓눌렸지만, 그런 사소한 것에 신경을 쏟을 정도로 머리가 이성적이지는 않았다.
연 대표는 며칠 전, 침실에 설치되어 있다던 감시 카메라 영상을 확인했다. 사각이 없도록 어찌나 정밀하게 설치해 뒀는지, 정희연이 뺨을 맞는 것부터 목이 졸리는 장면까지 모든 순간이 세세하게 녹화되어 있었다. 남수현 집에 놀러 가고 싶다는 애인의 말이 아니었다면, 그날로 정영길을 죽이러 이 자리에 왔을 터였다.
“누가 누구한테….”
연 대표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뇌까렸다.
넘긴다니. 정희연은 그가 각인시킨 오메가였다. 다른 알파의 페로몬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는.
연우범이 기다리는 건 각인의 순간이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쌍방 각인은 완전한 소유와 독점의 동의어였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독점욕은 반쪽짜리에 불과했다.
정희연을 각인시켰으니, 그 또한 정희연에게 각인되어야 했다. 페로몬 조절에 서투른 애인이 각인을 위해 낑낑대며 애쓰고 있으니 얌전히 기다릴 따름이었다.
“정희연을 넘겨….”
연 대표는 가볍게 정영길의 멱살을 잡았다. 가죽 장갑이 빠드득 맞물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알파 하나를 악력으로 일으키는 것쯤이야 그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뻑!
손바닥으로 내리친 것치고는 지나치게 무서운 소리였다. 짐승의 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 특유의 질긴 잔혹함이 인간의 연약한 피부를 찢어 놓았다.
“커, 헉!”
정영길은 저도 모르게 단말마의 신음을 내뱉었다. 삐이이이-. 이명이 들리며 입 안의 살이 터져 나갔다.
“고작 뺨 한 대 맞은 걸로 이러면 어떡해요, 정 회장님.”
연 대표는 실낱같은 미소를 지으며 또다시 손을 날렸다.
정영길의 입술 사이에서 튄 피가 무표정한 뺨까지 튀어 올랐으나, 남자는 여전히 무감한 낯이었다. 늙은 알파의 얼굴이 너덜너덜해지고 나서야 내팽개치듯 멱살을 놓아주었을 뿐이다.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해도 알파의 육체란 쉬이 부서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회장님은 애기 뺨 때리는 게 버릇이셨나 봐.”
연 대표는 한쪽 입술을 비릿하게 끌어 올렸다.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자그마한 오메가가 품에 안겨 오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뺨 맞아서 코피도 났어요.’
나동그라진 몸뚱어리 앞에 친히 한쪽 무릎을 꿇은 남자는 손을 뻗어 기절한 것처럼 늘어진 얼굴을 낚아챘다. 양 뺨을 거칠게 짓누르자 피로 엉망진창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입 안은 물론 코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렸다.
“끄흐으으…. 컥, 쿨럭.”
“우리 애기도 회장님처럼 아팠을 텐데…. 이 정도로 엄살 부리면 안 될 것 같지 않아요?”
줄줄 흘러나오는 피를 확인한 남자는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또 어디 맞았어?’
‘또 안 맞았는데…. 아, 넘어지면서 발목 삐끗했어요.’
‘으응. 그랬어?’
서슬 퍼런 시선이 이번에는 정영길의 발목을 향했다. 위를 올려다보자 김철우가 당황한 낯으로 고개를 저었다.
“준비된 게…. 죄송합니다.”
“하아….”
연 대표는 재차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피 묻은 장갑 때문에 머리카락이 붉게 젖어 들었으나 이번에도 별반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뭐, 뜬장에서 오래 버티다 보면 발목이 성하진 않지.”
남자가 구둣발을 그대로 들어 올렸다.
“아아악!”
피부를 내려치는 것과 뼈를 가격한 고통은 차원이 달랐다. 정영길은 발목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벌레처럼 몸을 말았다. 반사적으로 발목을 가리자 거침없는 발길질이 손등을 때려 부쉈다.
“허, 허으윽, 헉…. 내, 내가 잘못, 했….”
“잘못?”
연 대표는 픽 웃음을 터뜨렸다.
“누구한테?”
“자, 자, 네…. 아악!”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고급 구두가 허름한 바지 위를 짓밟았다.
“사과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애한테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언제 발길질을 했냐는 듯, 연 대표는 무심한 낯으로 정영길의 상태를 살폈다. 꺽꺽거리는 늙은 알파 달리 호흡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였다. 정희연과 약속했으니, 이 자리에서 죽이는 건 곤란했다. 짙은 피 냄새가 코끝을 스쳤으나 연 대표는 여전히 서류를 처리할 때와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저 얄팍해진 눈매로 늙은 알파가 고작 이 정도에 죽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연 대표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또다시 뜬장 위를 응시했다. 대기하고 있던 김철우가 좁은 구멍 사이로 쇠사슬에 연결된 물건을 내려보냈다. 핏줄이 불거진 손이 완전히 널브러진 늙은 몸을 향해 뻗어 나갔다.
“애 목 조르는 걸 보는데 진짜 죽여 버리고 싶더라고.”
죽는 순간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이다. 남자는 목을 울리듯 조용히 속삭였다.
“회장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나 회장님한테 관심 없어요.”
정영길은 간신히 눈을 깜박였다. 자신의 피로 끈적끈적해진 장갑이 호흡을 조르나 싶더니 거칠거칠한 표면이 목 전체를 감싸기 시작했다. 목을 조이는 물건의 정체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고개를 내릴 힘조차 없었다.
“애기만 안 건드렸어도 다시 얼굴 볼 일 없었을 거라는 소리야. 내가 해 주기로 한 일은 어디까지나 당신을 여기에 가두는 게 전부였거든.”
철컥.
쇠와 쇠가 얽히는 듯한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목을 감싼 물건이 무엇인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목이 졸렸다.
“커, 헉!”
주인의 의지를 배반한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정영길은 목에 걸린 거칠거칠한 천을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목이 조이며 자연스레 고개가 꺾였다. 하늘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늙은 알파는 지금껏 의식하지 못한 또 다른 알파 하나를 마주했다. 늘 연우범 뒤에 서 있던 비서였다. 김철우. 정영길은 뒤늦게야 그 이름을 떠올렸다.
김철우가 뜬장 밑으로 떨어진 쇠사슬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커헉, 쿨럭, 쿨럭! 꺽, 억…!”
손을 마구 움직인 탓에 너덜거리던 손톱이 목에 연결된 쇠와 부딪치며 떨어져 나갔다. 정영길은 그제야 자신의 목을 죄는 물건이 개 목걸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커, 컥!”
버둥거리며 다리를 움직이자 다행히 발끝이 땅에 닿았다. 길이를 가늠하던 김철우가 뜬장 천장에 쇠사슬을 고정하는 모습이 보였다.
“설, 마…. 커헉, 컥!”
일부러 발끝만 간신히 닿을 법한 위치에 쇠사슬을 고정한 게 틀림없었다. 정영길은 한 발로 간신히 버텨야 했다. 연 대표에게 맞은 발목은 너덜거려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옛날 생각나고 재미있지 않아요?”
연 대표가 시뻘게진 얼굴을 한 손으로 꽉 붙들며 물었다. 정영길은 그제야 ‘옛날 생각’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투견들을 훈련하는 방법 중 하나가 기울어진 컨베이어 벨트 위를 끊임없이 걷게 만드는 것이었다. 걷지 않으면 목이 졸리도록 천장에는 줄을 매달아 놓았다. 마치 지금처럼.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조르고 싶은데…. 이번에는 제대로 조절 못 하고 죽여 버릴 것 같아서.”
연 대표는 평소보다 느릿한 어조로 말꼬리를 늘였다. 목이 졸리던 정희연을 본 순간, 당장 눈앞의 늙은 알파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남자는 절로 힘이 들어가는 손가락을 접었다 펴며 한숨인지 웃음인지 모를 모호한 숨을 내뱉었다.
“우리 애기가 너무 착해서 그대로 두라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죽여 버릴 수는 없잖아?”
기실 연우범은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찍 깨우친 편이었다. 돈과 힘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게 되면서 예외 역시 있음을 깨달았고. 그 깨달음 이후 연 대표는 예외의 삶을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정영길의 처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지고 노는 게 재미없어졌을 뿐, 죽이고 싶으면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애인의 말 한마디에 세상이 제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또다시 깨우칠 줄은 몰랐지만.
“회장님께서 내 분이 풀릴 때까지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데…. 별수 있나.”
남자는 정영길의 양 뺨을 붙잡은 상태로 천천히 페로몬을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회장님도 아시다시피…. 그냥 두기에는 내가 성격이 좋지를 못해서.”
시뻘겋게 달아오른 주름 진 이마 위로 시퍼런 핏대가 곤두서기 시작했다.
“커,헉, 콜록, 커, 컥!”
정영길은 제한된 호흡 사이로 기침을 내뱉었다. 단순히 목이 졸렸기 때문은 아니다. 온 내장을 할퀼 기세로 쏟아지는 막대한 알파 페로몬 탓이었다.
약에 중독된 데다 오랜 폭력으로 병약해진 몸뚱어리가 다른 알파의 페로몬에 과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동종 형질의 페로몬이 낡은 페로몬 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극렬히 움직였다. 과부하가 걸린 기관이 꿈틀거리며 마지막 발악을 남겼다.
“커헉, 헉, 허으, 헉.”
“페로몬 쇼크가 그렇게 괴롭다던데.”
연 대표는 습관처럼 입술을 끌어올렸다. 가죽 장갑이 피 묻은 얼굴에서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내일 사람 올 때까지 버텨 봐요.”
“이, 이놈…. 허으으, 컥, 컥!”
“오래오래 사셔야죠, 회장님.”
모든 것을 가진 알파는 제법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분이 풀릴 때까지.”
뜬장 밖으로 빠져나온 남자는 드럼통 안으로 피에 젖은 장갑을 던져 넣었다. 김철우가 지금과 같은 상황을 대비해 미리 준비해 둔 물건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가죽을 던져 넣자 매캐한 연기가 솟아오르며 타닥타닥 불타는 소리를 냈다.
“호텔 들렀다 가야겠네.”
연 대표는 코트와 슈트 재킷, 구두까지 전부 드럼통 안으로 던져 넣으며 중얼거렸다. 새 슈트로 갈아입고 있자,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철우가 말을 붙여 왔다.
“바로 희연 씨한테 안 가실 겁니까?”
정희연은 이해진의 집에서 놀고 있었다.
“좋은 것만 보게 하려고 이 짓도 몰래 했는데….”
