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2/20)

5

[강남 총기 사고, 새 국면 접어드나]

[총기 불법 매매 의혹 파문!]

[대한민국의 총기 카르텔. 정경유착의 결과일까]

정희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집을 나서며 연 대표 핸드폰에서 본 뉴스 기사들이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으나, 막상 그 상황을 맞닥뜨리니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긴장한 탓에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희연아. 걱정돼?”

태블릿을 들여다보던 남자가 아무것도 아니라는듯 비스듬히 웃으며 물었다.

“네.”

“손잡아 줄까.”

연 대표는 부지런히 꼼지락거리는 손가락에 시선을 던졌다. 무릎에 앉혀서 달래면 좋을 것 같은데, 차 안이라 안을 수 없는 게 퍽 아쉬웠다.

“네? …아니요. 괜찮아요.”

“으응. 괜찮아?”

“네.”

평소 같았으면 당연히 잡고 싶다고 했을 것이다. 괜찮다고 하는 걸 보니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의 속내를 가늠하고자 했으나 그게 무엇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표정을 보니 잡고 싶은 건 확실한데…. 어린 애인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기 위해서는 이쪽에서 조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는 잡고 싶은데.”

연 대표는 일부러 말꼬리를 늘였다.

“…잡아 드릴까요?”

아니나 다를까, 정희연이 순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연 대표는 곧바로 정희연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한 줌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손목에는 그가 선물한 시계가 걸려 있었다.

“시계 잘 차고 다녀.”

브레이슬릿과 맞닿은 손목을 일부러 느릿하게 문지르자 잡혀 있던 손이 얕게 튀어 올랐다.

“네에. 맨날 차고 다닐게요.”

별일이야 없겠지만, 눈앞에 두고 볼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연 대표는 제 손아귀에 잡힌 손목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조수석에 앉아 있던 김철우가 뒤를 돌아봤다.

“대표님.”

회사 건물로 진입하는 주차장 근처였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연 대표의 차가 방향을 꺾자 근처를 서성이던 기자들이 순식간에 달라붙었다. 창문 밖으로 커다란 고함 소리가 한데 뒤섞였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는 것과 동시였다.

“쯧.”

연 대표는 곧바로 정희연의 손을 당겨 그를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선팅이 짙게 된 차라 얼굴이 노출될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기자들이 날파리처럼 달라붙자 놀랐는지 정희연이 코트 자락을 붙잡았다.

“어떻게 할까요?”

몇 시간 전, 엠바고에 걸려 있던 기사가 아침 뉴스와 함께 풀렸다. 수사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게 보통의 절차라는 걸 참작하면,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기자들에게 정경 유착을 파 보라고 던진 떡밥이나 다름없었다.

불법 무기 매매 논란과 총기 사고, 그리고 정경 유착. 기자들이 들러붙기 딱 좋은 소재들이었다. 연 대표는 무료한 얼굴로 짧게 명했다.

“밀어.”

그냥 밀고 들어가라는 소리에도 당황하는 사람은 없었다. 차가 무턱대고 움직이자 앞을 가로막았던 기자들이 어, 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나기 시작했다.

성질 더러운 것쯤이야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라 챙겨야 할 이미지도 없었다. 차를 텅텅 내리치는 소리와 함께 쌍시옷이 들어간 욕설이 차 안으로 희미하게 흘러들어 왔다. 품에 안긴 오메가가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져 연 대표는 제가 끌어안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애들 좀 불러서 처리해.”

남자는 누가 들으면 조폭으로 다분히 오해할 만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네. 지금 연락 넣겠습니다.”

김철우는 상사의 싸늘한 표정을 확인하자마자 핸드폰부터 꺼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귀찮은 파리떼가 꼬였다는 듯 심드렁하게 굴었을 남자가 오늘따라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이유가 뻔했다. 급한 마음을 알아 주기라도 하듯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심수천 팀장님. 밑에 사람들 좀 보내 주시죠.”

- 대표님 빡치셨어요?

심수천의 가벼운 물음이 조용한 차 안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응. 대표님 빡치셨으니까 빨리 튀어 오라고 전하세요.”

- 아이고, 대표님. 들으셨구나? 빨리 내려가겠습니다.

얌전히 안겨 있던 정희연은 눈만 깜박거렸다. 화나셨나? 목소리를 들으니 화가 나신 것 같기도 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올리자 기척을 눈치챘는지 내려다보는 연 대표의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싸늘하게 굳어 있던 눈매가 부드럽게 누그러졌다.

“대표님. 화나셨어요?”

“화 안 났어.”

“팀장님들한테 화내시면 안 돼요. 밖에 사람들이 이상한 건데….”

“응, 알았어. 화 안 낼게.”

연 대표는 재차 정희연을 껴안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멈추기는커녕 그대로 들이박는 차에 달라붙던 기자들은 건물 밖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온 알파들에게 움직임을 봉쇄당했다. 보복성 기사들을 마구 쏟아 내겠지만, 연 대표가 알 바 아니었다.

“김철우 비서님.”

“네, 대표님.”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정희연을 겁먹게 만든 행위들이었다.

“차에 달라붙은 새끼들 전부 찾아내서 손해 배상 청구해.”

“예? 아, 예. 알겠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귀찮음에 방치했을 일을, 남자는 자비 없이 처리했다.

연 대표는 비스듬히 선 자세로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발밑을 응시하자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죽치고 앉아 있는 기자들이 보였다. 어느덧 오전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점심을 배달한 배달 기사에게 득달같이 달려들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정의의 사도처럼 구는 꼴이 우습기 그지없어 남자는 비릿하게 웃었다.

“취조하는 것도 아니고….”

뻔히 예상한 일이었으나 짜증스럽고 번거로운 감정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반사적으로 담배를 찾던 그는 정희연의 존재를 자각하고는 나지막한 한숨으로 흡연 욕구를 대신했다. 곧바로 돌아서려는 찰나, 진동이 울렸다.

지금 갑니다. 10분 내로 도착 예정.

강서의에게 온 메시지였다.

곧바로 메시지를 삭제한 연 대표는 천천히 등을 돌려 소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정희연의 시선이 그 발걸음을 따라 고스란히 움직였다.

“이리 와.”

연 대표는 픽 웃으며 정희연을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안아 주는 버릇을 하다 보니 두 사람 모두에게 익숙해진 습관이었다. 회사에서는 따로 앉으려고 하는 편인데, 불안하긴 불안한 모양인지 자그마한 몸이 쉽게 안겨 왔다.

“희연아.”

“네?”

연 대표는 정희연의 앞머리를 살살 쓸어 올렸다. 이마 밑으로 곧은 선을 그린 눈썹을 만지작거리자 간지러운 듯 안긴 몸을 살짝 움츠러들었다.

“곧 형사들 들이닥칠 것 같은데…. 놀라지 마.”

“형사요?”

“일 어떻게 진행될 예정인지 말해 줬잖아. 별거 아니야.”

“네. 대표님한테 아무 일 없을 거라는 것도 알아요.”

정희연은 차분히 대답하기 위해 애썼다. 대표님이 잘못될까 봐 무서운 건 아니었지만, 바다에서 만난 이후로 한 번도 떨어져 본 적이 없다가 곧 떨어진다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혼자인 게 익숙해 외로움을 탄다는 감정도 잘 몰랐는데, 대표님이 옆에 없으면 조금 힘들 것 같았다.

“아마 긴급 체포 될 거야. 불구속 수사가 원칙이긴 한데, 구속 수사 될 확률이 더 높고.”

“네에….”

“강 전무가 빨리 움직이면 이틀 내로 풀려날 거야. 그쪽은 내가 시간 더 끌어 주는 쪽이 편하겠지만.”

정희연은 빨리 돌아오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 안으로 삼켰다. 괜히 저 때문에 계획이 어그러지는 건 원치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금방이라도 어리광 부리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괜한 이야기를 해서 대표님께 걱정 끼쳐 드리고 싶지 않았다.

“대표님이 부탁 하나 하면 들어줄 거야?”

연 대표는 정희연이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웃음기 섞인 질문을 던졌다. 꼭 깨문 입술에서 빨리 나오셨으면 좋겠다는 기색이 느껴졌으나, 애인이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다른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부탁이요?”

“응.”

“네, 들어드릴게요.”

“뭔지도 안 물어보고 덜컥 약속하면 큰일 나는데.”

한 손으로 양 뺨을 잡으며 눈꼬리를 접자 정희연이 순한 얼굴로 대답했다.

“네? 대표님은 괜찮아요. 지금까지 저한테 나쁜 일 시키신 적 한 번도 없잖아요.”

침대에서 작정하고 울리면 저런 말도 쉽게 못 할 텐데. 연 대표는 말랑말랑한 뺨에 쪽 입을 맞추며 사나운 기색을 감췄다.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괜찮다고 하는 버릇을 언젠가 고쳐 줘야 할 듯했다.

“으응. 들어줄 거야?”

