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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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다소 방만한 자세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대표실 소파에는 정희연이 앉아 있어야 했으나, 팀장님과 놀고 있으라며 잠깐 내보낸 찰나였다. 심수천은 헤벌쭉 웃으며 정희연과 함께 사라졌다. 애를 맡겨 뒀으니 시간이 남는 다른 알파들과 함께 맛있는 걸 먹이고 실컷 놀아 줄 터였다. 사실상 놀아 주는 사람은 알파들이 아닌 정희연이겠지만.

“관련 자료입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김지원이 파일철을 건네며 운을 뗐다. 연 대표는 무감한 얼굴로 그 안에 든 자료들을 훑었다.

“그 베타가 맞혔다는 주사, 알아봤는데 난임 오메가를 위한 주사입니다.”

“난임?”

난임을 위한 주사라니, 열성도 아니고 우성 오메가인 정희연과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였다.

“네. 강제적으로 페로몬을 체내에 쌓아 두는 작용을 합니다. 어디까지나 임신 확률을 높이는 게 목적이고요.”

연 대표는 발끝을 까딱였다. 오메가를 임신으로 귀결시키는 정 회장의 사업 방식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알고 있다고 해서 그 역겨움이 옅어지지는 않았다.

“사실 이런 약물은 열성을 위한 약이라 우성 오메가가 맞아도 큰 효력은 없습니다. 열성과 우성은 페로몬 기관 자체가 달라서 약을 맞더라도 효과는 미미한 편이고요.”

김지원은 한숨을 푹 내쉬며 잠깐 말을 잘랐다. 자세한 사항은 검사를 해 봐야 알겠지만, 정밀 검사를 한다고 해서 예상한 결과가 크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았다.

“문제는 그 주사 때문에 희연 씨 몸에 페로몬이 쌓인 상태입니다.”

“우성은 효과 없다며?”

“효과가 없는 것과 미미한 건 엄연히 다르니까요. 장기간 맞은 게 문제입니다.”

눈앞의 남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어 목이 탔다. 김지원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물로 목을 축였다.

“페로몬이 너무 많이 농축된 상태라 히트가 오면 터뜨려야 합니다. 당연히 억제제 없이 보내야 하고요. 문제는…. 알파 페로몬이 없으면 쇼크가 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발현한 지 오래됐는데 강제적으로 히트를 억누른 바람에 첫 히트가 늦은 데다가, 본인이 페로몬을 다룰 줄 모르니까요. 약물을 이용해 강제적으로 쌓아 둔 페로몬이라 혼자 내버려 두면 위험합니다.”

김지원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연 대표의 표정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정희연이 없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일견 무료해 보이는 견고한 무표정이었다.

“히트를 알파와 보내야 합니다.”

연 대표는 대답 대신 고개를 기울였다. 손가락이 닿은 관자놀이 옆에는 날카로운 흉터가 자리 하고 있었다. 알파의 동공이 짐승처럼 조여들었다.

***

정희연은 습관처럼 보글보글 끓고 있는 찌개 속 노른자를 터뜨렸다. 맞은편에서 픽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는 한껏 집중한 표정으로 젓가락을 휘저었다. 톡 터진 노른자가 몽글몽글한 순두부 사이로 섞여 들었다. 조개와 순두부가 잔뜩 들어간 찌개는 요즘 정희연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였다.

“잘 먹겠습니다.”

“많이 먹어, 희연아.”

“네.”

연 대표 앞에서 끓고 있는 찌개는 정희연의 찌개보다 조금 더 붉은색이었다. 정희연은 언제쯤 대표님이 드시는 걸 먹을 수 있을까, 가늠하며 찌개를 한 숟가락 떠 입에 넣었다. 따뜻한 국물이 들어가자 몸이 금세 따뜻해졌다.

“안 매워?”

“네.”

“저번에 해 준 것보다 양념장 더 넣었는데 다행이네. 우리 희연이 애기라 순한 맛도 잘 못 먹잖아.”

담장 안에서 살 때도 순두부를 먹은 적이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희연은 순두부찌개가 당연히 하얀 국물인 줄로만 알았다. 빨간 게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 담장 밖을 나온 이후였다. 일반적인 순두부 찌개를 처음 본 날, 낯선 음식에 보이는 관심을 읽었는지 김지원이 제 순두부를 덜어 주었다. 너무 매워서 먹지 못했지만. 지나가듯 그 이야기를 하자 연 대표는 그랬냐고 묻더니 퇴근 후 직접 순두부찌개를 끓여 주었다.

언제나처럼 옆에 서서 요리하는 걸 구경하는데 양념장에는 순한 맛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마저도 매워서 물을 찾긴 했지만, 생각보다 입에 맞아 한 그릇을 거의 다 먹었다.

벌써 며칠은 지난 일인데도 연 대표는 그때의 일을 놀리듯 말했다. 사실 아직도 조금 맵기는 했다.

“그래도 예전보다는 잘 먹어요.”

자꾸 아기 취급하는 게 입맛 때문인가 싶어 정희연은 조금 늦게 입술을 달싹였다.

“으응. 그랬어?”

연 대표는 정희연의 밥그릇 위에 시금치를 올려 주며 재차 피식하고 웃었다. 정희연은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하고 꼬박꼬박 인사한 뒤 밥과 함께 시금치를 입에 넣었다.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하얀 뺨이 볼록 솟아올랐다 꺼지길 반복했다.

“맛있어요.”

“맛있어?”

“네. 대표님이 해 주시는 거 다 맛있어요.”

정희연은 옅게 웃은 뒤 보들보들한 순두부를 먹었다. 역시나 살짝 매웠지만, 순한 맛 양념 정도는 이제 물을 마시지 않고도 그럭저럭 먹을 수 있었다. 요리할 때마다 세심하게 맞춰 주는 연 대표 덕분이었다.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음식을 먹는 건 익숙한데도 이상하게 대표님이 해 주시는 음식은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정희연은 괜스레 숟가락을 쥔 손을 꼼지락거렸다. 손바닥이 간질거리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저도 해 드릴게요.”

