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20)

4

연 대표는 김철우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품에 안겨 있던 오메가가 그의 기척에 몸을 꼬물거리며 덩달아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은근슬쩍 턱을 잡아 입술에 입 맞추자 아이스크림의 단맛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짧게 입술을 내린 남자는 픽 웃으며 다시 핸드폰으로 시선을 내렸다.

대표님. 오늘 새벽에 인천 도착했다고 합니다.

숨길 만한 일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이 핸드폰을 들여다보게 놔둔 채 하얀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섹스 후 짙어진 치자꽃 냄새가 알파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했다. 아이스크림 따위에 비교할 수 없는 단내였다.

“희연아. 같이 갈래?”

정희연은 어깨를 살짝 움츠리며 연 대표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 말하는 남자 때문에 몸이 간지러웠다.

“네. 갈래요.”

연 대표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다 보니 이제껏 가 본 곳이라고는 회사 근처와 부산이 전부였다. 정희연은 인천 위치를 떠올리며 순하게 대답했다. 어디를 가든 대표님만 옆에 있으면 좋았다.

“걷는 거 힘들 것 같은데.”

연 대표는 자그마한 엉덩이를 토닥이며 가느다란 목덜미를 약하게 깨물었다. 안겨 있던 몸이 움찔 얕게 튀었다. 오랫동안 걸어 다닐 일은 없지만, 섹스에 지쳤을 오메가를 혹사하고 싶지는 않았다. 몇 시간이나 몸을 섞은 직후라 묘하게 달뜬 얼굴을 다른 알파들 앞에 내놓고 싶지도 않았고. 믿을 만한 놈들이었지만, 믿음과 독점욕은 엄연히 다른 이야기였다.

“그래도 저는 대표님이랑 같이 있는 게 좋은데…? 대표님이 싫다고 하시면…. 사업이니까 이해할게요.”

“내가 왜 싫어해.”

문제는 정희연을 떼어 놓고 다니는 것 역시 내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안위에 대해서는 걱정스럽지 않으나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제법 큰 차이가 있었다. 알파들이 기를 쓰고 오메가를 각인시키려는 이유를 얼핏 알 것 같기도 했다. 연 대표는 방금 그가 깨문 잇자국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각인이라는 단어를 혀끝에서 굴렸다.

차라리 각인시킬까.

그러나 페로몬 흐름이 정상적이지 않은 상태에서 각인 당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각인이란 페로몬을 묶는 행위였다. 정희연은 연 대표와 같은 우성이었지만, 엉망으로 관리된 페로몬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다. 불안정함으로 일렁이는 페로몬에 다른 형질의 페로몬을 엮으려 들면 무리가 갈 게 분명했다.

한때 베타들에게 짐승 취급 당하던 알파와 오메가는 기실 짐승이 맞았다. 각인이 이루어지는 과정 역시 짐승들의 교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독점욕을 드러내고자 단순히 페로몬을 끼얹는 행위인 페로몬 샤워와는 그 결부터 달랐다. 각인은 폭력적이고 원초적인 짓거리였다.

역시 각인은 아직 이르겠지.

“대표님이 싫으신 거 아니면 저도 같이 갈래요.”

“응. 같이 가.”

연 대표는 정희연의 몸을 조금 더 끌어안으며 한 손으로 어렵지 않게 답장을 보냈다.

애기도 같이 갈 거니까 준비해.

정희연은 창밖으로 지나가는 바다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풍경이 아닌데도 볼 때마다 눈을 떼기가 어려웠다. 단순히 아름다움에 매료된 것일 수도 있으나, 대표님과의 첫 만남이 바다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결 위로 톡 튀어 오르는 햇살에 눈이 부셨다. 살을 엘 듯한 차가운 공기가 흐르고 있을 텐데도, 꼭 완연한 한여름의 햇살 같았다. 여기가 인천항이구나. 자연스레 부산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집으로 가는 길에 연 대표와 바다를 구경한 기억 역시 함께였다.

“대표님. 인천에 볼일 있으세요?”

“저번에 부산에서 본 컨테이너. 기억나?”

“네.”

정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뜬장에서의 기억 때문에 직접 들어가지는 않았지만, 거대한 고철 덩어리 안에 실린 물건들이 무엇인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오늘 새벽에 이쪽으로 옮겨서. 부산보다는 이쪽이 눈에 띄기 쉽거든.”

느릿한 대답에 정희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컨테이너 안의 총기들이 불법 거래된 물건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탓이었다. 불법 유통이라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은 없으나, 알아차리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희연이 연 대표와 처음 만난 순간은 의지할 빛이라고는 달빛이 전부였던 어둑한 밤이었다. 밀수된 물건이 아니라면 굳이 한밤에 컨테이너를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나 남수현이 물건을 찾느니 뭐니 말한 적이 있기도 했다.

정희연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의 옆에 앉은 남자는 무엇이든 숨기는 법이 없었다. 대표실에서 지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들려오는 소식 역시 다양해졌고,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에 그려지는 그림이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대강이나마 지금 상황을 추론할 수 있었다.

“눈에 띄면 대표님 곤란해지시잖아요.”

“희연아. 걱정돼?”

“네.”

연 대표는 픽 웃으며 말랑말랑한 뺨을 꾹 눌렀다. 젖살이 남아 있는 얼굴은 여전히 앳돼 보였다. 남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제법 많은 편이었으나, 정희연과 같은 의미로 걱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보통은 그가 등에 총을 맞고 죽을까 봐 걱정하지, 불법 거래 때문에 곤란해질까 걱정하지는 않았다. 연 대표에게는 많은 연줄이 있었고, 그 연줄이란 회유와 협박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걱정하지 마. 그냥 미끼라고 했잖아.”

미끼. 정희연은 은밀한 느낌의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렸다. 부산에서도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미끼라면, 분명 할아버지인 정 회장을 낚기 위한 미끼일 것이다.

“대표님. 만약 제가 물어보면…. 말씀해 주실 거예요?”

“우리 희연이가 궁금해하면.”

조심스러운 물음이 무색하게 연 대표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는 정희연에게 무언가를 숨길 생각이 없었다. 나이 차이가 나는 탓에 아기 취급 하고 있긴 하지만, 정희연은 엄연한 성인이었고, 제 애인은 피해자로서 알 권리가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은 뭐든지 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좋은 것만 보게 하고 싶으니 굳이 정 회장과 관련된 일을 보여 줄 필요는 없지만, 궁금해한다면 알려 줄 수밖에.

“그럼 집에 가서 말해 주세요. 궁금해요.”

“알았어. 집에 가서 말해 줄게.”

연 대표는 앞으로 벌어질 일을 그리며 정희연을 응시했다. 하긴, 아기가 놀라기 전에 미리 말해 주는 편이 나을 듯했다.

때마침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창밖으로 미리 도착한 지우(馶遇) 알파들이 보였다.

“금방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연 대표는 직접 문을 열고 내리려다가 정희연이 슈트 재킷을 잡아당기자 곧바로 움직임을 멈췄다.

“대표님. 저도 들어가도 돼요?”

“들어가는 건 상관없는데…. 컨테이너 싫어하잖아.”

뜻밖의 물음에 연 대표는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컨테이너를 꺼려 하던 정희연이 들어가고 싶다는 말을 내뱉을 줄은 몰랐다. 그 안에 갇힌 채 부산까지 실려 갔으니 거부감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혹은 뜬장에서 학대당한 기억 때문일 수도 있고.

연 대표가 항구를 싫어하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녹슨 쇠 비린내와 네모난 고철 덩어리들이 뜬장을 연상시키고는 했으니까.

하긴, 여러 이유들을 다 차치하고서라도 컨테이너에 들어가는 걸 선호하는 사람은 없을 듯했다.

“대표님 있으니까 괜찮아요.”

정희연은 슈트 재킷을 잡고 있던 손에 꼬옥 힘을 주며 말했다. 부산에서는 컨테이너에 들어가는 대신 뻥튀기를 사러 갔지만, 오늘은 들어가고 싶었다. 옆에 연 대표가 있으니까. 그를 믿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지만, 이제는 애인이 됐으니 미묘한 자신감이 붙었다. 무엇보다 컨테이너에 들어가서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게 정 회장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라는 걸 어렴풋이 짐작한 까닭이었다.

정희연은 더 이상 담장 안에 갇혀 아무것도 모르던 오메가가 아니었다. 아직 돌아가는 상황을 자세히 모르긴 해도, 지금은 직접 마주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컨테이너를 짓밟자 특유의 가벼운 공명음이 네모난 공간을 갈랐다. 물건으로 꽉 찬 탓에 소리가 울리지는 않았으나, 특유의 가벼운 소음은 신경을 거스르기에 충분했다. 정희연은 비릿한 쇠 냄새에 콧잔등을 찌푸렸다. 안아 주겠다는 연 대표의 제안을 거절한 게 조금 후회되려는 순간이었다.

‘안아 줄까.’

‘네? 왜요?’

‘걷기 힘들잖아.’

‘저 혼자 걸을 수 있어요.’

‘으응. 혼자 걸을 수 있어?’

‘네. 그리고 밖에 팀장님들 계시잖아요.’

정희연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는지 연 대표는 피식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너 안고 다닌다고 뒷말할 사람 없어.’