“네. 뭔데요?”

“대표님 없는 동안 바람피우면 안 돼.”

“네? 바람이요?”

정희연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바람 안 피워요.”

“그런데 아까 왜 손 잡는 거 거절했어.”

일부러 속상한 목소리로 가증을 떨어 대자 순한 얼굴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놀리기 위해 꺼낸 말이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표정이었다.

“대표님 싫어서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야?”

“네.”

정희연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며칠 떨어져 지내야 하는데, 연 대표가 괜한 오해를 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긴장해서 손 차가워졌거든요. 그런데 제 손 잡으면 대표님도 차갑잖아요. 그래서 안 잡겠다고 한 건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알파의 뺨이 얕게 굳어졌다. 연 대표에게 정희연의 온도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차갑든, 따뜻하든, 정희연의 체온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우리 애기는 왜 이렇게 착해 빠졌지.

“하….”

남자는 정희연을 폭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자 옅은 치자 향이 느껴졌다. 겨울과는 어울리지 않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냄새였다.

“내가 손 잡고 싶다고 했을 때는 왜 줬어.”

코를 파묻은 채로 웃음기를 섞어 속삭이자 자그마한 몸이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대표님이 잡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저는 대표님이 하시는 말씀 다 들어 드릴 건데….”

“예뻐 죽겠네, 진짜.”

예쁘게 구는 애인을 두고 가려니 입 안이 썼다. 사정 봐주지 말고 빨리 나오는 게 좋을까. 가장 빨리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셈하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저 이제 내려갈래요.”

연 대표는 하얀 목에 짧게 입 맞추고 나서야 정희연을 놓아 주었다. 안겨 있던 몸이 옆으로 떨어지는 게 퍽 아쉬웠다.

“들어와.”

열린 문 사이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김철우였다.

“대표님. 손님 오셨습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이 제 얼굴을 확인하지 못하도록 비스듬히 몸을 틀었다. 익숙한 얼굴 몇이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연우범 대표님?”

가장 먼저 들어온 남자가 목에 걸려 있던 형사증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연우범 씨를 총기 불법 매매 혐의로 체포합니다.”

청바지에 점퍼를 입은 형사는 꼬리들을 줄줄 매단 채 성큼성큼 소파를 향해 다가섰다.

“도주할 우려가 있어 긴급 체포 합니다. 긴급 체포는 영장 필요 없으니 영장 운운하지 마시고요.”

연 대표는 느긋하게 앉은 자세 그대로 입술을 달싹였다. 형사들이 정희연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을 만한 거리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잠깐 얘기 좀 하죠.”

“대표님.”

가장 앞에 선 남자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앉아요, 이 형사님.”

잔뜩 늘어지는 목소리였으나 침묵을 내려앉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연 대표는 느리게 발끝이 까딱였다. 알맞게 재단된 슈트와 검은색 구두가 사소한 움직임을 따라 순식간에 위험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앉으라고 두 번이나 말해야 하나….”

제법 다정하게 들리는 협박이었다.

형사, 이승준은 뒷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더니 뒤를 돌아 대충 손을 휘저었다. 나가라는 뜻이 담긴 손짓에 그를 뒤따라온 후배들이 어물쩍거리다 곧 자취를 감췄다. 잔뜩 떨어지는 콩고물을 다 함께 처받아먹었으니 피차일반이었다.

“연 대표님. 공과 사는 구분 좀 해 주시죠. 이럴 때 아는 척하시면 어떡합니까?”

“다 낯익은 얼굴들이던데.”

느긋하기 짝이 없는 대답에 이승준은 땅이 꺼져라 푹 한숨을 내쉬었다. 연 대표가 재차 소파를 향해 눈짓했으므로, 그는 어쩔 수 없이 미적미적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무리 형삿밥을 오래 먹었다지만, 우성 알파를 대할 때는 늘 껄끄러웠다.

“아, 깜짝이야.”

고급 소파에 엉덩이를 깔고 앉은 이승준은 예상치 못한 사람의 존재에 화들짝 놀라 가슴을 부여잡았다. 당연히 연 대표만 있으리라 생각한 공간에 다른 이가 있었다.

들어올 때는 분명 안 보였는데. 아무래도 알파의 위압적인 덩치에 가려 보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혹은 저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눈앞의 남자가 고의적으로 숨겼거나.

눈이 마주치자 상대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엄청난 미인인 걸 보니 딱 봐도 오메가였다. 이승준은 어색하게나마 고개를 숙였다. 단언컨대 형사 생활 중 저렇게 예의 바른 인사로 자신을 맞은 사람은 저 남자가 처음이었다.

“예에. 손님이 계신 줄은 몰랐네요.”

정희연은 남자의 목에 걸린 형사증을 빤히 쳐다봤다. 증명사진 밑으로 이름 석 자가 쓰여 있었다.

“희연아. 이름 봐서 뭐 하려고. 앞으로 얼굴 볼 사이도 아닌데.”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 연 대표는 정희연의 뺨을 톡 건드리며 속삭였다. 다른 알파에게 닿아 있던 시선을 걷어 내려는 교묘한 속삭임이었다.

“아, 그래도….”

“이름 몰라도 괜찮아. 다시는 볼 일 없을 거거든.”

“그렇구나. 그럼 안 볼래요.”

정희연이 관심을 거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연 대표는 이승준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긴급 체포 당하는 상황에서 형사를 붙든 것치고는 지나치게 느긋한 태도였다.

“48시간 안에 구속 영장 신청하겠네.”

“예, 뭐. 그렇죠. 담당 검사 누군지 아시죠?”

“알죠.”

선하 쪽에 연줄이 있는 검사였다.

“시간 꽉 채워서 움직일 생각인지 빨리 움직일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서 검사 쪽이면…. 빨리 수사하고 싶어 할 텐데요. 수사하려면 구속 영장 나와야 하고. 그러려면 아무래도 빨리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연 대표의 계획은 구속 후 정식 수사를 받으며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선하를 구석으로 몰아넣어 정 회장을 내치게 만들 준비는 끝마친 지 오래였으나, 강서효까지 한 번에 처리하려니 계획에 약간의 변동이 생겼다. 물론 선하 내부자인 강서의가 좆빠지게 뛰어다니면 48시간 이내에 끝내는 것도 영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었다.

연 대표는 힐긋 시선을 내려 옆에 앉은 오메가를 살폈다. 부지런히 꼼지락거리는 손가락들을 보아 하니, 역시나 불안한 모양이었다. 여유를 두는 편이 낫지만, 애인이 불안해하니 빨리 움직이는 수밖에.

“강 전무님한테 좆빠지게 뛰시라고 연락부터 넣어야겠는데. 알았어요.”

“…일어나도 됩니까?”

“내가 막았던가?”

이승준은 어슬렁어슬렁 자리에서 일어섰다. 빨리 움직여야 하는데 연 대표는 도통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거니와 그럴 마음도 없는지라 이승준은 이 상황이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대표님. 빨리 갔다 빨리 끝내시죠. 저도 위쪽에서 다 전해 들었습니다.”

“뭘?”

“이번 사건 일부러 이렇게 설계하신 거라면서요. 다 왔는데 빨리 갔다 옵시다. 밖에 다른 새끼들 기다리는 거 아시잖습니까.”

“5분만 기다려요.”

연 대표는 정희연의 손이 슈트 재킷에 닿은 걸 알아차리고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하…. 대표님. 이러시면 곤란….”

“5분 있다가 내 발로 걸어서 가겠다고.”

“…딱 5분입니다.”

이승준은 손목시계를 두어 번 두드리더니 성큼성큼 걸어 문가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여기는 믹스 커피도 없나? 하는 소리가 문 사이로 흘러들어 오다 사라졌다.

“희연아.”

젖살이 남아 있는 뺨을 손으로 감싸자 둥그런 눈매가 눈을 마주쳐 왔다.

“빠르면 모레쯤 나오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정희연은 그제야 자신의 손이 연 대표의 슈트 재킷 끄트머리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표님이 하려는 일은 일종의 사업이었다. 어른스럽고 의연한 모습만 보여 드려야 하는데, 마음처럼 쉽지 않아 큰일이었다.

“심수천 붙여 줄 테니까 집에서 같이 지내. 어차피 나 없는 동안 다들 쉴 거니까.”

“네.”

“되도록 집 밖에 안 나갔으면 좋겠는데.”

뺨을 감싼 손이 속눈썹을 부드럽게 쓸고 지나갔다. 정희연은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희게 웃었다. 제가 걱정하는 사람은 대표님인데, 정작 대표님은 자신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저 걱정하지 마세요. 팀장님이랑 집에만 있을게요.”

“누가 채 갈까 봐 겁나서.”

“네? 아무도 안 채 가요.”

터무니없는 말에 정희연은 살포시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것도 아닌 오메가를 누가 채 갈까 싶었다.

“김철우가 내일쯤이면 카드랑 네 자산 관련된 서류들 가져다줄 거야. 그거 받아 두고.”