코트까지 걸친 남자가 소매를 확인하며 잔뜩 늘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김철우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이 꼴로 가서 애 놀라게 할 일 있어?”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럼 호텔 측에 먼저 연락 넣어 두겠습니다.”
연 대표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차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얀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그 체향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다는 욕구가 불쑥 차올랐다.
서울에 도착할 즈음이었다. 연 대표는 습관처럼 툭, 도어 트림을 건드렸다. 규칙적인 소음이 이어지길 몇 번, 불현듯 손끝에서 미묘한 열기가 느껴졌다. 커다란 손이 우뚝 움직임을 멈춘 것과 동시였다. 심장 뛰는 소리가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질 정도로 온몸의 신경이 예민하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하…. 씨발.”
연 대표는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명백한 러트 전조 증상이었다.
러트 올 시기가 아닌데. 의아함에 눈썹을 찌푸린 것도 잠시, 그는 미약한 한숨을 내뱉었다. 규칙적이던 러트가 빨리 찾아온 이유를 대강이나마 알 것 같았다. 결벽적으로 관리하던 페로몬을 근래에 지나치게 많이 쏟아 낸 탓에 주기가 틀어진 모양이었다.
“대표님. 왜 그러십니까?”
김철우가 힐긋 백미러를 통해 상태를 확인하며 물었다. 연 대표는 귀찮게 됐다는 듯 찌푸려진 미간을 문지르며 짧게 대답했다.
“러트.”
“러트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러트라는 단어에 김철우는 연 대표의 눈치를 살폈다. 원래대로라면 그가 물을 만한 문제는 아니었다. 러트란 지극히 사적인 일이었고, 연 대표는 러트를 알아서 해결하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굳이 물은 건 정희연의 존재가 떠오른 까닭이었다.
“뭘 어떻게 해요, 김철우 비서님.”
잔뜩 늘어진 말꼬리가 느릿하게 흘러나왔다.
“애 붙잡고 섹스라도 할까?”
러트란 알파의 발정기였다. 발정기라는 점만 놓고 보면 오메가의 히트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나 그 방향성은 엄연히 달랐다. 히트 때의 오메가가 알파를 유혹하기 위해 몸을 연다면, 러트 때의 알파는 말 그대로 번식 욕구에 충실할 뿐이었다. 거칠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섹스가 이어질 터였다.
섹스에 익숙한 오메가라면 몰라도, 정희연이 감당하기에는 무리였다.
“죄송합니다. 각인하셔서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여쭤봤습니다.”
“아직 감당 못 해.”
연 대표는 정희연을 안을 때 제법 많이 봐주는 편이었다. 섹스할 때는 당연히 젖꼭지를 물고 빠는 거라며 제 입맛대로 길들이고 있긴 하지만, 퍼붓고 싶은 행위에 비하면 그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어린 애인이 놀라지 않을 만한 선을 지키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중이었다.
발가락 조금 빤 것 가지고 그렇게 놀란 걸 보면 구멍에 혀를 댔을 때는 울음까지 터뜨릴지도 몰랐다. 연 대표가 가르쳐 주고 싶은 건 몸을 섞는 행위의 즐거움이지, 놀람이나 두려움 따위가 아니었다.
러트 사이클의 알파는 이성을 잃는다. 페로몬 조절에 능통하다고 해서 유전적으로 새겨진 형질의 발정기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우성 알파였다. 오메가를 임신시켜 제 씨를 보존하려는 욕구가 깊은 본능에 자리하고 있을 터였다.
이 상태로 몸을 섞으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뻔했다. 애를 엉망으로 울리거나, 임신시키거나 둘 다일 것이다. 정희연은 입버릇처럼 아가를 갖고 싶다고 하지만, 연 대표는 어린 애인을 임신시킬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럼 억제제라도 준비할까요? 자주 가시는 호텔이라, 지금 연락 넣으면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아니. 그냥 넘길 생각이야.”
남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억제제를 먹으면 불쾌하긴 해도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러트를 넘길 수 있었다. 다만 정희연에게 페로몬을 쏟아부을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안정제가 잘 듣는 편인데다 각인으로 호르몬 수치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어 사고 초기와 비교하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섹스 없이 러트를 보내면 이삼일 혼자 앓고 말겠지만, 러트용 억제제를 먹을 경우 일주일 정도는 페로몬을 제대로 쏟아부을 수 없을 터였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답이 나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러트 생으로 넘기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도어 포켓 위로 팔꿈치를 세운 남자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곧 러트가 찾아올 알파치고는 제법 정상적으로 보이는 얼굴이었다. 느른하게 늘어지는 말투와 날카롭게 벼려진 눈매가 평소와 달리 사납게 느껴진다는 걸 제외하면.
“그럼 호텔 쪽에 지금 바로 연락 넣겠습니다.”
“알았어.”
“희연 씨한테는 뭐라고 할까요?”
연 대표는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러트인 걸 알면 호텔로 찾아올 게 분명했다. 지금이야 전조 증상만 있을 뿐이라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어린 애인이 조르면 곧바로 넘어갈 터였다. 본능만 남은 알파가 그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글쎄. 사업 틀어져서 출장 갔다고 둘러대.”
“믿을까요? 은근 눈치 빠르던데요.”
“이해진이 알아서 커버 쳐 줄 거야.”
열기 섞인 호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손끝이 저릿한 감각에 연 대표는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주기가 틀어지며 찾아온 러트라 그런지 진행 속도가 빨랐다. 머리카락에 달라붙은 피를 씻어 내는 도중에 자위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 좆같네.”
하필 이 시점에 러트라니, 번거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해진 집에서 재우면 더 좋고.”
그는 김철우를 향해 가볍게 말을 던졌다. 이해진이라면 굳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예. 일단 말해 보겠습니다.”
차가 도착하자마자 지하에서 대기하고 있던 호텔 매니저가 문을 열었다. 연 대표는 느릿하게 발을 내디뎠다. 땅을 딛는 구두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다.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비릿한 피 냄새와 머리카락에 들러붙은 붉은 핏자국이 완벽한 슈트 차림과 비현실적으로 어우러졌다.
“애기 잘 챙겨.”
연 대표는 짧은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이어서 문이 닫혔다. 김철우는 매니저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연 대표의 뒷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차를 돌렸다. 상사의 어린 애인을 설득할 시간이었다.
정희연은 힐긋 시계를 응시했다. 연 대표와 만나기로 한 시간이 살짝 늦어지고 있었다.
“희연아. 나랑 노는 거 재미없어?”
이해진이 턱을 괴며 슬쩍 웃었다. 약간의 놀림이 섞인 목소리였다.
“네? 아니에요. 저 형 만나는 거 좋은데….”
“시계 보길래. 아, 시간 다 됐구나.”
정희연을 따라 시계를 확인한 이해진은 연 대표가 남긴 말을 더듬었다. 8시쯤 도착할 것 같으니 저녁 잘 먹이라는 말도 함께였다. 어련히 알아서 잘 챙길 텐데, 양심은 있는 도둑놈인지 정희연을 생각보다 훨씬 애지중지 다루는 듯했다. 하긴, 돌이켜보면 애지중지 안 할 때가 없었다.
그 남자는 껄끄러워도 정희연의 방문은 늘 즐거웠다. 주변에서 찾아보기 힘든 순하디순한 성정 때문인지, 정희연과 시간을 보내는 건 일보다는 휴식에 가까웠다.
“네. 부산 다녀온다고 하셨는데 그래서 오래 걸리나 봐요. 아, 그래도 헬기 탄다고 하셨는데…?”
목적지가 부산이 아닌,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깊숙한 산속이라는 사실을 이해진은 알고 있었다. 연 대표가 정영길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 늙은 알파가 차라리 죽이라는 말을 내뱉었으리라는 사실이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벨이 울렸다. 정희연은 딸기 케이크를 먹다 말고 현관 앞으로 뛰듯이 걸어갔다. 아무리 껄끄러워도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 이해진은 마지못해 뒤를 따랐다.
“어….”
그러나 정희연의 기대가 무색하게도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연 대표가 아닌 김철우였다. 웬일로 직접 안 왔지? 이해진은 삐딱한 자세로 기대어 서서 벽에 머리를 기댔다.
“김철우 비서님. 대표님은요?”
“아, 그게….”
김철우는 힐끔 이해진을 쳐다보며 말을 흐렸다. 뜬금없는 시선에 이해진은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대표님께서 급하게 출장이 잡히셔서…. 오늘 못 올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러트구나. 이해진은 연 대표가 이 자리에 없는 이유를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출장이요? 대표님 저한테 다른 말씀 없으셨는데….”
“부산에서 올라오는 길에 갑자기 일이 터져서 전화할 겨를이 없으셨을 겁니다.”
조악하기 그지없는 핑계에 이해진은 한숨을 내쉬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텄네. 그는 마음 속으로 짧게 내뱉으며 자신보다 약간 작은 키의 오메가를 응시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희연은 전혀 납득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입술에 힘이 실렸는지 하얀 뺨이 볼록 솟았다.
“네? 아닌데…. 대표님 바쁘셔도 저한테 전화 안 하실 리가 없는데요…?”
정희연으로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뽀뽀해 준 남자가 바쁘다는 이유로 전화 한 통 없이 출장을 통보하다니.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수상쩍기 짝이 없었다. 그가 알고 있는 연 대표라면 아무리 바빠도 전화를 했어야 했다.
“대표님 구치소에 계실 때도 저한테 전화하셨어요.”
“아니, 그게….”
혹시 또 곤란한 상황을 겪으신 걸까? 아니면 사고? 며칠 전 김지원과 함께 본 드라마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남자 주인공이 연인에게 가던 중 교통사고가 나 기억을 잃어버린 장면이었다. 그는 자신이 여자 주인공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허겁지겁 달려온 연인을 매몰차게 내쫓는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당혹스러움이 몰려왔다. 정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김철우를 올려다봤다.
“혹시 대표님 사고 나셨어요?”
“예?”
“그게 아니면 저한테 전화 한 통 안 하실 분 아니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진짜 사고가 나신 걸까? 김지원 선생님께서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하다고 하셨는데…. 혹시 나를 잊어버리셨나?
고작 전화 한 통 없는 것뿐인데도 정희연은 크게 당황했다. 연 대표가 고이 싸고돌며 예뻐한 일이 뜻하지 않게 부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둥그런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하자 김철우는 크게 놀라 어쩔 줄 몰라 했다.
“아, 아니, 희연 씨. 그게 아니고….”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혹시 대표님 머리 다치셨어요? 그래서 저 잊어버리신 거예요?”
눈물방울이 금방이라도 후드득 떨어져 내릴 것처럼 가득 고여 들었다. 미치겠네. 김철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앓듯이 내뱉었다.