‘그게 아니라…. 저도 어른이잖아요. 술 마신 것도 아니고 잠에서 깬 것도 아닌데 밖에서 안겨 다니면 안 돼요.’

제법 엄한 어조로 말하자 연 대표는 알았다며 차에서 내려섰다. 남자가 허리를 받쳐 준 덕분에 걷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컨테이너 안으로 들어오자 속이 조금 불편해지는 기분이었다. 대표님께 안기면 페로몬 냄새 덕분에 거부감이 덜했을 텐데.

“이리 와.”

주춤한 기색을 느낀 남자가 옆에 선 오메가를 끌어당겼다. 자그마한 몸이 너른 품 안으로 쏙 들어갔다. 뒤에서 보면 정희연의 자그마한 몸 따위는 연 대표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정희연은 그제야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대표님께 완전히 안기자 묵직한 페로몬이 조금 더 짙게 느껴졌다. 늘 그를 안심시켜 주는 페로몬이었다. 비릿한 쇠 냄새가 순식간에 몸을 사렸다.

컨테이너 안에는 커다란 상자들이 가득 차 있었다. 정희연은 자신이 선 공간이 뜬장이 아님을 실감한 뒤에야 긴장을 풀었다. 찬찬히 안쪽을 둘러보자 열린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그 안에는 검은색 총들이 섬세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남수현이 벌인 일이 아니었다면, 연 대표가 한참 전에 손에 넣었어야 할 물건들이었다.

“원래 저 대신 받을 물건이에요?”

정희연은 슬쩍 턱을 올려 허리를 감싼 남자를 쳐다봤다. 그의 물음에 상자를 확인하던 연 대표의 시선이 곧바로 내리깔렸다. 눈을 내리깐 탓에 싸늘한 분위기가 배는 짙어졌으나, 정희연에게는 무서운 얼굴이 아니었다.

“우리 희연이 처음 만난 날 생각나나 보네.”

연 대표는 그에게 결박당하다시피 한 오메가를 조금 더 세게 끌어당기며 나지막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신경을 긁어 대던 컨테이너 특유의 쇠 냄새가 정희연의 페로몬에 묻혀 서서히 옅어졌다. 컨테이너에 들어서며 신경이 곤두서지 않은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일이 예정대로 진행됐으면. 직접 보니까 신기해?”

“네.”

연 대표는 심수천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남자의 뜻을 파악한 심수천은 망설이지 않고 곁에 있던 총을 꺼내 공손한 자세로 건넸다.

내색하고 있지는 않지만, 심수천은 컨테이너 안을 진동하는 연 대표의 페로몬 향에 죽을 맛이었다. 완벽하게 페로몬을 갈무리하던 남자가 품에 안긴 오메가에게 퍼붓고 다니다시피 하는 바람에 냄새가 진동을 했다.

김지원 말로는 정희연이 아직도 페로몬을 잘 다루지 못한다던데, 지금 상황을 보면 연 대표 덕분에 일하는 도중 오메가 페로몬을 느끼는 불상사는 없을 듯했다.

심수천은 숨을 참으며 연 대표와 그가 예뻐 죽는 오메가를 살폈다.

“들어 봐.”

지우(馶遇) 알파들이 페로몬에 힘들어하는 걸 알면서도 연 대표는 뻔뻔한 얼굴로 손에 들린 총을 정희연 앞에 흔들었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탄창 없어서 괜찮아.”

정희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연 대표가 내민 총을 받아 들었다. 생각보다 가볍고, 생각보다 서늘했다. 신기한 마음에 만지작거리자 연 대표가 넌지시 물었다.

“갖고 싶어?”

뜬금없는 물음에 정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총이요? 총 가지려면 허가서 있어야 하는데…? 전 허가서 없어요.”

“만드는 거 어렵지 않은데.”

기준에 맞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듯, 다소 위험하게 들리는 발언이었다.

대답 없이 손만 꼼지락거리자 연 대표는 픽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양 가볍게 말했다.

“네가 못 할 건 없다고 했잖아.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가져야지.”

정희연은 손에 들린 총을 내려다봤다. 열아홉 살까지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하지 말라.’는 명령이었다. 고작 몇 개월 사이에 하고 싶은 건 하라는 말이 더 익숙해질 줄은 몰랐다. 어쩐지 가슴이 간질거려 정희연은 또다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갖고 싶어서 말씀드린 건 아니에요. 그리고 저는 쓸 일 없으니까 괜찮아요.”

“하긴. 우리 희연이 손 쓰는 거 서툴지.”

연 대표는 하얀 손이 내민 총을 다시 심수천에게 건넸다. 원한다면 줄 생각이었는데 총은 과한 모양이었다. 성격이 워낙 순해 함부로 다루다가 사고를 낼 일은 없겠지만, 손 쓰는 게 서툴러 불상사가 생길지도 모르겠다. 어떤 사고를 치든 괜찮았지만, 총을 쓰면 정희연이 다칠지도 모르니 역시 보류하는 게 좋을 듯했다.

“대표님은 총 쏠 줄 아세요?”

심수천이 총 닦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정희연은 궁금증이 인 듯 물었다. 연 대표는 뭐라고 대답할까, 고민하다 비스듬히 웃었다.

“나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닌데, 희연아.”

“그건 다른 사람들이 대표님을 그렇게 평가하는 것뿐이잖아요.”

마치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글쎄. 느슨한 웃음과 함께 남자의 눈매가 얄팍해졌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연 대표 자신은 그리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대답 대신 비스듬히 웃자 품 안에서 꼬물거리던 오메가가 마주 보는 자세로 몸을 돌려 왔다.

“저한테는 대표님 좋은 사람이에요.”

정희연은 제법 단호한 어투로 차근차근 내뱉었다. 다른 사람이 대표님을 뭐라고 평가하든, 그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그리고 생각해 봤는데…. 대표님이 저한테만 좋은 사람이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예쁘게 굴지 마세요.”

“으응. 다른 사람들한테는 예쁘게 굴지 마?”

“네.”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자 연 대표가 뺨을 톡 건드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희연아.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커다란 손이 뺨을 지나 느릿하게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이미 너한테만 예쁘게 굴고 있어.”

목을 감싸듯 턱선에 닿아 있던 손가락이 진득하게 움직여 하얗고 말랑말랑한 피부를 매만졌다. 정희연은 조심스러운 손길이 물러난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네에. 앞으로도 그러셔야 해요.”

무해한 얼굴로 하는 말치고는 제법 당돌한 요구였다. 정희연다운 반응에 연 대표는 입꼬리를 늘리며 습관처럼 보드라운 뺨에 입을 맞췄다. 컨테이너 안에 있던 알파들이 머쓱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눈치가 느껴졌으나, 부하 직원들의 반응을 의식할 정도로 염치 있는 인간은 아니었다.

연 대표는 품에서 빠져나간 몸뚱이를 다시금 끌어당겼다. 정희연이 그의 페로몬이 있어야 덜 긴장한다는 사실을 알고 한 행동이었으나 본심은 지극히 사적인 욕망에 가까웠다. 말랑말랑하고 따끈따끈한 몸을 끌어안고 페로몬을 마음껏 들이마시고 싶다는 욕망.

남은 손을 내밀자 대기하고 있던 심수천이 총을 건넸다. 정희연에게 건넨 것과는 다른 종류였다. 손에 익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총을 쥔 남자는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가볍게 손목을 돌렸다.

“다른 물건들은?”

“확인 마쳤습니다. 컨테이너를 통째로 옮긴 건 확실합니다만,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정희연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흘려들으며 연 대표의 손에 들린 총을 빤히 응시했다. 이제 와서 총이 갖고 싶어진 건 아니었다. 검은색의 매끈한 총신이 연 대표의 커다란 손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 절로 시선을 빼앗긴 것에 가까웠다.

위험한 물건인데 잘 어울린다니. 실례가 되는 생각인 것 같았지만, 솔직한 감상으로는 그랬다. 곧게 뻗은 손가락과 툭 불거져 나온 뼈가 둔중하면서도 날렵한 디자인의 총과 한 몸처럼 잘 어울렸다.

시선을 조금 아래로 내리자 차가운 금속 느낌의 은색 시계와 하얀색 셔츠, 그 밑으로 이어지는 검은 슈트가 남자의 손목을 어슷하게 가리고 있었다. 살짝 드러난 손목이 어쩐지 은밀하게 느껴져 정희연은 괜스레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불현듯 섹스 도중 연 대표의 손목이 한 손에 잡히지 않던 기억이 떠오른 탓이었다.

“아파?”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연 대표는 미간을 찌푸렸다. 심수천에게 총을 건넨 그는 허리를 감싸던 팔을 들어 얇은 손목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새벽까지 몸을 섞으며 몇 번이나 남자의 손아귀에 잡힌 손목이었다. 부드럽게 한다고 했는데, 아픈 모양이었다.

“아, 아파서 만진 거 아니에요.”

온순한 대답에서 진실을 찾아낸 듯 연 대표의 찌푸려진 미간이 곧 제자리를 되찾았다.

“으응. 아파서 만진 거 아니야?”

“네. 괜찮아요.”