“네.”

순순한 대답이 귀여웠는지 피식 웃은 남자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더니 눈꼬리를 접었다.

“희연아. 벗을까?”

“네?”

맥락 없이 튀어나온 말에 너무 놀라 정희연은 눈을 깜박였다.

“슈트. 벗어 주고 갈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눈치챈 듯, 연 대표가 웃음기를 섞어 다정하게 물었다. 정희연은 그제야 말뜻을 알아듣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집에서는 연 대표의 카디건을 제 옷처럼 입고 다니는데, 슈트 재킷까지 벗어 달라고 말하려니 조금 부끄러웠다.

“…대표님. 저 진짜 이상한 취향 아니에요?”

알파 페로몬을 갈구하는 자연스러운 행위라고 듣긴 했지만, 자꾸만 겸연쩍은 마음이 들었다.

“우리 희연이는 대표님 옷이 애착 담요잖아.”

느긋하게 몸을 일으킨 남자가 재킷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연 대표의 집요한 시선이 그대로 내리꽂히자 왠지 이상한 기분이 정희연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툭, 툭. 단추를 풀 때마다 팽팽한 셔츠와 함께 남자의 몸을 가린 베스트가 드러났다.

“밖에 추운데…. 저한테 주시면 대표님은 어떡해요?”

“김철우한테 여분 있어. 괜찮아.”

연 대표는 슈트 재킷을 정희연의 어깨에 둘러 주며 느슨히 웃었다. 우성 알파에게 딱 맞도록 재단된 슈트가 한 품밖에 되지 않는 오메가의 등을 감쌌다. 허리를 숙인 남자는 보드라운 눈꺼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다녀올게.”

정희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연 대표의 눈웃음에 그나마 안심이 됐다.

“다녀오세요.”

등을 감싼 슈트에서는 남자의 체온과 페로몬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정희연은 속눈썹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한 탓에 눈이 조금 따가웠다.

“잠 못 잘 줄은 몰랐는데….”

침대에 걸터앉은 채 중얼거리자 잔뜩 잠긴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닥을 딛는 대신 멍하니 앉아 있자 어제 있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들이닥친 형사들이 연 대표와 함께 회사를 나선 직후, 기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때를 틈타 집으로 돌아왔다. 연 대표가 걱정되긴 했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하루였다.

심수천은 그가 모르던 연 대표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김지원은 자극적인 저녁 식사와 함께 설기를 데리고 왔다. 손을 핥으며 품에 안기는 부드럽고 따끈따끈한 솜뭉치 덕분에 기분도 나름대로 괜찮아졌다.

저녁에는 연 대표에게 온 전화도 받았다. 김철우가 정희연의 명의로 개통했다며 가져다준 핸드폰이었다. 남자의 목소리는 여전히 다정하고 느긋해 그나마 안심이 됐다.

씻고 침대에 누울 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잠이 오리라 생각했다. 혼자 자는 게 훨씬 익숙했으니까. 그런데 눈을 감고 숨을 골랐는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안아 주던 사람이 사라지자 넓은 침대가 썰렁하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한 번도 외로움에 대한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이 없는데 덜컥 무서워졌다. 연 대표에게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떨어져 있는 건 고작 며칠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걱정시켜 드리면 안 되니까….”

멀거니 창문 밖을 바라보던 정희연은 스스로를 달래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침대에서 내려섰다. 우울해하면 대표님께서 속상해하실지도 모르니, 괜찮지 않아도 괜찮아야만 했다.

씻고 나오자 심수천이 거실 소파에 누워 자고 있었다. 왜 게스트룸에서 안 주무시고 여기서 주무시고 계시지? 의아함에 빤히 쳐다보자 그 시선을 느꼈는지 닫혀 있던 눈꺼풀이 느지막이 올라갔다.

“흐아아암. 희연 씨, 잘 잤어요?”

“네.”

정희연은 쩌억 하품하는 심수천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막 일어난 남자는 아직도 잠이 덜 깬 듯, 눈을 감은 채 머리를 긁적였다. 덕분에 잘 잤다는 거짓말을 들키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와, 늦잠 자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

“팀장님. 왜 여기서 주무세요? 게스트룸 있는데….”

“게스트룸이요? 아, 거기….”

심수천은 몸을 일으키며 까치집이 된 머리를 대충 정리했다.

“희연 씨 쓰던 방 아니에요?”

“네? 맞아요.”

순한 긍정의 말에 심수천은 허허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정희연이 쓰던 침대에서 잔 걸 알게 되면 누군가가 빡쳐 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우성 알파의 소유욕과 독점욕은 생각지도 못하는 사소한 부분에서 튀어나오니, 까라면 까야 하는 그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는 소파도 괜찮아요. 아침 뭐 먹을래요? 대표님이 잘 챙겨 먹이라고 하셨거든요.”

심수천은 배달 앱을 뒤지며 물었다. 힐긋 정희연을 살피자 눈이 살짝 충혈되어 있었다. 목소리부터 시무룩하더라니, 역시나 잘 잤다는 말은 거짓말인 모양이었다.

대표님 아시면 난리 나겠네. 심수천은 쩝, 입맛을 다셨다.

“별로 배 안 고픈데….”

“그래요? 대표님이 걱정하실 텐데?”

연 대표를 들먹이며 꼬드기자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더니 옆으로 와 앉았다.

“뭐 있어요?”

“아침이라서 메뉴는 별로 없는데…. 먹고 싶은 거 골라 봐요. 지금 배달 안 되는 건 점심이나 저녁때 먹으면 되니까.”

“그럼 순두부찌개 먹을래요.”

“알았어요.”

심수천은 일사천리로 음식을 주문한 뒤 욕실로 들어갔다. 정희연은 그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잠잠한 핸드폰을 껐다 켜길 반복했다. 손바닥만 한 기계로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아무런 흥미도 들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초인종이 울렸다.

“아. 밥 왔다.”

음식을 받으러 나가려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심수천이 앞을 가로막았다. 머리도 제대로 말리지 못하고 급하게 튀어나온 눈치였다.

“희연 씨. 밥 먹을 준비 좀 해 줄래요? 내가 가져올게요.”

내가 해도 되는데…. 정희연은 다급한 심수천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자 연 대표가 해 둔 밑반찬들이 보였다. 부지런히 움직여 반찬들을 덜었을 즈음, 심수천이 돌아왔다.

“와, 이거 대표님이 하신 거예요?”

“네? 네.”

“대표님 요리 잘하시잖아요. 다른 사람한테 절대 안 해 주는데.”

심수천은 순두부찌개를 식탁 위에 올려 두며 고자질하듯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맛있게 먹어요.”

“네. 팀장님도 맛있게 드세요.”

입맛은 없었지만, 정희연은 숟가락을 들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대표님이 해 주시던 순두부찌개가 떠올랐다. 조금 우울해졌지만, 씩씩하게 밥을 먹었다.

오후에는 김철우가 다녀갔다. 그는 연 대표에 대한 짧은 소식과 함께 여러 가지 서류를 건넸다. 그중에는 정희연의 이름이 각인된 카드도 섞여 있었다. 가만히 있어 봤자 대표님 생각만 날 것 같아, 정희연은 김철우가 가져다준 서류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교육의 일환으로 직접 관리하던 주식과 부동산이 있어 대강이나마 자산 규모를 예상하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막상 까 보니 정희연 자신의 명의로 된 자산이 생각보다 훨씬 많았다. 해외 도피를 떠나던 정 회장이 자산을 모조리 그의 명의로 돌려놓은 탓이었다.

“희연 씨. 뭐예요?”

옆에 앉은 심수천이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아, 원래 회장님 건데…. 전에 해외 가실 때 제 명의로 돌려 두셨거든요. 뭐 있는지 보고 있었어요.”

“주식이랑 부동산이구나. 오, 선하 주식도 있네요?”

“이건 몰랐는데…. 회장님이 사 두신 건가 봐요.”

정희연은 꼼꼼하게 본 서류들을 내려놓은 뒤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쓸 수 있는 돈이 생겼으니, 대표님께 선물을 사 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 들었을 때는 열 시가 채 되지 않는 시간이었다. 잠이라도 자면 시간이 빨리 갈 것 같아 일부러 일찍 누웠는데, 당연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정희연은 곧바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 번호를 알고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대표님.”

- 응, 희연아.

다정한 목소리가 평소처럼 부드럽게 대답했다. 대표님 상황에서 이렇게 전화하는 게 가능한 걸까? 당연한 의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으나, 쓸데없는 생각인 의문인 것 같아 금세 털어 버렸다. 정희연에게 중요한 건 연 대표와 통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 저녁은.

“먹었어요.”

- 뭐 먹었어?

“어….”

저절로 말끝이 흐려졌다. 깨작깨작 먹다 보니 뭘 먹었는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 안 먹었어?

남자의 목소리가 묘하게 가라앉았다.