“그게 아니라…. 하….”
그는 무슨 핑계를 대든 정희연에게는 통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러트가 오셔서 호텔에 가 계십니다.”
“네? 러트요?”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정희연은 눈을 깜박였다. 담뿍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떨어져 내렸다.
“그런데 왜 출장이라고 거짓말하신 거예요?”
“러트 때 알파는 위험해.”
보다 못한 이해진이 김철우를 구제해 주기 위해 나섰다. 정희연은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을 대충 닦아 내며 의아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 오메가랑 보내는 거잖아요.”
“그렇긴 한데 러트 때는 훨씬 거칠어지니까. 아무래도 너 걱정돼서 그런 것 같은데.”
“걱정이요?”
이번에도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이해진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을 받으며 배운 것 중 하나가 알파의 러트에 관한 것이었다. 짐승 같은 본능만 남는다는 사실도, 그렇기에 연인과 함께 보낸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섹스하다가 다칠 수도 있으니까.”
“저 튼튼한데요…?”
이해진은 퍽이나, 라는 말을 간신히 삼켰다. 연 대표의 섹스 스타일이 어떤지는 몰라도, 기본적인 체격 차이 탓에 정희연이 짜부라질 것 같았다. 다정하게 대해 줘도 힘겨워할 것 같은데 과연 저 오메가가 러트 사이클을 맞은 알파를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희연 씨. 대표님은 러트 보내는 게 익숙하셔서…. 괜찮으실 겁니다.”
“익숙하다고 괴로운 게 아닌 건 아니잖아요.”
또박또박 돌아오는 논리적인 대답에 김철우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음, 희연아. 아무래도 연 대표는 너 생각해서 말 안 한 것 같은데. 어차피 러트야 주기적인 거고…. 며칠만 형이랑 지내자.”
정희연은 쩔쩔매는 김철우를 한 번, 무언가를 걱정하듯 미간을 문지르는 이해진을 한 번 응시했다. 연 대표가 왜 출장을 핑계로 거짓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서운함이 불쑥 치미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몸을 섞은 애인 사이인데 왜 러트는 안 되는지 납득하기 어려웠다.
섹스가 거칠어진다고 해서 본질을 구성하고 있는 무언가가 달라지는 건 아니었다. 정희연은 남자의 그런 부분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
“저 대표님한테 갈래요.”
“희연아.”
“해진이 형. 저 어린애 아니에요.”
말리기 위해 똑바로 서던 이해진이 단호한 말에 움직임을 멈췄다.
“이건 저랑 대표님 사이의 일이잖아요.”
맞는 말이라 이해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쓸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 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정도로 컸는지 모를 일이었다. 김철우가 제발 말려 달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해진은 끝내 그의 바람을 저버렸다.
“데려다주시죠, 김철우 비서님. 아, 상사라 껄끄러우려나. 그럼 내가 하고.”
“하…. 사장님까지 이러시면 어떡합니까. 대표님께서 왜 희연 씨 맡겼는지 아시잖습니까.”
“희연이 말대로 두 사람 사이의 일이잖아요.”
이해진은 과연 이 선택이 옳은가에 대해 고민하면서도 차 키를 챙기기 위해 손을 뻗었다.
“어른이 도망가면 안 되지.”
러트를 평생 혼자 보낼 것도 아니고, 연우범 그 남자도 한 번쯤은 직면해야 할 문제였다.
정희연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를 이곳까지 안내해 준 매니저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라진 뒤였다. 한 층을 통째로 쓰는지, 길게 늘어진 복도에는 문이 하나뿐이었다. 연 대표가 문을 열지 않을 경우 곧장 내려오기로 약속한 끝에야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던 페로몬이 문 가까이 다가갈수록 점차 짙어졌다. 각인된 몸은 자신을 각인시킨 알파의 페로몬을 더욱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정희연은 망설이는 대신 호출 벨을 눌렀다.
“얼마나 기다려야 하지….”
약속을 지키려면 몇 분이나 기다리다 내려가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였다.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벌컥 문이 열렸다.
“아.”
정희연은 문을 열어 준 남자를 똑바로 올려다봤다. 방금 씻고 나온 듯, 샤워 가운만 대충 걸친 알파의 턱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미처 주체하지 못해 흘러넘치는 페로몬 위로 원색적인 분위기가 섞이며 보는 이로 하여금 낯선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가느다랗게 접힌 눈꼬리와 가라앉은 눈빛, 느른하면서도 위압적인 분위기가 남자를 지배하고 있었다.
“대표님.”
연 대표는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그의 눈앞에는 정희연이 아닌 호텔 매니저가 있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마자 술과 담배를 부탁했으니까.
“왜 여기에….”
별다른 의심 없이 문을 연 순간, 미약한 치자 향이 손가락 끝을 전율케 했다. 지나치게 달콤한 냄새였다. 연 대표는 먹어 치우고 싶은 단내가 단순한 착각이라고 여겼다. 러트를 맞은 몸이 각인시킨 오메가의 페로몬을 느끼지 못해 미쳐 날뛰는군,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뿐이다.
그런데 눈앞에 그가 각인시킨 오메가가 서 있었다. 지나치게 단내를 풍기며.
“우리 애기가 있지….”
넘쳐흐르는 페로몬은 정희연의 존재를 알아차리자마자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연 대표는 진득하게 눈앞에 선 이를 응시했다. 이성이 남아 있을 때 내려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를 둘러싼 모든 감각이 눈앞의 오메가를 핥아 먹을 듯 집요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짐승 같은 집중력이 정희연의 머리카락부터 속눈썹, 젖은 뺨을 찬찬히 훑어 내렸다.
“희연아.”
잔뜩 늘어진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샤워 가운 안에 가려진 성기는 제 오메가의 페로몬을 알아차린 순간부터 이미 완전히 발기한 상태였다.
“우리 애기 누가 울렸어?”
정희연은 연 대표의 낯선 분위기에 눈도 깜박이지 못했다.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는데 알파의 가늘어진 입술이 느릿하게 질문을 던졌다. 누가 울렸냐는 말을 듣고 나서야 호텔로 오기 전, 눈물을 흘린 일이 떠올랐다. 슬퍼서 고인 눈물은 아니었다. 혹시 사고가 난 대표님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일까 봐 괜한 걱정에 고였던 눈물이었다.
정희연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연 대표가 자신을 놀리기 위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대표님. 다른 오메가 숨겨 두셨어요?”
몰래 두부를 만들기 위해 게스트룸에 콩을 숨겨 둔 날 들었던 말이었다.
“뭐?”
각인시킨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쯤 정신이 나간 남자는 정희연이 자신을 따라 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내 침실에 너 말고 누굴 들여.”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 사나워졌다.
“그런데 왜 러트인 거 말씀 안 하시고 거짓말하셨어요? 애인 사이에 거짓말하면 안 돼요.”
“하….”
연 대표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희연 때문에 내쉰 한숨이 아니라 이성을 붙잡기 위해 내쉰 가느다란 호흡이었다.
“자제할 자신 없으니까.”
“저 튼튼해서 괜찮아요.”
깊게 침잠한 시선이 정희연의 발목으로 향했다.
“우리 희연이 나중에 겁먹고 도망가면 어떡하지…. 대표님 그렇게 다정한 사람 아닌데.”
목소리가 점차 느려졌다. 연 대표는 한 줌만 한 발목을 보며 인내심을 붙잡기 위해 애썼다. 빨리 저 오메가를 삼키라며 페로몬이 날뛰기 시작했다. 신경 줄이 팽팽하게 곤두서며 손가락 끝에 힘이 실렸다.
“괜찮아요. 저한테는 다정하시잖아요.”
“러트는….”
연 대표는 뺨을 일그러트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정희연에게 제 본성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았다. 각인시켰으니 다른 알파에게 도망가지는 못하겠지만, 혹시라도 겁을 먹으면 뒷일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만약 겁먹어서 거부하면….
“대표님 마음대로 안으셔도 괜찮아요. 섹스가 거칠다고 해서 대표님이 저한테 다정한 분이라는 사실까지 변하는 건 아니잖아요.”
알파의 음습한 독점욕과 소유욕이 만들어 낸 지나친 망상이 순하지만 단단한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대표님이 저한테 보여 주시는 다정한 모습만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냥 대표님이 좋은 거예요.”
남자의 턱이 팽팽하게 땅겼다. 뺨을 가린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대표님이 저한테 어떤 모습 보여 주시든 상관없어요. 저는 그런 대표님도 사랑해요.”
“하하….”
연 대표는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남자의 얼굴에 비친 감정은 약간의 놀라움과 약간의 환희 그리고 거대하고 지독한 독점욕이었다.
“희연아. 도망가면 안 돼.”
정희연은 사납게 허리를 낚아채는 팔에 이끌려 남자의 품에 안겼다. 발정기를 맞은 알파의 페로몬은 부드럽지도 다정하지도 않았다. 한없이 사납고 한없이 거칠며 한없이 원색적이었을 뿐이다.
등 뒤로 문이 닫힘과 동시에 물에 젖은 입술이 갈급하게 달라붙었다.
반사적으로 살짝 벌어진 입술을 알파의 날카로운 이가 거칠게 짓뭉갰다. 이가 부딪칠 정도로 자제심 없는 달려듦이었다. 정희연은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라 눈도 감지 못했다.
곧바로 연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무서울 정도로 집중한 알파의 눈동자는 명백한 소유욕을 담고 있었다.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페로몬에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조금 더 크게 벌렸다. 뜨거운 살덩어리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막 벌어지기 시작한 잇새 사이를 화급히 벌리며 들어왔다.
“으응….”
고작 그 정도로는 만족하지 못하겠다는 듯 커다란 손이 하얀 뺨을 짓눌러 입을 더 크게 벌리도록 만들었다. 정희연은 숨을 헐떡였다. 혀를 뽑을 기세로 거칠게 빨아 대는 알파의 살덩어리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남자의 성급한 키스를 거부하는 대신 입 속을 마구잡이로 파헤치는 혀를 핥기 위해 애썼다. 알파의 페로몬이 타액과 함께 입 안으로 들어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고작 키스 하나에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흐, …읏!”
순식간에 다리가 공중으로 붕 떴다.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이 엉덩이 아래로 내려가 자그마한 몸을 그대로 들어 올린 탓이었다. 정희연은 연 대표가 잠깐 떨어져 나간 틈을 타 숨을 내뱉었다. 약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른하게 늘어진 눈매를 내려다보고 있자 뒤늦게야 남자의 입술 사이로 길게 늘어진 타액이 눈에 들어왔다.
“대… 읍!”