괜찮다는 대답에도 남자의 손길은 떨어져 나갈 줄 몰랐다. 느릿하게 쓰다듬는 움직임이 간지러워 정희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피식 웃는 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다의 짠 내가 자취를 감췄다. 정희연은 창밖으로 멀어지는 푸른 물결을 응시했다. 날씨 탓인지 지난번에 본 부산 바다와는 색깔이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했다. 그 빛깔은 달라도 산발하는 물결은 한결같이 아름다웠다. 담장 안에서는 영영 보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정 회장의 바람대로 성인이 된 후 우성 알파와 결혼했다면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옆에 연 대표가 아닌 다른 알파가 앉아 있는 건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정희연은 연 대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바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연 대표는 태블릿을 한 손에 든 채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래로 반쯤 내리깔린 눈과 무표정하게 닫힌 입술이 싸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정희연은 조용히 숨을 죽였다. 가만히 남자를 보는데 태블릿을 쥐고 있는 손이 또다시 시선을 앗아 갔다.

커다란 손이 제법 큰 태블릿을 쉽게 받치고 있었다. 손가락과 이어지는 툭 튀어나온 뼈마디 밑으로 핏줄 돋은 손등이 인상 깊었다. 커다란 손과 정교하게 이어지는 손목 위를 시계의 은색 브레이슬릿이 단단히 감싼 채였다. 차가운 금속성의 베젤 안쪽에서는 서늘함이 섞인 남색 청판이 예리하게 빛났다.

“희연아. 뭐가 그렇게 궁금해.”

연 대표는 태블릿을 내려 두며 비스듬히 웃었다. 밑바닥에서 구를 대로 굴러먹은 인간인 만큼 그는 타인의 기척에 예민한 편이었다. 칼을 꽂아 넣고 싶어 신중하게 접근하는 깡패도 아니고, 순하고 무딘 정희연의 기척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숨소리까지 죽인 채 도둑질하듯 쳐다보는 게 귀여워 언제까지 보려나 궁금해 그냥 뒀더니, 고작 시계에 시선을 뺏길 줄은 몰랐다.

“그게 아니라….”

“응. 그게 아니라.”

정희연은 말꼬리를 흐렸다. 연 대표의 카디건을 처음 입은 날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대표님 옷을 입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길래 혹 제가 이상한 취향을 가진 건 아닐까 싶어 김지원에게 상담한 적이 있었다. 혼자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아 솔직하게 물어본 것뿐인데, 지금이 딱 그런 기분이었다.

정희연은 앞 좌석과 분리된 가림막을 힐끗 확인한 뒤에야 입술을 열었다.

“대표님 손목 본 거예요.”

“내 손목?”

“네. 대표님 손목 야한 것 같아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연 대표의 한쪽 눈썹 위로 미세한 홈이 파였다. 이내 말뜻을 파악한 남자가 느슨히 웃었다. 시계를 쳐다보는 줄 알았더니 손목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다. 한참 어린 애인 입에서 야하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들을 줄도 몰랐고.

정희연에게 야하다는 소리를 들은 게 처음은 아니지만, 대놓고 품평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저 이상한 취향이에요? 솔직히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애인 눈에 야하다는데 뭐가 이상해.”

연 대표는 가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얌전히 놓여 있던 정희연의 손을 잡아챘다. 깍지 낀 작은 손이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졌다. 남자는 보란 듯이 제 손목을 돌렸다.

“아까 컨테이너에서부터 느꼈는데 이렇게 이어지는 부분 보니까 기분이 조금 이상했어요.”

정희연은 빼꼼 튀어나온 엄지손가락으로 연 대표의 손목을 쓸었다. 옅은 분홍색 손톱이 남자의 두꺼운 손목과 시계를 지나 슈트까지 닿았다.

연 대표는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느라 아래로 기울어진 정희연의 긴 속눈썹을 바라보며 나지막하게 한숨을 삼켰다. 적절한 단어를 찾지 못해 기분이 이상하다고 말한 것일 뿐, 정희연이 내뱉은 말은 손목을 보고 꼴렸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야하게 느껴졌다는 건 성애적인 의미였으니까.

성기에 대한 비속어는 스스럼없이 내뱉더니, 꼴렸다느니 하는 단어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희연아.”

남자에 비하면 자그마한 손이 재차 시계와 슈트 사이의 피부를 만지작거렸다. 야하다 말하던 애인이 도리어 꼴리는 짓을 하고 있었다. 사심 없는 행동이라는 게 더 문제였다.

“모르고 하는 짓이 더 나쁜 건데.”

“네? 저 나쁜 짓 했어요? 아까 말실수한 거예요?”

말간 얼굴에 연 대표는 비스듬히 웃었다. 굳이 말로 설명해 줄 필요는 없었다. 이런 건 직접 느껴 보는 게 가장 쉽고 빠르니까.

“시계. 해 볼래?”

마침 하얀 손가락이 차가운 금속 베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네. 해 볼래요.”

연 대표는 능숙하게 시계 클래스프를 풀었다.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소리가 고요하게 달리는 차 안을 울렸다.

그는 정희연의 손목을 부드럽게 끌어와 손수 시계를 채워 주기 시작했다. 눈 감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으나 일부러 느릿하게 움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손목을 문지르는 다정하고도 느른한 접촉에 정희연은 괜히 손가락만 꼼질거렸다.

방금 전까지 남자의 피부에 달라붙어 있던 시계는 싸늘한 생김새와 달리 미약한 온기를 품고 있었다. 클래스프가 스트랩에 감기는 소리와 함께 연 대표의 손이 물러갔다.

“저한테는 너무 헐렁한 것 같아요. 빠질 것 같은데….”

정희연은 팔을 세우며 중얼거렸다. 대표님께 딱 맞는 시계니, 자신에게는 당연히 크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까지 헐렁거릴 줄은 몰랐다. 손목에 아슬아슬 걸쳐져 있던 시계가 팔 안쪽으로 내려가다 움직임을 멈췄다. 어쩐지 연 대표의 손목에 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예쁘네.”

연 대표는 정희연의 손목이 아닌 팔에 걸리다시피 한 시계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에게 맞춘 시계라 그런지, 하얀 손목에 걸리기는커녕 팔을 세우지 않으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질 것만 같았다. 정희연에게는 너무 커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 같으나, 어린 애인이 자신의 물건을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이 퍽 만족스러웠다.

“맞는 걸로 사 줄게.”

정희연의 손목에 시계를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당장 각인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독점욕을 억누르는 수밖에.

“네? 안 사 주셔도 돼요. 대표님 시계라서 해 보겠다고 한 거예요.”

“으응. 내 시계라서 해 보고 싶었어?”

“네. 다른 시계는 관심 없는데…?”

“하여튼 예쁜 말만 하지.”

오래 사용한 소유물이 정희연의 손목을 감싸 쥐고 있는 걸 계속해서 보고 싶었으나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클래스프를 조절하면 그만이지만, 저 손목에는 지나치게 큰 시계였다.

연 대표는 한발 물러섰다. 제가 입던 옷을 애인이 입고 다니니 욕심을 억누르는 것은 그럭저럭 어렵지 않았다. 정희연은 여전히 그의 카디건을 애착 담요 대하듯 했다. 대놓고 페로몬을 쏟아부은 이후로는 입고 외출한 적이 없으나, 집에 있을 때만큼은 버릇처럼 연 대표의 옷을 입고 생활하는 편이었다. 습관으로 굳어진 듯한 행동이었고 남자는 그 습관을 고쳐 줄 생각이 없었다.

“사 줄게. 필요한 일 생길 수도 있으니까.”

“필요한 일이요?”

“응.”

연 대표는 속내를 감추며 다정하게 눈꼬리를 접었다.

도착한 곳은 몇 달 전에 와 본 적 있는 장소였다. 연 대표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랍시고 옷을 잔뜩 사 안긴 장소이기도 했다. 정희연은 그때와 다를 바 없이 편안하고 안락한 소파에 앉아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지난번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트레이에 담긴 디저트가 마카롱이 아닌 딸기가 들어간 생크림케이크라는 점이었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해 연 대표는 직접 접시를 가져와 깔끔하게 케이크를 잘라 냈다.

“조금 있으면 밥 먹어야 하는데….”

“먹기 싫어? 치우라고 할까.”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 결국 접시를 받아 들었다. 다른 디저트였다면 참았을 텐데, 제일 좋아하는 케이크라 유혹을 떨쳐 내기가 어려웠다. 애인이 직접 잘라 준 케이크를 먹고 있자, 직원이 커다란 상자를 들고 나타났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퍼스널 쇼퍼인 최윤은 조심스레 상자를 내려 둔 뒤 케이스를 열었다. 연 대표가 착용하고 있는 브랜드의 시계가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대표님께서 착용하고 계신 시계는 보통 알파들이 착용하는 라인이라 작게 나오는 제품이 없어서요. 비슷한 가격대의 괜찮은 제품들로 골라 봤습니다.”

최윤은 고객 옆에 앉아 있는 오메가를 힐긋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사이즈를 원하길래 혹시 애인에게 주려는 선물인가 싶어서 준비했더니, 예측이 딱 맞아떨어졌다.

“하하. 혹시나 했더니 그때 오신 분이 맞네요. 개인적으로 골드 버클이 잘 어울리실 것 같아서 준비해 봤는데….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다른 제품으로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윤은 시계를 하나하나 보여 주며 특징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정희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달싹였다. 시계를 잘 몰랐을뿐더러, 그의 눈에는 전부 비슷해 보였다.

“희연아. 마음에 드는 거 없어?”

