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4/20)

뜬장 위의 개

1

동그란 머리 위로 가볍게 입술을 내리자 안겨 있던 몸이 얕게 바르작거렸다. 연 대표는 무의식적으로 제게 붙어 오는 체온을 만끽하며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날카로운 흉터가 근육의 움직임을 따라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희연아.”

그리 작은 목소리는 아니었다. 그러나 깊은 잠에 빠졌는지 이름의 당사자는 말간 눈동자를 보여 주지 않았다. 차라리 눕혀서 재울까, 고민하던 남자는 이내 제게 안겨 있던 몸을 눕히길 포기했다.

사고가 난 지 어느덧 사흘째였다. 회사에도 나가지 않고 내내 붙어서 페로몬을 쏟아부은 덕에 정희연의 상태는 많이 안정되고 있었다. 지금처럼 잠에 빠져드는 시간이 길어지긴 했지만.

연 대표는 볼록 솟아오른 뺨을 살펴보다가 얇은 손목과 연결된 링거 줄로 시선을 옮겼다. 잠든 오메가의 몸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는 약물은 페로몬 안정제였다. 베타들이 맞는 수액처럼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약물이지만, 날카로운 주삿바늘이 얇은 피부를 뚫고 들어간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의 상념은 사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페로몬 안정제입니다. 하루에 한 번씩 맞으면 되고요.’

서슬 퍼런 시선을 느꼈는지, 주삿바늘을 꼽던 김지원이 뒤늦게 설명을 덧붙였다. 곧바로 병원으로 가 정밀 검사를 마친 뒤였다. 오프 중인 교수를 불러내는 것쯤이야, 그에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페로몬 쇼크는.’

‘차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대표님이 우성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희연 씨가 대표님 페로몬을 익숙해하는 편이라 쇼크까지는 안 간 상태입니다.’

김지원의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묻어 나왔다.

‘그래도 약물을 사용하면 조금 더 빨리 안정시킬 수 있으니까 쓰는 겁니다. 한 번 다 맞으려면 세 시간 정도 걸리는데 가급적이면 대표님 품에 안긴 상태로 맞는 게 좋고요. 페로몬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신체가 맞닿을수록 효과가 크거든요. 안정제도 안정제지만 잘 맞는 페로몬보다 좋은 건 없습니다. 약물은 어디까지나 보조제라, 안정제 맞을 때도 신체 접촉을 권장해 드리는 거고요.’

‘알았어.’

연 대표는 정희연에게 시선을 떼어놓지 않으며 대답했다.

‘안정제 맞으면 지금처럼 잠들 겁니다. 이게 체내에 흐르는 호르몬을 강제적으로 누르는 약이라 몸이 나른해지거든요. 그리고 대표님께서 옆에 계시면 알파 페로몬 때문에 몸이 더 늘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오래 잔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페로몬이라는 게 베타들 표현 빌리자면 미약 비슷한 거니까요.’

차분히 설명을 듣던 남자는 김지원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병원 싫다고 집에 가고 싶다고 하던데.’

‘아, 집에 가셔도 괜찮습니다. 주사야 제가 놓을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제일 중요한 건 알파 페로몬이라 희연 씨가 편한 장소에서 맞는 게 더 좋습니다. 계속 말씀드렸지만, 대표님 페로몬은 항상 풀고 계세요.’

잠깐 말을 멈춘 김지원은 잠든 오메가의 얼굴을 확인한 뒤에야 느지막이 다른 대화 주제를 꺼내 들었다.

‘가벼운 뇌진탕이라고 합니다.’

정 회장에 관한 이야기였다.

‘애는 저 지경을 만들어 놓고 고작 뇌진탕?’

연 대표가 가늘게 입꼬리를 늘리며 빈정거렸다. 의사가 아니더라도 객관적으로 상황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단순 타박상보다 뇌진탕이 훨씬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김지원은 괜한 소리를 내뱉어 고용주의 신경을 거스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회장님이 연세에 비해 튼튼하셔서 다행이네…. 하긴, 벌써 죽으면 안 되지.’

정 회장의 치료를 지시한 건 다름 아닌 연 대표였다. 남자의 나쁜 버릇을 알고 있는 김지원은 이번에도 침묵했다.

‘심수천은.’

‘갈비뼈에 금이 가긴 했는데 그거 빼면 괜찮습니다. 지금 많이 빡쳤던데요.’

연 대표는 잠든 정희연의 머리카락을 건드리며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했다.

사고가 벌어진 것과는 별개로 심수천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정희연이 하고 싶어 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라고 한 사람이 자신이었으니까. 데리고 오지 말라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을 리는 없지만, 일련의 상황이 눈앞에 빤히 그려졌다. 심수천이 어떤 의도로 정희연을 차에 태웠는지도.

사고가 벌어지지만 않았어도, 연 대표는 분명 심수천의 결정에 만족해 했을 것이다.

‘움직이는 데는 이상 없고?’

‘네. 자존심 많이 상한 것 같던데요.’

남자는 자신의 사람을 막 다루는 편이 아니었다. 팀장급은 그가 직접 데려온 알파들이었고, 대부분은 뜬장에서 함께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혹은 건너 건너 뜬장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놈들이거나. 심수천은 전자였다.

연 대표는 폭력으로 사람을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물리적인 위해로 사람을 길들이고 충성심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 자신이 여기까지 올라올 일도 없었을 터였다. 폭력이 충성심과 비례했다면 연우범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남자를 배신하지도, 죽이지도 않았을 테니까.

연 대표는 사람을 다룰 때만큼은 사업가의 탈을 뒤집어쓰는 편이었다. 적절하게, 그리고 효율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정희연에게 지우(馶遇)의 알파들이 껌벅 죽는 건 정희연이 지닌 순한 성정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 기반은 어디까지나 연 대표를 향한 충성심이었다. 그를 향한 충성과 존경이 있기에 그가 싸고도는 오메가에게도 친절한 것이다.

‘우리 팀장님은 일 맡겨서 좀 굴려야겠네.’

남자의 어조는 가볍기 그지없었다. 심수천에게 손을 대지 않는다고 해서 책임까지 덜어 준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당분간 심수천은 좆빠지게 뛰어다녀야 할 터였다. 교통사고 후유증쯤이야 본인이 알아서 처리할 문제고.

정 회장에게 돈을 받아 처먹은 대가로 정희연을 납치한 놈들을 찾으라고 지시하면 도리어 좋아서 날뛸 놈이었다. 일이 마무리되면 상한 자존심도 그럭저럭 회복될 테고. 물론 그 전까지 1팀장 자리는 내놓아야겠지만.

앞으로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셈하고 있을 때였다.

“대표님….”

조그마한 속삭임이 남자의 상념을 일깨웠다. 연 대표는 주삿바늘로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움직였다. 정희연이 눈을 깜박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깼어?”

“네. …그런데 계속 졸려요.”

“계속 자도 돼. 희연아, 누울까?”

연 대표는 하얀 뺨을 부드럽게 문지르며 정희연을 얼렀다. 시퍼렇게 멍이 든 부분은 건드릴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아니요. 전 이게 더 좋은데…. 대표님 불편하세요?”

“안 불편해.”

“그럼 이렇게 잘래요. 계속 안아 주시면 안 돼요?”

“으응. 계속 안아 줘?”

온순한 갈색 눈동자에 졸음기가 가득했다. 연 대표는 그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며 작은 몸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

“네. 대표님 페로몬 냄새 좋아요.”

“계속 풀어 둘 테니까 자. 손등 안 아파?”

“네. 괜찮아요.”

등을 몇 번 토닥여 주자 정희연이 품을 파고들며 다시 눈을 감았다. 머지않아 규칙적으로 호흡하는 소리가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연 대표는 방금 잠든 오메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팔을 뻗어 태블릿을 열었다.

정희연을 돌보느라 집에 처박힌 사흘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언론의 타깃이 연우범 그에게서 선하 그룹으로 옮겨 간 일은 사건 축에도 끼지 못했다.

강남의 총기 사고를 제일 처음 보도한 선우 일보 김재호 기자의 정정 보도가 시작이었다. 사람들은 공격적으로 연 대표를 겨냥하던 선하 그룹에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섹스 스캔들 당사자인 강서효가 관련 TF 팀 담당자라는 게 밝혀지며 소란이 일었다. 관련 정보를 흘린 사람은 강서의일 터였다.

지우(馶遇) 측에서 M88A 모델의 코드 추적과 자료 누락에 대해 소명한 순간, 선하는 함정에 빠졌음을 직감했을 것이다. 강서효가 정 회장의 손을 놓은 것도 그 때문이었을 테고. 그 정도면 연 대표 역시 한발 물러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거만하기 짝이 없는 오산이자 오만이었다.

그 결과 선하는 퍽 당황스러운 상황에 직면했다. 조용히 넘어가나 싶었던 섹스 스캔들 ‘해프닝’이 단순 해프닝이 아니게 된 게 먼저였다. 어떠한 경로를 통해 유출됐는지 알 수 없으나, 인터넷에 업로드된 강서효의 섹스 동영상 수위가 문제였다. 포르노에 가까운 수위는 기자들이 물어뜯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이미지 실추와 총기 불법 유통 의심이 맞물리며 강서효는 사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곧 그 자리를 강서의가 치고 올라갈 터였다.

남자의 손가락이 태블릿 화면을 가볍게 건드렸다. 연 대표는 고작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지이잉-.

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강서의에게서 온 전화였다.

연 대표는 정희연의 얼굴부터 확인했다. 곤히 잠든 걸 보니 쉽게 깰 것 같지는 않았다.

“강서의 전무님.”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부진하게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보다 통화로 빠르게 용건을 끝내는 편이 나았다. 그래야 정희연에게 조금이라도 더 집중할 수 있을 터였다.

- 연 대표님. 제가 조만간 축하주 사겠습니다.

“쓸데없는 말 할 거면 끊죠.”

- 아, 지금 정희연이랑 계신가 봐요?

“강서의.”

낮게 으르렁거리자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 죄송합니다.

강서의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가라앉았다. 사나운 기세에 완전히 겁먹은 목소리였다.

“용건.”

평소 같았으면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환기했을 테지만, 연 대표에게는 그럴 만한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정희연의 머리카락에 코를 묻으며 사나워지려는 심기를 가라앉혔다.

- 첫째 형님 완전히 나가리 됐습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단단히 화가 나셨더라고? 섹스 스캔들 터졌을 때까지만 해도 사생활이라 그냥 넘어가는 눈치였는데, 총기 밀매 터지니까 우리 강 회장님도 빡 돈 거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건 아시죠?

“방금 기사 확인했습니다.”

정희연이 깨기라도 할까 봐 그는 최대한 목소리를 죽였다. 따끈따끈한 몸이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치자 향이 코를 찔렀다.

- 이번 사건은 너무 커서 재기 불능 수준이에요. 뭐, 우리 강 회장님이 마음만 먹으면 불러들일 수 있기야 하겠지만…. 그 전에 내가 자리 꿰차야죠. 아무튼 강서효 완전히 치워 주신다고 말씀하신 거 생각나서 감사 인사드릴 겸 연락드렸습니다.