칼질도 제대로 못 하면서 당찬 포부가 아닐 수 없었다. 가만히 정희연의 쫑알거림을 듣던 연 대표는 일순 젓가락질을 멈췄다. 정희연이 그의 밥 위에 반찬을 올린 덕분이었다. 조금 전 제가 한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듯이.

연 대표는 낯선 것을 본 사람처럼 물끄러미 밥그릇을 내려다봤다. 기억이 맞다면 누군가가 제게 이런 식으로 반찬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뜬장에서 살 때는 물론이고, 지금 이 자리에 오른 이후에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상할 건 없었다. 연 대표 그조차도 정희연 외에는 타인의 밥 위에 반찬을 올려 준 적이 없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직접 요리한 음식을 챙겨 먹이는 것도 정희연이 유일했다. 그런데 막상 제가 하던 일을 자그마한 오메가가 따라하자 무척이나 묘한 기분이 들었다.

연 대표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다음에?”

턱을 괴며 던지는 질문에 정희연은 맞은편의 남자를 응시하며 부지런히 입을 움직였다. 식탁에서 턱 괴면 안 되는데…. 하지만 대표님은 뭘 해도 괜찮았다. 결국 정희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돌려준 것은 입안에 든 밥을 전부 삼킨 뒤였다.

“네. 다음에 해 드릴게요.”

“희연이는 언제까지 대표님이랑 살 건데?”

정희연은 남자가 일부러 짓궂게 군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스러움에 입술을 달싹였으나 연 대표는 어르는 말을 해 낌새가 없어 보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고민하다 힐긋 시선을 내리자 대표님이 만들어 준 저녁이 눈에 들어왔다. 맨날 받기만 하고 뭔가를 해 드린 기억이 없었다.

덜컥 걱정스러움이 몰려와 정희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대표님.”

“응.”

“저…. 귀찮으세요?”

연 대표는 턱을 괸 자세 그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정희연이 당황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지금 이 순간이 제법 즐거웠다. 팔랑팔랑 흔들리는 속눈썹과 달싹거리는 입술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를 충동질했다.

정희연이 예외일 뿐, 연우범은 다정한 부류가 아니었다. 자기 객관화에 능통한 남자는 그의 근간이 폭력성과 잔인성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말랑말랑한 오메가를 놀리거나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도 태어나길 그렇게 생겨 먹은 인간이라 그럴 터였다. 연 대표는 익숙하지 않은 충동을 그렇게 넘겨짚었다.

“희연아.”

“네?”

“내가 널 왜 귀찮아해.”

그는 자세를 바로 하며 느릿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손 많이 가는 거 좋아한댔잖아.”

보란 듯이 눈을 접어 웃은 건 그다음이었다.

“대신 우리 애기는 내 손만 타야지, 응?”

“네에.”

정희연은 손 탄다는 의미도 잘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나쁜 말 같지도 않은 데다가 다른 사람도 아닌 대표님이 하는 말이니 해가 되지 않으리라 판단해서였다.

“그래서 희연아.”

“네?”

“언제까지 대표님이랑 살 거야?”

“…계속 계속 같이 살아도 돼요?”

계속이라는 단어를 두 번 반복하는 게 귀여웠는지 곡선을 그리던 알파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속 계속?”

“네.”

“응. 대표님이랑 계속 계속 같이 살아.”

정희연은 숟가락을 들어 올리며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밥이 아까보다 더 맛있게 느껴졌다.

핸드폰 진동 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대표님. 이해진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김철우가 보낸 메시지였다.

이해진에게 연락이 왔다고. 연 대표는 눈동자만 굴려 메시지 내용을 확인했다. 역시나 정희연에 대한 내용이었다.

억제제를 당분간 끊어야 한다고 합니다.

정희연이 맞은 주사의 정체를 알고 한 말은 아니겠지만, 김지원이 내린 처방과 같은 내용이었다. 연 대표는 무감한 얼굴로 김지원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히트를 알파와 보내야 합니다.’

첫 히트가 문제였다.

거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남자는 느릿하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씻었는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정희연이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약을 먹으려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성인이 됐다지만 연 대표 눈에는 여전히 솜털 보송보송한 오메가였다.

알파 앞에서 저렇게 무방비하게 구는 오메가의 첫 히트라고. 다른 알파에게 던져 줄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그렇다고 제가 안고 싶은 거냐면, 글쎄. 정희연을 어떻게 하고 싶은지 연 대표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답은 하나였다.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해도 어쨌든 정희연에게 발정한 적이 있으니 히트를 핑계로 안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연 대표의 섹스는 그리 다정한 편이 아니었고, 어떤 방식으로든 여린 몸을 상처 입힐 게 분명했다.

무엇보다 어린애를 덜컥 잡아먹을 정도로 양심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키스한 순간부터 잡아먹은 건 똑같나. 남자는 자조적으로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 어린애에게 키스 마크를 남긴 사람이 할 법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리고 당분간 본인 집에서 지내는 게 어떻냐고 합니다.

연이어 메시지가 도착했다. 연 대표는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답장을 보냈다.

거절해.

망설임이라고는 추호도 느껴지지 않는 반응 속도였다. 핸드폰을 소파 위에 대충 던져 둔 그는 정희연이 사라진 주방을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히트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우선은 억제제를 먹지 못하게 해야 했다.

“희연아.”

약을 먹으려던 정희연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움직임을 멈췄다. 등 뒤로 다가온 남자가 팔을 뻗어 손바닥에 놓인 알약을 가져갔다.

“억제제 그만 먹어.”

평소 같았으면 네, 하고 대답했을 텐데 오늘은 대답 없이 눈만 깜박거렸다. 왜 그만 먹으라는 건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설명 대신 옅은 색채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기만 하자 정희연이 천천히 뒤를 돌아 눈을 마주쳐 왔다.

“왜요?”

“이해진이 약 끊는 게 좋을 것 같다던데.”

“해진이 형한테 연락 왔어요?”

연 대표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슬쩍 눈썹을 찌푸리더니 평소보다 느리게 대답했다.