느긋한 연 대표의 물음에 건너편에 앉은 최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그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 저는 시계를 잘 몰라서요. 대표님께서 골라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이상한 거 골라 주면 어쩌려고.”

“네? 대표님이 골라 주시는 건 다 좋은데…? 괜찮아요.”

아니나 다를까, 가볍게 던진 짓궂은 물음에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연 대표는 시계를 하나 골랐다. 정희연과 어울릴 법한, 스틸이 아닌 레더 소재 시계였다.

“희연아. 저거 어때.”

“예뻐요. 그럼 저걸로 할래요.”

최윤이 냉큼 말을 받았다.

“아, 역시 대표님 안목이란. 제가 보기에도 이 시계가 애인분께 제일 잘 어울려 보입니다.”

어떤 점에서 어울리는지 줄줄이 늘어놓은 최윤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연 대표는 정희연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따로 해야 하는 작업이 있으니 다시 벗어야겠지만, 일단은 직접 채워 줄 생각이었다.

정희연은 제게 시계를 채워 주느라 살짝 고개 숙인 남자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스스로 해야 익숙해질 텐데, 대표님이 자꾸만 해 주시니 나쁜 버릇이 들어 큰일이었다.

“예쁘네.”

부드러운 칭찬에 정희연은 슬쩍 손목을 돌렸다. 오메가 라인으로 나온 시계라 그런지, 연 대표의 시계를 착용했을 때보다 훨씬 안정감 있게 느껴졌다. 시계를 찬 손목은 여전히 남자의 손바닥에 가둬진 채였다.

“대표님이 예쁜 거 고르셔서 그런가 봐요.”

“시계가 아니라 네가 예쁘다는 소린데.”

“아….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민망해했을 소리를 정희연은 익숙하다는듯이 받아들였다. 담장 안에서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소리지만, 연 대표에게 자주 듣다 보니 예쁘다는 말이 너무나도 당연해진 것이다.

연 대표는 온순한 대답을 들으며 가느다란 손목과 시계 사이의 틈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제 애인은 아직도 사회적 통념에 익숙하지 않은 편이었다. 인간관계라고 해 봤자 지우(馶遇)의 알파들과 이해진이 전부니,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관습을 단기간에 익히는 게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제 품에 가둬 두고 싶은 독점욕이 들끓었으나, 연 대표는 정희연이 협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도록 제한할 생각이 없었다. 원한다면 뭐든지 해 줄 생각이었고, 그중에는 새로운 인간관계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

정 회장 때문에 극단적으로 보호하는 것일 뿐, 일이 마무리되면 조금 더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게 해 줄 생각이었다. 알파들이야 정희연에게 묻은 페로몬 때문에 알아서 떨어져 나갈 테고.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예쁨만 받아도 충분했다.

“대표님도 예뻐요.”

정희연은 또다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목을 느릿하게 문지르는 기다란 손가락이 의식된 탓이었다.

“으응. 예뻐?”

순한 오메가가 제게만 예쁘다 하는 걸 알고 있는 남자는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네.”

“희연아. 예쁘면 부탁 하나 들어주면 좋겠는데….”

“네? 네. 대표님이 부탁하시면 다 들어드릴게요.”

“이 시계.”

알파의 손가락 끝이 시계의 스트랩 부분을 톡, 건드렸다.

“위치 추적기 달고 싶은데.”

“위치 추적기요? 전 맨날 맨날 대표님 옆에만 있을 건데….”

“응. 우리 희연이는 맨날 맨날 대표님 옆에만 있어야지.”

연 대표는 느른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데 너를 데려가고 싶어서 혈안인 새끼들이 있어서.”

“아….”

정희연은 연 대표가 왜 위치 추적기라는 단어를 꺼냈는지 단번에 파악했다.

“네. 괜찮아요.”

스트랩을 건드린 손이 마침내 그 틈을 파고들었다. 연 대표는 얇은 힘줄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속삭였다.

“착하네.”

알파의 가늘어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정희연은 일순 호흡을 멈췄다. 대표님의 손목을 보며 느꼈던,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

<한밤중 서울 도심에서 총기 사고 발생. 임산부와 어린아이 있어…. 총기 규제 논란 뜨거운 감자 될까>

지난 3일 30대 남성이 총기 손질 도중 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현재 이 남성은 세브란스 병원에서 전문 치료를 받고 있다. 당시 집 안에는 임산부와 어린아이가 있었으나, 다행히 피해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찰은 ‘총이 갑자기 폭발했다.’라는 피해자의 진술을 바탕으로 사고 경위를 조사하는 중이다.

현행 ‘총포·도검·화약류 등의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에 의하면 허가를 받은 일반인은 총기를 소유할 수 있다. 총기 규제가 완화된 지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이번 사고가 총기 합법화에 대한 뜨거운 논쟁으로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폭발한 총기는 K&H사의 M88A 모델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사 결과 총기 결함이 원인으로 밝혀질 경우 유통 업체는 상당한 곤욕을 치를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 대한민국의 총기 유통 업체는 단 하나뿐으로….

“임산부에 어린아이….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다 가져다가 썼네.”

연 대표는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헤드라인을 손가락으로 툭 건드렸다. 엠바고가 걸려 있으나 당장 내일 오전에 발표될 기사였다.

“기자님 성함은?”

“김재호 기자입니다.”

남자의 눈썹이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기사에 연우범이라는 이름이 떡하니 박혀 있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해진한테 감사해야겠네.”

“오늘 만나시잖습니까. 따로 선물이라도 준비할까요.”

김철우는 지나가듯 물었다. 힐긋거리는 시선은 연 대표가 아닌, 태블릿을 향해 고정된 동그란 정수리를 향한 채였다. 그의 상사 앞에서가 아니면 대개 무심한 표정인 오메가는 드물게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진지하게 기사를 보는 모양이었다.

“됐어. 내가 주면 싫어할걸.”

연 대표는 슬쩍 찡그려진 정희연의 미간을 꾹 눌러 펴 주며 여상한 어조로 답했다.

“그쪽도 보답 바라고 한 일 아닐 테고. 정 회장 잡고 싶어서 안달 난 건 이해진 쪽도 피차일반이니까.”

“알겠습니다. 기사는 그대로 나가게 할까요? 유 의원님께서 도움 필요하면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김철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연 대표의 가늘어진 입술 사이로 웃음기가 비죽 튀어나왔다.

“선하 그룹에서 낸 기사인데 내가 무슨 수로 막겠어, 안 그래요, 김철우 비서님?”

연 대표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압박하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었다. 김철우는 상사의 재미없는 농담 따먹기를 들으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총기 사고도, 선하의 개입도, 내일 발표될 기사도 전부 연 대표의 계획이었다. 이 상황을 설계한 당사자가 대기업에 맞서는 힘없는 개인 행세를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었다.

“선하 그룹이요? 대표님. 이거 회장님 짓이죠?”

김철우는 확신했다. 연 대표가 답지 않게 연약한 척 구는 이유는 눈을 동그랗게 뜬 저 오메가 때문이라고.

“전에 강서의 전무님 만났을 때 들었어요. 강서의 전무님 형 되시는 분이 원래 저 사기로 하셨다고…. 그럼 저 때문에 큰일 난 거잖아요.”

“희연아. 걱정할 필요 없는데. 너 넘겨줄 생각 없거든.”

“네? 저는 걱정 안 돼요.”

정희연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입매를 굳혔다. 연 대표가 자신을 얼굴도 모르는 알파에게 넘길까 봐 걱정한 게 아니었다.

“제가 걱정하는 건 대표님인데….”

모르긴 몰라도 기사가 뜨는 순간 화살이 연 대표를 향해 날아올 터였다. 15년 가까이 감금당한 채 살아온 탓에 어린아이들도 알 법한 사회적 관습에는 서툴렀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백치는 아니었다.

정희연에게 배제된 교육은 어디까지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작용이었지, 모든 배움은 아니었다. 정 회장은 그를 알파에게 보낸 후에도 빼먹을 게 있다고 생각했는지 주식과 부동산 등을 가르쳤다. 알파를 위해서 돈을 굴릴 줄 알아야 한다면서.

돈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회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했기에 정희연 역시 크고 작은 이슈 정도는 알고 있었다. 바깥세상도, 바다도 본 적 없으면서 숫자로 이루어진 세계는 나쁘지 않게 볼 줄 알았다.

엠바고가 걸린 기사에 버젓이 등장한 연우범이라는 이름 석 자는, 사고의 원인을 그에게 돌리려는 명백한 의도를 띠고 있었다. 기사의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더욱더 자극적인 기사들을 양산해 낼 테고, 실명이 거론된 당사자는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좋아하는 사람이니 걱정되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정희연이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닌 연 대표의 안위였다.

“으응. 내가 걱정돼?”

“네. 제가 아니라 대표님이 걱정돼요.”

애인에게서 원하는 대답을 끌어낸 남자는 눈꼬리를 접었다. 서늘한 낯 위로 부드러운 분위기가 어렸다.

“걱정하지 마. 뭐, 구치소에 며칠 갇혀 있긴 해야 할 것 같지만.”

“네? 구치소요?”

연 대표는 정희연을 가뿐히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하얀 목덜미에 턱을 기댄 남자는 허리를 감싼 손으로 기사 속 한 부분을 툭 건드렸다. 정확히 M88A라는 글자 위였다.