“강서의 전무님은 그게 완전히 치운 걸로 보이시나 봐.”

- 예?

매끈한 입술이 냉소를 담으며 비틀렸다. 정희연이 그 손버릇 나쁜 알파에게 넘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의 오메가를 품으려 했다는 사실이 연 대표의 신경을 갉작였다. 정희연의 존재를 먼저 안 건 그쪽이니 선후 관계가 뒤바뀐 셈이지만, 선후 관계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존재 자체가 거슬리기 시작했으니 치워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재기 불가능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내가.”

- …어떻게 말입니까?

“사장 자리에서는 물러나 봤자 해외 지사로 발령 나겠지.”

- 그렇, 죠?

“선하 강 회장이 그렇게 집착하는 게 알파 형질인데….”

폭 안겨 있던 몸이 꼼지락거리자 연 대표는 잠깐 말을 멈췄다. 자신의 허리를 꼬옥 감싼 팔에 미약하게나마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숨소리는 여전히 평온하고 달았다.

“형질이야 망가트리면 그만 아닌가….”

앞으로 오메가에게 좆질 하는 건 불가능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 하하. 대표님. …나한테 과분한 선물인데. 이 정도 해 줘도 괜찮아요?

“여기까지 해 줬으면 지금처럼 나한테 기어오를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잠깐 침묵한 강서의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 알겠습니다. 다음에 먼저 찾아뵙겠습니다.

알아서 기는 듯한 어투에 남자는 곧바로 전화를 끊었다. 강서의를 마음대로 휘두르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었다. 연 대표 자신을 배신할 생각 따위는 꿈에도 하지 못하겠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강서의의 약점을 모조리 손에 쥐고 있었다.

핸드폰을 내려 둔 남자는 잠든 오메가의 이마에 습관처럼 입을 맞췄다.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

검사지를 자세히 훑던 연 대표는 뺨을 찡그렸다.

“애 페로몬 수치가 왜 이래.”

“첫날 비교하면 꽤 안정된 수치인데요. 문제라도…?”

“전에 비해서 너무 널뛰는데.”

김지원은 말을 고르기 위해 잠깐 숨을 가다듬었다.

“대표님께서도 그간 가까이에서 봐서 아시겠지만, 희연 씨 페로몬 수치가 원래 그렇게 안정적인 편은 아닙니다.”

난임 주사는 독한 약물이다. 그걸 난임 오메가도 아닌 우성 오메가가 몇 년이나 맞았으니, 페로몬이 불안정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정희연의 상태는 흘러넘치기 직전의 댐과 다를 바 없었다.

우성 알파인 연 대표가 매일같이 붙어 있던 덕분에 그나마 안정적인 궤도에 올라선 수치가 근래에는 다시 널을 뛰기 시작했다. 원인은 당연히 이 주 전의 사고 때문이었다. 그래도 페로몬 쇼크 직전까지 간 상황을 고려하면 지금은 제법 안정된 축에 속했다.

“두 달 사이에 꽤 괜찮아진 상태였는데, 정 회장이 하필 희연 씨와 혈연관계라…. 게다가 페로몬 쇼크라는 게 같은 형질 사이에서도 나타날 수 있지만, 다른 형질 사이에서 그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지거든요. 다행히 희연 씨는 페로몬 쇼크까지 안 가기도 했고, 위험했던 것치고는 지금 수치도 꽤 괜찮은 편입니다.”

“문제가 아예 없는 건 아닐 텐데.”

“페로몬 쇼크 직전까지 가더라도 관리만 잘하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게 일반적입니다. 문제는 희연 씨가 너무 오랫동안 난임 주사를 맞았다는 거고요.”

연 대표는 계속하라는 듯 김지원을 응시했다. 금방이라도 누구 하나 족칠 듯한 싸늘한 표정이었다.

“어려서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표님께서 지금처럼 페로몬 관리만 해 주시면 시간이 조금 걸려도 괜찮아질 겁니다. 우리 직원들이 대표님 페로몬 냄새 때문에 고생 좀 하겠지만요. 뭐, 그건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죠.”

“김지원.”

낮은 목소리가 이름을 읊조리자 김지원은 괜히 놀라 안경을 추켜올렸다.

“말씀하시죠.”

“방법. 알지?”

알파의 위협적인 손가락이 테이블 위를 툭, 건드렸다.

“예?”

“빨리 안정시키는 방법. 알고 있으면서 말 안 하는 것 같은데.”

이래서 눈치 빠른 고용주는 곤란했다. 김지원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입가를 문질렀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냈을 때, 눈앞의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예상 가지 않았다.

“대표님, 혹시….”

김지원은 잠깐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희연 씨한테….”

“애기한테.”

“각인하는 거. 생각해 보셨습니까?”

***

각인이라고.

유리잔 안에 든 진한 액체가 느긋한 움직임을 따라 기울어지더니 곧 남자의 입술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유영하듯 느린 속도였다.

연 대표는 반쯤 빈 크리스털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며 느릿하게 그 표면을 문질렀다. 어린 애인은 잠들어 있는 깊고 야심한 시간이었다.

‘각인하는 거. 생각해 보셨습니까?’

김지원의 조심스러운 물음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각인. 남자는 짧은 어절의 단어를 몇 번이고 혀 안에서 굴렸다.

각인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각인 욕구가 없는 알파가 몇이나 될까. 다만 그 시기가 지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페로몬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각인하려 들면 위험해질 확률이 있다고 했으니까.

정희연의 페로몬은 늘 불안정했고, 연 대표는 매번 각인을 미뤘다.

‘페로몬 불안정할 때 각인하면 위험하다고 한 게 김지원 선생인데.’

‘위험하다는 게 사실 상대적인 개념이니까요.’

말을 꺼낸 당사자는 다소 복잡한 표정이었다.

‘우선 각인이 드물게 이루어지는 이유부터 설명 드리겠습니다. 각인이라는 건 서로의 페로몬을 얽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페로몬을 타인의 페로몬과 섞으려면 그만큼 정교하게 다룰 줄 알아야겠죠. 대부분은 그럴 능력이 없는데 무턱대고 각인하려고 하니까 그 반작용으로 당하는 쪽이 크게 앓는 겁니다.’

‘그래서?’

‘대표님은 페로몬 다루는 솜씨가 수준급이잖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희연 씨 몸에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아픈 애 붙잡고 섹스하는데 몸에 무리가 안 간다고?’

얄팍하게 눈을 좁히며 빈정거리자 김지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슴을 퍽퍽 쳐 댔다.

‘지금 의사인 저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페로몬 테라피가 괜히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애 몸에 무리 가는 짓 할 생각 없어.’

‘방법 아냐고 물어본 건 대표님이십니다. 의사로서 설명해 드릴 테니까 잘 들으세요. 지금 희연 씨 페로몬이 날뛰는 건 페로몬 쇼크 직전까지 간 사고 때문입니다. 낯선 알파 페로몬이 막무가내로 휘저으니까 몸이 견디기 힘들어하는 상태예요. 그런데 각인하게 되면 대표님 페로몬에만 반응하게 될 테니 페로몬 수치가 오히려 안정될 겁니다. 대표님 페로몬이 희연 씨 체내에 남아 있는 다른 알파 페로몬을 잡아먹을 테니까요.’

‘잡아먹는다고.’

‘잡아먹는다는 표현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형질자에게 페로몬은 살아 있는 유기체나 다름없습니다. 희연 씨가 다른 알파 페로몬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대표님 페로몬이 남아 있는 정 회장 페로몬을 없애면 자연스레 희연 씨 상태도 안정되겠죠.’

김지원은 강조하듯 재차 말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페로몬이 불안정한 상대에게 각인하려 드는 게 위험한 이유는 대부분이 자기 페로몬을 제대로 다룰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대표님께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은 건, 각인 실패의 가능성 때문이고요.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각인 반작용을 감수하고서라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각인 실패가 페로몬 쇼크보다 위험하지는 않으니까요.’

연 대표는 잔을 문지르던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그 안에 든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느낀 감정은 아마 저열한 만족감이었을 것이다. 거리낌 없이 정희연을 각인시킬 수 있다는, 그리고 정희연을 각인시킬 수 있는 알파가 자신뿐이라는 저열한 만족감.

제게 예쁘다 말하는 오메가를 각인시키면 그 오메가는 다른 알파의 페로몬 따위는 느끼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알파의 독점욕과 소유욕을 충족시키기에 제법 달콤한 단어였다.

“하….”

그러나 연 대표는 망설였다. 어디까지나 정희연 때문이었다. 한번 각인하면 다른 알파는 못 만나겠지. 놓아줄 생각은 조금도 없으면서 쓸데없는 망상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걱정을 가장한 위선일지도 모른다. 다정하게 굴지 않으면 제 침실에 누워 있는 오메가가 도망가기라도 할까 봐 답지도 않은 가식을 떠는 것이다.

완전히 잔을 비운 남자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민해 봤자, 그가 선택할 길은 하나뿐이었다.

자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침실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희연아. 깼어?”

“네. 요즘 낮에 계속 자서 깼나 봐요.”

“이리 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자 정희연이 당연하다는 듯 꼬물꼬물 안겨 왔다. 연 대표는 제게 끌어안긴 몸을 토닥이며 발목부터 살폈다.

“발목은?”

“괜찮아요. 김지원 선생님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저 이제 잘 걸어요.”

“으응. 이제 잘 걸어?”

“네. 하나도 안 아파요.”

연 대표는 정희연의 턱선을 손으로 감싸 살짝 옆으로 돌렸다. 하얀 뺨 위로 아직도 푸르스름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목에 남은 멍보다는 덜했지만, 눈썹이 찌푸려지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조심스러운 태도를 느꼈는지 정희연이 고개를 바로 했다. 힘을 싣지 않고 가볍게 잡고 있던 탓에 연 대표의 손가락이 하얀 뺨에 닿았다.

“만지셔도 안 아파요.”

정희연은 연 대표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색이 빠지지 않아서 그렇지, 뺨은 이제 말짱했다. 목은 여전히 아팠지만, 그마저도 살갗 위의 피부가 아릿한 정도지 목 안쪽이 아픈 건 아니었다. 대표님이 도자기 인형 대하듯 조심스럽게 행동하시는 이유를 알고 있지만, 정희연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무척이나 튼튼했다.

“멍 때문에 흉해요?”

괜히 남자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묻자 연 대표가 눈을 좁혔다.

“누가 흉하대.”

“안 만져 주시잖아요.”

“아플까 봐 그렇지.”

“이제 안 아파요.”

정희연은 며칠 내내 입에 달고 사는 말을 또다시 내뱉었다. 그는 손가락을 조금 더 꼼지락거리다 연 대표를 은근슬쩍 올려다봤다.

“대표님이랑 키스도 하고 싶은데….”

허리를 껴안고 있던 팔이 크게 꿈틀거렸다.

“으응. 키스하고 싶어?”

연 대표는 짧게 웃으며 정희연의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작은 몸을 끌어안은 손에 저절로 힘이 실렸다. 고개를 들어 귀 아래쪽에 입을 맞춘 남자는 순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교활하게 본심을 드러냈다.

“희연아.”

“네?”

“각인할까.”