“응. 방금.”

“네.”

이해진과의 대화가 떠올라 정희연은 금세 수긍했다. 페로몬 조절하는 법을 배우려면 당분간 억제제를 끊어야 한다고 했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연 대표가 타인의 페로몬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정희연은 티 나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억제제를 끊으면 페로몬이 새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대표님께서 페로몬 문제로 싫은 기색을 내보인 적은 없지만, 걱정스러움이 몰려왔다. 싫어하시면 어떡하지. 타인의 호불호에 감정적인 영향을 받는 편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도 아닌 대표님께서 자신의 페로몬을 싫어하면 조금 슬플 것 같았다.

“이해진이 당분간 자기네 집에서 지내자고 했어?”

“아….”

정희연은 입술을 벌렸다.

“페로몬 새어 나가니까 대표님 말고 자기랑 지내는 게 어떻냐고 물어보셨어요.”

“이해진한테 가고 싶어?”

연 대표는 젖살 오른 뺨을 부드럽게 감싸며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조금 전, 이해진의 제안을 단칼에 잘라 낸 남자가 물을 법한 질문은 아니었다.

“저는 대표님이랑 지내는 게 더 좋은데….”

정희연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연 대표가 이해진의 제안을 진작 거절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 만큼 말간 얼굴이었다.

“대표님, 저 싫으세요?”

뜻밖의 물음에 연 대표는 뺨을 찡그리며 정희연의 눈가를 매만졌다.

“희연아. 대표님이 예뻐해 주는 게 부족해?”

“아, 그게 아니라….”

정희연은 당황해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대표님 페로몬 냄새 싫어하시잖아요. 저 억제제 안 먹으면 페로몬 새어 나가니까, 대표님께서 싫으시면 해진이 형 집에서 지낼게요.”

연 대표는 그제야 정희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그는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물끄러미 정희연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무해한 얼굴이었다. 맹목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오메가의 페로몬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었다. 좋기는커녕 최악의 기억들만 남아 있었으니까.

정 회장의 손에서 길러진 투견들은 모두 페로몬 훈련을 받았다. 오메가의 페로몬에 질질거리는 알파는 비싼 값을 받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연히도 매우 비인간적이고 비인격적인 훈련이었다.

그 덕분에 지우(馶遇)를 이곳까지 끌어올렸지만, 시간에 희석될 만큼 가벼운 기억은 아니었다. 오메가는 물론 자신의 페로몬에까지 결벽적으로 구는 건 그 탓이 컸다.

팔려 온 이후의 상황도 연 대표의 결벽적인 페로몬 관리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경호업체의 탈을 뒤집어썼을 뿐, 조직 폭력배는 어쩔 수 없는 깡패 소굴이었다. 필연적으로 얽힌 오메가들이 많았고, 우성이라는 형질 때문에 성인이 되기 전부터 달려드는 오메가 역시 많았다.

연 대표는 하얗고 자그마한 오메가를 내려다보며 정희연의 페로몬이 어땠는지 상기했다. 처음 만난 날을 제외하면 늘 억제제를 먹여 왔으니 페로몬 냄새를 맡은 것도 거의 두 달 전이었다.

제법 애지중지 아끼고 있으나, 싸고도는 것과는 별개로 정희연은 오메가였다. 그리고 연 대표는 제가 아끼는 오메가의 페로몬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로 낙관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문제는 정희연이 제 손에서 벗어나는 게 달갑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 히트가 터지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연 대표는 긴장한 기색의 정희연을 내려다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아직 애기니까 괜찮아.”

“네에. 그럼 대표님이랑 있을래요.”

괜찮다는 대답이 떨어지자 정희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그는 연 대표가 스무 살이 된 자신을 아직까지 아기라 칭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불쾌하지는 않았지만, 가끔은 조금 속상한 기분이 들곤 했는데, 지금만큼은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대표님 옆에 있을 수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대신 당분간은 같이 출근하는 대신 이해진 만나고 있어.”

“왜요?”

“회사에 다른 알파들 있잖아.”

히트가 터진다고 이성을 잃고 달려들 만한 놈들은 없었지만, 다른 알파에게 정희연의 페로몬을 내보이는 것 자체가 영 탐탁지 않았다. 연 대표 스스로도 모순적이라는 자각이 있었으나 태어나길 글러 먹게 태어났으므로 남자는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정희연의 젖살을 꾹 누른 손가락이 천천히 물러나는가 싶더니 이내 느릿하게 목덜미로 향했다. 잇자국은 사라진 지 오래였으나 불그스름한 흔적은 여전히 하얀 피부 위에 달라붙어 있었다.

“아, 이해했어요. 그럼 빨리 배울게요.”

“천천히 해도 돼.”

연 대표는 마음이 급해진 오메가를 도닥이듯 가는 목선을 천천히 문질렀다. 사실 그의 입장에서는 정희연이 하루라도 빨리 페로몬을 다룰 수 있게 되는 편이 좋았다. 그래야 쓸데없이 오메가 페로몬에 노출되지 않을 테니까. 그러나 빨리 배우라고 종용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이든지 간에 정희연은 다급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으니.

“저는 우성이니까 빨리 배울 거라고 하셨어요.”

“으응. 그랬어?”

연 대표는 다정하게 웃으며 연신 가느다란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간지러운 감각에 정희연은 남자의 커다란 손을 향해 힐긋 시선을 내렸다. 왜 자꾸 여기를 만지시지, 생각하는데 불현듯 목 쪽의 상처가 떠올랐다. 샤워하고 나온 뒤 잠옷을 입으며 발견한 상처였다.

“아.”

“희연아. 아파?”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살결을 쓰다듬는 손은 멈출 줄을 몰랐다. 정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통증 비슷한 감각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통증과는 다른 감각이었다. 맞아서 멍이 들었을 때는 손을 대기만 해도 아팠는데, 그것과 비슷한 통증은 아니었다.

“그게 아니라…. 대표님이 만지시는 여기, 벌레 물린 것 같아요.”

“벌레 물린 것 같아?”