제 입술과 이어진 타액이라는 걸 깨닫자마자 곧바로 호흡이 먹혀 들었다. 한시라도 떨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남자의 움직임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정희연은 연 대표의 목을 꼭 끌어안은 채 서툴게나마 고개를 기울이기 위해 애썼다.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린 발가락이 운동화 안에서도 곱아들었다. 입 안을 꽉 채운 혀 때문에 호흡이 가빠 오는데도 숨막히는 충만함이 너무 좋아 몸이 떨렸다.
“저, 으…. 흣.”
발음이 금세 혀 안에서 뭉개졌다.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 남자의 머리카락에 손을 넣어 미친 듯이 질주하는 알파의 혀를 떼어 냈다. 연 대표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 왔다. 금방이라도 다시 달려들 기세에 정희연은 꼴깍 침을 삼키며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저도, 헉, 대표님한테….”
“응. 대표님한테.”
연 대표는 침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예의 다정한 말투로 정희연을 얼렀다. 발을 디딜 때마다 품에 안긴 오메가를 그대로 쓰러트려 비좁은 안을 거칠게 탐닉하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치밀었다. 다정한 말투와 달리 조그마한 엉덩이를 받친 손등에서 시퍼런 핏줄이 툭 불거졌다. 며칠을 내리 괴롭힐 텐데 적어도 침실에 도착할 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키스할래요….”
남자는 눈매를 접으며 느릿하게 혀를 내밀었다. 정희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배운 걸 그대로 따라 하려는 듯 정희연은 손으로 연 대표의 뺨을 조심스레 감싸고는 고개를 살짝 기울여 알파의 혀를 입술로 빨았다. 조금 전처럼 타액이 급박하게 뒤섞이는 소리가 아닌, 사탕을 빨듯 느리고 규칙적인 소리가 주변을 채워 나갔다.
정희연은 연 대표의 표정을 살피며 남자의 입 속으로 혀를 집어넣었다. 곧 뜨겁고 두꺼운 살덩어리가 혀를 낚아채 쭉쭉 빨아 대기 시작했다. 감각이 집중된 조그마한 살덩이를 알파의 이가 예민하게 긁어내렸다.
“으읏, 응….”
남자의 입 안을 유영하는 건 분명 정희연 자신의 혀인데도, 주도권을 앗아 간 사람은 연 대표였다. 속절없는 휩쓸림이었다. 고개가 몇 번이나 꺾이고 입술이 잠깐 떨어져 나갈 때마다 선홍색의 혀들이 정신없이 뒤엉켰다. 허리가 저절로 움찔 튀었다. 문이 닫힌 순간부터 알파의 페로몬에 예민하게 반응하던 아래가 키스 하나에 완전히 풀어져 물을 줄줄 흘리다시피 애액을 토해 냈다.
“하으, 으….”
각인 후 몸을 섞는 건 처음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섹스 도중 각인했으니 처음이라고 보기 어려웠지만, 전희부터 시작하는 건 처음이었다. 정희연을 침대 끄트머리에 앉힌 남자가 코트를 벗겨 냈다.
“대표님…. 흐윽,”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페로몬에 오메가의 몸이 뒤이어질 쾌감을 기대하며 잘게 떨렸다. 정희연은 남자가 옷 벗기는 걸 돕기 위해 팔을 들었다. 뒤늦게 신발을 신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라 그는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연 대표가 신발을 벗겨 내며 발목과 이어지는 얇은 힘줄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흘러나온 애액과 프리컴으로 속옷 안이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희연이는 대표님 보기 싫은가 보네….”
젖은 속옷이 신경 쓰여 바지만 빤히 노려보고 있는데 양말만 신은 발바닥에 불현듯 뜨겁고 딱딱한 감각이 닿았다. 느른한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든 정희연은 흠칫 다리를 움츠렸다. 하얀 시트가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엉망으로 구겨졌다.
“흐으, 으….”
침대에 걸터앉은 정희연과 달리 연 대표는 신발을 벗기기 위해 그 아래에 무릎을 꿇은 채였다. 샤워 가운에 간신히 가려진 거대한 성기가 이미 배에 닿을 듯이 팽팽하게 발기해 있었다.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연 대표가 발목을 잡고 있는 자세라, 자연히 발뒤꿈치가 남자의 허벅지를 스치며 발기한 좆이 옴폭 파인 발바닥에 닿았다.
몸의 가장 밑바닥에서 느껴지는 생경한 느낌에 정희연은 발가락 끝만 꼼지락거렸다. 발을 떼어 내고 싶으면서도 대표님의 표정이 너무 야해서 떼어 내고 싶지 않았다. 정희연은 발목을 잡힌 그대로 연 대표가 자신의 발로 자위하듯 움직이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양말을 신었는데도 샤워 가운 너머의 성기가 지나치게 선명하게 느껴졌다. 평소와 달리 과할 정도로 흥분한 남자의 모습에 정희연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싫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대표님, 흑…. 그냥, 섹스할래요.”
“으응. 그냥 섹스할 거야?”
평소처럼 달래는 어투에 정희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야살스럽게 웃은 남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입을 맞춰 왔다. 쵸옵, 촙. 조금 전보다 다소 느릿해진 키스에 안심한 오메가는 알파의 목에 팔을 둘렀다. 커다란 손바닥이 뒤통수를 받치더니 곧 몸이 부드럽게 뒤로 넘어갔다.
페로몬이 뒤섞이며 공기가 다소 무거워졌다. 그 사이로 타액에 젖은 살덩어리들이 마찰하는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연 대표는 정희연이 긴장하지 않도록 작은 혀를 부드럽게 핥아 대며 한 손으로 바지를 벗겨 냈다. 사냥 직전의 맹수는 먹잇감을 방심시킬 줄 아는 법이었다.
“애기라 그런가…. 다 젖었네.”
커다란 손이 프리컴으로 젖은 속옷 위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하으, 흐….”
정희연은 고개를 젖혔다. 보지 않아도 속옷이 앞뒤로 질척해졌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커다란 손이 손장난을 치자 속옷 안에 갇혀 프리컴을 줄줄 흘려 대던 성기가 그 안에서 토정했다. 자위하는 일이 없는 탓에 말랑말랑한 성기는 작은 접촉에도 쉽게 예민해졌다.
“아아…. 하, 대표, 님…. 흐으….”
성기가 사정하자 구멍이 좆을 달라는 듯이 발씬거렸다. 정희연은 알파의 물건을 조르듯이 조금 전 남자가 한 행위를 따라 하며 발바닥으로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를 문질렀다. 연 대표는 제 좆을 문지르는 하얀 양말을 보며 하,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정희연. 어떻게 감당하려고 이래.”
“흐으, 빨리….”
엉덩이 쪽으로 들어온 손이 애액으로 잔뜩 젖은 구멍 위를 건드렸다. 연 대표는 발갛게 물들었을 구멍을 떠올리며 느릿하게 손을 움직였다. 속옷 때문에 움직임이 제한됐지만, 덕분에 애액이 손가락은 물론 손바닥에까지 끈적하게 들러붙었다.
“아흐. 아, 아….”
정희연은 진저리를 쳤다. 속옷 안으로 들어온 긴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구멍이 애액을 왈칵왈칵 내뱉는 게 느껴졌다.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 때문에 머리가 핑핑 돌며 시야가 부옇게 변했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것처럼 흥분이 몰려와 정희연은 허리를 비틀었다. 급한 마음과 달리 아래를 만지작거리는 손가락은 느릿하기 짝이 없었다.
답답함에 스스로 속옷을 벗으려는 찰나, 엉덩이 쪽으로 들어간 남자의 커다란 손이 속옷을 벗겨 내며 앞쪽으로 나왔다. 덕분에 정희연은 완전히 젖어 질척해진 속옷과 남자의 손을 볼 수 있었다. 정액과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속옷 안쪽으로 성기가 흘려 대는 프리컴이 주욱 늘어졌다.
눈꺼풀을 반쯤 내리깐 남자가 보란 듯이 젖은 손바닥을 길게 핥았다. 잔뜩 흘러나온 체액과 그것들을 노골적으로 핥아 대는 연 대표의 행동에 정희연의 뺨이 열 오른 듯 붉어졌다.
“씨, 씻을래요….”
그는 위험한 분위기를 잔뜩 풍기는 알파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집었다. 아침에 샤워하긴 했지만, 사타구니가 너무 젖어 부끄러웠다.
“안 씻어도 되는데, 희연아.”
뒤집은 몸 위로 상체를 기울인 남자가 배 아래로 팔을 집어넣으며 속삭였다. 고작 목소리 하나에 긴장감이 치솟으며 귓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연 대표는 발갛게 변한 정희연의 귀를 잘근잘근 씹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움직임은 느긋했으나 각인시킨 오메가의 페로몬에 이성이 반쯤 날아간 상태였다.
“우리 애기 냄새 좋은데…. 응?”
“아, 아침에만 씻었는데…. 흐으, 창피해요. 대표님은, 흐, 아! 씻으셨, 잖아요….”
귓바퀴를 한창 빨아 대다 느릿하게 귓구멍 안으로 들어오는 혀에 둥그런 어깨가 얕게 움츠러들었다. 전신을 강타하는 긴장감과 흥분이 소름 끼칠 정도로 선명해 정희연은 조금 당황했다.
“으응. 창피해?”
“하으으….”
정희연은 대답도 하지 못하고 연신 신음했다. 몸을 뒤덮는 알파 페로몬이 너무 짙어서 자꾸만 숨이 헐떡여졌다. 사정한 성기는 어느새 꼿꼿하게 발기한 지 오래고, 구멍은 알파를 유혹하기 위해 페로몬을 줄줄 내뱉고 있었다.
“고작 이런 걸로 창피해하면 안 되는데….”
연 대표는 엎드린 목 뒤에 입술을 맞추며 상체를 세웠다. 어차피 자신의 체액과 정액, 페로몬에 범벅이 될 몸이었다. 씻을 시간을 주기에는 좆이 곤란할 정도로 팽팽하게 발기한 상태였다.
“흐으, 왜….”
연 대표는 배 아래쪽으로 집어넣은 팔에 힘을 실어 정희연의 무릎을 세웠다. 커다란 손이 하얀 엉덩이를 쥐고 양쪽으로 벌리자 오밀조밀한 구멍이 움찔거렸다. 정희연은 시트에 얼굴을 박은 채 밭은 숨을 내뱉었다. 대표님의 시선이 아래쪽을 향해 있다고 생각하자 발가락 끝이 곱아들었다.
“우리 희연이, 대표님한테 정떨어지면 어떡하지.”
정희연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고개를 저었다. 머리카락이 시트에 비벼지는 감각조차 미미한 흥분으로 다가왔다. 페로몬 때문에 온몸의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곤두섰다.