알파의 눈동자는 품에 안긴 오메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먹잇감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어 신경을 곤두세우는 짐승만큼이나 사납고 집요한 눈빛이었다. 만약 싫다고 하면…. 곧게 뻗은 눈썹이 다소 신경질적인 선을 그리며 뺨이 경련하듯 굳어지려는 찰나였다.

“네.”

정희연은 알파의 신경이 날카로워지기도 전에 곧바로 대답을 내놓았다.

“각인하면 내 페로몬밖에 못 느낄 텐데.”

순한 대답에 그간 가까스로 감춰 둔 본심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네? 저도 알아요. 어차피 대표님만 좋으니까 상관없어요.”

“으응. 그랬어?”

“네. 저도 대표님한테 각인할래요….”

연 대표는 말없이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의 애인은 아직도 페로몬을 다루는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니 자신을 단번에 각인시키기에는 무리겠지만, 원한다면 기꺼이 목을 내어 줄 생각이었다.

“각인하면 날뛰는 페로몬도 어느 정도 안정될 거야.”

“네에…. 그런데 그런 이유 아니어도 대표님이랑 각인하고 싶어요.”

정희연은 잠깐 말을 골랐다. 혹시라도 대표님이 각인의 이유를 오해하실까 봐 걱정스러웠다. 각인이 불안정한 페로몬을 안정시켜 줄 거라는 이야기는 김지원에게 들어 진작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페로몬 때문에 각인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제 페로몬 때문에 네라고 대답한 거 아니에요. 저 페로몬 지금처럼 날뛰어도 괜찮아요. 다른 사람이랑 각인해도….”

“다른 사람?”

허리를 끌어안는 힘이 조금 더 강해졌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랑 각인해서 제 페로몬 괜찮아진다는 얘기 들어도 안 할 거예요. 저 대표님 아니면 필요 없어요.”

“다른 사람이랑 각인하고 싶다고 졸라도 안 놔줄 건데.”

“네? 네. 놔주지 마세요. 저도 대표님 안 놔드릴 건데…?”

허리를 옥죄던 힘이 나지막한 웃음소리와 함께 약해졌다. 곧 커다란 손이 잠옷 안으로 들어와 맨등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희연아. 각인은 조심해서 해야 하니까 천천히 할게.”

은은하게 쏟아지던 알파 페로몬이 노골적인 의도를 띄며 거칠게 덮쳐 왔다.

“아까처럼 키스 졸라 봐.”

정희연은 키스해 달라고 말하는 대신 허벅지에 앉아 있던 몸을 세워 연 대표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으며 상처 하나 없는 입술을 조심스럽게 핥았다.

“아!”

순식간에 몸이 뒤집히며 등 뒤로 침대가 닿았다. 커다란 손이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자마자 입술이 그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간질간질한 기분에 정희연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마에 내려앉은 입술은 눈두덩이를 지나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

“그렇게 키스 조르는 건 누가 가르쳐 줬어.”

연 대표는 한 손으로 정희연의 턱선을 감싸며 무해한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놀리는 걸 또 못 알아들었는지 하얀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스쳤다.

“네? 대표님하고만 해 봤는데….”

“응. 대표님이랑만 해야지.”

연 대표는 정희연이 고개를 살짝 젖히게 만들며 피가 고였던 입술을 집요하게 핥았다. 뜨거운 살덩어리가 연약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남자의 혀는 급박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쏟아 내는 페로몬치고는 퍽 나른하고 여유로운 움직임이었다.

“하….”

작은 입 속을 들어간 혀가 치아를 훑더니 느릿하게 꿈틀거리며 조금 더 깊숙이 움직였다다. 정희연이 고개를 조금 더 젖히자 연 대표는 얼굴을 잡고 있던 손을 내려 잠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축축한 소리와 함께 자그마한 혀와 엉켜 대던 살덩어리가 볼 안쪽의 연약한 점막을 문지르고는 여린입천장을 쓸었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쇄골을 지나 톡 튀어나온 유실을 건드린 것과 동시였다.

“읏, 응….”

연 대표는 정희연의 야트막한 신음을 그대로 삼키며 달뜬 얼굴의 오메가를 집요하게 살폈다. 파도처럼 요동치던 오메가 페로몬이 물결처럼 잔잔하게 바뀌어 갔다. 남자의 혀가 느긋하게 입 안을 유영하며 선홍색 살덩어리를 부드럽게 빨았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 내자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대표님 옷, 흐…. 벗길래요.”

“나중에.”

연 대표는 턱 끝으로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다소 거칠어진 목소리와 달리 움직임은 여전히 느긋했다. 장난치듯 유두를 문지르던 손가락이 멍든 목덜미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목은.”

“안 아픈 것 같…. 아….”

정희연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뺨과 달리 손자국이 남은 목은 살갗 위로 무언가가 닿을 때마다 미약한 통증이 느껴지고는 했다. 그러나 커다란 손이 닿은 순간, 통증이 쾌감과 모호해졌다. 아픈 것 같으면서도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체온과 움직임이 좋아 오소소 소름이 내달렸다.

“우리 희연이 허리 뜨네. 좋은가 봐.”

연 대표는 조심스럽게 멍든 목덜미에 입술을 내렸다. 조르듯 목에 걸려 있던 가느다란 팔이 어느새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약하게 살결을 빨아들인 남자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곧게 뻗은 쇄골을 아프지 않게 깨물며 잇자국을 내자 정희연이 작게 헐떡였다.

“대표… 아!”

톡 튀어나온 분홍색 유실이 남자의 입술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정희연은 알파의 어깨를 붙든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저도 모르게 남자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얽었다. 연 대표가 웃는 소리가 귀가 아닌 피부를 통해 그대로 전해졌다. 조금 전까지 입 속을 핥아 대던 뜨겁고 두꺼운 살덩어리가 조그마한 젖꼭지를 빨아 대며 츄윱, 춥, 질척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정희연은 잠옷 바지와 속옷이 한 번에 벗겨지는 것도 모른 채 연신 신음했다.

“하으, 으, 왜애….”

“희연아, 뭐가.”

말캉한 젖꼭지를 깨문 남자가 드디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정희연은 눈꺼풀을 반쯤 내리깔며 자신의 가슴에 달라붙은 남자를 응시했다. 평소처럼 정신없는 전희가 아닌, 느린 전희였다.

“왜 이렇게…. 아흐….”

“응, 왜 이렇게.”

페로몬 때문에 젖을 대로 젖은 뒤쪽으로 기다란 손가락이 닿았다. 정희연은 움찔 몸을 떨었다. 눈가에 눈물이 고여 들며 속눈썹이 축축해졌다. 차라리 거칠게 움직이면 저 역시 그 움직임을 따라 정신없이 휩쓸릴 수 있을 텐데, 연 대표가 느리게 움직이는 바람에 온몸의 감각 세포가 예민하게 깨어났다. 그 선득한 느낌이 견디기 어려웠다.

“천, 천히 하세요?”

“다친 애 데리고 섹스하는데 양심은 있어야지.”

긴 손가락이 회음부를 느긋하게 문질렀다. 알파의 성기를 기대하는 구멍이 애액을 왈칵 토해 내며 발씬거렸다.

“저 괜찮, 읏, 은데…. 안 아파요.”

“으응. 안 아파?”

엉덩이에서 손을 거둔 남자가 보란 듯이 손가락을 벌리자 검지와 중지 사이로 진득한 애액이 길게 늘어졌다. 정희연은 두 눈만 깜박이며 연 대표를 응시했다. 그가 보란 듯이 손가락을 핥자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왜 드세요…?”

“더한 짓도 하고 싶은데 놀랄까 봐 참는 거야.”

더한 짓이 뭐지? 다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연 대표가 다시 몸을 숙였다. 옆구리를 타고 내려온 입술이 배꼽 바로 위쪽을 이로 스치더니 혀끝이 오목한 안쪽을 파고들었다.

“흣!”

간질간질한 기분이 배꼽까지 퍼지자 정희연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물컹하고 축축한 살덩어리가 옴폭하게 들어간 안쪽을 느릿하게 핥을 때마다 빳빳하게 선 성기가 자꾸만 연 대표의 얼굴에 부딪혔다. 날카로운 이가 배꼽 근처의 연한 살을 스치듯 깨물자 쾌감이 순식간에 내달리며 발끝이 곱아들었다.

“하으, 흐….”

“우리 애기는 배꼽도 성감대인가 보네….”

연 대표는 정희연의 성기를 부드럽게 쥐며 중얼거렸다. 가볍게 흔들 때마다 하얀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조금 더 짙어졌으나 알파의 움직임은 느긋하기 짝이 없었다.

“대표님, 흑, 넣을래요….”

“내가 조심해야 네가 안 다쳐.”

정희연의 다리를 벌린 그는 허벅지 안쪽을 느릿하게 핥으며 축축하게 젖은 구멍으로 손을 뻗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일어난 성기부터 빨고 싶었으나, ‘저도 대표님 거 빨래요.’ 따위의 말을 들을 게 뻔했으므로 다음을 기약했다.

사고를 겪은 게 고작해야 이 주 전이었다. 자그맣고 연약한 몸을 거칠게 다룰 생각은 없지만, 정희연이 발갛게 부은 입술로 저런 말을 내뱉으면 참지 못할 게 분명했다.

연 대표는 허벅지 안쪽을 빨아들이며 느긋하게 손을 움직였다. 애액으로 미끈거리는 구멍 위를 덧그리다 손가락을 집어넣자 따뜻한 점막이 알파의 손가락을 허겁지겁 빨아들였다.

“간지, 럽…. 아!”

정희연은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허벅지 안쪽에 쪽쪽 닿는 입술 때문에 간지러움이 발바닥을 타고 기어 올랐다. 발끝에서 시작된 감각이 천천히 달아오르며 목까지 이어지자 허리가 주인의 의지를 배반하고 얕게 비틀렸다.

“흣!”

예상치도 못한 순간에 장난치듯 내벽을 유영하던 손가락이 안쪽을 벌려 댔다.

“간지러워?”

발로 시트를 밀어내며 허덕이자 남자가 오금을 손바닥으로 감싸 다리를 공중에 띄웠다. 약해진 오른쪽 발목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연 대표는 한 손으로 정희연의 뒤를 쑤시며 남은 손으로 무릎을 고정했다. 그리고는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온몸에 열이 오른 탓에 무릎 역시 붉은색이었다. 그는 계속해서 페로몬을 쏟아부으며 내벽을 쑤시던 손을 느긋하게 빼어 냈다.

“하아윽, 흐윽….”

정희연은 연신 몸을 떨었다. 구멍은 알파의 성기를 원하며 꿈틀거리는데 정작 알파는 그가 원하는 걸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릎에 입을 맞춘 남자가 자세를 낮추며 종아리를 깨물기 시작했다. 입술이 살 곳곳에 내려앉을 때마다 약간의 통증이 섞인 쾌감이 정희연의 살결을 물들였다.

종아리를 핥은 축축한 혀가 복사뼈를 둥글게 핥더니 그 위로 입술을 내렸다. 톡 튀어나온 뼈를 감싸는 얇은 피부에 정희연은 다리를 움찔거렸다. 그 움직임을 느꼈는지 오금을 받치고 있던 손바닥이 발목을 잡아챘다.