“먹었는데 입맛이 없어서…. 아침에는 순두부찌개 먹었어요.”

- 으응. 그랬어?

“네. 저번에 대표님이 해 주신 거 생각나서 그거 먹었어요.”

핸드폰 너머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착하네.

“대표님은 식사하셨어요?”

- 먹었어.

그렇게 한참 일상적인 대화가 이어졌다. 정희연은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대표님. 보고 싶어요.”

미처 참지 못한 한마디가 툭 튀어나왔다. 상대에게서 침묵이 흘렀다. 고작 하루 떨어져 지낸 것뿐인데 어리광을 부린 것 같아 죄송한 마음이 몰려왔다. 그렇다고 아니라는 말은 하기 싫어 가만히 발끝만 쳐다보는데 맞은편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희연아.

“네?”

- 보고 싶어?

“…네.”

- 응. 나도 보고 싶어.

정희연은 입술을 깨물며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 빨리 갈게.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연 대표가 가장 듣고 싶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정희연은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대표님이 너무 보고 싶어서 속이 상했다.

- 왜 아무 말도 없어.

“대표님.”

- 응.

“제가 많이 좋아하는 거 아시죠.”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 알아.

“네에. 아시면 됐어요.”

- 희연아. 잘 못 잤어? 목소리 상한 것 같은데.

“…네.”

정희연은 거짓말을 할까, 하다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연 대표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금방 들킬 것 같았다.

- 옷도 벗어 주고 왔는데 왜 잘 못 잤지.

“아….”

발끝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침대 한쪽에 고이 모셔 둔 슈트 재킷으로 향했다. 집에 다른 사람이 있는 탓에 평소처럼 입는 대신 잘 정리해 보관해 둔 옷이었다. 정희연은 무릎걸음으로 걸어가 슈트 재킷을 품에 안았다. 익숙한 페로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대표님 페로몬 냄새 나요.”

- 으응. 내 페로몬 냄새 나?

“네. 오늘은 대표님 옷 안고 잘래요. 그러면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건너편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얼핏 욕설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분명한 남자의 목소리리라 정희연은 조금 당황했다. 섹스할 때 빼고 욕 쓰신 적 없는데….

- 하…. 희연아. 가면 안아 줄게.

“네? 네.”

핸드폰 너머로 여러 개의 목소리가 섞여 들었다. 정희연은 직감적으로 전화를 끊어야 하는 시간이 왔음을 눈치챘다.

-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네. 전화 끊을게요.”

- 또 전화할 테니까 대표님 옷 끌어안고 자고 있어.

“네.”

- 잘 자.

이내 전화가 끊겼다.

정희연은 핸드폰이 꺼질 때까지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슈트 재킷을 품에 안은 채 꼬물꼬물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은은한 페로몬 향기 덕분에 불안이 조금이나마 가시는 기분이었다.

“…….”

그러나 잠은 쏟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누운 채 연신 몸을 뒤척이는데, 재킷 안쪽에서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잠을 자기는 그른 것 같아 스탠드를 켜고 다시 침대에 기대앉았다. 안주머니에서 무게가 느껴져 손을 집어넣자 지갑이 딸려 나왔다.

다른 사람 지갑에 함부로 손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나중에 대표님 만나면 봤다고 말씀드리고 사과드려야지. 정희연은 연 대표의 지갑을 조심스레 열었다. 카드와 현금, 신분증이 들어 있는 깔끔한 지갑이었다. 한창 머뭇거린 그는 치열한 고민 끝에 신분증을 꺼내 들었다. 다정한 얼굴이 아닌, 차갑고 싸늘한 낯이 네모난 프레임에 담겨 있었다. 대표님은 무표정일 땐 이런 얼굴이시구나.

사진 옆에는 남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연우범(連遇범)

두 번째 한자는 뜻을 알기 어려웠지만, 첫 번째 한자는 읽는 게 어렵지 않았다. 정희연 자신의 이름에 쓰는 것과 똑같은 한자였다.

정희연은 연이라는 글자 위를 조심스레 문지르다가 신분증을 다시 지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스탠드를 끄고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대표님 페로몬 냄새를 맡고 있으니 내일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정희연은 어렴풋이 눈을 떴다. 미처 자각하지 못한 사이에 잠이 든 모양이었다. 흐릿한 밤하늘 위로 하얀 눈발이 옅게 흩날리고 있었다.

눈을 감을까, 고민하던 그는 천천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머릿속이 흐린 하늘만큼이나 잔뜩 흐렸지만, 다시 눈을 감는다고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연 대표에게 온 연락이 있을까 싶어 핸드폰을 켜자 깨끗한 화면이 나타났다.

“시간이….”

새벽 5시가 막 지나가고 있으니, 연락이 없는 게 당연했다.

“생각보다 오래 잤네.”

잠깐 자다 깬 줄 알았는데, 나름 깊게 잠들었던 모양이다.

정희연은 도토리를 소중하게 쥔 다람쥐처럼 슈트 재킷을 품에 안은 채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통화 목록을 누르려던 손이 미끄러지며 인터넷 창이 열렸다.

“아, 팀장님이 기사 보지 말라고 하셨는데….”

모든 언론사가 한 명을 물어뜯기 위해 안달이었다. 연 대표에 대한 욕을 보는 순간 상처를 받을 것 같아 그대로 인터넷 창을 끄려는데 기사 하나가 속보로 떠올랐다.

단독 보도. 선하 강서효 사장, 성매매 의혹 일파만파. 동영상 존재하나

관심 없는 기사였지만, 강서효라는 이름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성매매라는 추잡한 단어에 정희연은 콧잔등이 찌푸려질 정도로 인상이 찌푸렸다. 굳이 내용을 확인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영상은 말할 것도 없었고.

핸드폰을 끄려는 순간, 또 다른 뉴스 기사가 포털 상단을 차지했다.

지우 연우범 대표, 총기 불법 밀수 사실 없어…. 총기 유통자 실체 깜깜

정희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기사를 확인했다.

지우 연우범 대표가 총기 불법 밀수 사건과 관련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은 연우범 대표 소유의 컨테이너를 압수 수색 한 결과, 총기 사고가 벌어진 M88A 모델 제품 코드가 일치하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해당 모델은 총마다 제품 코드가 각인되어 있어 유통자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게 경찰 측의 설명이다.

한편 연우범 대표 측은 K&H사의 물건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M88A 모델에 대한 누락이 있었을 뿐, 불법 밀수가 아니라는 자료를 소명했다.

대한민국 총기 유통 업체가 하나뿐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강남에서 벌어진 총기 사고는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해당 사건의 제품 코드를 추적하여 총기를 불법으로 유통한 사람을 쫓고 있다.

예상보다 훨씬 일찍 터진 기사였다. 분명 시간 끌 계획이라고 하셨는데 왜….

“아….”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냈다. 불과 몇 시간 전의 다정한 속삭임이 떠오른 탓이었다.

‘빨리 갈게.’

그는 침대에서 발을 내리며 시간을 셈했다. 48시간이 채 지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무의식적으로 슈트를 껴안은 채 거실로 나오자 심수천이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팀장님.”

시간을 확인하던 심수천은 정희연이 깨어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처럼 화들짝 놀랐다.

“희연 씨. 벌써 일어났어요?”

“네. 어디 가세요?”

“대표님 모시러요.”

정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나오시는 거예요?”

“어…. 혹시 기사 봤어요?”

“네.”

심수천은 머리를 긁적였다.

“방금 김철우 비서한테 연락이 왔는데, 이미 얘기 끝났다고 하더라고요. 기사도 합의해서 낸 거고.”

“네에.”

“희연 씨도 대표님께 들어서 아시겠지만, 이게 여론전이라…. 처음 총기 사고 관련해서 기사 낸 기자가 정정 보도 한 후에 나오실 거예요. 그래야 떡밥 던지기 쉬우니까. 정정 보도는 두 시간 정도 있다가 낼 거고요.”

“두 시간이요?”

“대표님이 원래 계획보다 일을 앞당기셔서…. 강 전무 쪽에서 두 시간만 벌어 달라고 했나 봐요.”

정희연은 말간 얼굴로 설명을 듣다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더니, 일부러 빨리 움직이신 게 맞았다. 간질거리는 기분에 껴안고 있던 옷을 만지작거리자 미미한 페로몬 냄새가 느껴졌다.

“팀장님. 저도 같이 가도 돼요?”

나갈 채비를 하던 심수천은 뜻밖의 상황에 머리를 굴렸다. 정희연을 데리고 오라는 말은 없었다. 새벽인 데다 기자들이 달라붙을 게 뻔하니 일부러 언급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데리고 오지 말라는 말 역시 없었으나, 연 대표 밑에서 오래 굴러 온 터라 심수천은 상사의 의중을 쉽게 파악했다. 그러니 정희연의 부탁 역시 거절해야 했다.

“부탁드릴게요….”

문제는 저 순한 얼굴을 외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었다.