“저번에 컨테이너에서 만져 본 총, 기억나지?”

“네.”

“그 모델이 M88A야.”

숨결이 귓가 위로 나직이 내려앉자 정희연은 목을 살짝 움츠렸다. 그를 안고 있던 남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불법적으로 들여온 총이고.”

“네에.”

“이번 일에 써먹으려고 들여온 물건은 아닌데 선하에서 컨테이너에 손을 댄 김에 계획을 바꿨어.”

“계획이요?”

“자세한 얘기는 오늘 저녁에 해 줄게.”

정희연은 오늘 저녁, 이해진과 남수현을 만난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

연 대표는 정희연의 귓바퀴에 쪽 입술을 내리고는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듣는 이가 이해하기 쉽도록 차근차근한 어조였다.

“기사에 나온 불량품은 우리 쪽에서 들여온 물건이 아니야. 선하에서 컨테이너에 든 물건 확인하고 나한테 덮어씌우려고 준비한 같은 모델이지.”

“그럼 저 기사에 나오는 사고도 그쪽에서 일부러 만들어 낸 거예요?”

“임산부에 아이에…. 거실에는 카메라까지 있고. 이렇게 자극적으로 영상 뽑아 내기도 참 힘들어?”

정희연은 기사 속 영상 캡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홈 CCTV치고는 지나치게 화질이 좋았다. 마치 자신의 방에 설치되어 있던 감시 카메라처럼.

“총기 결함에 불법 거래까지 한 번에 엮어서 물고 늘어지려는 속셈인가 본데….”

연 대표는 뻔히 예상 가는 그림이라는 듯 느른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일 주도한 건 강서효 사장일 거야. 후계 구도가 걸린 일이라 네가 꼭 필요한데 그러려면 나를 치워야 할 테니까. 선하 쪽은 총기 유통권 가져오려고 쉽게 움직여 줄 거고.”

정희연은 천천히 연 대표의 말을 곱씹었다. 강서효 사장이라면 자신을 사기로 했던 알파였다. 그렇다는 건 이 사건의 뒤에 정 회장이 있다는 의미였다.

“그럼 곤란한 상황 아니에요? 불법 거래 맞잖아요.”

연 대표는 제게 안겨 있는 몸을 느슨히 놓아주며 하얀 뺨을 꾹 눌렀다. 심각해진 표정 때문인지 젖살 오른 뺨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부풀어 있었다.

정희연의 말처럼 ‘곤란한’ 상황이 맞긴 했다. 정식 루트도 아닌 밀수한 총으로 사고가 발생할 경우 어지간해서는 문제를 덮기 어려울 터였다. 무엇보다 총기 규제 강화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존재하는 한 이번 사건은 정치 싸움으로 이어질 요소가 다분했다. 제아무리 연 대표라고 해도 정치와 엮이는 순간 짜증스러운 일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들여온 물건에 코드가 있어. 코드만 대조해도 우리 쪽 물건이 아니라는 건 쉽게 증명될 테고. 그럼 끝이야.”

기실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연 대표를 물 먹이기 위해 선하 쪽에서 벌인 자작극이라는 게 밝혀지면 여론은 금세 뒤집힐 것이다. 그룹에 대한 신뢰는 바닥을 칠 테고, 주가가 떨어진 틈을 타 강서의와 함께 개미들을 긁어모으면 그만이었다. 강서효가 책임지고 사장 자리에서 물러서면 그 자리를 채우는 건 강서의 전무가 될 테고, 그렇게 되면 선하가 지우(馶遇)를 귀찮게 하는 일도 없어질 터였다.

“그럼 이번에 들여오신 물건들 전부 합법으로 세탁하신 거예요?”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코드를 밝히려면 컨테이너에 있던 물건을 전부 내보여야 하는데, 그렇다는 건 물건을 들여온 과정이 전부 합법적인 루트로 둔갑했다는 소리였다. 제법 잘 맞는 추론에 연 대표는 대답 없이 웃었다.

“아…. 하긴, 회장님께서 하시던 일 생각하면 가능할 것도 같아요.”

“희연아.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건 없어.”

연 대표는 농담을 던지듯 가볍게 말했다. K&H에 빚지는 장사를 한 데다, 몇몇을 포섭하느라 제법 큰 손해를 봤으나 그 정도 금액쯤이야 몇 배로 돌아올 테니 상관없었다.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했을 일이고.

연 대표는 손을 뻗어 한 줌만 한 손목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며칠 전에 선물한 시계가 정희연의 손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기묘한 충족감이 그를 난파시킬 것처럼 몰려왔다.

“김재호 기자 선물 준비할까요?”

김철우는 그 틈을 타 중요한 물음을 건넸다. 연 대표가 지금처럼 정희연을 끼고도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니다 보니 이제는 면역이 되어 적절한 시기에 끼어들 수 있었다. 연 대표의 싸늘한 얼굴에 스민 다정함은 여전히 낯설었다.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았지만.

사실 김철우는 오랫동안 생각했었다. 연 대표의 마지막 모습은 자살일지도 모른다고. 다 가진 남자가 자살이라니, 다소 우습고 허황된 생각일 수 있으나 그럴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종종 그를 덮쳤다.

오랜 시간 보아 온 연우범은 모든 일에 무료한 남자였다.

뜬장에서 남자를 잡아먹은 것은 증오라는 이름의 화마였다.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 것처럼 타오르던 화마는 남자가 모든 것을 손에 쥔 순간 허망함이라는 잿더미만 남기고 사라졌다. 실로 허무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진창에서 나와 위로 올라가는 것만을 목표로 아득바득 살아온 탓일까, 오를 곳이 사라진 남자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증오의 원인인 정 회장이 버젓이 살아 있음에도 쉬이 처리하지 않은 것 역시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정 회장마저 죽어 사라지면 지루해진 나머지 견딜 수 없었을 테니까. 그나마 연 대표에게 남은 사소한 즐거움이라면 정 회장이 자신의 손에서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게 전부였을 터다.

김철우 역시 이해진이나 남수현처럼 정 회장에게 악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빌어먹을 노인네가 하루빨리 고통스럽길 원했으나 한편으로는 정 회장이 사라진 이후, 연 대표가 보일 태도가 걱정스러웠다.

김철우는 연우범이 내민 동아줄을 잡고 살아남은 알파 중 하나였다. 구원자를 향한 걱정과 염려는 당연한 순리였다. 연우범에게 충성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당연한, 반박할 필요조차 없는 순리. 깡패 새끼로 함께 구른 과거가 없었더라도, 김철우는 자신이 남자에게 충성했으리란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무언가에 집착이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도 연우범에게서 풍겨 나오는 무료함 때문이었다. 물건보다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나았고, 살아 있는 생명체 중에는 수명이 비슷한 인간, 개중에서도 오메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메가를 향한 알파의 집착과 소유욕은 연우범이라도 거스르지 못할 테니까. 페로몬을 병적으로 싫어하는 탓에 글렀다 싶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김철우는 남자를 끝까지 보좌할 생각이었다. 연우범이 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준비하라고 하시면 대표님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러나 남수현이 선물이랍시고 준비한 오메가가 우범 지대로 들어오며 모든 게 달라졌다. 김철우는 연우범이 다정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남자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물론 그의 상사는 표정 관리에 무척이나 익숙한 남자였고, 다정한 척 구는 것쯤이야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김철우 역시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연 대표가 정희연에게 내보이는 다정함이 단순한 비즈니스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어느 순간 김철우는 연우범의 얼굴에서 낯선 다정함을 발견했다. 처음과는 분명히 다른 결의 다정함이었다.

연 대표가 처음 정희연에게 보인 호의는 어디까지나 이용 가치 때문이었다. 정희연을 귀여워한 것 역시 그의 주변에는 없는 인간상이기 때문이지, 다른 의미는 없을 터였다.

그게 아닐 줄이야. 김철우는 한 박자 늦게 연 대표의 변화를 알아차렸고, 상사의 얼굴에 깃든 낯섦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전처럼 모든 게 무료해 사는 게 재미없다는 표정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연우범이 부하들을 앞에 두고 정희연을 어떻게 어르든, 김철우에게는 다행인 일이었다.

“우리 기자님께서 신경 써서 준비해 주셨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이해진 통해서 드려.”

“그럼 오늘 퇴근 전까지 준비해 두겠습니다.”

선물? 정희연은 김철우 입에서 나온 ‘선물’이라는 단어가 단순한 사전적 의미가 아님을 눈치챘다. 선물을 준비하는 정 회장을 가끔 본 터라 단어에 숨은 말뜻을 알아듣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현금이나 골드바, 혹은 미술품일 것이다.

문득 정희연의 시선이 손목으로 향했다. 얌전히 걸려 있는 시계가 억대를 호가하는 물건인 걸 감안하면 이 물건을 선물한 남자 역시 부자겠지만, 은근한 걱정이 밀려오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도움이 되지 못해 시무룩해지려는 찰나, 생각지도 못한 사실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대표님.”

“응, 희연아.”

“제가 도와 드릴까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연 대표는 고개를 기울였다. 한참 어린 애인한테 도움받을 만한 일은 없는데.

“갑자기 생각났는데 저 돈 많아요. 직접 써 본 적은 없지만….”

“돈?”