느린 움직임만큼이나 부드러운 손놀림이었다.

“희연아. 핥으면 울 거야?”

“네? 흐윽, 어, 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가락 끝이 곱아들었다. 날카로운 이가 발뒤꿈치를 약하게 깨물더니 입 안의 살덩어리가 발바닥을 느리게 핥아 댔다. 몸의 가장 밑부분을 자극하는 낯선 감각에 정희연은 연 대표를 밀어 내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대, 흐, 대표님. 왜, 왜요….”

“뭐가.”

“발 더러운데…. 핥지, 흑, 핥지 마세요.”

“울 거야?”

연 대표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나른하게 휘어지는 눈매와 느리게 올라가는 입꼬리가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위협적이기 짝이 없었다. 상냥한 물음에 정희연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간지러워서 자꾸만 신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이제 넣을래요….”

남자는 칭얼거리는 애인을 한창 내려다보다 복사뼈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몸을 위로 올렸다. 그는 젖어 있는 눈꼬리에 입을 맞추며 정희연의 뺨을 살폈다. 푸른 기가 도는 멍이 눈에 거슬렸다.

상체를 완전히 세운 연 대표는 몸을 감싸고 있던 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졌다.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희연아. 스트립쇼 재밌어?”

“스트립…? 그게 뭐예요?”

이어지는 연 대표의 행동에 정희연은 스트립쇼의 의미를 대강이나마 이해했다. 나지막하게 웃은 남자가 완전히 옷을 벗으며 쪽쪽 소리가 나도록 입술을 내렸다. 오랫동안 삽입 없이 이어진 애무 탓에 몸이 잘게 떨렸다.

연 대표는 축축하게 젖은 구멍과 애액으로 진득하게 젖은 회음부 사이를 선단으로 느리게 문질렀다. 뜨겁게 발기한 살덩어리가 하얀 몸에 닿을 때마다 오메가 페로몬이 점성 짙은 물과 함께 울컥울컥 쏟아져 나왔다.

“하….”

남자는 정희연의 페로몬을 짓누르며 천천히 성기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으로 몇 번 쑤시지도 않았는데 작은 구멍이 녹진하게 풀려 있었다. 천천히 허리를 밀어 넣을수록 아래에 깔린 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연 대표는 정희연이 다친 발목으로 시트를 밀지 못하도록 제 허리에 다리를 감도록 했다. 그리고는 상체를 숙여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섞었다.

“으응…. 아!”

쿡 찌르는 허리 짓에 정희연은 또다시 사정했다. 남자가 배 위로 떨어지는 정액을 장난치듯 문지르며 웃는 감각이 맞닿은 입술 사이로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배 속의 내장들이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쾌감이 아슬아슬하게 내달리며 온몸이 저릿해졌다.

평소와 다른 느린 움직임에 정희연은 울듯이 신음했다. 안쪽을 느리게 쑤셔 대는 성기가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선명해 몸을 가누기 어려웠다. 평소 같았으면 머리끝까지 한 번에 치솟았을 쾌감이었다. 그런 쾌감이 오랜 시간 동안 느리게 피어오르자 오히려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흐으…. 아….”

느린 움직임 덕분에 신음 역시 잔뜩 늘어졌다. 정희연은 평소처럼 거칠게 헐떡이는 대신 나른한 숨을 내뱉었다. 입술을 떼어 낸 연 대표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주며 다정하게 웃었다. 느리게 움직이는 탓에 남자의 성기가 내벽을 어떻게 밀고 들어오는지 고스란히 느껴졌다.

“대표님, 왜, 왜 빨리 안… 흣!”

“각인할 때 내가 과하게 흥분하면…. 하, 네가 다쳐, 희연아.”

연 대표는 집요하게 정희연을 응시했다. 지금처럼 느리게 섹스하는 건 처음이었지만, 나긋하게 허덕이는 몸을 보고 있자니 느린 섹스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면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는 느릿하게 허리 짓을 반복하며 멍든 뺨에 부드럽게 입술을 내렸다.

“하으, 흐, 아….”

남자의 커다란 손이 턱을 지나 목덜미로 내려갔다. 연 대표는 각인의 순간을 노리며 노련하게 페로몬을 풀어 냈다.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 사나운 시선을 내리깔자 옅게 남겨진 멍이 눈에 띄었다. 하얀 목 위에 남은 흐릿한 손자국이 그를 잠깐 망설이게 만들었다. 아플 것 같은데.

“대표, 님….”

정희연은 연 대표가 목의 손자국 때문에 망설인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팔을 뻗어 남자의 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깨무셔도, 흑, 돼요.”

알파의 눈매가 초식 동물을 노리는 맹수처럼 순식간에 가느스름해졌다.

“이 자국 싫어요. 흐, 대표, 님 자국 남기고 싶어….”

천천히 흔들린 덕분에 평소와 달리 발음이 제법 선명했다.

“대표님한테, 하, 각인할래요….”

남자의 거칠어지는 숨소리만큼이나 안쪽을 드나드는 성기의 움직임 또한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강인한 턱이 팽팽하게 땅기며 느릿하게 흘러나오던 페로몬이 사납게 곤두섰다.

“제 목에, 자국 남길 수 있는 사람은…. 아, 아!”

“응. 자국 남길 수 있는 사람은? 하…. 희연아, 끝까지 말해 줘야지.”

날것의 목소리와 감정이 정희연에게 고스란히 쏟아졌다.

“대표님만 남길 수…. 아!”

씨발. 남자의 이가 얼룩덜룩한 목덜미를 물었다. 사냥감을 단번에 도살하듯 날카롭고 거침없는 움직임이었다. 정희연이 놀라 헐떡이는 게 느껴졌으나 연 대표는 물러나지 않았다. 혀로 스며드는 피에서는 치자 향처럼 지나치게 단내가 났다.

“아흐으…. 하, 아….”

날짐승의 냄새가 섞인 듯한 매캐한 나무 향기가 아래 깔린 자그마한 몸을 완전히 짓눌렀다. 알파가 쏟아 내는 사나운 페로몬이 따뜻하고 부드러운 향기를 탐욕스럽게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정희연의 신음은 고통인지 쾌락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날카롭게 뭉개졌다.

연 대표는 오롯이 그의 의지로 정희연에게 상처를 남겼다. 처음으로 남긴 상처였으나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기, 기분, 이상…. 흐으으….”

“하.”

각인한 순간 남자가 처음 마주한 감정은 완벽한 만족감이었다. 정희연이 제게만 종속될 수 있다는 음습한 만족감. 태어나길 추저분한 본성과 함께 태어난 남자였다. 정희연이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느낄 수 없다는 사실 하나가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로 만족스러웠다.

“연, 연우범….”

놀랐는지 그에게 깔려 있던 작은 몸이 이름을 내뱉었다. 연 대표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잔뜩 부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

“희연아. 아파?”

부드러운 목소리와 달리 흐물흐물 풀린 내벽을 들이박는 움직임은 점차 거세졌다.

“아니이, 흣….”

정희연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 대표에게 매달렸다. 편안하게 다가오던 페로몬이 그를 녹일 기세로 들러붙기 시작했다. 불과 이 주 전 공격하듯 쏟아지던 다른 알파의 페로몬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으, 하, 아아!”

안쪽을 찔러 대는 성기가 지나치게 몸을 자극했다. 목을 물어뜯던 고통이 언제였냐는 듯,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쾌감이 해일처럼 덮쳐 왔다.

알파에게 각인당하자 몸이 완전히 열린 기분이었다. 정희연은 눈물 때문에 잔뜩 흐려진 시야로 연 대표를 쳐다보기 위해 애썼다.

“저, 저도…. 흐으, 아, 각인하고 싶… 하으, 아, 아!”

“으응. 각인하고 싶어?”

연 대표는 정희연의 뒷머리를 감싸 한 품만 한 몸을 단번에 제 허벅지 위로 앉혔다. 삽입이 깊어지자 하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는 뒤로 넘어가려는 몸을 단단히 붙잡은 채 작은 머리를 자신의 목덜미에 파묻었다.

“희연아. 얼마든지 물어.”

“흐으, 으, 아!”

“매일 내줄 테니까….”

정희연은 간신히 입술을 벌려 남자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연 대표가 아래에서부터 계속 허리를 쳐 대는 탓에 몸이 계속해서 들썩거렸다. 선홍색 혓바닥과 질척한 타액이 남자의 단단한 목덜미 위에서 잔뜩 뭉그러졌다.

“각인될 때까지 물어뜯어.”

오메가를 각인시킨 알파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눈길이 짧은 진동 소리에 그 옆으로 옮겨 갔다. 연 대표는 느리게 손을 뻗어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 대표님.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강서의 전무님. 아, 이제 전무가 아니라 사장님이라고 불러 드려야겠네.”

- 하하. 취임식 방금 끝난 건 어떻게 아시고. 축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무에서 사장 자리까지 올라갔음에도 강서의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확연히 공손했다. 누가 우위에 있는지, 누가 저를 그 자리까지 밀어주었는지 절실히 깨달은 어조였다.

“강서의 사장님 통해서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알파의 서늘한 눈매가 게스트룸의 꽉 닫힌 문으로 향했다.

- 어떤…?

“정 회장 한국 들어올 때 이용한 배가 궁금한데.”

- 배요?

“강서효 측근들 뒤지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내가 이런 것까지 하나하나 알려 드려야 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던 것 같은데.”

- 지금 당장 알아본 뒤에 오늘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연 대표는 대답 없이 전화를 끊었다. 남자의 눈은 여전히 게스트룸에 못 박힌 채였다.

“대표님. 왜 자꾸 그쪽 쳐다보세요?”

정희연은 막 샤워하고 나와 따끈따끈해진 몸으로 남자의 시야를 가리며 안절부절못했다. 연 대표는 자그마한 몸을 끌어안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애인이 뭐 숨겼는지 궁금해서. 희연아, 다른 알파라도 숨겨 뒀어?”

이틀 전, 페로몬 수치를 검사하러 온 김지원이 게스트룸에서 나오다 딱 걸린 적이 있었다. 말없이 쳐다보자 슬슬 눈치를 보더니, 희연 씨가 부탁한 것뿐이라는 핑계를 대며 서둘러 달아났다. 정희연이 문 앞을 막아서지만 않았어도, 부탁한 게 무엇인지 확인했을 터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속상해요.”

말간 얼굴이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대꾸하자 연 대표는 피식 웃으며 찌푸려진 눈썹 위로 입술을 내렸다.

“으응. 속상해?”

“네. 저는 대표님밖에 없는데…. 다른 알파 얘기 하시면 안 돼요.”

“응, 알았어. 내가 잘못했어.”

하얀 목덜미에 코를 묻자 은은한 페로몬 향이 감돌았다.

“네에. …열어 보시면 안 돼요. 그럼 저 앞으로 대표님이랑 안 자고 게스트룸에서 잘 거예요.”

“알았어. 안 열어 볼게.”

아직도 김지원이 가져온 물건을 확인하지 못한 건 정희연의 이러한 엄포 때문이었다. 몰래 확인할 수 있는 방법쯤이야 차고 넘치지만, 연 대표는 순순히 제 오메가의 말을 들어주고 있었다.