“으으으.”

심수천은 괴롭게 앓는 소리를 내며 마른세수를 했다. 곧 그의 입술 사이로 야트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알았어요. 그럼 챙겨서 나올래요? 어차피 대표님 나오시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천천히 준비해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빨리 준비해서 나올게요.”

“그래요.”

방으로 사라지는 등을 바라보며 심수천은 자신의 선택이 옳은지에 대해 심각히 고민해야만 했다.

정희연은 모르고 있지만, 지우(馶遇)의 알파들은 최선을 다해 그를 보호하고 있었다. 정 회장이 한국에 왔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었고, 연 대표가 자리를 비운 지금은 경계가 한층 더 삼엄해진 상태였다.

어제 아침, 식사를 가지러 나가려던 오메가를 황급히 붙잡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대로 문을 열었다면 그 앞을 지키고 선 지우(馶遇)의 알파들과 마주쳤을 테니까.

“이대로 나가면 놀랄 것 같은데.”

심수천은 자기 객관화를 무척이나 잘하는 편이었고, 시커먼 알파들이 얼마나 위압적으로 보이는지도 알고 있었다. 물론 정희연이야 그들을 자주 보니 익숙하긴 하겠지만.

심수천은 방 안쪽의 기척을 살피며 전화를 걸었다.

- 예, 팀장님.

“십 분쯤 있다가 나갈 거니까 먼저 가 있어.”

- 예? 팀장님은요?

“대표님 애인 모셔 가야 돼. 나가려는데 걸렸다. 같이 가고 싶다고 하는데 그 얼굴 보고 어떻게 거절해.”

- 예? 그런데 저희는 왜…. 아. 놀라실까 봐요?

“조폭같이 생긴 새끼들이 문 앞에 있는데 안 놀라겠냐?”

동류인 주제에 심수천은 상대를 잘도 비난했다.

- 팀장님도 똑같으면서.

“씁.”

- 솔직히 희연 씨가 같이 가면 좋죠. 대표님 개빡쳤어도 희연 씨 얼굴 보면 풀릴걸요.

“그건 그렇지.”

- 그럼 먼저 움직이겠습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시고요.

“오냐.”

심수천은 전화를 끊은 뒤 창밖의 날씨를 확인했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 아직도 사위가 어두웠다. 축축한 하늘 위로 하얀 눈 덩어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운전 조심해야겠는데.

정희연은 핸드폰으로 한창 뭔가를 검색하다가 운전 중인 심수천을 살폈다. 조수석에 앉는 게 예의라고 배웠는데, 팀장님께서 절대 안 된다고 하신 바람에 죄송하게도 혼자 뒷자리에 앉아 이동하는 중이었다. 핸드폰을 꼭 쥔 탓에 옅은 색 손톱이 하얗게 질렸다.

“희연 씨. 할 말 있어요?”

시선을 눈치챈 듯, 심수천이 백미러로 눈을 마주치며 물어 왔다. 정희연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천천히 운을 뗐다.

“팀장님.”

“네.”

“제가 검색해 봤는데요.”

심수천은 연신 백미러를 힐긋거리며 정희연의 얼굴을 살폈다. 미간이 살짝 좁혀진 게 제법 비장한 표정이었다.

“이럴 때는 두부를 사야 한대요.”

“네? 두부요?”

갑자기 두부? 무슨 두부? 불쑥 튀어나온 맥락 없는 주제에 심수천은 두부에 자신이 모르는 뜻이 있나, 심각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네. 방금 검색해 봤는데 감빵 갔다 오면 두부를 먹어야 한대요. 감빵이 감옥 맞아요?”

순진한 질문에 심수천은 빵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핸들을 꽉 쥐자 차가 살짝 흔들렸다. 결국 그는 풉,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크, 흡…! 흑, 네. 감빵이 감옥이에요.”

구치소와 감옥은 엄연히 다른 공간이지만, 그는 정정해 주지 않았다. 정희연이 두부를 내밀면 연 대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내심 궁금해진 까닭이었다.

심수천은 또다시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삼켰다.

“희연 씨. 큽, 두부 사고 싶어요?”

“네? 네. 그런데 왜 웃으세요? 이거 잘못된 정보예요?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해요.”

“잘못된 정보, 큽, 아니에요.”

“…저 놀리시는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심수천은 눈가에 고인 눈물을 훔치며 헛기침을 했다. 마음을 가다듬으며 길게 숨을 내쉬자 그나마 웃음을 멈출 수 있었다.

“그럼 두부 사러 갈까요? 재래시장은 문 열었을 시간인데.”

“아, 그런데 늦는 건 싫은데….”

“안 늦어요.”

심수천은 차를 돌리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럼 저 가는 길에 돈도 뽑아도 돼요?”

“요즘은 카드도 다 받아 줘요. 대표님이 카드 주지 않았어요?”

정희연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딱딱하고 얇은 카드가 손끝에 걸렸다. 자신의 이름이 각인된 카드였다.

“그렇긴 한데…. 제 카드 쓸래요.”

“그래요. 그럼 잠깐 들렀다 가요. 거리가 좀 있긴 한데 안 늦어요. 어차피 대표님도 조금 있다가 나오실 거고.”

늦지 않는다니 다행이었다. 정희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코트에서 빠져나온 손이 품속에 꼭 안고 있던 슈트 재킷을 만지작거렸다.

“대표님 슈트 아니에요?”

“네. 그저께 벗어 주고 가셔서…. 추우실 것 같아서 챙겼어요.”

심수천은 그러냐고 답하며 정면을 응시했다. 춥기는커녕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을 남자였다.

어차피 전부 짜인 각본이었다. 모든 증거가 준비되어 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연우범이 고생할 리가 없었다.

“미리 알려 드려야 하나….”

그는 손가락으로 핸들을 툭툭 두드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심수천이 알고 있는 연 대표라면 밖으로 나올 즈음 매우 멀끔한 차림일 것이다. 김철우가 가져다준 슈트로 갈아입었을 테니까. 그러나 정희연이 재킷을 챙겨 온 걸 알면 보란 듯이 새 슈트를 벗고 나올 남자였다.

지우(馶遇)의 다른 알파들처럼 심수천 역시 정희연 앞에서만 가식을 떨어 대는 상사의 모습에 슬슬 적응하는 중이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심수천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핸들을 돌렸다. 하얗고 자그마한 오메가가 하얀 두부를 내밀면, 연 대표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정희연은 조심스레 놓아둔 검은색 비닐봉지를 살짝 눌렀다. 손가락 끝에서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른 새벽이라 못 살 줄 알았는데, 팀장님 덕분에 막 나온 두부를 살 수 있었다.

‘신기하다.’

새벽부터 여는 시장이 있을 줄은 몰랐다. 눈이 내리는 겨울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이 바쁘게 움직이는 장소였다.

정희연은 제 명의의 카드를 그곳에서 처음 사용했다. 만 원도 하지 않는 가격이라 대표님께 드려도 되나, 고민이 됐지만, 감옥에서 나온 사람에게는 원래 두부를 주는 거라고 하니 괜찮을 것 같았다.

“대표님 30분 정도 있으면 나오실 것 같네요.”

심수천은 신호에 걸린 차를 세우며 시간을 확인했다. 동선이 바뀐 바람에 경찰서에서 집으로 가는 방향의 도로를 타게 됐지만, 차야 돌리면 그만이었다. 대충이나마 거리를 계산해 보자 연 대표가 나오는 시간에 딱 맞춰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죄송해요. 빨리 가셔야 하는데…”

정희연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눈꺼풀을 내렸다. 연 대표가 선물해 준 시계가 손목에 단정히 걸려 있었다. 처음 집을 나섰을 때보다 시간이 꽤 흐른 뒤였다.

“괜찮아요. 같이 가면 대표님은 더 좋아하실걸요? 보자마자 꼭 두부 먼저 주세요.”

“네? 네.”

어쩐지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 있었지만, 정희연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창문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눈 내리는 새벽이라 도로는 텅 비어 있었다. 하얀 눈발이 차게 휘날리며 싸늘한 아스팔트 바닥으로 낙하했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데 교차로 쪽에서 검은색 SUV가 다가왔다.

“희연 씨.”

심수천이 눈썹을 찌푸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려는 순간이었다.

“팀장님. 왜 그….”

쾅!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거친 파열음과 함께 몸이 흔들렸다. 잔뜩 흔들리는 시야 안으로 조수석을 들이박은 검은색 차체가 보였다. 정희연은 가쁘게 숨을 들이마셨다. 안전벨트 때문에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호흡이 멈추나 싶더니 간헐적인 기침이 튀어나왔다.

쾅!

뒤로 물러난 차가 재차 조수석을 들이박았다. 이명이 머릿속을 온통 헤집었다.

“팀, 장, 흣….”

정희연은 눈을 깜박였다. 손을 더듬자 잔뜩 뭉그러진 두부와 부드러운 슈트 감촉이 느껴졌다.