“아, 아니…. 정 안 떨어, 져, 흐윽.”
“뭘 해도 봐줄 거야?”
“으응, 응….”
신음인지 대답인지 모호한 소리였으나 러트로 눈이 돌아간 알파는 듣기 좋을 대로 해석했다. 남자는 곧장 자그마한 엉덩이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아, 아니, 아흐으!”
하얀 몸이 당황해 바르작거렸다. 회음부와 구멍을 핥는 게 혀라는 사실을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말캉말캉하고 뜨겁고 유연한 살덩어리가 애액으로 질척해진 회음부를 지나 구멍 위를 배회했다. 남자의 날카로운 콧대가 부딪힐 때마다 쾌감이 등허리에 매달렸다.
“이, 이거 아니….”
결국 정희연은 눈물을 터뜨렸다. 당황과 수치심, 쾌감이 뒤섞인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며 시트를 적셨다. 낯선 애무에 예민하게 달아오른 성기가 또다시 왈칵 정액을 토해 냈다.
정희연은 이 감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래를 빨아 대는 혀가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라 수치스러운 동시에 너무 좋아 견디기가 어려웠다.
“뭐가 아니야.”
연 대표는 나지막하게 웃으며 녹진하게 풀어진 구멍 위로 혀를 세웠다. 오메가 페로몬이 짙게 흘러나오는 곳에 얼굴을 처박자 러트를 맞은 몸이 흥분으로 잔뜩 달아올랐다. 성기와 달리 여리고 축축한 살덩어리가 부드럽게 풀린 내벽을 밀어내며 안쪽으로 진입했다. 환장할 정도의 단내가 코를 찔렀다.
씨발. 남자는 하얀 엉덩이를 움켜쥔 채 게걸스럽게 구멍을 빨기 시작했다. 구멍을 덮은 입술을 짓뭉개며 발갛게 달아올랐을 몸 안을 꼼꼼하게 핥았다.
“하으으, 아, 아, 아!”
허리가 떨리며 자연스레 배가 꺼졌다. 정희연은 엎드려 엉덩이만 치켜든 자세로 속절없이 신음했다. 내벽을 파고드는 혀는 성기와 달리 말랑말랑하고 유연했다. 지독한 애무에 톡 튀어나온 젖꼭지가 꼿꼿하게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낯선 쾌감에 머릿속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시트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며 손등뼈가 하얗게 도드라졌다.
“하…. 희연아, 왜 이렇게 달아. 응?”
“대, 대표님…. 흐으, 이제 그만, 할, 래요…. 그냥 자지 주세요.”
“왜애.”
연 대표는 혀로 한참을 쑤셔 잔뜩 예민해진 구멍을 바라보며 말꼬리를 늘였다. 타액에 축축하게 젖은 구멍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정희연의 불그스름한 성기를 제멋대로 주물럭거리며 회음부를 길게 핥았다.
“우리 희연이 여기는 좋아 죽는데….”
“아, 아니야, 흐, 윽.”
“으응. 아니야?”
남자는 금방이라도 애원을 들어줄 것처럼 다정하게 굴며 또다시 구멍 위로 혀를 내렸다. 안쪽에 고인 오메가 페로몬과 혀를 녹진하게 조여 오는 점막에 머리가 시뻘겋게 들끓었다. 그는 정희연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먹어 치우며 체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흐으으, 아, 아흣!”
촉촉하고 부드러운 안쪽을 혀로 쑤셔 대던 남자는 제 오메가가 곧 사정에 다다를 것을 눈치챘다. 연 대표는 곧바로 손을 뻗어 매끈한 귀두를 막았다. 엉덩이에 얼굴을 처박은 탓에 작은 몸이 파득거리는 움직임이 그대로 전해졌다.
“싫…!”
정희연은 손을 뻗어 성기를 가로막은 손을 치우려 했다. 당연하게도 연 대표는 밀려나지 않았다.
“흐으, 대표님…. 싸고 싶, 흑….”
아래가 쑤셔지는 감각에 사정감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정희연은 헐떡이며 연 대표를 불렀다. 지금까지 사정하지 못하도록 막으신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서운함이 뚝뚝 몰려왔다. 정희연은 서운한 티를 내며 투둑 눈물을 흘렸다. 신음에 우는 소리가 잔뜩 뒤섞였다.
“하아…. 싸고 싶어?”
연 대표는 느리게 얼굴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남자의 혀끝에서 구멍까지 늘어진 진득한 액체는 타액 같기도 했고 애액 같기도 했다. 연 대표는 서운함에 파들거리는 곧은 등을 바라보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목덜미를 깨물며 손가락을 치우자 깔려 있던 몸이 빳빳하게 굳어지며 남자의 손 위로 희멀건 액체를 뱉어 냈다.
“아, 아아…! 아흐, 으….”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뚝뚝 떨어졌다. 정희연은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강제로 막힌 사정이 뒤늦게 몰려오자 쾌감 때문에 몸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애기는 정액도 예쁘네….”
정희연은 허덕이며 간신히 뒤쪽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커다란 손에서 질질 흐르는 하얀 정액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연 대표가 보란 듯이 손바닥을 핥았다.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몰려와 눈을 꼭 감자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희연아. 서운해?”
“아, 아니…. 흐윽, 흑, 왜, 왜 자꾸…. 아!”
발음이 뭉개졌다. 알파의 성기가 타액과 애액으로 젖은 구멍을 느릿하게 벌리며 들어오기 시작한 탓이었다.
“대표님 좆 안 줘서 서운한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아흐, 흐, 으응…!”
연 대표는 쫀득한 근육이 성기를 조여 대는 감각을 만끽하며 천천히 허리를 밀어 넣었다. 각인당한 오메가는 러트 상태의 알파를 알아차리고는 무리 없이 커다란 좆을 받아먹었다. 하얗고 조그마한 엉덩이 사이로 묻히는 검붉은 성기를 바라보며 남자는 초조하게 입술을 핥았다. 갈증이 돌아 목이 탔다.
“후우….”
연 대표는 나른한 한숨을 내뱉으며 성기를 끝에 끝까지 처넣었다.
퍼억!
어깨 근육이 크게 꿈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정희연이 울음 같은 교성을 내뱉었다.
“하으, 으, 아아…!”
완전히 쾌감에 전 목소리가 시발점이 된 듯, 연 대표는 자그마한 골반을 붙잡은 채 허리 짓을 시작했다. 애액이 질질 흐른 허벅지 위로 알파의 피부가 달라붙자 찔걱이는 소리가 나며 피부가 쩍쩍 달라붙었다.
퍽, 퍽!
정희연은 연신 밭은 숨소리를 내뱉으며 헐떡거렸다. 간신히 치켜세운 엉덩이는 골반을 붙잡은 악력이 아니었다면 진작 무너졌을 만큼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힘이 들어가는 곳이라고는 알파의 성기를 감싼 몸 안쪽뿐이었다. 지나치게 크고 딱딱한 물건이 쑤셔 댈 때마다 부드럽게 풀린 내벽이 제멋대로 알파의 좆을 조였다가 풀어 대길 반복했다.
“흐윽, 너무 커어….”
“커도 잘 받아먹잖아. 하…. 예쁘네, 우리 희연이….”
골반을 붙잡은 손에 푸르스름하게 핏줄이 곤두섰다. 연 대표는 이를 악물었다. 정희연을 만난 순간부터 발기한 좆이었다. 한참을 혀로 맛본 부드러운 내벽이 알파의 자지를 쫀쫀하게 감싸 안았다. 페로몬에 완전히 잠식당한 알파는 오메가의 몸을 마음껏 휘저었다.
퍽, 퍼억, 푸욱!
움직임이 빨라질수록 무거운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아우성을 쳐 댔다. 귀두만 남겨 둔 채 성기를 뺀 남자는 욕을 뇌까리며 작은 몸 안쪽에 퍽 소리가 나도록 성기를 짓쳐 올렸다.
“아아!”
“후우….”
“하으, 아, 하, 하아….”
연 대표는 정희연의 등을 덮듯 상체를 기울이며 정액을 토해 내는 좆을 조금 더 깊숙이 파묻었다. 하얀 몸을 완전히 가린 단단한 어깨 근육이 남자의 호흡을 따라 크게 꿈틀거렸다.
“흐으, 대표, 님…. 키스, 하아, 흐….”
남자는 키스를 졸라 대는 뺨을 한 손으로 감싸며 타액을 뚝뚝 흘려 대는 입술을 자신의 혀로 먹어 치웠다. 극점을 자극당해 새어 나오던 신음이 알파의 입술에 완전히 삼켜졌다. 삽입이 깊어지자 침대에 완전히 짜부라진 몸이 바르작거렸다. 연 대표는 사정하면서도 얕게 허리를 치댔다.
“하으, 으, 으응….”
정희연은 안쪽을 채우는 남자의 정액을 처음으로 느꼈다. 따뜻하고 진득한 정액이 몸 안을 꽉 채우는 감각이 소름 끼칠 정도로 좋았다. 각인당한 오메가의 내벽이 알파의 씨를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연신 경련했다.
“하, 으….”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타액과 신음이 줄줄 샜다. 정희연은 완전히 탈진해 제대로 움직이지도 않는 팔을 뻗어 자신의 배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를 덮치고 있던 남자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귀를 깨무는 게 느껴졌다.
“대표님, 흐윽…. 가득 찬, 것 같은데…. 하, 아, 정액….”
“으응. 정액으로 가득 찼어?”
연 대표는 정희연을 따라 그의 배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프지 않게 누르자 하얀 몸이 신음을 내뱉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또다시 웃음을 터뜨린 남자는 가느다란 목덜미에 잇자국을 남긴 뒤 다시 상체를 일으켰다.
“다, 끝…. 히익!”
가냘픈 물음은 이어지지 못했다. 몸이 붕 뜨며 고개가 위로 젖혀졌다. 오금으로 손을 뻗은 남자가 엎드려 있던 몸을 단번에 뒤집은 것이다. 알파의 좆은 몸 안쪽을 꿰뚫고 있던 그대로였다. 내벽이 또다시 딱딱하게 발기한 성기에 짓이겨지며 겨우 진정한 몸을 흥분으로 달궜다.
“하으, 으, 아아….”
“희연아. 배부를 때까지 쌀까?”
연 대표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얹힌 엉덩이를 옆으로 벌리며 다정하게 물었다. 삽입한 채로 몸을 돌린 탓에 정액이 질금거리며 새어 나왔다. 노팅을 한 것도 아니건만, 러트라 사정액이 제법 많았다. 회음부를 만지작거리며 구멍과 가까운 피부를 바깥쪽으로 당기자 정액이 제 오메가가 흘리는 눈물처럼 투둑 떨어졌다. 연 대표의 가학성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흐으, 으….”