“늦었는데. 들어갈까?”

“네.”

“오늘도 깨물어 줄 거야?”

느른한 물음에 하늘하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정희연은 슬쩍 고개를 내려 연 대표의 목덜미를 확인했다. 여러 개의 자그마한 잇자국과 함께 푸르스름하게 든 멍이 군데군데 보였다. 알파를 각인시키려고 애쓴 흔적들이었다.

“오늘부터 안 물래요….”

정희연은 자신이 남긴 잇자국을 조심스레 건드리며 풀이 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왜 안 물어.”

연 대표는 시무룩해진 오메가를 가볍게 들어 올리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희연이 자연스레 목에 팔을 감아 왔다.

“김지원 선생님께 여쭤봤는데 각인이 원래 드문 현상이래요. 대표님처럼 한 번에 각인하는 게 오히려 특이 케이스라고 하셨어요. 페로몬 잘 다룰 줄 알아야 쉽게 각인되는 거라고….”

“으응. 그랬어?”

“네. 저는 페로몬 다루는게 아직도 서투르니까…. 해진이 형한테 다 배워서 익숙해지면 그때 물래요.”

“그냥 물어도 되는데.”

안긴 몸을 능숙하게 침대에 내려 둔 남자는 손바닥에 머리를 기대며 모로 누웠다. 정희연이 당연하다는 듯이 품을 파고들었다.

“네? 안 돼요. 대표님 아프시잖아요.”

“이런 이로 깨무는데 뭐가 아파.”

연 대표는 정희연의 입술을 벌려 조그마한 어금니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기다란 손가락이 물러난 것은 조그마한 이가 손톱 위를 살짝 깨물고 난 뒤였다.

“그래도 안 돼요.”

총으로 쏘겠다는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사람의 이로 무는 행위일 뿐이었다. 험한 일을 하며 살아온 연 대표에게는 통증으로도 느껴지지 않는 자극이었다. 그러나 그의 애인은 그만 깨물겠다는 발언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아쉽네.”

“네? 왜요?”

“아릿할 때마다 우리 애기가 깨물던 거 생각났는데.”

일부러 말꼬리를 늘이자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꼬물거렸다.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안 돼요….”

얕은수가 통하지 않는 걸 보니 정말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연 대표는 픽 웃으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안 아프셔도 제 생각은 자주 하셔야 해요.”

“알았어. 자주 할게.”

당돌한 요구에 그는 이번에도 나지막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도톰한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정희연은 요즘 연 대표와 함께 회사에 출근하는 대신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일전의 사건으로 연 대표의 심기가 크게 비틀린 탓이었다. 설득하는 과정에서 강압은 없었다. 교묘한 설득이 있었을 뿐이다.

‘페로몬 안정될 때까지만. 회사에 알파가 너무 많아서 너한테 안 좋아.’

완전히 틀린 소리도 아니었기에 죄책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정희연은 쉽게 고개를 끄덕였고, 연 대표는 대부분의 일거리를 집으로 가져와 서재에서 처리했다. 간혹 자리를 비울 때면 김지원이나 이해진, 혹은 남수현이 집을 지키는 식이었다.

“아, 심수천 팀장님 병문안도 가야 하는데….”

“나중에.”

“많이 다치셨어요?”

“많이 안 다쳤어.”

“팀장님한테 화내시면 안 돼요. 제가 나가고 싶다고 해서 나간 건데….”

“응. 화 안 낼게.”

착한 오메가의 걱정과 달리 심수천은 좆빠지게 뛰어다니며 일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당분간 눈에 띄지 말라고 했으니, 자존심이 퍽 상했을 터였다. 상한 자존심은 정희연을 납치한 놈들에게 풀 테고.

“네에. 잘하셨어요.”

“잘했으면 칭찬해 줘야지.”

뻔뻔한 요구에도 정희연은 순한 얼굴로 남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품에 안겨 오는 몸이 따끈따끈했다.

남자가 눈을 뜬 건 불유쾌한 기계음 때문이었다. 낯선 소리에 순식간에 신경이 곤두서며 몸이 본능적으로 깨어났다. 반사적으로 옆자리를 더듬던 연 대표는 얼굴을 굳히며 곧바로 침대에서 벗어났다. 곤히 잠들어 있어야 할 오메가가 곁에 없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침실 문을 열어젖혔다. 감정이 이성을 좀먹어 갈 무렵, 무의식적인 걸음이 기계음을 쫓아 움직였다.

“하….”

연 대표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

정희연이 믹서기 앞에 서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희연아. 뭐 해?”

그는 부드러운 표정을 가장하기 위해 애쓰며 제법 다정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희연이 말없이 사라질 리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 나갔다. 정 회장은 철저히 그의 손아귀에 있었고, 경호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있는데도 정희연이 제 옆에 없다는 사실에 순간적으로 머리가 돌았다.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연 대표가 갑자기 나타날 줄 몰랐던지 정희연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슬쩍 몸으로 믹서기를 가렸다. 애인의 안전을 확인한 남자는 간신히 평정심을 되찾았다.

“대표님한테 숨기는 거 있으면 속상한데.”

대놓고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내숭을 떨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오메가가 가리고 있던 믹서기를 보여 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부 만들어요.”

“두부?”

“왜 이렇게 빨리 일어나셨어요? 몰래 해 드리려고 했는데….”

연 대표는 애인의 속상한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낯설게 느껴지던 기계음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믹서기 소리였다.

“그때 대표님한테 드리려고 두부 샀는데 못 드렸어요. 혹시 팀장님이 두부 얘기도 하셨어요?”

연 대표는 한 박자 늦게 그 당시 받았던 보고를 떠올렸다. 뒷좌석에 자신의 슈트 재킷과 검은 봉지 안에서 뭉그러진 두부가 있다는 보고였다.

정희연의 몸 상태에만 집중하느라 잊고 지냈는데, 그 뭉그러졌다던 두부가 원래는 제 손에 들어올 예정이었던 모양이다. 저 자그마한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단번에 상황을 파악한 남자는 그제야 긴장을 놓으며 비스듬히 웃었다.

“얘기 들었어. 대표님 주려고 했어?”

연 대표는 정희연의 뺨에 쪽 소리가 나게 뽀뽀하며 장난기를 섞어 물었다.

“네. 감옥 갔다 오면 원래 두부 주는 거래요.”

“감옥 갔다 온 거 아닌데. 우리 희연이가 애인을 범죄자 만드네.”

불법적인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남자가 내뱉기에는 퍽 뻔뻔한 발언이었다. 애인을 범죄자 만든다는 발언에 정희연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연 대표가 또 저를 놀리는 건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심수천 팀장님이 두부 드리는 거 맞다고 하셨는데. 저 놀리는 거 아니라고 하셨어요.”

“누구 말 믿을 거야.”

“대표님이요.”

정희연은 망설임 없이 연 대표를 골랐다. 아무래도 대표님이 아닌 팀장님이 자신을 놀리신 것 같았다.

일부러 김지원에게 부탁해 몰래 구한 재료들이었다. 어젯밤 내내 게스트룸에서 콩을 불렸다. 문을 열었을 때 곧바로 보이지 않도록 침대 뒤에 숨겨 두긴 했지만, 연 대표가 게스트룸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두부를 주는 게 아니라니. 실망스러운 마음에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지만, 이미 시작한 일이었다. 믹서기에 콩까지 갈았으니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만들어서 대표님께 드리고 싶었다.

슬쩍 연 대표의 눈치를 살피자 남자는 드물게 소리 내어 웃고 있었다. 좋아하시는 것 같아 약간의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래도 해 드릴게요.”

“같이 할까?”

정희연은 조금 고민했다. 솔직히 혼자 잘할 자신은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레시피를 자세히 찾아보기는 했지만, 손 쓰는 데 재주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제가 대표님께 해 드리고 싶어서 만드는 거잖아요. 대표님이랑 같이 하면 의미가 없는데….”

“그럼 옆에서 도와주기만 할게.”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서 망설임을 읽어 낸 남자는 달래듯이 제안했다.

“대표님은 같이 하고 싶은데 희연이는 싫은가 봐.”

“네? 아니에요.”

능숙한 수작이 손쉽게 먹혀들었다. 정희연이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이내 말간 갈색 눈동자가 연 대표를 향했다.

“같이 하고 싶으세요?”

“응. 같이 하고 싶으세요.”

“네에. 그럼 같이 해요.”

미치겠네. 연 대표는 또다시 예쁜 말만 내뱉는 입꼬리에 자신의 입술을 꾹 짓눌렀다. 뽀뽀에 완전히 익숙해진 오메가는 남자의 갑작스러운 뽀뽀 세례도 얌전히 받아들였다.

“뭐부터 할까.”

“이거 끓여야 돼요.”

온순한 지시에 남자는 자연스레 냄비를 꺼냈다. 그리고는 곱게 갈린 콩을 전부 부어 넣었다.

“제가 만들어 드리기로 한 거니까 젓는 건 제가 할래요.”

“알았어.”

연 대표는 정희연이 콩물을 젓는 동안 뒤에서 지켜보며 턱 끝밖에 오지 않는 몸을 끌어안았다.

아침에 섹스 하면 큰일 나는 줄 알겠지. 두부를 만들어 주겠다고 새벽부터 일어난 애인이 사랑스러워 당장이라도 안고 싶었지만, 다행히 남자의 인내심은 제법 긴 편이었다.

“끓기 시작하면 불 꺼야 한대요.”

“그다음은?”

“여기 부어서 짜야 해요.”

“뜨거우니까 그건 내가 할게.”

“네? 안 돼요.”

“왜 안 돼.”

“뜨겁잖아요.”

뜨거우니 제가 하겠다는 소리였다. 객관적으로 이런 일에 능숙한 사람은 정희연이 아닌 연 대표였다. 뜨거운 걸 만지는 것쯤이야 그에게는 험한 일 축에도 끼지 못했으니까. 예뻐해 준다는 말에 저 자그맣고 하얀 손으로 험한 일을 하겠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나, 생각하며 연 대표는 피식 웃었다.

“뜨거우니까 애기가 아니라 내가 해야지.”

“안 돼요. 제가 만들어 드리기로 했잖아요. 뜨거우니까 대표님 시키기 싫은 건데….”

“희연아. 이것도 예뻐해 주는 거야?”

“네? 네. 대표님이 고생하는 거 싫으니까 제가 할래요.”

애인의 제가 하겠다는 소리는 귀여웠으나, 저 하얀 손으로 뜨거운 걸 만지게 둘 생각은 없었다.

“세게 짜야 두부 만들 수 있는데. 우리 희연이 악력도 별로 안 세잖아.”

정희연은 자신의 손과 연 대표의 손을 비교하다 곧바로 물러섰다. 등 뒤에 서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와 물기를 짜내기 시작했다. 장갑을 꼈다지만, 뜨거울 게 분명한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정희연은 괜히 자신의 매끈한 손과 힘줄이 툭 불거져 나온 남자의 손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다음은?”

“아, 여기서 걸러 나온 콩물 끓이면 두부 된대요. 이제 제가 할래요. 대표님은 앉아 계세요.”