“콜록, 콜록. 흑, 읏….”

쾅!

또 한 번 차가 조수석을 들이박았다. 머리가 잔뜩 흔들리고 속이 어지러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허윽, 흑.”

이내 차를 들이박던 움직임이 멈췄다. 정희연은 가까스로 고개를 들어 운전석을 확인했다. 심수천이 터진 에어백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정신을 잃은 듯 그는 눈을 뜨지 못했다.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덜컥 겁이 밀려왔다.

“흐, 심수, 천, 팀….”

정희연은 가까스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심수천을 흔들기 위해 팔을 앞으로 뻗은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남자 둘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뭐야, 씨발. 이거 연우범 아닌데?”

“그쪽 방향에서 오는 차 맞아. 저거 심수천이잖아.”

낯선 사람의 악의에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멍한 눈으로 그들을 올려다보자 남자 하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야, 이거 정 회장 손자잖아.”

“이게?”

“맞다니까. 연우범보다 이게 더 대어야.”

삐이이-.

이명이 또다시 뇌를 헤집었다. 날카로운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워 말소리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리며 순식간에 토기가 치밀었다. 본능적으로 물러서려는데 불쑥 들어온 손이 팔을 잡아챘다.

“흑, 놔!”

반항하기 위해 몸부림쳤으나 무용한 일이었다. 힘없는 오메가가 건장한 성인 남자 두 명에 의해 밖으로 끌려 나오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수천이 살아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발목이 욱신거려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었다.

“집에 갑시다, 도련님.”

뒤쪽에서 팔이 뻗어져 왔다. 비릿한 냄새와 함께 순식간에 코와 입이 틀어막혔다.

등 뒤에 선 사람 때문에 정희연의 고개가 강제적으로 젖혀졌다. 축축한 하늘이 보였다.

차가운 눈송이가 속눈썹에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눈이 감겼다.

***

“콜록.”

얕은 기침에도 몸속의 내장이 전부 아려 왔다. 코와 입을 틀어막은 약물이 제법 독했는지, 비릿한 냄새가 아직까지 코끝을 맴도는 것 같았다. 혀끝에서 맛이 느껴지는 듯한 착각이 일 정도로 강력하고 지독한 냄새였다.

“하아, 하….”

정희연은 황급히 숨을 들이마시려 애썼다. 그러나 호흡을 내뱉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안전벨트에 짓눌렸던 가슴이 옥죄이며 갈비뼈가 욱신거렸다.

“흐….”

간신히 몸을 일으키자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 집이라고 생각한 공간이었다. 정희연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연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에 사고가 났고, 그대로 담장 안으로 끌려왔다. 다분히 고의적인 사고였다.

정희연은 낯선 이들이 내뱉은 말을 되새김질했다.

‘뭐야, 씨발. 이거 연우범 아닌데?’

‘그쪽 방향에서 오는 차 맞아. 저거 심수천이잖아.’

사고가 난 교차로가 떠올랐다. 두부를 사느라 중간에 동선이 바뀌었다. 예기치 않게 그 도로를 타게 됐을 뿐, 원래대로라면 연 대표를 태운 차가 지나갔을 도로였다. 확실히 정희연 자신을 노린 사고는 아니었다.

정희연은 상황 파악을 마치자마자 시간을 확인했다. 손목에 걸린 시계를 보자 마침 연 대표가 나올 시간이었다.

“내가 아니라 대표님….”

그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분명 15년 동안 머물던 집이었다. 근래에는 전혀 관리가 되지 않았는지 먼지가 잔뜩 쌓인 데다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추웠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장소였다. 그렇다는 건 낯선 남자들에게 사고를 사주한 사람이 정 회장이라는 의미였다.

“아….”

덩그러니 남겨진 오메가는 재차 시계를 확인했다. 조수석을 들이박은 덕분에 시계는 무사했다. 위치 추적기가 달려 있으니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정희연은 심수천이 일러 준 시간과 시침이 가리키는 숫자를 계산하며 대략적으로나마 연 대표가 이곳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을 셈했다.

그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틸 생각이었다. 분명 데리러 와 주실 테니까.

“심수천 팀장님은….”

뒤늦게 심수천의 존재가 떠올랐다. 정희연은 그제야 제 손이 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괜찮으실까? 피를 본 기억은 없었다. 팀장님 손가락이 꿈틀거린 것 같기도 한데, 머리가 울리던 상황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정희연은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으며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새벽이라 도로가 텅 비어 있었지만, 이곳은 서울이었다. 분명 다른 차가 지나가며 사고 현장을 목격했을 터였다. 그렇다면 신고를 했을 테고, 심수천 역시 병원에 갔을 것이다.

팀장님의 안위를 먼저 걱정하는 대신 상황부터 파악한 자신이 이기적으로 느껴졌다.

“괜찮아, 괜찮아….”

정희연은 누구에게 하는지 모를 말을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심수천은 알파였고, 알파는 베타나 오메가에 비해 튼튼한 편이었다. 그러니 괜찮으실 거라고, 끊임없이 되뇌었다.

한때 집이라고 생각했던, 그러나 뜬장이나 다름없던 이곳을 나간 뒤 사과하면 괜찮을 것이다. 나중에 걱정해서 죄송하다고.

“콜록, 콜록.”

직접적으로 흡입한 약물 때문인지 자꾸만 기침이 새어 나왔다. 정희연은 비틀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만약 집에 아무도 없다면, 직접 걸어서 나갈 생각이었다.

“왜 조용하지….”

정 회장이 사주한 게 분명한데, 기척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읏.”

자리에서 일어선 정희연의 시선이 통증이 올라오는 발목으로 향했다. 알파에게서 도망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일부러 약하게 키웠다던 발목이었다. 이유태의 정성이 통했는지, 혹은 정 회장의 바람이 통했는지 하필 이럴 때 발목이 말썽이었다. 연 대표가 옆에 있다면 안아 줬겠지만, 정희연은 혼자였다.

입술을 꼭 깨문 그는 절뚝이면서도 조금씩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 대표가 오기를 바라면서 손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었다.

“깨어났니.”

보잘것없는 시도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정희연은 눈을 깜박이며 거실로 들어서는 늙은 알파를 응시했다.

“인사도 안 하는구나. 내가 그리 가르쳤더냐?”

정희연은 고개를 숙이는 대신 꾹 입을 다물었다. 노인이 쯧쯧 혓소리를 내더니 턱짓으로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를 가리켰다.

“앉거라. 얘기 좀 하자꾸나.”

정희연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정 회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리 나이가 많다고 해도 정 회장은 웬만한 알파보다 정정한 노인이었다. 저 주름진 손이 얼마나 매운지 정희연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도망가 봤자 붙잡힐 게 뻔한 상황에서 괜한 화를 사고 싶지는 않았다.

화를 사면 자연스레 손찌검이 뒤를 이을 테고, 맞은 걸 알면 대표님께서 속상해하실 테니까.

“쯧, 말년 운이 이렇게 좋지 않아서야.”

노인이 혓소리를 낼 때마다 정희연의 작은 몸이 얕게 떨렸다.

“고작 장난질에 놀아나서 나를 내쳐?”

혼잣말이었으나, 정희연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파악했다. 강서효에게 섹스 스캔들이 터졌고, 그게 시작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발생한 총기 사고와 해당 총의 밀매 루트에 대한 의문은 곧 선하 그룹을 향할 것이다.

총기 밀매를 수면 위로 드러내 연우범을 저격하려던 선하는 같은 방식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사건을 조작한 당사자가 무고한 사람을 진창으로 끌어내리기 위해 여론전을 펼친 셈이니 그 여파는 배로 돌아올 테고.

성적 학대와 다름없는 섹스 동영상과 총기 밀매 사건으로 선하 그룹의 주가가 바닥을 치는 것은 자명했다. 강서의는 이복형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이번 사태를 수습하는 척 딜을 건넸을 터였다.

그 딜 중 하나가 정 회장을 내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정희연은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눈앞의 노인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린 셈이었다.

“연우범 그 하룻강아지 놈이….”

정 회장은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그 시건방진 놈이 오늘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노인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있는 돈 없는 돈을 탈탈 털어 연우범의 납치를 사주했다.

탐욕스럽게 주름진 눈매가 눈앞의 오메가를 향했다. 연우범 대신 손자가 굴러떨어지다니, 운이 좋았다. 말년 운은 없어도, 손자 복은 있는 모양이었다.

“네 앞으로 돌려 둔 자산들, 어찌했느냐.”

정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정확히 모르는 문제였으니까. 분명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연 대표가 사람을 시켜 그 자산들을 정희연이 융통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는 것뿐이었다.

“이제 미성년자가 아니라 보호자인 내 이름으로는 융통을 못 하겠더구나.”

정희연은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눈앞의 노인과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 자금줄을 내놓아야 내가 해외로 나가거나 할 것 아니냐!”