정희연은 간신히 숨을 헐떡이며 연 대표를 응시했다. 내장이 정액으로 범벅된 기분이었다. 샤워 가운을 언제 벗었는지, 남자는 나체였다. 격렬하게 움직인 탓에 땀이 흐르는 육체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보였다.
아래쪽을 쳐다보던 연 대표는 제 몸을 훑는 시선을 느끼고는 눈동자를 굴렸다. 나른함에 취한 듯 잔뜩 풀어진 눈동자에 미처 숨기지 못한 사나운 기색이 모습을 드러냈다.
완벽하게 우위를 점한 알파의 표정에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으며 손가락은 물론 발가락까지 흥분이 내달렸다. 러트 상태의 페로몬을 단 한 번 의식했을 뿐인데도, 몸이 주체하기 어려울 정도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대표, 님….”
눈을 깜박이자 생리적으로 고여 있던 눈물이 투둑 떨어졌다.
“더, 할래요. 흑, 배부를 때까지 싸 주…. 흣! 아아!”
느릿하게 빠져나가던 성기가 푸욱 소리를 내며 안쪽을 파고들었다. 연 대표는 예쁜 말만 내뱉는 입술을 집요하게 핥고 빨아 대며 꼿꼿하게 선 젖꼭지를 매만졌다. 허리를 쳐올릴 때마다 깔린 몸이 들썩이며 기다란 손가락 밑에 깔린 젖꼭지가 거침없이 비벼졌다. 그렇지 않아도 분홍색인 젖꼭지가 마찰에 붉게 달아올랐다.
“읏, 흑, 하아, 아, 아!”
러트를 맞은 알파는 오메가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하얀 엉덩이 사이로 반쯤 빠져나온 좆이 내부를 꽉 채운 정액에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위로 울퉁불퉁 흉하게 돋은 핏줄들이 부드럽고 연약한 내부를 거칠게 벌려 대며 몸을 들이밀었다.
퍼억, 푹!
연 대표는 정희연의 무릎을 이로 깨물며 추삽질을 반복했다. 안에 가득 싸지른 정액이 구멍 밖으로 질금질금 새어 나오며 거품이 일었다. 하얀 엉덩이가 까슬한 음모에 쓸려 붉어져도 그는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하얀 거품이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며 새까만 음모에 엉켜 들었다.
“희연아…. 후우…. 도망 안 갈 거야?”
정희연은 울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기가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배 속에 가득 찬 정액이 내장 쪽으로 밀려드는 감각이 생생했다. 계속해서 마찰 당한 안쪽은 퉁퉁 부어오른 것만 같았다. 느끼는 곳을 직격으로 찔러 대는 살덩어리 때문에 너무 느껴서 몸에 열이 오를 지경이었다. 신음 대신 거친 호흡만이 내뱉어졌다.
“왜 고개 저어…. 도망가면, 하, 대표님 화날 것, 같은데.”
도망가지 않는다는 의미로 고개를 저은 걸 알면서도 연 대표는 뻔뻔하게 대답을 강요했다. 허리 짓에 맞춰 몸을 떠는 애인이 사랑스러워 잔뜩 부은 눈가에 입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봐주지 않고 쳐 대는 허리와 달리 부드럽기 그지없는 입맞춤이었다.
“아니이…. 흐윽, 윽! 도망 안, 안 가요. 아, 아….”
신음을 내뱉는 혀를 혀로 짓뭉개자 정희연이 목에 팔을 감아 왔다. 연 대표는 욕을 짓씹으며 작은 입 속을 제멋대로 핥았다. 예쁜 모양의 성기를 몇 번 흔들자 하얀 몸이 허리를 비틀며 사정했다.
“아흐, 흐으…. 대표님, 하, 아아, 좋아요….”
“으응. 좋아?”
하도 만지작거리고 꼬집어 퉁퉁 부은 젖꼭지를 혀로 핥자 정희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었다.
“대표님도, 흑, 좋았으면…. 아!”
“희연아. 내가, 너한테, 하아…. 좆질을 하는데….”
정희연은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가지 못해 헐떡거렸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살결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한데 섞여 들었다. 애액과 정액 때문에 철벅거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구멍에서 흘러나온 액체들로 시트가 젖어 들었다.
“안 좋을 리가, 없지…. 하, 씨발.”
퍽! 딱딱하게 발기한 좆이 하얀 엉덩이 사이를 거칠게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알파의 성기가 또 한 번 사정했다.
“흐으, 아, 아….”
연 대표는 정희연의 타액을 핥아 먹으며 방금 사정한 성기를 느긋하게 빼냈다. 흉흉하게 곤두선 핏줄 위로 하얀 점액질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사정한 상태에서도 줄어들지 않은 성기를 빼내자 미처 다물리지 못한 구멍이 뻐끔거렸다. 몸을 섞은 후 계속해서 좆을 처박은 구멍이었다.
남자가 싸지른 정액 덩어리가 생크림처럼 투둑 떨어져 이미 잔뜩 젖은 시트 위를 또다시 적셨다. 구멍이 발씬거릴 때마다 애액이 섞인 좆물이 회음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하….”
연 대표는 숨을 고르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러트는 이제야 시작이었다.
정희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응, 으응…. 흐으, 으, 아!”
점멸했던 의식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으며 몸을 관통하는 감각 역시 거세지기 시작했다. 기절하기 직전에도 하릴없이 흔들리고 있던 몸은 깨어난 직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우리 애기 일어났어?”
연 대표는 성기를 빨아들이듯 꽉꽉 조여 무는 내벽을 고스란히 느끼며 자못 다정한 척 속삭였다.
“흐으, 연, 우범…. 하으, 응, 아아!”
정희연은 생각나는 단어를 아무렇게나 내뱉었다. 몸은 완전히 탈진해 힘없이 늘어져 있는데, 파도처럼 밀려오는 쾌락은 도무지 멈출 낌새가 없어 보였다. 늘 적당하게 주어지던 페로몬이 정희연을 질식시킬 듯이 거침없이 쏟아졌다.
“응. 연우범 왜.”
연 대표는 습관처럼 다정하게 대답하며 여기저기 붉게 물든 몸을 마음껏 탐닉했다.
“흣, 아…. 안을, 래, 흐윽….”
“으응. 안아 줘?”
그는 성기를 빼지 않은 채 능숙하게 정희연을 안아 들었다. 삽입이 깊어질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품에 안겨 있던 몸이 파드득 튀어 오르며 크게 경련했다.
“아! 흐윽, 대표님, 너무, 깊, 읏!”
조그마한 손톱이 놀란 듯 등을 마구 할퀴어 댔지만 연 대표는 개의치 않았다. 팔뚝은 물론이고 허벅지부터 등까지 정희연의 손톱자국으로 가득한지 오래였다. 하찮은 통증이 오히려 자극처럼 다가와, 남자는 칭얼거리는 애인을 달래듯 뺨에 입을 맞추며 허리를 쳐올렸다.
“아흑! 아, 아! 앗!”
“안아 주라며. 응?”
“히, 힘들…. 하, 아….”
잔뜩 젖어 축축해진 속눈썹이 남자의 너른 어깨 위로 비벼졌다. 연 대표는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리며 침대 밖으로 팔을 뻗었다. 헐떡이는 오메가의 시선이 그의 움직임을 따라붙었다.
“아, 앗!”
치받는 힘에 연신 신음을 흘리면서도 정희연은 남자의 팔을 좇았다. 커다란 손이 빨갛고 조그마한 무언가를 집어 드는 게 보였다. 그 정체가 궁금했으나 몸이 계속 흔들리는 데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희연아. 후우…. 궁금해?”
그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남자가 아니었다. 연 대표는 기다란 손가락을 정희연의 입술 사이로 집어넣어 작은 입을 벌렸다. 이내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예쁘게 썰린 딸기가 들어갔다. 정희연이 기절한 틈을 타 문밖에 놓인 트레이를 가지고 온 참이었다.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예상한 듯 트레이 위에는 물과 간단한 핑거 푸드, 즙 많은 과일이 잔뜩 놓여 있었다.
정희연은 영문도 모른 채 입 안에 든 과일을 씹었다. 상큼한 과일이 으깨지며 달콤한 즙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남자의 타액을 입에 넣은 것처럼 꼴깍 소리가 나게 삼키자 연 대표가 웃으며 딸기를 하나 더 입에 넣어 주었다.
“더 줘?”
“흑, 네. 더 먹을, 아….”
상냥한 물음에 정희연은 지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딸기를 먹는 동안 쳐올리는 속도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눈치챈 탓이었다 달콤한 과육을 삼키자 그나마 살 것 같았다.
“흐읏, 또 먹을, 래요. 아흐으…. 아니, 대, 대표님. 나중에 움직여어…,”
“응. 알았어. 아.”
조르듯 말하며 연 대표의 가슴을 콩 치자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알파의 좆이 배 속을 쑤시고 있는 탓에 얕은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희연은 밭은 호흡을 내뱉으면서도 연 대표가 내미는 딸기를 꼴딱꼴딱 잘도 받아먹었다. 배 안쪽은 멍이 든 것처럼 얼얼한데도, 과일이 넘어간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맛있어?”
“읏, 응….”
연 대표는 오물거리는 입술을 빤히 응시했다. 딸기를 넣어 줄 때마다 벌어지는 잇새 사이로 혀가 보였다. 딸기 물이 든 것처럼 붉은색이었다.
“하, 씨발.”
남자는 욕을 짓씹으며 그대로 딸기를 먹고 있는 입술을 깨물었다.
“읏, 응…. 흑!”
성욕을 충동질한 붉은 혀를 마음껏 빨아 당기자 상큼한 맛이 혀끝을 감돌았다. 연 대표는 언제 속도를 늦췄냐는 듯, 다시 허리를 쳐올리기 시작했다. 기절한 동안 안에 쏟아 낸 정액을 긁어냈는데도 앉아 있는 자세 탓에 꽉 막힌 구멍 사이로 정액이 질금질금 흘러나왔다.
“흐으, 으….”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키스를 조르며 남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조금이나마 달콤한 것을 섭취하자 몸이 금세 달아올랐다. 알파의 탄탄한 근육에 가슴이 쓸리며 말랑하던 젖꼭지가 연 대표의 배에 비벼지고 있는 성기처럼 빳빳하게 곤두섰다.
페로몬에 완전히 취한 오메가는 달뜬 신음을 내뱉으며 허리를 들썩였다. 알파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정희연.”
“으, 으응….”