“네. 빨개졌어요.”

“벌레 아닌데.”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웃는 남자는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기색이었다.

“내가 희연이 예뻐해 줘서 생긴 거잖아.”

예뻐해 주는 게 몸에 남은 자국과 무슨 상관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으나, 대표님이 예뻐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정희연은 작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대표님이 예뻐해 주시는 거 좋아요. 더 예뻐해 주세요.”

피부 위를 쓸어내리던 남자의 손길이 뚝 멎었다.

“더 예뻐해 주면 울 텐데.”

대표님께서 예뻐해 주는 것과 우는 것의 상관관계 역시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정희연은 괜찮다고 생각했다. 연 대표가 제게 하는 거라면, 뭐든지 괜찮았다.

“대표님 때문에 우는 건 괜찮은데요…?”

“하. 정희연….”

연 대표는 짧게 헛웃음을 내뱉더니 자각 없이 위험한 말만 내뱉는 뺨을 한 손으로 감쌌다. 그리고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를 쑤셔 넣었다.

“흣…!”

알파의 두꺼운 살덩어리가 얌전히 놓여 있던 작은 혀를 마음껏 핥고 빨았다. 다소 급박하고 거친 움직임이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놀라 정희연은 연 대표의 옷을 꼬옥 붙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나른한 햇살과 예뻐해 준다는 말 덕분에 기분이 좋았는데, 갑작스레 시작된 키스 역시 좋았다. 지난번의 키스와 다르게 너무 급박해 따라가기 버거웠지만, 대표님과 체온이 맞닿고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기꺼웠다. 저절로 눈이 감겼다.

“앞으로도 예뻐해 줄 테니까….”

키스는 그리 길지 않았다. 정희연은 입 안을 헤집던 혀가 물러난 뒤에야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연 대표의 손이 작게 숨을 헐떡이는 입술 위로 닿았다.

“그만 예쁘게 굴어도 돼.”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다녀오겠습니다.”

정희연은 차에서 내리기 직전, 연 대표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무표정한 얼굴로 태블릿을 확인하던 연 대표는 순한 작별인사에 피식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시선 역시 들어 올렸다.

“데려다줄까?”

“네? 괜찮아요. 바로 앞인데….”

사실 정희연은 연 대표와 헤어지는 이 상황이 다소 어색했다. 여태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남자와 함께 혹은 그의 공간에서 보내온 까닭이었다. 게다가 며칠 전, 수려에서 이해진을 만났을 때와는 다르게 오늘은 몇 시간이 아닌 반나절이 넘는 시간을 떨어져 있어야 했다.

평소와 다른 하루의 시작이 조금 낯설었으나 만나는 상대가 이해진이라 한편으로는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요즘 정희연은 뭐든지 혼자서 곧잘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건 처음이지만, 걱정스럽지는 않았다. 미아가 될 염려가 있는 어린아이도 아니고, 집주인을 호출해 열린 문으로 들어가면 끝이었다.

한마디로 연 대표가 굳이 데려다줄 필요는 없다는 의미였다. 이해진의 집 바로 앞에 차를 댄 경우에는 더더욱.

“같이 안 들어가 줘도 돼?”

연 대표는 놀리듯 가볍게 물었다.

“네. 혼자 갈 수 있어요.”

“으응, 혼자 갈 수 있어?”

눈치껏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밖에서 문을 열어 주었다. 정희연은 오른쪽 발을 땅에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 저 갈게요. 아, 이거 사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그마한 손끝에 하얀색 종이 박스가 달랑거렸다. 조각 케이크가 들어 있는 박스였다.

“혼자 먹어.”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인 듯, 정희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순한 눈매가 굴곡을 그렸다.

“해진이 형이랑 먹으면 안 돼요?”

“희연이가 해진이 형이랑 먹으면 대표님은?”

연 대표는 시간이 빠듯하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정희연을 놀렸다. 그의 능청스러운 물음에 종이 박스를 쥐고 있던 분홍색 손톱들이 꼬물꼬물 바쁘게도 움직였다.

“그럼 제 건 대표님 드릴게요.”

거짓말이라고는 한 톨도 담겨 있지 않은 진심 어린 표정이었다. 아까워하는 기색조차 없었다. 순하고 착해빠진 제안에 연 대표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조그마한 손에 들린 종이 박스에는 어제 산 케이크 두 조각이 들어 있을 터였다.

‘대표님. 케이크 두 조각 사도 돼요?’

쇼케이스를 가리키며 조심스레 던진 물음이었다. 억제제를 끊은 상태라 정희연에게서는 무의식적인 페로몬이 퐁퐁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다행히도 곁에 선 우성 알파 덕분에 오메가의 페로몬 이상을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었다. 평소 제 몫 이상 원하지 않는 정희연이 먼저 욕심을 부리는 게 의아하면서도 기특히 연 대표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사고 싶은 거 다 사.’

‘그럼 두 조각 살래요. 감사합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하나 먹을 줄 알았더니, 정희연은 도토리를 저장하는 다람쥐처럼 곧장 케이크를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희연아. 먹고 싶으면 지금 먹어도 돼.’

‘아, 그게 아니라…. 내일 선물로 산 거예요.’

‘선물?’

내일이라면 이해진을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네. 원래 다른 사람 집 방문할 때는 이런 거 사 가는 건데요…?’

그러니까, 지금 막 차에서 내리려는 오메가의 손에 들린 물건은 이해진에게 줄 선물이었다. 손을 뻗자 정희연은 차에서 내려서는 대신 당연하다는 듯이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밖에 서 있던 기사가 눈치껏 문을 닫아 주었다. 연 대표는 익숙하게 하얀 뺨을 감싸며 둥그런 곡선의 눈매를 문질렀다.

“농담이야. 다 먹어도 돼.”

“그럼 나눠 먹어도 돼요?”

“응.”

손을 거두자 정희연은 무언가를 고민하듯 손가락을 꼼질거렸다. 시간이 흘러가는 걸 알면서도 연 대표는 굳이 재촉하지 않았다.

“대표님. 뽀뽀해도 돼요?”