참다못한 정 회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젊었을 때였다면 손부터 나갔겠지만, 회장 소리를 들으며 산 지 10년이 훨씬 넘었다. 우습게도 노인은 자신이 꿈꾸던 회장의 이미지를 지키고 싶었다. 손이 아니라 언성만으로도 남들을 벌벌 떨게 하는 권력자의 모습을.

개들을 팔아 치웠다고 해서 그가 정말 개장수였던 것은 아니다. 제 손을 거쳐 지나간 알파와 오메가들을 개 취급 하긴 했어도, 그 자신은 개장수 취급 받지 않아야 마땅했다.

모순적이기 짝이 없는 허영심과 역겨운 자의식이 자그마한 오메가에게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해외로 가신다고요?”

정희연은 노인과 마주한 뒤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도망치신다는 말씀이세요?”

“도망?”

정 회장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칼칼한 웃음소리가 쇠를 긁어내는 소리처럼 소름 끼쳤다.

“내가 무엇이 무서워서 도망을 간단 말이냐?”

“대표님 무서워서 도망가시는 거잖아요.”

정희연은 또박또박 말했다. 정 회장의 눈을 마주 보기 위해 애쓸 필요도 없었다. 제게 폭군처럼 군림하던 자가 연 대표 앞에서는 보잘것없는 노인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내가, 그, 하룻강아지를 무서워한다고?”

정희연은 오히려 정 회장이 하룻강아지라고 생각했다.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고 덤비다가 으르렁거림 한 번에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하룻강아지.

“그 개새끼를 키운 건 나다.”

모욕을 당했다고 생각했는지 정 회장의 얼굴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회장이라는 직함을 붙들기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최소한의 인간적인 작태가 꺼풀을 벗기 시작했다.

“내가 아니면 진작에 굶어 죽었을 새끼야!”

정희연은 노인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연우범을 키운 건 연우범이었다.

쓰레기 같은 끼니를 준다고 해서, 보잘것 없는 잠자리를 내준다고 해서 사람을 키우는 건 아니었다.

정희연은 연우범의 과거를 완전히 알지는 못했으나, 그가 아는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남자를 키운 건 연우범 그 자신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대표님 개새끼 아니에요.”

“천애 고아가 된 놈을 키워 줬더니!”

정 회장이 노성을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키워 주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라는 건 노인의 말버릇 중 하나였다. 그때의 정희연은 감사하게도 회장님이 자신을 거두어 준 것이라고 착각했다.

오메가는 알파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도, 성인이 되면 회장님이 이어 주는 알파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것도, 그때는 당연하게 생각했다. 정희연의 세계를 이루는 건 추레하게 늙은 노인뿐이었으니까.

“회장님이 저 키워 주신 것도 아니에요.”

정희연은 자신을 키운 사람은 연우범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단순히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라는 게 아니다. 조금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며 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정희연에게 올바른 세계를 알려 준 사람이 바로 연우범이었다. 그는 순종을 강요하지도, 다리를 벌리라고 명하지도 않았다. 궁금해하는 건 귀찮은 기색 없이 무엇이든 알려 주었고, 하고 싶어 하는 건 전부 하게 해 준 사람이었다. 그게 아무리 하찮고 사소한 일이라도.

“네놈이 먹고 입고 자는 공간까지 전부 내가 이룬 것들이었어!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누릴 수 있었을 것 같으냐!”

늙은 알파의 이마에 불룩 힘줄이 솟았다.

“아비가 잡종 새끼와 붙어먹었으니 잡종을 낳을 수밖에!”

정희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빠들에 대한 기억은 희미했지만, 모욕을 당할 만큼 나쁜 분들은 아니셨다. 담장 안에서 살던 때라면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을지도 모르나 그는 더 이상 담장 안에 갇힌 오메가가 아니었다.

“그러니 네가 연우범 같은 잡종 새끼와 붙어먹었지!”

정 회장이 고성을 지를수록, 제어하지 못한 알파 페로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에 정희연은 작게 기침을 내뱉었다. 같은 핏줄 사이에서의 페로몬은 성적인 흥분을 유도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페로몬 특유의 중압감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설마 그 잡종 새끼 애라도 밴 건 아니겠지?”

천박한 단어 선택에 절로 눈썹이 찌푸려졌다. 정희연은 늙은 알파를 노려보았다. 대표님과 자신의 관계는 저런 식으로 치부될 게 아니었다.

“대표님 모욕하지 마세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오메가는 제법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정희연은 제가 다른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회장님한테 그런 소리 들을 분 아니에요.”

대표님이 자신 때문에 질 나쁜 취급을 받는다고 생각하자 화가 나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연우범 그게 너한테 오냐오냐해 주긴 했나 보구나.”

정 회장은 꼬박꼬박 말대답하는 손자를 험악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분명 말대꾸 따위는 하지도 못하게 가르쳤는데, 버릇이 없어져 영 써먹을 데가 없을 듯했다. 애라도 뱄으면 연우범과 거래를 해 볼 만도 하건만 임신한 건 아닌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그에게 급한 건 당장 융통할 수 있는 돈이었다. 강서효가 저 지경이 되었으니, 선하가 시끄러운 틈을 타 도주해야 했다. 그나마 연우범이 손자의 위치를 모르는 게 다행이었다.

“일단 돈 문제부터 해결하자꾸나.”

위협적인 목소리에 정희연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 몰라도 정 회장의 바람은 조금도 들어주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가야 했다. 괜히 자리를 옮겨 연 대표에게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대표님을 만나고 싶을 뿐이었다.

“저는 회장님 말씀 들어드릴 생각 없어요.”

정희연은 침실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떠올렸다. 아무리 집이 관리가 안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자동으로 녹화되는 감시 카메라는 제 기능을 다하고 있을 터였다. 만에 하나 정 회장이 폭력을 휘두를 경우, 증거물을 남겨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정희연은 차분하게 방까지 도달할 수 있는 동선을 계산했다.

“그놈이 그렇게 오냐오냐해 주든?”

“대표님 얘기 꺼내지 마세요. 회장님 입에서 대표님 얘기 나오는 거 듣기 싫어요.”

정 회장이 입매를 비틀었다.

“너처럼 페로몬 조절도 못 하는 잡종을, 연우범 그놈이 예뻐해 준다고? 오메가 페로몬이라면 치를 떠는 놈이?”

잡종이라는 단어에 정희연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페로몬 조절을 못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정 회장 때문이었다. 배워야 할 시기에 그런 걸 배워야 한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게다가 페로몬 조절에 서투른 건, 노인이 주기적으로 맞기를 강요한 주사 탓도 있었다.

“저한테 잡종이라고 하지 마세요.”

“이 건방진 놈이…!”

“잡종은 회장님처럼 사람 장사 하는 사람한테나 하는 말이에요.”

정 회장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그대로 꿰뚫린 듯한 얼굴이었다. 폭력을 예감한 정희연은 절뚝거리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이 건방진 놈이…! 거기 못 서!”

그나마 거실이 방과 가까워 다행이었다. 감시 카메라는 거실에도 설치되어 있지만, 그의 침실처럼 사각지대가 없는 곳은 드물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발소리가 거머리처럼 귓가에 달라붙었다.

“감히 키워 준 은혜도 모르고 할애비에게 대들다니!”

머리채가 잡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몸이 돌아가는 순간, 정희연은 신음을 내뱉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짝!

텅 빈 도로에서 귓가를 파고들던 이명 소리가 또다시 머릿속을 강타했다.

이가 스치며 입술이 터졌는지 혀끝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뒤통수가 붙들린 채 뺨을 맞은 탓에 정희연은 바닥으로 넘어지는 대신 크게 비틀거렸다.

“건방진 놈!”

정 회장이 거칠게 손을 흔들며 윽박질렀다. 억센 손길에 따라 줄 떨어진 인형처럼 흔들리던 오메가는 힘없이 침대 위로 넘어졌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아닌 부드러운 침대 위로 넘어진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딱딱한 바닥에 쓰러졌으면 그대로 기절해 낯선 곳으로 끌려갔을지도 몰랐다.

“후우….”

정희연은 노인의 신경질적인 한숨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차리기 위해 애썼다. 처음 맞은 것도 아닌데 생각보다 너무 아파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세월은 노인의 악력을 앗아 갔을 터였다. 아무리 정 회장이 정정하다 해도, 베타보다 악력이 강한 알파라 해도, 정희연이 느끼는 고통은 과거보다 약해야 옳았다.

그런데 왜 예전보다 아프지. 머리를 울리는 충격에도 눈물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맞을 때마다 울지 않기 위해 버티던 버릇이 여태 남아 있는 모양이었다.

“아….”

그 순간 정희연은 깨달았다. 왜 폭력이 이전보다 거세게 느껴지는지. 그 상흔이 어째서 자신을 더욱더 깊게 할퀴고 지나가는지.

늙은 알파의 말처럼 연 대표가 오냐오냐하며 예뻐해 준 덕분이었다.