“하, 씨발. 이러다 애기한테 노팅하겠네….”
연 대표는 정희연의 등을 받쳐 그를 침대 위로 눕혔다. 곧바로 허리를 내려 자그마한 입을 마음껏 헤집은 남자는 거칠게 추삽질을 반복했다. 퍽, 퍼억! 알파의 몸 전체가 꿈틀거리며 턱이 팽팽하게 땅겼다.
“씹….”
나지막한 욕설과 함께 연 대표는 퉁퉁 부은 구멍을 헤집던 좆을 빼냈다. 그리고는 정희연의 배 위에 그대로 사정했다. 꿀럭꿀럭 쏟아져 나온 정액이 하얀 배와 분홍색 젖꼭지를 지나 발갛게 물든 뺨까지 튀어 올랐다. 그에게 깔린 오메가가 사정한 것과 동시였다.
“흐으, 으….”
쾌락이 극점을 찍었다. 정희연은 숨이 넘어갈 듯 간헐적으로 호흡을 내뱉었다. 허리가 뜨며 온몸이 벌벌 떨렸다. 알파 페로몬이 담긴 정액이 몸 곳곳에 튀어 오르자 피부 위로 전율이 치달았다.
연 대표는 정희연의 벌어진 입술 근처에 튄 정액을 손가락으로 지익 그어 살짝 부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빼꼼 튀어나온 혀가 남자의 긴 손가락과 함께 그 위에 묻은 정액을 핥았다.
“흐으, 더, 할래요….”
“하하, 정희연.”
남자는 나지막하게 웃었다. 다정하지 않은 미소였으나 쾌락에 완전히 점철된 오메가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흑, 윽…. 아가 생길 때까지 할래요….”
“하아….”
연 대표는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닫히려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대충 정액을 긁어낸 그는 애인의 보챔을 사양하는 대신 자신의 정액으로 잔뜩 젖은 귀두를 붉게 물든 구멍에 갖다 댔다. 푸욱 소리가 나도록 삽입하자 그렇지 않아도 얇은 배가 꺼지며 안쪽으로 가득 찬 성기 윤곽을 내비쳤다.
“아! 아아, 앗!”
“애기가, 후…. 아가를 어떻게 낳아.”
남자는 후희를 즐기려는 것처럼 느리게 허리 짓을 반복하며 정액 범벅이 된 배를 아프지 않을 정도로 꾹 눌렀다. 정희연이 얕게 신음하며 고개를 도리질 쳤다.
“저, 흐윽, 흐…. 애기 아니…. 아흑, 흐, 흑!”
“으응. 애기 아니야?”
연 대표는 정희연의 입술을 살짝 깨문 뒤 그 사이로 흘러내리는 타액을 달게 받아 마셨다. 러트에 눈이 돈 상황에서도 노팅할 생각은 없었다. 히트까지 겹쳤다면 오메가 페로몬에 취해 싫다는 말에도 강제로 노팅했겠지만, 히트가 아닌 애인 덕분에 노팅 전에 성기를 빼낼 여력은 있었다.
“애인 말은, 하…. 다 들어줘야지.”
러트에 잠식당한 알파는 이번에도 저 좋을 대로 생각하며 달콤하고 상냥한 말을 교활하게 속삭였다. 노팅까지해서 임신시킬 생각은 없지만, 아가가 생길 때까지 좆질 할 의향은 있었다. 노팅만 하지 않으면 아가가 생길 일은 없을 테고, 그렇다는 건 러트 내내 정희연을 마음껏 먹어 치울 수 있다는 의미였다.
퍽!
느릿하게 빼낸 성기를 거칠게 쑤셔 넣자 정희연의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아!”
연 대표는 눈물에 젖어 발갛게 부은 눈가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응. 아가 생길 때까지 해.”
***
바람이 긴 궤적을 남기며 흩어졌다. 봄기운이 섞이긴 해도 가벼운 옷차림으로 맞기에는 퍽 차가운 공기였다. 어깨를 움츠리며 서둘러 실내로 들어가야 정상이건만, 남자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 대표님.
짙은 어둠을 배경으로 수 놓인 화려한 야경은 서늘한 눈동자에 담긴 순간 무채색으로 변한 듯했다. 야경을 내려다보는 남자의 무료한 낯에서는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 김지원이 오늘 대충 보고 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답니다.
“얼마나.”
하얀 담배가 기다란 손가락 사이를 굴러다녔다. 불티의 흔적이 조금도 없는, 새 담배였다.
- 상처가 터져서 곪았다고 하는데…. 진통제와 항생제가 다르긴 다른가 봅니다. 잘못하면 썩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 목숨 줄은 질긴지, 금방 죽을 것 같지는 않다고 합니다.
“궁금하긴 하네. 사람 몸도 고깃덩어리처럼 썩을 수 있는지.”
살벌한 대화 내용치고는 다소 나른한 목소리였다.
- 남수현 사장이 근처에 까마귀 다니지 않냐고 농담하던데요.
“까마귀 드나들 수 있는 구멍 정도는 만들어 놓고 그런 소리 하라고 해.”
끔찍한 소리를 내뱉으면서도 연 대표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시선을 아래쪽으로 떨어트릴 때마다 눈꺼풀 위의 흉터가 날카롭게 도드라졌다.
- 대표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아, 페로몬 쇼크도 확인했답니다.
비로소 알파의 입꼬리가 느슨히 올라갔다. 페로몬 기관이 망가지면 몸의 면역 체계 역시 무너진다. 베타에 비해 강인한 육체도 하등 쓸모없는 고깃덩어리로 전락하는 것이다. 알파 형질 특유의 단단한 몸으로 버텨 왔을 폭력과 굶주림, 갈증을 페로몬 기관이 망가진 늙은 알파가 과연 얼마나 더 견뎌 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다른 쪽은.”
연 대표는 연신 손가락 사이로 담배를 굴리며 물었다. 문득 흡연 욕구가 치밀었으나, 불을 피울 생각은 들지 않았다.
- 미국이라 큰 의심은 사지 않을 듯싶습니다. 약물이 넘쳐 나는 나라니까요.
“섹스 스캔들 때문에 미국까지 쫓겨나신 분이 개 같은 버릇은 못 버리셨나 봐.”
- 그 문제보다 총기 문제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강서의 사장이 말하길, 더럽게 노는 게 일상이라 잘못된 것도 딱히 모른다고 하더군요.
가늘어진 입술 사이로 냉소에 가까운 호흡이 흘러나왔다. 우성 오메가를 돈으로 매수해 접근시키는 것쯤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 덕분에 형질 망가트리는 게 수월했습니다. 약에 취해서 본인은 아직 모른다고 합니다.
“적당히 놀아 주다 잠수 타라고 해.”
- 알겠습니다.
“심수천은?”
연 대표는 마지막 용건을 물었다.
- 대표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결과 가져왔다고 합니다.
정희연을 납치한 놈들은 높은 확률로 반신불수가 되었을 터였다. 혹은 어느 한 부분이 날아갔든가.
“우리 1팀장님이 자신만만하신가 보네.”
복귀 명령을 알아들은 김철우는 잠깐 침묵했다. 회사에 있으니, 옆에 심수천이 대기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연 대표는 심수천을 바꾸라고 명하는 대신 평온한 어조로 다른 말을 내뱉었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고 전해.”
- 예, 알겠습니다.
손가락 사이를 굴러다니던 담배가 가벼운 손짓 하나에 손쉽게 구겨졌다.
계획은 한 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고 수월하게 진행 중이었다. 정영길은 페로몬 쇼크로 죽어 가는 중이었고, 정희연을 납치해 간 놈들은 톡톡한 대가를 맛봤다. 확인 후 직접 손볼 생각이긴 했으나, 심수천의 성격을 생각해 봤을 때 제법 만족스러운 꼴이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정희연을 독차지하려 들었던 강서효 역시 본인이 모르는 사이 형질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봄이 찾아올 때쯤이면 베타나 다름없는 형질로 변모할 것이다. 형질을 우선시하는 선하에서 그를 내치든, 강서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 자살하든, 연 대표에게는 알 바 아니었다.
- 내일 출근하시겠습니까?
“애기부터 달래고.”
아무 문제 없는 남자에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정희연이었다. 연 대표는 비스듬히 몸을 틀어 테라스에서 훤히 들여다보이는 거실을 응시했다. 이쪽을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하얀 얼굴이 어색하게 고개를 돌렸다. 대놓고 피한 적은 없어도 러트 이후 분위기가 미묘했다.
연 대표는 김철우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애인이 낯설게 구는 이유를 반드시 알아낼 생각이었다.
거실로 들어선 남자는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사나운 기색을 숨기며 얌전히 앉아 있던 오메가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내렸다. 소파에 앉은 그는 자신의 허벅지를 툭 건드렸다.
“이리 와.”
작은 몸이 마주 보는 자세로 꼬물꼬물 안겨 왔다. 치대는 건 평소와 다를 바 없었으나 연 대표는 정희연의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졌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품에 폭 안긴 상태에서 평소처럼 눈을 마주치는 대신 슬쩍 눈꺼풀을 내리까는 것만 봐도 그랬다. 힘이 실린 입술과 볼록한 뺨을 보니 분명 서운한 게 있는 것 같은데, 제 애인은 도통 먼저 알려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남자는 노련하게 내숭을 떨기로 마음먹었다.
“희연아. 대표님한테 정떨어졌어?”
“네?”
옅은 갈색 눈동자가 그제야 눈을 마주쳐 왔다. 연 대표는 짐짓 비탄에 잠긴 사람처럼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눈도 잘 안 마주치고…. 러트 때 너무 울렸더니 우리 애기가 정떨어졌나….”
“아, 아니에요.”
정희연은 안절부절못했다. 연 대표가 진심으로 서운해하는 눈치라 그는 재빨리 엉덩이를 들어 남자의 뺨에 짧게 뽀뽀했다. 허리를 감지 않은 연 대표의 손이 순식간에 말랑말랑한 뺨을 쥐더니 입술을 파고들었다. 밤바람을 묻혀 온 탓에 뺨에 닿는 체온이 조금 차갑게 느껴졌으나 입 속을 파고든 혀는 뜨거웠다. 움찔, 가벼운 키스에도 허리가 떨렸다.
“흣….”
알파의 러트를 받아 내느라 내내 시달린 몸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연 대표는 오랫동안 혀를 섞는 대신 좁은 입 안을 샅샅이 핥은 뒤 자그마한 살덩이를 부드럽게 빨고 물러섰다. 타액에 젖은 붉은 입술이 퍽 선정적이었다.
“정 안 떨어졌어?”
“네? 네. 저 대표님 좋아요.”