연 대표는 정희연의 내뱉은 돈이라는 단어를 되짚었다. 갑자기 저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품에 안긴 몸이 바르작거리더니 마주 보려는 듯 반쯤 돌아섰다.

“네. 주식도 있고 부동산도 있고…. 제 명의로 된 것들이라서 대표님이 원하시면 드릴 수 있어요. 써 본 적은 없어서 대표님께서 도와주셔야겠지만….”

갑작스레 튀어나온 애인의 재산 고백에 연 대표는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애초에 정희연의 재산 목록 자체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쩐지 현금만 가지고 움직이는 게 이상하다 싶었지….”

해외로 도피하듯 떠난 노인은 현금만 가지고 움직였다. 정 회장의 재산이 목적이 아니었던 터라, 그 부분은 딱히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이제 보니 주식이니 부동산이니 전부 정희연 명의로 돌려 두고 간 모양이었다.

5년 전의 정희연은 미성년자였고, 주식과 부동산은 보호자 없이 처분 불가능한 자산이니 탁월하다면 탁월한 선택이었다. 정 회장에게 피붙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몰랐으니 세탁까지 거쳤다면 재산을 숨기기에도 수월했을 테고.

“네?”

“아니야. 혼잣말.”

연 대표는 김철우를 쳐다보며 짧게 명령했다.

“알아봐.”

“네. 지금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애기가 융통할 수 있게 절차 밟아 두고.”

“네.”

김철우는 곧장 대표실을 나섰다.

“희연아. 애인 빼먹을 정도로 돈이 없지는 않은데, 내가.”

연 대표를 향해 완전히 돌아앉은 정희연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의 놀리는 듯한 말투를 진심으로 알아들은 기색이 역력했다.

“아…. 대표님 돈 없을까 봐 걱정한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생각났어요. 현금이 아니라서 어떻게 쓰는지 모르니까 대표님께 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어차피 저는 대표님 카드 쓰잖아요. 제가 지금까지 대표님 돈 쓴 게 더 많을 것 같은데….”

정희연은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성인이니 경제적으로 자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여태껏 연 대표의 돈을 아무렇게나 쓰고 다녔다는 사실이 자각된 탓이었다. 담장 안에서 살 때처럼 누군가가 의식주를 제공해 주는 게 익숙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민망함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자 연 대표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얽어 왔다.

“희연아.”

“네?”

“애인 카드가 네 카드야.”

날카로운 흉터가 남자의 눈을 따라 완만한 곡선을 그렸다.

“나이 많고 돈 많은 애인은 이럴 때 써먹어야지?”

***

길게 이어진 복도는 다소 어두웠다. 은은한 조명 덕분에 발을 딛기는 어렵지 않았으나, 사람의 얼굴을 구분하기에는 어려울 듯했다. 복도를 따라 걸을 때마다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진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언가가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것처럼 저마다 꽉 닫힌 모양새가 퍽 수상쩍었다.

고요함과 은밀함이 무겁게 깔린 곳을 지나며 정희연은 이해진을 떠올렸다. 처음 만난 식당 외에도 여러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이런 곳도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잘 닦인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마다 서늘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번화가 한복판에 자리 잡은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고층이어서인지 들려오는 소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저 적막할 뿐이었다.

“잡아 줄까.”

호기심이 동한 듯 별것 없는 장소를 이리저리 둘러보는 모습에 연 대표는 넌지시 말을 건넸다. 다정한 제안에도 정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두워서 넘어질 것 같은데.”

“네? 괜찮아요. 이 정도로는 안 넘어져요.”

연 대표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어둠에도 쉽게 익숙해지는 눈이 오메가의 발목을 시야에 담았다. 저 발목이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는 남자는 정희연의 의사를 무시하기보다 신경을 기울이는 쪽을 택했다.

대리석 바닥을 밟는 두 개의 발소리는 몇 번을 더 울린 후에야 멈춰 섰다. 가장 안쪽 문을 열자 드넓은 공간이 그들을 반겼다. 은밀한 느낌의 복도와 달리 통으로 된 유리 벽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서울의 야경이 지척에서 펼쳐지며 눈발에 잠긴 새까만 밤하늘을 내보였다.

다소 어두운 복도와 달리 내부의 조명은 밝은 편이었다. 디귿 배열로 놓인 소파들이 유리 벽을 배경으로 놓여 있었고, 한가운데에는 테이블이 자리하고 있었다. 정희연은 이곳에서 긴밀한 대화가 거래가 오간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확인해 보죠.”

공간의 주인은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야경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유리에 비친 그림자를 발견한 듯 천천히 뒤돌아섰다. 정희연에게 손을 들어 보인 이해진은 연 대표와 눈이 마주치자 까딱, 고개를 숙여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전화를 끝내는 것과 동시였다.

“희연아, 왔어?”

“네.”

이해진은 정희연의 몸에서 폴폴 풍겨 나오는 알파 페로몬을 무시하기 위해 애썼다. 하얀 몸 위로 덧씌워진 페로몬은 다소 위압적이기까지 했다. 단순히 상태 안정을 위해 쏟아부은 페로몬인지, 알파가 지닌 소유욕의 발로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정작 페로몬을 쏟아부었을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빚을 졌네.”

테이블로 다가선 연 대표가 한쪽에 놓인 서류 봉투를 툭, 건드리며 말했다. 이해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받았다.

“빚이 아니라 공조라고 해야 맞겠죠.”

서류 봉투에 들어 있는 것은 김재호 기자의 신상 정보와 그가 기사를 쓸 때 참고한 자료들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선하가 아닌 이해진 쪽에서 제공한 자료들이었다.

“엠바고 걸린 기사. 봤어요?”

이해진은 정희연 앞으로 딸기라테를 밀어 넣어주며 물었다. 연 대표와 사업 이야기를 할 때는 양주를 마시는 편이라, 테이블 위에 준비된 술과는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는 음료였다.

맥주도 잘 못 마시는 애한테 양주를 먹이기가 겸연쩍어 따로 준비했는데, 연 대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정희연이 먹고 싶어 하면 정크 푸드 취급하는 인스턴트도 직접 사다 바친다는 남자였다. 그 대상이 독한 술이라고 해서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극적인 키워드 넣어서 잘 쓰셨던데.”

“엄밀히 말하면 선하 쪽에서 자극적인 기사가 나오도록 상황 설정을 잘한 거죠.”

“설마하니 선우 일보 기자를 매수할 줄은 몰랐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연 대표를 겨냥한 기자, 김재호는 이해진의 인맥 중 하나로 메이저 언론사인 선우 일보 기자였다. 선우 일보는 대표적인 친(親)선하 언론사였고, 선하 그룹 입장에서는 연 대표를 엿 먹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 중 하나가 선우 일보를 이용한 여론전이었을 터다. 조작된 총기 사고 관련 정보가 선우 일보로 흘러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 미끼를 물어다 준 사람이 바로 김재호였다. 이해진은 적절한 거래를 통해 김재호를 매수했다. 어차피 터질 기사라면 그가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터뜨리는 편이 나았다. 엠바고가 걸린 기사와 기사에 첨부될 동영상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던 것도 김재호 덕이 컸다.

“기자님 선물은 이해진 씨 통해서 드릴까 하는데.”

“김철우 비서가 가져옵니까?”

“지금쯤 가져오고 있을걸. 남 사장이랑 같이 올 것 같은데.”

이해진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가 나간 후에도 유용한 사람이니, 연 대표와 연줄을 이어 줘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대표님. 아까 낮에 본 기사…. 그거 쓰신 분 매수하신 거예요?”

정희연은 이해진이 건넨 딸기라테를 마시는 대신 유리잔을 가만히 만지작거리다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자니 의문이 들었다. 대표님께 불리한 기사인데, 그 기사를 쓴 기자를 매수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히는 내가 아니라 저쪽이.”

“기사 터지는 걸 막을 수는 없겠지만…. 왜 매수하신 건지 이해가 안 가요. 대표님 곤란하게 만드는 기사잖아요.”

“후속 기사 낼 때 이용할 생각이거든.”

“후속 기사요?”

정희연은 후속 기사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아무래도 선하를 역으로 물 먹이려는 속셈인 것 같았다.

“낮에 계획 바꿨다고 한 말. 기억해?”

“네.”

“사고 일으킨 총이 지우(馶遇) 소유가 아니라는 게 밝혀지면 그 총의 출처가 최대 관심사가 될 거야.”

국내에 유통되지 않은 모델이니, 유통 경로에 대한 추적이 이루어질 터였다.

“총이 선하 쪽에서 준비한 물건인 게 밝혀지면, 사고 역시 자작극이라는 의심이 생겨날 거고. 그쯤에서 후속 기사가 터지면 관심이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어. 다른 언론사도 아닌 선우 일보인 데다, 사고를 가장 먼저 취재한 기자가 후속 보도한 기사니까.”

“그럼 후속 기사에 자작극이라는 내용 실으실 생각이세요?”

“응.”

“하지만 증거가 없잖아요.”

“증거는 이미 만들어 놨을걸.”

이해진은 황금색 액체가 든 크리스털 병을 한 손에 쥐며 대수롭지 않은 어조로 연 대표를 대신해 답했다. 병의 유려한 곡선이 남자의 창백한 손과 제법 잘 어울렸다.