그만 예쁘게 굴랬더니 자꾸 예쁘게 굴어서 큰일이었다. 예쁘게 굴어 봐야 좋을 게 하나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남자는 검지로 제 뺨을 툭 건드렸다. 곧 그가 가리킨 뺨 위로 말랑말랑한 입술이 짧게 닿았다가 떨어져 나갔다.

뽀뽀가 제법 익숙해졌는지 정희연은 옅게 웃으며 직접 문을 열었다.

“이제 갈게요. 해진이 형이 기다릴 것 같아요.”

차에서 내리자 겨울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렸다. 공기가 차가운 탓에 코끝이 시려 왔다. 문을 닫기 전, 정희연은 무언가가 떠오른 듯 살짝 입술을 움칠거렸다. 차는 출발 전이었고, 연 대표는 안쪽에 앉아 고개를 기울인 채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표님.”

“응, 희연아.”

바람이 갈색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정희연은 그칠 줄 모르는 바람이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때문일까, 꼭 다물린 입술 끝에 옅은 미소가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별것 아닌 광경이었으나 문득 어떠한 궁금증이 연 대표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정희연이 평범하게 살았다면 어땠을까.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교복을 입은 채 학교에 갔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바람이 성가시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평화로운 정희연의 모습을 상상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남자의 입매가 저절로 굳어졌다.

“보고 싶으면 전화해도 돼요?”

정희연은 남자의 머릿속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순진한 물음을 던졌다. 이해진을 처음 만난 날, 연 대표에게 전화를 건 기억이 불현듯 떠오른 탓이었다. 핸드폰은 없었지만, 이해진에게 부탁하면 전화하는 게 가능할지도 몰랐다.

일그러지듯 굳어 있던 알파의 입매가 그제야 느슨히 풀어졌다.

“하고 싶으면 해야지. 기다릴까?”

“네. 그럼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정희연은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문을 닫았다.

“…….”

연 대표는 미련 없이 걸음을 옮기는 오메가의 옆얼굴을 눈에 담았다. 따뜻한 공기가 맴도는 건 바깥이 아니라 차 안일 텐데도 부드럽게 풀려 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출발해.”

강서의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하며 그는 짧게 명령했다.

***

“전화했으면 내려갔을 텐데. 올라오는 거 어렵지 않았어?”

이해진의 손에 들린 머그잔에서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대표님께서 뭐든지 저 혼자 해 보는 연습 해야 한대요.”

“음, 그건 그렇지. 적응하려면 해 보는 게 제일 좋으니까.”

정희연은 이해진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대표님의 집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너른 거실을 차지한 것이라고는 커다란 소파와 낮은 높이의 테이블이 전부였다. 생활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김지원이 보여 주던 드라마에서는 거실에 이것저것 많았는데, 연 대표 집이나 이해진 집은 왜 이렇게 썰렁한지 모를 노릇이었다. 정희연은 따뜻한 차를 마시며 쓸데없는 의문을 삼켰다.

“억제제 안 먹었지? 페로몬 새어 나오는데.”

“네. 대표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페로몬 상태가…. 조만간 히트 터질 것 같은데.”

이해진은 정희연의 얼굴을 꼼꼼하게 살피며 중얼거렸다. 그 역시 우성 오메가였다. 정 회장의 밑에서 길러진 건 둘째 치더라도, 관리하는 오메가가 여럿이다 보니 타인의 페로몬을 귀신같이 읽어 낼 줄 알았다.

그를 뜬장에서 구해 준 오메가는 이해진을 보며 ‘네가 알파들보다 히트 더 잘 알아차릴 것 같은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했었다.

“히트요?”

“히트 몰라?”

“모르는 건 아닌데….”

미묘한 대답이었다.

“설마 아직까지 히트 온 적 없어?”

“네.”

이해진은 입 안의 여린 속살을 깨물었다. 그럴 리가. 정확히 몇 살에 발현했는지는 몰라도 올해 스무 살인데 여태 히트가 오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우성 오메가인데 아직도 첫 히트 전이라고? 그는 눈꺼풀을 반쯤 내리깐 채 머리를 굴렸다.

“히트 전이라고….”

정희연의 몸에 벌어진 일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역겨운 의도를 가지고 일부러 히트를 늦춘 듯했다. 처음이면 많이 힘들 텐데. 다소 염려스러웠으나 곧 생각이 연 대표에게로 미쳤다. 그 남자라면 정희연의 몸 상태를 알고 있을 테고, 해결 방안을 마련해 두었을 터였다. 억제제를 못 쓰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지우(馶遇)에는 페로몬 관리 전문가들이 많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히트는 오메가인 이해진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대신 이해진은 성교육을 먼저 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희연아. 꼭 알아 둬야 할 게 있어.”

정희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진의 앞으로 종이박스를 쓱 밀어 넣었다. 로고를 보니 디저트 전문점에서 사 온 듯했다.

“…나 먹으라고 사 온 거야?”

“네. 형이랑 나눠 먹으려고 사 왔어요.”

“아…. 고마워, 잘 먹을게.”

사실 이해진은 디저트류를 딱히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애초에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을 법한 기호품은 담배와 술이 전부이기도 했고. 그렇다 해도 정희연의 성의를 거절할 수는 없어 이해진은 케이크를 한 입 떠먹었다. 그리 달지 않은 케이크가 웬일로 푹신푹신하게 느껴졌다. 정희연은 그제야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이해진은 오물거리는 모습을 지켜보며 느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히트가 터졌어도, 네 동의 없이 덤벼드는 놈들은 다 강간범이야.”

“강간이요?”

정희연은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오메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라고 했는데….”

그동안 배운 걸 전부 잊으라던 연 대표의 말이 떠올라 뒤늦게 말끝을 흐렸다.

“개소리야. 정상적인 알파는 억제제를 먹이지 강간하지 않아.”

“네.”

“발정기 상태나 다름없어서 히트가 터지면 다른 생각은 못 할 거야.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거든. 그래도 그건 알아야 해. 합의되지 않은 섹스는 무조건 강간이야.”