정희연은 레시피를 되새김질하며 불을 약하게 줄였다. 그리고는 김지원을 통해 전달받은 간수를 조심스레 조르륵 흘려 넣었다.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주걱 위로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끓기 시작한 콩물을 젓자 하얀 덩어리들이 몽글몽글 엉기기 시작했다.

“순두부 됐네.”

“네. 신기하죠.”

혼자 했으면 분명 실패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으응. 신기해? 순두부찌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해 줄까? 먹고 싶다며.”

정희연은 대표님께 드리려고 산 두부처럼 네모난 모양으로 굳힐까, 이대로 찌개로 만들어 먹을까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찌개로 먹을래요. 저번에 시켜 먹은 것보다 대표님이 만들어 주신 게 더 맛있어요.”

“알았어. 안 맵게 해 줄게.”

연 대표는 예쁜 말만 내뱉는 입술을 약하게 깨물며 다정하게 웃었다.

강서의에게 메시지가 온 건 느지막한 오후였다. 정희연이 침실에서 검사를 받는 도중이기도 했다. 남자의 눈동자가 메시지를 따라 께느른히 움직였다. 무감한 눈빛이었다.

메시지 내용을 전부 확인한 연 대표는 김지원을 향해 슬쩍 턱짓했다.

“희연 씨. 이거 측정 중이니까 움직이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네.”

눈치 빠르게 핑계를 둘러댄 김지원은 침실 밖으로 빠져나왔다. 거실을 둘러보자 등을 보인 채 발코니에 서 있는 연 대표가 보였다. 침실에는 소리가 흘러 들어가지 않을 만큼 동떨어진 장소였다. 김지원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치료는?”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긴말하지 않고 용건부터 꺼냈다. 무척이나 미묘한 뉘앙스의 치료라는 단어에 김지원은 그 말의 목적어를 깨달았다. 정희연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오늘 끝납니다.”

“시기가 딱 맞아떨어지네.”

“그대로 진행할까요?”

“응.”

연 대표는 다소 성의 없이 대답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핸드폰 너머로 김철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예, 대표님.

“남수현하고 이해진한테 연락 넣어.”

- …오늘 밤입니까?

“대충 10시 이후에.”

- 예. 뭐라고 연락 넣을까요?

남자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목을 울리는 웃음이 함께였다.

“몰이 시작한다고.”

***

정 회장, 아니, 정영길은 숨을 죽인 채 기어가다시피 몸을 낮췄다. 해외 도피를 떠나기 전까지 줄곧 살아왔던 집은 지우(馶遇)의 알파들이 난장을 피운 탓에 엉망진창이었다. 그러나 집의 상태는 노인에게 그리 중요치 않았다. 어차피 정희연 명의로 돌아간 집이니, 미련은 두지 않는 게 심신에 좋을 터였다.

“돈, 돈부터 찾아야 해….”

노인의 가라앉은 목소리는 전보다 더 카랑카랑하게 들렸다. 마치 날카로운 유리로 녹슨 쇠를 긁어내는 듯한, 끔찍할 정도로 듣기 싫은 육성이었다.

“그놈들이 날 찾기 전에 움직여야 해, 아무렴.”

백발의 노인은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정신이 반쯤 나간 것처럼 보이는 행동이었으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은 제법 신중했다.

“침대 아래…. 그래, 그놈 침대 아래였어.”

정영길은 어두운 밤을 틈타 병원을 빠져나왔다. 링거가 불량이었는지 강제적으로 투약되던 약과 수면제가 멈췄다. 어렴풋이 잠에서 깨어난 노인은 몇 시간이나 잠든 척 누워 있었다. 해가 지고 창밖으로 짙은 어둠이 내리깔릴 때까지.

기회를 엿보던 늙은 알파는 문 앞을 지키고 선 경호원들이 담배를 피우러 간 틈을 타 몰래 빠져나왔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웬일로 그놈들이 자리를 비웠는지 뒤늦게 의문이 스쳤으나, 도망쳐 나온 지금, 깊게 생각할 여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저 조심해야 했다. 언제 지우(馶遇)의 알파들이 이곳으로 들이닥쳐 자신을 병원으로 끌고 갈지 모르는 일이었다.

불을 켜면 늙은 몸뚱어리가 고스란히 드러날 것 같아, 정영길은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둡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기었다.

마침내 정희연이 쓰던 침실로 들어간 그는 몸을 약간 세워 개처럼 기기 시작했다. 노인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더듬거리는 손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문득 매끈한 대리석 바닥 위로 거스러미처럼 묘하게 거슬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정영길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손바닥을 쓸었다. 얕은 웅덩이 형태의 무언가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굳어 있었다.

정영길은 냄새를 맡기 위해 개처럼 고개를 처박았다. 미약하게나마 피 냄새가 났다. 늙은 알파는 얕은 웅덩이가 자신이 흘린 피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찢어 죽일 놈 같으니라고….”

정영길은 깨졌던 이마를 손가락 끝으로 더듬으며 욕설을 내뱉었다. 연우범 그놈이 어떻게 이 집을 찾아왔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제 손자가 머물던 집을 찾아왔다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점들이 많았다. 나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시간도 그렇고, 이동 거리도 그렇고 꼭 망설임 없이 움직인 것만 같은 타이밍이었다.

“쯧.”

이제 와 이런 생각을 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정영길은 다시 무릎걸음으로 엉금엉금 기어가기 시작했다. 대리석 바닥에 몇 번이나 머리를 부딪친 탓에,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이마가 욱신거렸다.

머리가 망가진 바람에 성한 곳이 없었으나 그나마 지금처럼 사람 구실을 할 수 있는 건 연우범 그놈이 중간에 행위를 멈춘 까닭이었다.

“그놈 속을 알 수가 있어야지.”

정영길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허공을 더듬었다. 팔을 휘젓길 몇 번, 손바닥에 원목으로 만든 침대 프레임이 닿았다. 그는 구명줄이라도 붙잡은 사람처럼 반색하며 침대를 밀기 시작했다. 그나마 운신할 수 있는 것 역시, 치료를 받은 덕분이었다. 연 대표가 자비를 베푼 이유를 도통 알 수 없었다.

“답지 않게 법에 맡길 생각인 게냐.”

노인은 눈앞에 없는 상대를 빈정거리며 다시 한번 힘껏 침대를 밀었다. 다친 머리를 치료해 주고 하루도 빠짐없이 의사에게 보인 건, 직접 처리하는 대신 법에 맡길 의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조폭 나부랭이 주제에 법이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나 정영길에게는 천운이 아닐 수 없었다. 기력이 쇠해 쉽게 밀리지 않는 침대를 재차 밀어내며 그는 뒤늦게야 감시 카메라의 존재를 떠올렸다. 노인은 자라처럼 목을 빼 손수 지정한 장소들을 대충 훑어 내렸다.

“이유태 그놈이 어떻게 관리했는지 알 수가 없군.”

침실에 내려앉은 어둠이 너무나도 탁해 제대로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다면 손자의 목을 조르던 모습은 물론, 지금 침대를 밀어내는 행동까지 고스란히 녹화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정영길은 그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노인은 오늘 밤 남은 돈을 들고 제삼국으로 도피할 계획이었다.

몸속으로 흘러들어 오던 수면제가 멈추자마자 밤이 오길 기다리며 세워 둔 계획이었다.

“서둘러야….”

늙은 알파는 양쪽 어깨에 힘을 실어 침대 프레임을 밀어냈다. 연우범의 부하 놈들이 자신의 부재를 알아채 이곳으로 들이닥치기 전에 일 초라도 빨리 서둘러야 했다. 병원에서 오느라 시간을 제법 오래 잡아먹었다.

침대를 밀어내자 바닥에 숨겨져 있던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희연의 침실에 숨겨진 금고는 정영길만 알고 있는 비밀 금고였다. 파랗게 불이 들어오는 곳에 엄지를 대자 삑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살길이 보이는군.”

금고 안에는 위조 여권과 현금 다발, 급하게 움직일 때 입을 만한 옷가지들이 들어 있었다. 정영길은 재빨리 병원복을 갈아입은 뒤, 현금 다발이 든 골프 백을 꺼내 올렸다. 커다란 가방 안을 뒤적이자 오래된 구형 핸드폰이 손에 딸려 나왔다. 요즘은 쓰지 않는, 배터리가 따로 분리되는 모델이었다.

배터리를 넣고 전원을 켜자 다행히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그놈 전화번호가….”

정영길은 기억을 더듬으며 천천히 숫자를 누르기 시작했다. 정희연 앞으로 돌려 둔 자산을 생각하면 입맛이 썼지만, 이 정도 현금이면 제삼국에서 그럭저럭 풍요롭게 지낼 수 있을 터였다.

- 거 누구쇼.

핸드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세.”

- 나가 누구…. 정 회장님?

늙은 알파의 주름진 입가가 곡선을 그렸다. 징그러운 미소였다.

주인처럼 선장실을 꿰찬 노인은 옆에 서서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는 남자에게 돈다발을 건넸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나저나 생각보다 빨리 나가십니다.”

“일이 그렇게 됐네.”

“그런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연락하시면….”

정영길은 쯧, 혓소리를 내며 조금 전에 건넨 액수와 동일한 금액의 현금 다발을 꺼내 낡은 탁자 위에 올려 두었다. 선장이 비굴하게 웃으며 현금을 품 안으로 챙겨 넣었다.

“그나저나 안색이 안 좋아 보이시는데…. 어디 다치셨습니까?”

“잔말 말고 일이나 하게.”

“아이고, 아무렴요.”

비린내가 나는 작업복 안으로 돈을 챙긴 선장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파도의 움직임을 따라 배가 넘실넘실 울렁거렸다.

“저, 회장님….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눈이 오기도 하고 배라는 게 또 아무 때나 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서요.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최대한 빨리 준비해서 출발시키겠습니다.”

정영길은 선장을 타박하는 대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항구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눈이 올 낌새는 없었건만, 과연 눈송이가 휘날리고 있었다. 출항이 늦어져도 노인으로서는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회장님. 손이 떨리시는데, 괜찮으십니까?”

정영길은 선장의 말을 듣고 나서야 탁자 위에 놓인 손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크고 주름진 손이 경련하듯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먹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하긴, 오늘 밤이 오죽 추워야지 말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따뜻하게 마실 거라도 한 잔 가져오겠습니다.”

선장의 호의를 거절하려던 노인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나불거리는 주둥이가 너무나도 시끄러워 잠시나마 떨쳐 내고 싶었다. 그리 넓지 않은 선장실은 주인이 나가자 금세 침묵에 휩싸였다.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며 깨지는 소리만이 간간이 들려올 따름이었다.

“쯧쯧.”

정영길은 선장실 유리에 비친 늙은 얼굴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나도 나이가 든 게지.”

연우범을 만만하게 본 건 그의 실책이었다. 손자를 되찾고자 지우(馶遇)에 찾아간 일을 포함해서.

“너무 어릴 때의 개새끼를 생각한 게야….”

자신을 완전히 짓뭉개던 젊은 알파의 페로몬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오싹 소름이 끼쳤다.