연 대표는 정희연에게 손을 대는 일이 없었다. 남자가 남긴 흔적이라고는 애정의 결정체가 전부였다. 고작 몇 달 사이에 그가 주는 애정에 익숙해져서, 남자의 품에서 느낀 안락함이 일상이 되어서 몇 년이나 겪은 폭력을 금세 잊어버린 것이다.

“내 손자가 이렇게 말 안 듣는 철부지가 될 줄은 미처 몰랐구나.”

늙은 목소리에서 이성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늘 고분고분하게 굴며 비위를 맞춰 온 정희연은 그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침대에 쓰러진 자세 그대로 고개만 살짝 들어 올리자 감시 카메라가 보였다. 꼴깍 침을 삼키자 비릿한 쇠 맛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후, 그래. 말 안 듣는 놈은 매로 키워야지.”

엎어지다시피 누워 있던 오메가는 가까스로 몸을 비틀었다. 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백발의 노인이 정희연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회장이라는 허울뿐인 직함에 숨겨 둔 저열하고 천박한 본성이 오메가의 작은 도발 하나에 그 민낯을 드러난 것이다.

이상하게도 무섭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는, 흣….”

뺨이 부은 탓에 발음이 살짝 뭉개졌다. 정희연은 똑바로 말하기 위해 헐떡이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지금까지…. 회, 장, 님이 무서운 분이라고, 읏, 생각했어요.”

무슨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내냐는 듯 회색빛의 눈썹이 산처럼 솟아올랐다.

“다른 사람들도, 회장님께 벌벌 기었으니까…. 회장님이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했어요.”

담장 안의 노인은 유일무이한 권력자였다. 어린 오메가에게 폭언을 퍼붓고 손찌검을 하고 벌이라는 명분으로 뜬장에 가둘 때에도 말리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늘 무서웠다. 정 회장과 마주치면 저절로 시선이 내리깔렸고 어깨는 굽은 것처럼 움츠러들었다. 자신은 원래 그렇게 살아야 하는 존재라고, 담장 안의 오메가는 생각했다.

정희연은 연 대표를 만난 이후에야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안 무서워요.”

“안 무섭다?”

“나가 보니까 알겠어요. 회장님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야.”

정희연은 알 수 있었다. 저 노인에게도 두려워하는 존재가 있음을.

“그러니까 도망가려고 하시는 거잖아요. 대표님이 무서우니까.”

또다시 노인의 자격지심을 건드렸는지, 흘러나오던 페로몬이 점차 짙어지기 시작했다. 정희연은 약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역겨운 냄새에 공기가 무거워지며 저절로 숨이 막혔다. 그런데도 이 상황이 무섭지는 않았다.

“대표님은 당신 안 무서워해. 그러니까 나도 당신 안 무서워.”

“이 시건방진 놈이…!”

침대 위로 한쪽 무릎을 올린 노인이 오메가의 가냘픈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컥!”

정희연은 거친 숨소리를 내뱉었다. 들어오는 산소가 희박해지자 절로 숨이 막혔다. 그러나 목이 졸리는 감각보다 직격으로 쏟아지는 알파 페로몬 때문에 더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능수능란한 알파 페로몬이 오메가의 페로몬 기관을 망가트릴 기세로 쏟아졌다.

“네놈 페로몬 기관이 망가지면 연우범 그놈도 널 버리겠지.”

정 회장은 친히 손자의 목을 조르며 과다한 페로몬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오랜 세월 알파와 오메가를 팔아 치운 노인은 그 누구보다 페로몬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의사는 아니었으나, 페로몬에 관해서라면 그들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친족간의 페로몬은 알파와 오메가라는 형질을 떠나 완전히 상극이었다. 근친상간을 막기 위해 유전적으로 그렇게 설계된 것이다.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페로몬 쇼크의 확률이 친족 사이에서 조금 더 높아지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페로몬 쇼크란 과도한 페로몬을 강제적으로 쏟아부었을 때 상대의 페로몬 기관이 그를 견디지 못하고 망가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같은 형질 사이에서도 발생하는 ‘사고’는 다른 형질일수록, 피가 이어진 관계일수록 그 확률이 높아지는 편이었다.

“쓸모없어진 오메가를 우성 알파가 얼마나 예뻐해 주는지 두고 보자꾸나.”

“허윽, 헉.”

정희연은 주름진 손을 긁으며 반항했으나 분노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노인에게는 하찮은 움직임에 불과했다.

침대 위로 짜부라진 몸이 잘게 경련했다. 오메가의 몸은 호흡의 제한보다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페로몬을 더 견디기 어려워했다. 진득한 늪이 온몸을 삼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대, 표….”

연우범을 부르며 정희연은 눈을 깜박거렸다. 부옇게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익숙한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낯선 표정이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네가 연우범 그놈을 불러 봤자…. 컥!”

쾅!

“흐억, 헉, 콜록, 콜록!”

목을 죄던 손이 떨어져 나감과 동시에 억눌린 호흡이 숨 가쁘게 튀어나왔다. 눈물과 타액이 먼지 쌓인 시트 위로 뚝뚝 떨어졌다.

“희연아. 괜찮아.”

“대, 흣….”

연 대표는 정희연이 팔을 뻗기도 전에 자그마한 몸을 안아 올렸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는 제게 안긴 오메가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정희연이 얼굴을 확인하고 싶다는 듯 팔을 꼬옥 잡아 온 탓이었다.

“목 상했어. 말 안 해도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잇새 사이로 욕설이 튀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해야만 했다. 순한 얼굴이 눈물에 잔뜩 젖어 있었다. 뺨은 시퍼렇게 부어올랐고, 입술은 터졌는지 피가 고여 있었다.

“하….”

무엇보다 강제적으로 뒤집어쓴 페로몬 탓에 온몸이 잘게 떨리는 중이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을 세게 끌어안으면서도 쉽사리 제 페로몬을 끼얹지 못했다. 페로몬 쇼크 직전인 오메가에게 알파 페로몬이 괜찮은지 가늠할 수 없던 탓이었다.

“괜, 찮…. 흐으.”

정희연이 가쁘게 헐떡였다. 연 대표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디뎠다. 헐떡이는 몸을 역겨운 페로몬으로 가득 찬 공간에 계속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김지원 10분 내로 도착한답니다.”

김철우는 핸드폰을 확인하며 상사의 얼굴을 재빨리 훑어내렸다. 연 대표는 정희연을 달래기에 바빴다. 방에 남겨진 정 회장의 존재는 아예 잊은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김철우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상사가 눈이 돌기 일보 직전임을 깨달았다.

“…표, 님.”

“응. 희연아. 대표님 여기 있어.”

피에 젖은 입술이 자꾸만 달싹거렸다. 연 대표는 목이 상한다고 말하는 대신 정희연에게 고개를 숙였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귓가 가까이에 달라붙을 때마다 남자의 어깨 근육이 크게 꿈틀거렸다.

“심수, …괜, 찮… 요?”

“심수천 괜찮아. 걱정하지 마.”

이 상황에서도 심수천의 안부를 묻는 게 정희연다웠으나, 그 사실이 도리어 남자의 심기를 자극했다. 착해 빠진 오메가를 이 지경으로 만든 늙은 알파를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괜찮다는 말에 안심이 됐는지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거리다 짙은 그늘을 만들어 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의 눈이 감긴 걸 확인하자마자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김철우를 응시했다.

“…5분 내로 오라고 연락 넣겠습니다.”

김철우가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으며 가느다란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손에 힘이 실리며 핏줄이 툭 불거졌다. 분노가 이성을 좀먹어 가기 시작하자 결벽적으로 관리하던 페로몬이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그는 직감적으로 페로몬을 제어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평정심이 깨진 순간 페로몬이 제멋대로 요동쳤다.

정희연을 안정시켜 주던 페로몬이 독으로 변모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연 대표는 안겨 있던 몸을 토닥이다가 조심스레 소파에 눕혔다. 웬만한 병원보다 김지원의 처방이 훨씬 믿을 만했다. 김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정희연에게 손을 대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제어하지 못한 페로몬이 약해진 몸을 집어삼키려 들 테니까.

“대표님. 페로몬이….”

“알아.”

김철우의 염려에 연 대표는 낮게 뇌까렸다. 이대로 있으면 정희연의 몸에 무리가 갈지도 몰랐다. 일부러 정 회장의 페로몬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애인을 데려다 놓았더니, 제 페로몬이 말썽이었다. 아무래도 김지원이 오기 전까지 떨어져 있어야 할 듯했다. 머리를 새빨갛게 태우는 분노에 불안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하, 씨팔. 좆같네 진짜….”

남자는 엉망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등을 돌렸다. 애인 곁에 머무르지 못하는 불안은 해소할 수 없으나, 머리를 태우는 분노는 해소할 수 있을 터였다. 섬뜩한 구둣발 소리가 정 회장이 쓰러진 방으로 향했다.

<다음 권에서 계속>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