“그럼 히트일 때는 무조건 억제제를 먹어야 해요?”

당연하게 이어진 질문에 이해진은 입을 다물었다. 억제제를 먹는 게 보편적인 해결 방법이기는 했다. 정희연이 정상적인 히트를 겪었다면 이해진 역시 그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희연의 히트는 강제적으로 미뤄진 상태였다. 억제제를 먹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연 대표가 생각이 있겠지, 이해진은 말을 고르다 조금 늦게 입을 열었다.

“무조건은 아니고 보통은. 억제제를 먹든가 애인과 자든가. 아니면 미리 합의한 알파와 자는 경우도 있고.”

“합의요?”

“섹스 파트너.”

“아. 이해했어요.”

정희연은 평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생경한 단어였으나 뜻을 합치면 유추해 내기란 어렵지 않았다. 대표님께는 애인이 없는 것 같았는데…. 그럼 러트를 섹스 파트너와 보내시는 걸까? 이해진에게 물을 수 없는 난감한 질문이었다.

“혹시 히트 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무조건 나한테 말해. 알았지?”

“네.”

이해진이 무슨 일을 염려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정희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끔 자기 페로몬 이용해서 강제적으로 히트 유도하는 알파들이 있긴 하지만, 넌 우성이니까 웬만하면 그렇게 당하는 일은 없을 거야. 물론 지금 상태는 위험하지만.”

“제가 페로몬 조절을 못 해서요?”

“응. 그러니까 페로몬 조절하는 걸 먼저 배워야 해.”

연 대표는 천천히 하라고 했지만, 조급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괜히 제 페로몬 때문에 대표님이 일상을 방해받는 게 싫었다.

“오메가의 페로몬이 가장 강한 곳이 목이야. …잠깐 만져도 돼?”

“네.”

이해진은 허락을 구한 뒤 정희연의 목 폴라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페로몬선이 흐를 법한 자리를 손가락으로 살짝 누른 순간, 하얀 몸이 어깨를 움츠렸다.

“미안해. 아팠어?”

“아, 그게 아니라….”

연 대표가 예뻐해 줘서 생겼다던 자국 위를 누르자 당황했을 뿐이다.

“잠깐만. 봐도 돼?”

정희연이 눈에 띄게 당황하자 이해진은 순간적으로 무언가를 직감했다. 그는 한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괜찮아요.”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기꺼이 목을 내주었다. 이해진은 같은 오메가고, 자신은 잘 모르는 게 많으니 이 흔적이 뭐냐고 묻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이해진은 목 폴라를 당겨 정희연의 목덜미를 확인했다. 목을 촘촘하게 감싼 디자인은 아니라 옷을 끌어 내리기란 어렵지 않았다.

“…….”

아니나 다를까, 색이 옅어지긴 했지만 분명한 키스 마크였다. 이해진은 정희연의 옷을 정리해 준 뒤 머릿속으로 연 대표의 신상 정보를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 남자가 몇 살이었지? 정확한 나이는 연 대표 그 남자도 모를 터였다. 연우범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출생 신고가 된 것도 정 회장의 손을 떠나고 한참 뒤였으니까.

분명한 건 30대 초중반이라는 사실이었다. 열 살 이상 어린 오메가에게 키스 마크라니, 도둑놈이 따로 없었다.

“희연아. 이거 연 대표가 남겼어?”

“이게 뭔데요?”

“…키스 마크.”

“키스 마크요?”

이 도둑놈. 이해진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널 깨물어서 생긴 멍이야.”

정희연은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도 대표님이 왜 목을 깨무셨을까, 고민에 잠겼다.

“대표님.”

그는 곧바로 방으로 들어가는 대신 연 대표를 불렀다.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응, 희연아.”

“왜 저 깨무셨어요?”

연 대표는 단번에 말뜻을 알아들었다. 이해진이 키스 마크를 봤고, 어쩌다 생겼는지 알려 준 모양이었다. 가뜩이나 정희연에게 낯선 오메가 페로몬이 묻어 있어 기분이 좋지 않던 차였다. 무의식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우리 희연이는….”

그는 질문에 답하는 대신 느릿하게 정희연을 불렀다.

“전화도 안 하더니.”

“아.”

“다른 사람한테 맨살 보여 주면 어떡해. 대표님 질투 나게.”

정희연은 뒤늦게야 전화하겠다던 약속을 떠올리고는 당황했다. 이해진과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덧 집이었다. 먼저 약속해 놓고 잊어버리다니, 대표님께서 기다리셨을지도 모르겠다. 죄송함이 물밀듯이 밀려와 정희연은 괜스레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전화 기다리셨어요?”

“우리 희연이가 하겠다는데 기다려야지.”

다정한 목소리로 들려오는 다정한 대답에 손톱을 만지작거리던 손가락들이 한층 더 부산스러워졌다.

“아…. 죄송해요. 해진이 형이랑 얘기하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몰랐어요.”

“이해진이랑 노는 거 재밌어?”

정희연은 비스듬히 웃는 남자의 낯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놀지는 않았는데. 만남의 목적 자체가 배움이었고 실제로 이것저것 배웠으니 논 게 아니라 공부였다. 아래로 늘어뜨려진 시선이 팔랑거리는 속눈썹과 함께 연 대표를 향했다.

“형이랑 논 거 아닌데요…? 공부했어요.”

잠깐 머뭇거리다 말하자 연 대표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리며 뺨을 툭 건드렸다.

“으응. 논 거 아니고 공부했어?”

알파의 손이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하얀 뺨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위협적으로 느껴질 법한 크기였으나 정희연은 아무렇지 않게 제 얼굴을 남자에게 맡겼다.

“그렇다고 대표님 방치하면 어떡해.”

연 대표는 홈이 파이도록 눈썹을 찌푸리며 서운함을 토로했다. 이해진이 봤다면 가증스럽다고 할 만한 표정이었다. 정희연은 남자가 일부러 서운하다는 듯이 구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채 눈만 깜박거렸다. 잔뜩 늘어지는 대표님의 말꼬리가 속상함에 푸욱 젖어 있는 것만 같았다.