“그런데 왜 자꾸 피하는 것 같지. 러트 때문에 힘들었어? 너무 울렸나.”
연 대표는 정희연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물었다. 러트 때 그렇게 울려 놓은 주제에 퍽 다정한 목소리였다.
“대표님이….”
달래는 듯한 목소리에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몸이 힘들었던 건 사실이다. 섹스는 꼬박 며칠을 이어졌고, 계속해서 바뀌는 체위에 그는 말 그대로 엉엉 울었다. 발정기의 알파가 치받는 힘이 너무 강해서 울었고, 그만큼 과할 정도로 느껴서 울었다.
“응. 대표님이.”
언제 거칠게 굴었냐는 듯, 남자는 다정한 얼굴이었다. 느른하게 풀어진 눈매와 나긋하게 올라간 입꼬리, 여유로운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던 사나운 기색의 눈동자가 떠올라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연 대표가 무서웠다기보다는 그날 밤의 열기가 되살아나 손가락 끝이 아릿했다.
“…거짓말하셨잖아요.”
여전히 다정한 태도를 느끼며 정희연은 요 며칠 마음속에 꼭꼭 숨겨 둔 말을 툭 내뱉었다. 혼자서 감춰 뒀던 말을 입 밖으로 꺼내자 서운함이 해일처럼 몰려와 고개가 푹 수그러졌다.
“거짓말?”
뜻밖의 단어에 연 대표는 조금 당황했다. 그는 정희연을 끌어안은 채, 남은 손으로 말랑말랑한 뺨을 잡아 자신을 마주 보게 했다. 속상함에 잔뜩 젖어 있는 말간 얼굴을 발견한 순간, 알파의 신경이 순식간에 곤두섰다.
“아가 생길 때까지 한다고 하셨으면서 안에 안 싸시고….”
하얗고 보드라운 뺨을 붙잡은 손이 움찔 굳었다. 연 대표는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서운했어?”
“네. 서운했어요.”
발정기가 아닌 경우 임신 확률이 0에 가깝다는 사실쯤은 정희연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떠나서 연 대표가 자꾸 밖에 사정한 게 마음에 걸렸다. 생각의 방향이 나랑 아가 갖는 게 싫으신 걸까, 쪽으로 흘러간 탓이었다.
“희연아.”
연 대표는 어린 애인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안에 사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운해할 줄은 몰랐다. 오메가를 임신시키고자 하는 알파의 본능은 어린 애인의 발칙한 발언을 반겼으나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자는 지금 러트 싸이클이 아니었다. 러트 도중이었다면 제 오메가를 임신시키기 위해 성기를 처박고 노팅했을 법한, 위험한 발언이었다.
“히트 아닐 때 노팅하면 다쳐.”
“네? 아니에요. 우성은 잘 안 다쳐요. 그리고 각인하면 더 괜찮다고 했는데….”
“각인해도 너무 작아서 겨우 받아먹는데 어떻게 안 다쳐.”
“…그럼 왜 아가 생길 때까지 한다고 하셨어요?”
순진한 물음에 남자는 한쪽 눈을 가늘게 접었다. 러트라 제정신이 아니었고,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그런 말을 내뱉은 것이다.
‘응. 아가 생길 때까지 해.’
그것은 정희연을 마음껏 먹어 치우기 위한 교활한 속삭임에 불과했다.
“양에 찰 때까지 먹고 싶은데 우리 희연이가 허락 안 해 줄까 봐.”
남자는 순순히 대답했다. 러트 때 말장난을 치긴 했지만, 거짓말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먹어요…?”
“섹스.”
“아….”
섹스를 일컫는 비유적인 표현은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정희연은 새로 배운 표현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쌓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런 말씀 안 하셔도 대표님 하고 싶을 때까지 하라고 했을 것 같은데…. 아가 만드는 일은 거짓말하면 안 돼요. 중요한 일인데.”
“응. 잘못했어.”
연 대표는 피식 웃으며 젖살 오른 뺨을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네에. 중요한 이야기인데 앞으로 그렇게 거짓말하시면 안 돼요.”
“앞으로 안 할게. 서운한 거 풀렸어?”
옅게 남은 잇자국 위로 가볍게 입술을 내리자 안겨 있던 몸이 작게 바르작거렸다.
“대표님.”
정희연은 서운함이 풀렸다는 대답 대신 연 대표를 빤히 쳐다보다가 제법 진지한 어조로 물었다.
“저랑 아가 갖기 싫으세요?”
직설적인 물음이었다.
“저는 대표님 아가 갖고 싶은데…. 대표님이랑 저랑 돈 많으니까 키우는 데도 문제없잖아요. 대표님 닮으면 예쁠 것 같은데…. 제가 며칠 동안 생각해 봤는데 제대로 대답해 주신 적 없는 것 같아요.”
한참 어린 애인이 늘어놓는 임신 계획에 연 대표는 티 나지 않게 뺨을 굳혔다. 몸을 섞기 시작할 때부터 아가 운운하긴 했지만, 정희연의 진심인지 세뇌의 결과인지 도통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가스라이팅 피해자는 자신의 바람이 세뇌의 결과라는 걸 모를 때가 종종 있었으니까.
정희연의 바람과는 별개로 연 대표는 제 오메가를 임신시킬 생각이 없었다. 나이가 어린 건 둘째치더라도, 정희연이 살아온 환경 때문이었다. 이제야 담장 밖으로 나와 사회에 섞여 들고 있는데 임신이라니.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하게 해 줄 생각이나 임신하게 되면 온 신경이 아기에게 쏠릴 게 분명했다.
우성 알파의 본능이 각인시킨 오메가의 몸에 씨를 뿌리고 애를 배게 해 완전히 소유하라고 충동질해 댔으나, 남자는 사회화 과정을 거친 인간이었다. 아무리 알파의 본질이 짐승이라 한들, 정희연에게까지 짐승처럼 굴 생각은 없었다.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건 일로도 충분했다.
그와 동시에 연 대표는 직감했다. 정희연이 만약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랐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신시켜 제 새끼를 배게 만들고 완전히 소유했으리라는 사실을. 그동안 쌓아 온 인내심과 조그마한 오메가를 향한 애정 때문에 버티는 것일 뿐, 그 역시 본질은 어쩔 수 없는 알파였다.
“그게 아니라….”
연 대표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피해자를 앞에 두고 ‘네 생각이 네 온전한 바람이 아닐 수도 있다.’라는 말 따위는 할 수는 없었다. 정희연이 과거를 돌이켜 보게 만드는 상황 역시 피하고 싶었다.
“가족 계획은 결혼하고 세워야지.”
결국 연 대표는 무난한 말을 꺼냈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은 애인이 쉽게 납득할 수 있도록.
“결혼이요?”
뜻밖의 단어에 정희연은 허리를 끌어안은 남자를 빤히 응시했다. 생각해 보니 선후 관계가 바뀐 것 같기는 했다.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는 커플들도 많지만, 대부분은 결혼하고 나서 아이를 가지니까.
대표님 아가라면 무슨 상관일까 싶었지만, 곰곰이 고민해 보니 대표님께서 도둑놈 소리를 덜 듣게 하려면 아가는 결혼하고 갖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괜히 제 욕심 때문에 애 임신 시켜서 결혼한 도둑놈이라는 말을 대표님이 듣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해요.”
또박또박 말하자 연 대표가 목을 울리며 나지막이 웃었다. 왜 웃으시지? 의아함에 알파의 허리를 꼭 껴안자 자연스레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프러포즈한 거야?”
“네.”
“희연아. 반지는?”
“아…. 내일 드릴게요. 반지 드리면 결혼해 주실 거예요?”
“아니.”
단칼에 돌아오는 거절에 정희연은 눈만 깜박거렸다.
“우리 희연이 너무 어린데.”
“네? 안 어려요. 성인인데….”
“대표님 각인도 못 시켰잖아.”
청혼을 거절한 이유는 단순했다. 어린 애인이 툭 내뱉은 말을 덥석 물어 결혼을 진행할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어차피 평생 데리고 살 예정이니 실컷 예뻐해 주다가 완벽한 날을 노려 법적으로 묶을 생각이었다.
“그리고 일방 각인일 때 아가 가지면 페로몬 불안정해져서 안 돼, 희연아.”
홀리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정희연은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했다. 대표님께서 프러포즈를 거절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신도 대표님도 우성이니, 임신하게 되면 아가는 무슨 형질이든 우성으로 태어날 터였다. 페로몬이 불안정한 오메가가 우성으로 태어날 아가를 품는 건 다소 위험했다.
성인인 자신을 보며 어리다고 말씀하시는 것도 무슨 의미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페로몬 조절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대부분 어린아이거나 사춘기의 십 대들이었다. 단순히 페로몬만 놓고 보면 어리다는 이야기도 영 틀린 말은 아닌 셈이었다. 연 대표를 아직 각인시키지 못하기도 했고.
“그럼 제가 대표님 각인시키면 그때 결혼해요.”
정희연은 조금 긴장 어린 목소리로 선언하듯이 요구했다. 연 대표가 웃으며 입술 위로 짧게 입을 맞춰 왔다.
“응. 그때 대표님한테 프러포즈해.”
“네에.”
며칠 동안 혼자서 심각히 고민하던 문제들이 전부 정리되자 긴장이 풀린 듯 몸이 나른해졌다. 정희연은 그대로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기분 풀렸어?”
“네. 저만 아가 갖고 싶은가 해서 속상했어요….”
“으응. 그랬어?”
“네. 그런데 대표님 각인시키고 나서 결혼하면 아가 가질 수 있으니까 이제 괜찮아요.”
정희연은 남자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페로몬 냄새에 기분이 좋아졌다.
차근차근 미래에 대한 계획을 늘어놓자 연 대표와 처음 만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컨테이너 사이로 쏟아지던 파란 달빛과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지나치게 아름답고 지나치게 섬뜩했었다.
“대표님. 처음에 대표님 만난 바다 가고 싶어요.”
정희연은 충동적으로 내뱉었다.
“지금 갈까?”
귀를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다정하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을 텐데도, 당황스러움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아, 그런데 대표님 피곤하실 것 같아요. 지금 새벽인데…. 부산까지 운전하려면 피곤하시잖아요. 제가 헬기 잘 못 타서….”
“괜찮아.”
연 대표는 정희연을 안은 자세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가고 싶으면 가야지. 안 피곤해.”
“그래도요.”
“대신 선물 주면 되지, 희연아.”
“뽀뽀면 돼요?”
“응. 뽀뽀면 돼요.”
알파의 품에 안기는 게 익숙해진 오메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 연 대표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이 남자의 날카로운 흉터 위로 조심스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