“김재호한테 듣자 하니 부산에서 컨테이너 사진 찍힌 것도 그냥 방치했다던데. 얼굴 대문짝만 하게 박혀 있는 사진이잖아요, 그거. 선하에서 이런 식으로 여론전 할 때 써먹을 거 예상하고 일부러 한 짓일 테고…. 그쪽에서 대표님 컨테이너에 손댄 거, 영상이나 사진 확보하셨을 것 같은데. 아닙니까?”

“남 사장이 말해 줬나 봐?”

“뭐, 그렇죠.”

이해진은 얼음 하나 없는 술에 입술을 대며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정희연의 시선이 투명한 잔에 달라붙었다.

“남 사장님께서 일 처리를 제대로 하셨더라고. 선하 쪽 하청인 거 확인했어.”

가만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희연은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하다가 또다시 물었다.

“저번에 컨테이너에서 물건 없어진 거 없다고 하셨잖아요. …아. 선하 쪽에서 대표님한테 뒤집어씌우려고 컨테이너까지 건드렸다, 이렇게 몰아갈 생각이세요?”

“똑똑하네, 우리 희연이.”

“그렇구나.”

“이 사건 책임자가 강서효니까. 책임지고 물러나면 손잡은 정 회장도 같이 아웃일 테고, 그때 같이 처리할 거야. 한 번에 치우는 게 수월하니까.”

“네에. 이해했어요.”

연 대표의 처리 방식이 비합법적이고 비양심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정희연은 쉽게 수긍했다. 대표님께서 어떤 일을 하시든, 그 일이 어떤 형태이든, 중요치 않았다. 정희연의 기준점은 세상이 정한 법과 규범이 아닌, 연 대표 그 자체였다.

“남수현 사장님은 왜 안 오세요?”

“희연아. 보고 싶어?”

의외의 물음에 연 대표는 눈썹을 찌푸렸다. 같은 형질인 이해진이라면 몰라도 남수현이라니. 예쁜 말만 조잘조잘 내뱉는 입술이 지우(馶遇)의 알파들도 아닌, 다른 알파를 담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네? 아니요. 오늘 온다고 하셨는데 자리에 안 계시길래 궁금해서 여쭤본 거예요. 남수현 사장님 보고 싶다는 생각은 딱히 안 해 봤는데…. 한 번밖에 뵌 적 없어요.”

“으응. 보고 싶다는 생각 안 해 봤어? 착하네.”

찌푸려진 눈썹이 부드럽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연 대표는 앞에 놓인 딸기라테를 마시라는 듯 유리잔을 툭, 건드렸다.

“따로 부탁한 일이 있어서 김철우 먼저 만나고 올 거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조용한 기척이었으나 연 대표의 시선은 기민하게 문을 향했다.

“대표님. 오랜만에 뵙네요. 이해진 사장님께서도 안녕하시고?”

들어선 알파는 남수현이 아닌 강서의였다. 정희연과 이해진이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페로몬 풀지도 않았는데 너무 그렇게 막 싫어하지 마시죠? 머쓱하게.”

강서의는 하나도 머쓱하지 않은 표정을 지으며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지난번 정희연에게 페로몬을 흘렸다가 연 대표에게 경고를 당한 탓에 페로몬을 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동업자인 이해진이 알파 페로몬이라면 치를 떨기도 했고.

강서의는 콧잔등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연 대표의 페로몬과 비슷한 알파 페로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페로몬이라면 이해진이 질색을 하는데 그럴 리가 없지. 지난번에 맡았던 우성 알파의 페로몬과 미묘하게 다른 냄새인 것 같기도 했다. 페로몬이 아니라 향수인가? 이 자리에 향수 쓸 만한 인간이 없는데. 강서의는 깊게 생각하는 대신 본론부터 꺼냈다.

“저희 첫째 형이 아주 신이 났더라고요. 대표님 잡을 생각에.”

연 대표는 말없이 자신의 잔에 술을 따랐다. 호박색 액체가 부드럽게 굴러떨어졌다. 정희연이 그 광경에 집중하는 기색이 느껴져 그는 피식하고 웃었다.

“엠바고 걸린 기사도 당장 터뜨리고 싶어서 난리 난 눈치던데. 조회 수 1 만드는 놈은 분명 그 새끼일걸요.”

“대응 TF1)는 만드셨고?”

“사고 터뜨리기 전부터 만들었죠.”

강서의는 과장되게 등을 기대며 떠들었다.

“일 크게 벌이려면 시간 좀 끌어야겠네.”

“대표님께서 고생해 주시면 저야 감사하죠. 일 커질수록 책임도 커지는 법이잖습니까? 자작극인 거 밝혀지면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는 못 배길 테고…. 알아봤는데 우리 큰형이 일을 제법 크게 키울 계획이더라고.”

“강서효가 물러나면 강서의 전무님은 공석인 사장 자리 잡아채시고?”

연 대표는 유리잔을 가볍게 흔들며 느른한 어조로 물었다. 노골적인 질문이었으나, 강서의는 멋쩍어하는 대신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는 듯 다리를 꼬았다. 발끝을 감싼 구두가 다소 경박하게 까딱거렸다.

“상상만 해도 통쾌하네요. 재밌잖아요? 서자의 난이 성공하면.”

“거기서 끝내면 안 되지, 강서의 전무님.”

연 대표는 느긋하게 목을 울렸다. 사람을 꾀어내기 위해 은밀한 언어를 속삭이는 뱀처럼 낮고 느린,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아예 치워 드리죠, 내가.”

이번 일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선하 그룹 후계자인 강서효와 정 회장의 분열이었다. 강서의와 손을 잡으며 사업적 이득까지 노려볼 수 있게 됐지만, 애초의 목적은 정 회장을 끈 떨어진 갓 신세로 만드는 게 전부였다. 대기업을 뒷배로 두고 있는 사람보다는 비빌 언덕이 사라진 사람을 처리하는 게 훨씬 쉽고 효율적이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달라졌다. 연 대표는 정희연을 사려고 했던 알파를 얌전히 놓아줄 생각 따위가 없었다. 강서효는 정희연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보지 못했지만, 그게 면죄부가 될 수는 없었다. 순해 빠진 오메가가 교활한 알파의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머릿속이 들끓었다.

고작 사장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지. 기업 승계는 꿈도 꾸지 못하도록 완전한 재기 불능 상태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완전히 치워 주신다고요? 솔직히 거기까지는 기대 안 했는데.”

“대신 전무님께서 한 말은 지키셔야지.”

섬뜩한 기색에 강서의는 은근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자연스레 남자의 옆에 앉은 오메가가 눈에 띄었다. 정희연이 사뭇 진지한 얼굴로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연 대표가 직접 끼고 산다고 표현할 정도니, 저 오메가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는 않았다. 다만 한 가지는 의외였다. 정희연이 아무것도 모르게 처리할 줄 알았는데.

오래 쳐다보면 싸늘한 시선이 떨어질 게 뻔해 강서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연 대표가 이해진과 남수현을 만나기 위한 자리에 자신이 끼어들었으니, 불청객은 눈치껏 빠져 주는 편이 나았다.

고작 5분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두 시간이나 허비했지만, 첫째 형을 완전히 치워 주겠다는 제안을 들었으니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강서의는 테이블 위에 놓인 양주를 아무렇게나 들어 잔에 따른 뒤 꿀꺽꿀꺽 마셨다. 얼음 하나 들어가지 않은 독한 술이 위장을 태울 듯 지글거렸다.

“불청객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당연하게도 인사를 받아 주는 사람은 정희연뿐이었다. 강서의는 어깨를 으쓱이며 방을 나섰다.

정희연의 시선은 강서의가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자리를 지나 이해진 쪽으로 흘러갔다. 연 대표는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희연아. 왜 자꾸 다른 사람 빤히 쳐다봐. 대표님 서운하게.”

“네? 아, 그런 거 아니에요.”

연 대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으며 꼼지락거리는 손을 응시했다. 정희연은 뭔가 할 말이 있을 때마다 저렇게 손을 꼬물거리고는 했다.

“궁금해서 봤어요.”

“궁금? 희연아. 똑바로 말해야지. 뭐가 궁금해?”

“저 술이요.”

호박색 액체가 조명 아래에서 반짝거렸다.

“으응. 저게 궁금했어?”

“네. 색 예뻐서 본 거예요.”

“마셔 볼래?”

“마셔도 돼요? 다 못 마실 것 같은데…. 그럼 대표님 마시던 거 마실래요.”

“그냥은 안 되고 얼음 넣어줄게.”

연 대표는 망설임 없이 아이스 버킷을 끌어와 자신의 잔에 얼음을 넣었다. 그의 양주 취향을 아는 이해진은 해괴한 표정을 지었다. 희석된 양주는 절대 마시지 않는 남자였다. 정희연이 마실 술이기에 얼음을 넣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새로 따라 주면 될 걸 굳이 자신의 잔에 얼음을 넣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또다시 벌컥 문이 열렸다.

“예쁜이, 오랜만이네?”

남수현이 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남수현 사장님.”

남수현이 예쁜이라고 부른 게 처음이 아닌 듯, 정희연은 그녀의 인사를 받으며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

남수현은 아무렇지 않게 코트를 벗으며 이해진 옆에 털썩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았다. 소파에 대충 걸쳐 둔 코트에서 찬 바람 냄새가 잔뜩 묻어 나왔다. 김철우와의 대화가 길어진 모양이었다.