“대표님 방치한 거 아니에요. 대표님이 더 좋은데….”

방치라는 단어를 정희연은 황급히 부정했다. 대표님이 그렇게 느끼셨을 줄은 미처 몰라 당혹스러웠다. 이해진과 보낸 시간은 즐거웠지만, 그보다 연 대표와 함께 있는 시간이 더 좋았다. 더 좋아하는 사람도 눈앞의 남자였다.

“으응. 내가 더 좋아?”

“네. 대표님이 제일 좋아요.”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곧바로 튀어나오는 대답에 연 대표는 눈꼬리를 접었다. 지금과 같은 말을 듣기 위해 유도한 건 그 자신이면서, 제게 유순하게 구는 정희연을 보고 있자니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치밀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보다는 감상에 가까웠다.

저 멋모르는 오메가가 자신 때문에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감상.

“내가 제일 좋은데 다른 사람한테 그렇게 무방비하게 굴면 어떡하지.”

연 대표는 능숙하게 위험한 감상을 숨겼다. 그는 자신의 본성은 믿지 않았으나 학습된 습관은 제법 믿는 편이었다. 스스로의 의지로 정희연을 울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무방비요…?”

“목도 보여 주고.”

뺨에 닿아 있던 손이 턱을 지나 목으로 내려갔다. 정희연은 처음과 다를 바 없는 순한 얼굴이었다. 급소를 내어 준 초식 동물이 지을 법한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목덜미에 닿은 손이 느릿하게 움직이자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제 목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건 니트의 질감도, 부드러운 피부도 아닌 남자의 손이었다. 하얗고 자그마한 자신의 손과 달리 거칠고 커다란 어른의 손이었다.

“목은 원래 잘 보이는데요…? 오늘은 이런 옷 입어서 안 보이는 것뿐이에요.”

“보이지 말라고 목 폴라 입힌 건데.”

연 대표는 속내를 드러내며 손을 물렸다. 정희연의 목을 만지작거리는 게 습관으로 자리 잡으면 곤란했다.

“아. 그래서 오늘 이 옷 입으라고 하신 거예요?”

“응.”

보여 주지 말라고 일부러 이런 옷 주신 거구나. 정희연은 슬쩍 고개를 내렸다. 턱 끝에 닿는 니트의 감촉이 부드럽기 짝이 없었다. 괜스레 목을 감싼 니트를 만지작거리자 도톰하고 따뜻한 감촉이 손끝으로 전해져 왔다. 대표님과 저만 아는 비밀이 생긴 것 같아 목이 간지러웠다.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한테 안 보여 줄게요.”

눈 밑으로 그림자를 만들어 내던 속눈썹이 부드럽게 올라가며 연 대표를 향했다. 정희연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쩌다가 보여 줬어?”

희미하게 웃는 정희연. 연 대표는 가느다란 목을 손에 쥐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느슨하게 입을 열었다. 저 흔적을 오메가에게 보이는 것까지 싫을 줄은 몰랐다.

정희연에게 목 폴라를 입힌 건 엄밀히 말하면 이해진 때문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키스 마크를 드러낸 채 돌아다니게 둘 수 없었을 뿐이다.

분명 그런 의도로 입힌 것뿐인데. 연 대표는 손을 들어 딱딱하게 굳은 입가를 가렸다.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저 하얀 목덜미를 봤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불쾌함이 치솟았다. 낯선 불쾌함이었다.

알파의 집착은 보통 두 부류로 나뉘는 편이었다. 은밀하거나, 혹은 대놓고 드러내거나. 제 흔적을 깔끔하게 숨기는 알파가 있는가 하면 대놓고 드러내는 알파도 있었다. 대표적으로 남수현이 후자였다.

연 대표는 그간 자신의 집착 성향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오메가에게 집착한 적이 없으니, 생각해 보지 않는 게 당연했다.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는데.

“해진이 형이 페로몬 느껴지는 곳 가르쳐 주셨어요. 만지셨는데 제가 놀라서…. 봐도 되냐고 하셔서 보여 드렸는데 깨물어서 생긴 거래요.”

거기가 페로몬선이었나. 연 대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어 도톰한 니트에 가려진 목과 자신이 남긴 흔적을 가늠했다. 본능적으로 페로몬선 위를 깨문 모양이었다. 오메가의 목덜미를 깨문 적이 없으니 미처 자각하지 못했다. 쯧, 남자는 혀를 찼다. 역시나 알파의 본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희연아.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이 손 못 대게 해.”

연 대표는 날카롭게 곤두서기 시작한 신경을 익숙하게 갈무리하며 속삭였다. 엄연히 선을 넘은 통제였으나 정희연은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런데 대표님.”

“응.”

“왜 깨무셨어요?”

“궁금해?”

이해진이 거기까지는 말 안 했나 보지.

“저한테는 예뻐해 주신 거라고 하셨잖아요. 깨무는 건 예뻐해 주는 게 아닌데요…?”

정희연은 눈썹 앞머리를 조금 찌푸렸다. 예뻐해 주는 게 정확히 어떤 행동인지는 모르겠으나, 피부를 깨무는 건 그와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오히려 예뻐해 주는 것보다 벌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가 알고 있는 한 사람이 피부를 깨무는 경우는 단 한 가지뿐이었다.

고통을 참아 낼 때.

“키스한 뒤에 깨물면 예뻐해 주는 거야.”

연 대표의 말에 정희연은 눈을 몇 번 깜박이다가 이내 수긍했다. 대표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그런 거겠지. 제가 아는 것 외에 다른 의미가 있는 듯했다. 벌이라고 생각해 속상해지려던 마음이 금세 안정을 되찾았다.

“…그럼 저도 대표님 깨물어도 돼요?”

순진한 물음에 남자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입술이 벌어지며 그림 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우리 희연이 아직 애기잖아.”