젊었을 적 팔아 치운 애새끼들이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해 올 줄이야. 몇 년 전, 해외로 몸을 피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는데, 영 글러 먹은 모양이었다. 정희연만 다시 붙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지만, 연우범에게 넘어간 손자를 되찾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입 안이 써 정영길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괜스레 목을 가다듬자 갈증이 밀려왔다.

“회장님. 유자차인데, 이거라도 드시겠습니까?”

마침 선장이 허리를 굽히며 선장실 안으로 들어섰다. 한 손에는 종이컵 두 개를, 다른 손에는 보온병을 들고 온 남자는 낡은 탁자 위에 컵을 올려 두고는 차례대로 차를 따랐다. 고운 빛의 액체가 상큼한 향을 남기며 쏟아져 내렸다.

“드시죠.”

정영길은 선장이 먼저 차를 마시고 나서야 종이컵에 입술을 댔다. 곧 따뜻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차 한 잔에 긴장이 풀어지며 조금 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편안하게 풀어진 노인의 얼굴은 종이컵을 내려 둔 뒤 다시금 일그러졌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선장의 시선이 퍽 거슬렸다.

“뭘 그렇게 보는….”

정확히는 정영길이 아닌, 그의 등 뒤쪽이었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노인은 뒤를 돌아보려 했다. 그러나 어깨를 채 움직이기도 전에 뒤쪽에서 팔이 뻗어져 왔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코와 입이 틀어막혔다.

정영길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비틀었다. 혼신의 힘을 다한 덕분에 자신을 결박한 남자를 잠시나마 확인할 수 있었다.

“집에 가시죠, 회장님.”

처음 보는 알파였으나 분명 자신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집이라니?

눈이 감겼다. 바다의 비린내가 선장실 안으로 들이닥치는 것과 동시였다.

기절한 몸을 흔들어 깨운 것은 축축한 습기였다. 노인은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눈을 떴다. 오감이 가장 먼저 받아들인 감각은 쇠 특유의 비린내와 축축한 흙냄새였다.

“이게….”

목소리는 가뭄 든 땅처럼 버석버석 갈라졌다. 낯선 환경에 정영길은 파드득 몸부림을 치며 일어났다. 바닥을 디딘 손바닥에서 기묘한 느낌이 전해져 왔다. 불안한 직감이 척추를 관통하며 손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한 것과 동시였다.

정영길은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고개를 내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던 불편한 감각이 뒤늦게 엉덩이에서도 느껴진 탓이었다. 그는 얼기설기 엉킨, 쇠로 만든 우리 위에 앉아 있었다.

“이게, 뭐….”

말을 내뱉을수록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정영길은 바닥이 되어 주지 못하는 불안정한 우리에서 자세를 낮춘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오른쪽도, 왼쪽도, 앞쪽도, 뒤쪽도 전부 흙뿐이었다.

사냥꾼이 설치해 둔 함정에 빠져 버린 미련한 짐승 같은 모양새였다.

갈증이 심해질수록 바닥 아닌 바닥을 짚고 있는 손이 경련하듯 달달 흔들렸다.

철커덩.

철장의 가벼운 공명음과 대조되는 묵직한 페로몬이 머리 위에서 뚝뚝 떨어졌다. 벌레처럼 몸을 숙인 채 상황을 파악하던 노인은 지금껏 의식하지 못한 하늘을 향해 재빨리 고개를 쳐들었다. 햇빛에 눈이 부셔, 노쇠한 눈동자가 담을 수 있는 형체는 그림자가 전부였다. 정영길은 미간을 잔뜩 좁히고 나서야 머리 위의 그림자가 두 개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늙은 알파는 자신을 땅 아래에 가둔 이를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눈을 홉떴다. 커다란 구두가 드넓은 철장을 짓밟을 때마다 철커덩, 철커덩 음울한 소리가 머리 위를 울렸다. 어디선가 들어 본 소리였다. 묶여 있는 개들이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칠 때마다 절그럭거리던 쇠사슬 소리와 비슷했다.

약에 전 뇌는 뒤늦게야 상황을 파악했다. 늙은 알파의 주름진 입술 사이로 노기를 띤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연우범…!”

남자는 정영길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었다.

“정 회장님.”

허리를 조금 숙였는지 늙은 몸뚱어리를 덮고 있던 그림자가 괴물처럼 몸집을 불렸다.

“여기가 어디인지 아시려나 모르겠네….”

“이 하룻강아지 새끼가…!”

보이는 것이라고는 땅속의 흙이 전부인데 여기가 어디인지 알 게 뭔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정영길을 가둔 철장은 땅바닥에 닿아 있지 않았다.

노인은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이 갇혀 있는 우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긴. 정 회장님만큼 잘 아는 인간도 없을 거야.”

힘이 빠진 것처럼 턱이 헤벌어졌다. 늙은 알파의 시선이 다시 하늘을 향했다. 제가 처한 상황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안 그래요?”

남자가 느긋하게 웃었다.

“허억, 헉! 아, 아니야…. 아니야!”

정영길은 도망가듯 뒤쪽으로 몸을 물렸다. 얼기설기 얽힌 철장의 존재가 맞닿은 피부를 통해 고스란히 느껴졌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말처럼, 이곳은 노인이 잘 아는 장소였다.

“허억, 허억, 헉.”

녹슨 철장은 한때 머리 위의 남자를 가둬 둔 곳이었다.

동시에 남자의 옆에 선 오메가의 유년기를 가둬 둔 곳이었다.

“그렇게 개처럼 기어 봐야….”

지금은 늙은 몸뚱이를 가둬 둔, 녹슨 쇠 비린내가 나는 뜬장 위에.

“도망 못 갈 텐데….”

그가 키운 개들이 서 있었다.

정영길은 무거운 눈꺼풀을 몇 번이나 들썩였다. 겨울의 공기는 차갑기 그지없는데, 내리쬐는 햇살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갈증과 함께 속이 울렁거려 노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웩 하고 위장에 든 것을 내뱉었으나 나오는 것이라고는 누런 위액이 전부였다.

그가 뱉어 낸 오물은 얼기설기 엉킨 창살을 빠져나가 흙바닥 위로 떨어졌다. 정영길은 자신이 곧 그 오물과 같은 처지가 될 것임을 직감했다. 조금씩 떨리던 몸이 주체하기 힘들 정도로 덜덜 흔들리기 시작했다. 철컹거리는 쇠사슬 소리와 함께 개들이 짖는 소리가 귓가에서 마구 이지러졌다. 백발의 노인은 늙은 개처럼 몸을 웅크린 채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뱉었다.

“희연아. 보기 싫으면 차에 가 있어도 괜찮아.”

“네? 괜찮아요.”

정희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뜬장 안에 갇힌 노인을 내려다보았다. 땅 깊숙이 넣어 둔 철장 위로 올라서자 공중에 붕 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발이 땅에 닿지 않아 조금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었지만, 의지할 사람이 있어 무섭거나 불안하지는 않았다.

“대표님.”

정희연은 코트를 살짝 잡아당겨 연 대표를 불렀다. 그 의미를 알아차렸는지 서슴없이 몸을 움직인 남자가 등 뒤에서 그를 끌어안았다. 짧은 움직임에도 철커덩, 뜬장을 짓밟는 소리가 텅 빈 땅속을 울렸다. 정희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저를 안아 준 남자를 쳐다보는 대신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염없이 올려다보기만 하던 존재가 발밑에 웅크리고 있는 걸 보니 낯설면서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땅은 또 얼마나 깊게 팠는지, 까치발을 선 채 팔을 쭉 뻗어도 천장에는 절대 닿을 수 없는 높이였다. 그 먼 거리 아래에서 정영길이 짐승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불쌍해?”

연 대표는 정희연의 귓가에 조용히 물었다. 착해 빠진 오메가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건 연 대표였다. 그러나 그는 제 애인이 정영길을 불쌍하게 여기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생각해 보지 않았다. 타고나길 순하게 태어난 정희연은 저 늙은이를 동정할지도 몰랐다.

안쓰럽게 여기는 감정까지 막을 생각은 없었으나, 혹 정희연이 연 대표 자신의 본성에 진저리 치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아주 약간의 꺼풀만 드러낸 본성인데도.

그럼에도 이곳까지 데리고 온 건, 정희연이 피해자인 까닭이었다. 정희연에게는 늙은 알파가 추락하는 순간을 지켜볼 권리가 있었다.

“안 불쌍해요.”

어린 애인이 잔혹성에 진저리 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무색하게 정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대표님 괴롭혔잖아요.”

정희연은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히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덕분에 연 대표의 내리깔린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으응. 나 괴롭혀서 안 불쌍해?”

연 대표는 남수현이 있었다면 ‘쟤 여우 꼬리 달린 거 아니니?’라는 말을 내뱉었을 정도로 살살 웃어 보이며 한 손으로 하얀 뺨을 감쌌다. 언제 멍이 들었냐는 듯, 말랑말랑하고 따뜻한 감촉이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네. 대표님 괴롭혔으니까 안 불쌍해요. 그리고 해진이 형이랑 남수현 사장님이랑 또….”

“너는?”

“네?”

“왜 괴롭힌 상대에 너는 없어, 희연아.”

“아.”

정희연은 그제야 자신의 존재를 떠올렸다.

“네에. 저도요.”

“응, 착하네.”

연 대표는 단정한 이마에 입을 맞춘 뒤에야 뺨을 놓아주었다.

남자의 애정 어린 시선은 뜬장 아래를 향한 순간, 싸늘하게 돌변했다. 애정의 온기가 티끌도 남아 있지 않은 차가운 시선이었다. 그는 품에 안긴 오메가를 조금 더 끌어안으며 무감한 눈으로 뜬장 안의 노인을 응시했다.

남수현이 신이 나 제작한 뜬장은 오롯이 백발의 노인을 위한 장소였다. 연 대표는 제법 큰 간격의 철장 사이로 무언가를 쏟아부었다. 철장 사이에 걸려 밑으로 떨어지지 못한 물건을 발로 툭, 밀어 떨어트리는 친절함까지 엿보였다.

등 위로 무언가가 떨어지자, 정영길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허겁지겁 상체를 들어 올렸다. 흐리멍덩한 시선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약통에 닿았다.

“뭐….”

이 근방에는 건물이랄 게 없었다. 덕분에 연 대표는 쇠약해진 목소리를 똑똑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남자의 입술이 느린 속도로 벌어졌다.

“진통제.”

“지, 진통제?”

원활한 대화가 이루어질 만큼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다. 연 대표는 정영길이 자신을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완전히 젖히고 나서야 물건의 정체를 알려주었다.

“앞으로 많이 힘드실 텐데, 내 마지막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늙은 알파의 회색 눈썹 사이로 주름이 깊게 패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설마 여기를 나만 알고 있을까.”

나긋한 목소리가 가볍게 웃었다.

“남수현, 이해진…. 아, 정 회장님은 이름 말해도 모르시겠네.”

정영길은 낯선 이름들을 기억하기 위해 애썼다. 설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약에 중독된 뇌는 아무리 애를 써도 빠릿빠릿하게 돌아가지 않았다.

“이 꼴을 나 혼자 보기에는 아깝잖아.”