“김철우는?”

“이제는 인사도 안 하니?”

크리스털 잔을 정희연에게 건넨 남자는 남수현에게 인사하는 대신 김철우의 행방부터 물었다.

정희연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양주가 든 잔을 내려다봤다. 예전에 마셔 본 술과는 완전히 다른 색이었다. 얼음에 희석해야 할 정도면 독주라는 의미일 텐데, 호기심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황금색 액체가 느린 속도로 입술에 닿았다.

“읍.”

말간 얼굴이 금세 찌푸려졌다. 전에 마셨던 맥주처럼 달콤할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생각보다 훨씬 독한 맛이었다. 코끝에 닿은 향기는 분명 좋았는데, 혀끝에 닿는 순간 얼얼한 감각이 몰려왔다.

대표님은 왜 이런 술을 드시지. 작게 기침을 내뱉자 연 대표가 나지막하게 웃으며 물잔을 건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에 걸린 다정한 온기가 사뭇 장난스러웠다.

“해진아. 저 새끼 연 대표 맞니?”

남수현은 눈을 크게 뜨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 역시 연 대표가 정희연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도 그 지랄을 떨어 댔으니, 심해졌으면 심해졌지, 덜해졌으리라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그러나 사업 얘기를 끊으면서까지 저 오메가를 챙길 줄은 몰랐다.

남수현은 그제야 공기를 떠도는 페로몬의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웬일로 저놈이 페로몬을 흘리지, 생각한 게 고작 몇 분 전인데, 이제 보니 페로몬을 흘린 게 아니었다. 정희연에게 쏟아부은 페로몬이 공기를 부유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미묘하게 달콤한 향이 섞였더라니.

둘이 잤나? 남수현은 비스듬히 턱을 괬다. 그녀의 날카로운 눈매에 장난기가 스며들었다.

“저거 완전 도둑놈 아냐. 어린애들 만난다고 한심하게 쳐다보더니, 나보다 더한 도둑놈이 있었네?”

남수현의 비난에 연 대표는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개가 짖나, 생각하듯 귀찮은 표정이었다. 노골적인 비난에 깜짝 놀란 사람은 도리어 정희연이었다.

“예쁜아. 저런 시커먼 도둑놈은 만나는 게 아니야. 열 살 이상 차이 나잖아? 싱그럽고 어린 알파를 만나야지.”

싱그럽고 어린 오메가만 만나는 남수현이 할 만한 말은 아니었다. 그녀는 이때다 싶었는지, 그동안 연 대표에게 당한 걸 갚을 기세로 은근슬쩍 남자의 양심을 지적했다. 옆에 앉아 있던 이해진이 한숨을 내쉬며 피곤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당장 이해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눈앞에 놓인 술을 마시는 게 전부였다.

“…대표님 험담하지 마세요.”

얌전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정희연이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남수현의 비난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한 연 대표는 시선을 내리깔아 하얀 얼굴을 살폈다. 입술을 꾹 깨물었는지 뺨이 볼록 튀어나왔다.

“대표님 좋은 분이신데…. 누가 좋아하는 사람 험담하면 남 사장님께서도 기분 나쁘시잖아요.”

진지하게 내뱉은 말이었으나, 녹록지 않은 세상을 살아온 남수현의 눈에는 귀엽게만 보일 따름이었다. 한 입 거리인 강아지가 공격하겠답시고 깽깽거리며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깔깔거리며 정희연을 놀리듯 능글맞게 물었다.

“왜 예쁜이 네가 기분이 안 좋아.”

“대표님 제 애인이에요. 그러니까 욕하지 마세요.”

당돌한 대답에 그녀는 눈도 깜박이지 못하고 숨을 멈췄다. 옆에 앉은 이해진이 사레가 걸린 것처럼 기침을 내뱉었다.

“내 애인이 내 욕하지 말라는데, 남 사장님.”

잔뜩 굳은 정적 속에서 들리는 것이라고는 연 대표의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전부였다.

만족스럽게 포식한 듯 길게 늘어지는 목 울림에 남수현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사람이 너무 당황하면 머리가 정지한다더니, 제가 딱 그 꼴이었다. 그녀의 눈길이 차례대로 연 대표에게 한 번, 그 옆에 앉은 오메가에게 한 번 더 향했다.

눈이 마주치자 정희연이 슬쩍 몸을 앞쪽으로 빼더니 상체를 연 대표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등 뒤에 나른하게 누워 있는 집채만 한 호랑이를 지키겠답시고 깡깡거리는 주먹만 한 강아지를 본 기분이었다.

“허어.”

남수현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앞에 놓여 있던 양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탁!

크리스털 잔이 테이블 위를 스치는 거친 소리와 함께 그녀는 연 대표를 노려보았다. 너 양심이 있는 새끼니?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던 남자는 눈이 마주치자 은근슬쩍 정희연의 허리를 끌어안더니 제 앞을 가로막은 어깨에 턱을 올렸다. 노골적인 소유욕과 독점욕의 표시였다. 저 미친 새끼. 남수현은 재차 헛웃음과 함께 욕을 삼켰다.

가진 자 특유의 여유로움과 독선이 그녀의 투쟁심에 불을 질렀다.

“예쁜아. 쟤 나쁜 새끼야. 착한 놈 아니라니까?”

옆에 앉아 있던 이해진이 ‘사장님. 안 통할걸요. 그만하세요.’ 하고 말렸지만 흥분한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였다.

“예쁜이 너 쟤 처음 만난 날 기억 안 나? 컨테이너에서 만났잖아. 그거 불법 밀매 컨테이너야.”

“네? 저도 알아요. 그런데 저 컨테이너에 둔 건 남 사장님이시잖아요. 대표님이 꺼내 주신 건데….”

연 대표와 마찬가지로 아주 약간의 불법을 행하는 남수현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도 남 사장님 나쁜 분이라고 생각 안 해요. 원래 사람이 착하고 나쁜 건 상대적인 거예요.”

쟤는 어떻게 말을 저렇게 예쁘게 하지? 남수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차근차근 말하는 오메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연우범이 저 예쁜 말만 해 대는 오메가를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대표님은 저한테 좋은 사람 맞아요. 제 애인 욕하시면 안 돼요.”

정희연은 남수현을 향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무례하게 느껴질까 봐 조금 걱정스럽긴 했지만, 자신이 욕을 먹는 것보다 대표님이 나쁜 소리를 듣는 게 더 싫었다.

허리에 감겨 있던 손이 슬쩍 올라오더니 뺨을 꾹 누르며 고개를 위로 젖히게 했다.

“희연아.”

연 대표는 부드럽게 끌려온 얼굴을 마주 보며 정희연의 이름을 불렀다.

“남 사장님 욕해 줘. 네 애인 험담했잖아.”

“네? 그래도 욕은 안 돼요….”

유순한 눈매가 조금 더 동그래지자 연 대표는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이렇게 예쁘게 굴어서 어떡하지. 앞으로 며칠 자리를 비워야 하는데, 벌써부터 눈에 밟혀 큰일이었다.

연 대표는 남수현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기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쪽 입술을 내렸다.

“아니, 저게 미쳤나. 저거 연우범 맞아? 이해진, 너 알고 있었어?”

남수현은 기가 차 옆에 앉은 이해진을 툭툭 건드렸다. 이해진은 말없이 양주만 마셔 대고 있었다. 그를 오래 알아 온 남수현은 저 표정이 소주가 당길 때의 표정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해진의 반응을 보아 하니, 연우범의 저 지랄은 자신만 몰랐던 모양이다.

“내가 살면서 연우범이 저 지랄 떠는 꼴을 볼 줄은 몰랐네. 하여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이해진이 마시려던 술을 그대로 낚아챈 그녀는 얼음 하나 없는 독한 양주를 들이켜며 또다시 연 대표를 노려보았다. 동질감이니 어쩌니 할 때는 언제고, 어린 애인에게 빠져 좋아 죽는 게 훤히 보였다. 정 회장 건이 마무리되면 스스로의 머리통에 총을 갈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저 꼴을 보니 그럴 일은 없을 듯했다.

“대표님 노려보지 마세요.”

정희연이 슬쩍 자신을 껴안은 남자의 눈을 가렸다. 조그마한 손바닥 밑으로 비스듬히 올라가는 알파의 입꼬리가 보였다.

“허어.”

남수현은 한숨을 내뱉었다. 노려보다니. 그녀 입장에서는 살뜰히 쳐다본 것뿐인데, 애인 욕한 죄로 정희연의 경계를 산 모양이었다.

그러나 남수현은 흔히 말해 ‘지 좆대로 사는 인간’이었다. 다리를 꼰 자세 그대로 턱을 괸 그녀는 고개를 기울이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예쁜아. 그러지 말고 나한테 와. 내가 더 잘해 줄게.”

“안 돼요.”

“왜 안 돼?”

“저는 대표님만 좋아요.”

“연우범이 예쁜이를 도대체 어떻게 꼬셨을까 궁금하네.”

“네? 대표님이 꼬신 거 아닌데요…?”

순하게 대답하던 오메가가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럼?”

도톰한 입술이 진지하게 달싹거렸다.

“제가 대표님 꼬신 건데요…? 대표님이 저한테 넘어오신 거예요.”

남수현의 완벽한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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