재미있는 일을 마주한 것처럼 다소 천진하게 들리는 어투는 분명한 빈정거림을 담고 있었다. 정영길의 시선이 그제야 철장 바닥에 걸린 약통들을 향했다. 개중 몇 개는 금방이라도 그 사이를 통과해 흙바닥 위로 떨어져 내릴 것만 같았다. 아슬아슬한 곡예가 몇 초간 이어졌다.

“이건, 이건 아니야….”

노인은 약통을 낚아채기 위해 잘 움직이지 않는 팔을 뻗었다. 격한 움직임에 뜬장이 조금 흔들렸다. 간신히 매달려 있던 약통 몇 개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억!”

황급히 철장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었으나, 얼기설기 엉킨 철장의 간격은 사람의 손이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지 못했다.

“회장님한테 악감정 가진 사람이 한둘이어야지.”

연 대표는 익숙한 낯들을 떠올렸다.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이곳으로 달려오고 있는 알파와 오메가들이 제법 많았다.

남수현이 준비한 뜬장은 천장에만 문이 달린 구조였다. 위에서만 열 수 있게 설계된 문은 정영길의 손이 닿기에는 어림도 없는 높이였다. 땅 위에 세워 둔 것도 아니고, 땅을 파서 그 안에 처박아 두었으니 지나가던 사람이 발견할 일도 없었다.

오늘을 위해 넓은 부지를 사들였다. 건물 하나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높게 울타리를 두르고 사유지라는 팻말까지 걸어 두었으니, 뜬장에 갇힌 늙은 알파가 우연히 발견될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다. 핸드폰조차 제대로 터지지 않는 이곳에 사람이 흘러 들어올 리도 만무했다.

“이렇게, 이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는 없어….”

언제 허겁지겁 약통을 주웠냐는 듯, 정영길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정신이 아주 느린 속도로,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고작 하루 이틀 사이에 준비한 일은 아닌 듯했다. 노인은 자신의 남은 삶이 여의치 않으리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자살할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뭐, 자살할 만큼 목숨에 미련 없지도 않겠지만.”

단순한 노인의 혼잣말이었으나 몸짓에서 티가 났는지, 뜬장 위에서 목소리가 쏟아졌다. 정영길은 생존의 위협 앞에서 본능적으로 가슴을 헐떡이며 위를 응시했다.

늙은 알파는 그제야 자신을 내려 보는 뜬장 위의 개들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연 대표의 그림자가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막아섰다. 위협적인 크기의 어둠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나 정영길은 꼼작도 할 수 없었다. 맨바닥이었다면 쉽게 몸을 물렸겠지만, 늙은 몸을 지탱하는 건 쇠로 얽힌 뜬장이었다. 별것 아닌 움직임에도 행동이 제약되었다.

“저거. 보이죠?”

정영길은 연 대표의 턱짓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끼기긱, 뼈가 돌아가는 듯한 착각이 오감을 사로잡았다.

지이잉-.

감시 카메라가 늙은 몸뚱어리를 따라 목을 비틀었다. 짐승을 노리는 투견처럼 먹잇감을 물어뜯기 전까지는 절대 감기지 않을 눈동자였다.

“아무것도 없는 노인네 감시하는 게 번거롭긴 하지만, 돈이면 안 되는 게 없잖아요. 안 그래요?”

“이, 이놈…!”

“회장님께 악감정 가진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찾는 게 그렇게 어렵진 않더라고.”

정영길은 비스듬히 올라가는 연 대표의 입꼬리를 외면했다. 황급히 시선을 피하자 젊은 알파에게 안겨 있는 피붙이가 눈에 들어왔다. 연 대표와 비슷한 검은 코트를 입은 채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하얀 얼굴이 무심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영길은 쩍쩍 갈라져 피가 맺히기 시작한 입술을 달싹였다.

“정….”

제대로 부른 적이 없어 이름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다. 노인은 황급히 기억을 뒤적여 연 대표가 다정하게 속삭이던 이름을 끄집어냈다.

“희, 희연아!”

듣고 싶지 않은 부름에 정희연은 뺨을 굳혔다. 뒤에서 끌어안느라 배를 감싸고 있는 연 대표의 팔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사, 살려 다오!”

정희연은 말없이 노인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 이대로 보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으마! 경찰에 넘기면 되지 않겠니? 법이라는 게 있지 않으냐!”

정영길의 입을 통해 듣는 이름도, 법이라는 단어도 전부 생소하게만 느껴졌다. 정희연은 자신이 감금된 채로 자랐다는 사실을, 그게 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등 뒤의 남자를 만난 이후에야 깨달았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 연우범 저놈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할지 알고 있는 게냐?”

처절한 울부짖음에도 정희연은 침묵을 지켰다. 대표님이든, 남수현 사장님이든, 해진이 형이든, 그들이 정 회장에게 무슨 짓을 하든 관심 없었다. 노인은 자신이 한 짓을 그대로 돌려받는 것뿐이었다.

“내가 팔아 치운 놈들이 나를 고문할 게다!”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말버릇은 고치지 못한 모양이었다. 쇠를 긁어내는 듯한 목소리에 정희연은 조금 더 인상을 찌푸렸다.

“네 뒤에 서 있는 알파를 믿는 거냐? 그놈은 널 버릴 게야!”

“하.”

정희연의 등 뒤에서 선 알파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연우범 그놈이 어떤 놈인 줄 아느냐? 사람을 물어 죽인 투견이야!”

연우범이라는 이름에 정희연은 그제야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대표님이 어떤 사람이었든, 지금 어떤 사람이든 저는 상관없는데요…?”

“뭐, 뭐라…?”

“저는 대표님이 나쁜 사람이어도 상관없어요.”

언제 짜증스러운 헛웃음을 내뱉었냐는 듯, 연 대표가 짧게 웃으며 목덜미에 입을 맞춰 왔다. 정희연은 멀뚱하게 뜬장 아래를 내려다보며 오늘 아침을 떠올렸다.

‘희연아.’

연 대표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기며 이름을 불렀다. 내키지 않는 말을 하려는 사람처럼 조금은 날카로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네?’

‘지금 정 회장 처리하러 갈 거야. 같이 가고 싶어?’

‘처리요?’

정희연은 처리가 뜻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지 고민해야만 했다. 경찰에 넘기신다는 건가? 그제야 연 대표에게 감시 카메라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게 생각났다. 폭력의 현장이 고스란히 담겨 있을 터였다.

‘아, 대표님. 예전에 살던 집 침실에 카메라 설치되어 있는데…. 거기에 회장님께서 저 때리는 장면 찍혀 있을 거예요.’

말을 하면 할수록 남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의아한 마음에 쳐다보자 연 대표가 표정을 풀며 멍이 빠진 뺨을 느리게 문질렀다.

‘…알았어. 확인해 볼게.’

‘네에. 회장님 처리하시는 데 도움 될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 그런 걸 증거 제출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말한 처리는 그렇게 온건한 방식이 아닌데. 어떡하지.’

‘네? 그럼 어떻게 처리해요?’

‘너한테 그 짓거리까지 했는데 감옥에서 발 뻗고 자게 해 줄 생각 없어.’

정희연은 물끄러미 연 대표를 바라보다 자신의 뺨을 문지르는 손을 꼭 붙잡았다. 온건한 방식이 아니라면, 다소 비합법적이라는 의미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저도 갈래요.’

‘솔직히 안 갔으면 했는데.’

‘대표님만 옆에 있으면 괜찮아요.’

자그마한 손에 잡혀 준 커다란 손이 움찔 떨렸다.

‘회장님이 저만 때린 거 아니잖아요. 대표님 어릴 때도 괴롭혔잖아요.’

정희연은 차근차근 연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애썼다. 눈앞에 펼쳐질 광경이 어떻든, 전부 괜찮았다. 정희연에게 겁을 줄 만한 것은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저도 대표님이랑 같이 가서 볼래요. 대표님 괴롭힌 사람 저도 싫어요.’

‘우리 희연이 대표님한테 정떨어지면 어떡하지.’

‘네? 그런 걸로 정 안 떨어져요.’

‘알았어. 그럼 같이 가. 용감한 거 보니까 이제 애기 아니네.’

연 대표가 농담을 섞어 가볍게 말하자 정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꾸했다.

‘네? 저 원래 애기 아닌데요…? 대표님 처음 만날 때부터 아니었어요. 대표님이 놀리신 건데….’

‘으응. 놀려서 싫었어?’

‘대표님이 그렇게 부르시는 건 괜찮아요. 다른 사람은 안 돼요.’

무겁게 흐를 뻔한 대화가 원래 공기를 되찾았다.

정희연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분위기 속에서 이곳으로 향하는 차에 몸을 실었다. 이동하는 동안 연 대표가 대강의 상황을 설명해 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그가 벌인 일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빠짐없이 알려 준 남자가 자신을 버린다니. 교활한 혀에 넘어가기에는 그동안 연 대표에게 받은 애정이 지나칠 정도로 거대했다.

“대표님이 회장님 죽여도 저는 괜찮아요.”

정희연은 표정 없는 얼굴로 또박또박 내뱉었다.

“네 핏줄은 그놈이 아니라 나야! 뒤에 그놈은 너와 하등 관계없는 놈이라고!”

“저한테 다른 알파 만난 순간 남이라고 말씀하신 건 회장님이세요. 이제 남이니까, 다른 알파 말 잘 들으라고 하셨잖아요.”

핏줄에 대한 애정을 느껴 본 적 없는 오메가의 목소리는 평온하기만 했다.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정영길은 말 못 하는 짐승처럼 괴상한 소리를 질러 댔다. 그러나 약물로 잔뜩 상한 목 때문에 노인의 비참한 절규는 오래가지 못했다. 바람 빠진 듯한 쇳소리가 뜬장 안을 머물다 서서히 스러졌다.

“희연아. 어떻게 할까?”

연 대표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정희연은 고개를 조금 돌려 자신을 껴안고 있는 남자를 응시했다.

“대표님은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지금 당장 죽이고 싶으면 죽여 줄게.”

다정한 제안에 정희연은 고민에 잠겨 들었다. 대표님께서 죽이고 싶다고 하셨으면 저 역시 그렇다고 대답했을 텐데, 연 대표의 의중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나름 진지하게 고민하던 찰나였다.

“욕심내랬잖아.”

나지막한 목소리가 정희연의 자그마한 바람을 건드렸다.

“사실 저는 별로 상관없는데….”

정희연은 연 대표의 손에 자신의 손가락을 얽기 위해 꼼지락거렸다. 뒤에 선 알파가 낮게 웃으며 손가락을 얽어 왔다.

“대표님이랑 다른 분들 생각하면….”

“응.”

“회장님께서 죽지 말고 저 안에서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어요.”

죽음만큼 관대한 벌이 또 있을까.

정희연은 고개만 살짝 돌린 조금 전과 달리 완전히 몸을 틀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은 손가락처럼 엉켜 들었다.

“그래서 저 뜬장 안에서 오래오래 고통받으셨으면 좋겠어요.”

끔찍한 말을 입에 담는 것치고는 여전히 순하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다.

“대표님 분이 풀릴 때까지요.”

어린 애인의 허락을 받은 남자는 거리낌 없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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