정희연은 푹신한 이불에 몸을 숨긴 채 생각에 잠겼다. 오늘 이해진에게 아기의 또 다른 의미를 물었어야 했는데 깜박하고 말았다. 며칠 전, 아기라 페로몬을 조절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하던 목소리와 또 몇 시간 전, 아기라 깨물지 말라고 하던 목소리가 한데 섞여 들었다.

페로몬이 새어 나와도 괜찮은 건 다행이었지만, 깨물지 말라고 한 건 조금 속상했다. 대표님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아기가 도대체 뭘까 싶었다.

정희연은 폭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담장 밖을 나온 지 어느덧 두 달이 흘렀는데도, 어려운 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

둥그렇게 말린 몸은 마치 콩벌레처럼 보였다. 꾹 누르면 파들파들 떨다 손쉽게 짓이겨져 죽어 버릴 것 같은 하찮은 미물. 정희연은 양팔로 배를 감싼 채 소리 없이 앓았다. 손가락 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전신이 아팠지만, 그중에서도 배가 너무 아파 견디기 어려웠다. 온몸의 내장이 곤죽이 된 것만 같았다.

주사를 맞고 나면 익숙하게 찾아오는 고통이었다. 익숙한 고통이므로 이 시간 역시 익숙했다. 아침이 되면 그럭저럭 견딜 만할 테니 이 밤만 넘기면 괜찮았다.

“흐으….”

간신히 팔을 움직여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내렸다. 덜덜 떨리는 입술을 벌린 그는 새하얀 이불을 입에 넣고 악물었다. 언뜻 말린 햇볕 냄새가 나는 듯했으나 고통은 다른 감각들을 손쉽게 마비시켰다.

입 안 가득 넣은 이불을 잘근잘근 씹으며 정희연은 신음을 삼키기 위해 애썼다. 입에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입술을 다물면 이가 상할 테고, 이가 상하면 집사님이나 회장님께 혼이 날 게 분명했다. 맞는 건 참을 수 있었으나 뜬장에 갇히는 벌은 견디기 어려웠다.

식은땀이 뚝뚝 떨어지며 깨끗하게 갈아 둔 시트를 회색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혼미한 정신 속에서 앓고 있으려니 오늘 아침, 언제나처럼 주사를 놓고 간 주치의의 말이 떠올랐다.

‘인형도 아니고.’

주치의는 입이 무거웠다. 진찰에 필요한 단어가 아니라면 먼저 말을 거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그는 주사를 맞는 정희연을 내려다보더니 조용하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찾아올 고통을 뻔히 알면서도 무심한 얼굴인 오메가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표정도 없고, 감정도 없고.’

정희연은 대답 대신 가만히 주치의를 응시했다. 베타인 남자는 페로몬을 전공한 의사였다. 양심적인 의사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감금된 미성년자를 못 본 척하지 않았을 테니까. 학대를 방관한 건 둘째 치더라도, 우성 오메가에게 몇 년에 걸쳐 난임 주사를 맞혔으니 양심적이기는커녕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저버린 비양심적인 의사였다.

그렇다고 동정심까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었다. 아주 가끔, 이유태가 없을 때 그는 정희연에게 말을 걸었다.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로, 입도 거의 벌리지 않은 채 조심스럽게.

위로해 주는 말은 아니었다. 어쩌면 혼잣말이었을지도 모르고. 주치의는 정희연의 상태를 감정 박탈이라고 진단했다. 성장기에 모든 대인 관계와 외부의 경험을 박탈당해 감정 역시 강제적으로 박탈당한 상태라고.

단어의 부정적인 의미를 모를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으나, 정희연은 그 말을 들었을 때도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어차피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성인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회장님께서 맺어 준 알파와 결혼해 아기를 낳는 게 전부였다.

그러려면 주사를 맞아야 했다. 정희연은 헐떡거리며 곧 주치의와의 대화를 잊어버렸다. 몸이 아프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흑, 윽.”

생리적인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혹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창 고통에 시달리던 오메가는 입 속에 가득 들어찬 이불을 뱉어 냈다. 침과 땀 때문에 시트가 축축했다. 그는 초점 없는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다 인상을 찌푸렸다. 끊임없는 격통이 전신을 마구 찔러 대기 시작했다.

정희연은 고통을 참기 위해 제 팔을 깨물었다. 다른 곳으로 통증이 분산되어야 배를 휘젓는 통증을 희미하게 줄일 수 있었다. 무언가가 뱀처럼 혈관을 타고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정희연은 그 무언가가 자신의 페로몬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다.

주사를 맞은 날은 페로몬이 온몸을 기어 다니며 전신을 할퀴었다. 그가 자신의 페로몬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새까만 밤의 익숙한 고통 안에서뿐이었다.

어딘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주사를 맞은 날이 아니면 페로몬을 제대로 느끼지도 못했다. 페로몬이 질질 새고 있는 몸 상태를 모르는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정 회장이 그러한 이유 때문에 자신을 잡종이라 칭한다는 사실도 몰랐다.

“아파….”

정희연은 팔에서 입술을 떼어 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보니 팔을 깨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시야 속으로 선명한 잇자국이 보였다. 멍이 들 것 같았으나, 온몸이 이미 멍투성이이니 하나가 더해진다고 티가 나지는 않을 듯했다.

홀로 남겨진 오메가는 눈을 감았다. 내일이면 괜찮아질 것이다. 늘 그랬으니까.

정희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식은땀이라도 흘렸는지 손바닥이 축축했다. 기분 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떠오르는 장면은 없었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새까만 밤이 보였다. 저 멀리 비치는 희미한 빛은 구름에 자취를 감춘 달인 것 같았다.

“…….”

밖으로 내다보이는 하늘의 모습에 안심이 됐다. 하늘이 보인다는 건 이곳이 고층이며, 연 대표의 집이라는 의미였다. 그 사실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창가에는 자그마한 스노우볼이 고요하게 놓여 있었다.

“아….”

정희연은 상체를 일으키다 말고 앓는 소리를 내며 배를 감쌌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 배 속에 뭉근하게 고여 있었다. 어쩐지 얼굴에서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정희연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고여 있던 줄도 몰랐던 눈물이 그제야 툭, 손등 위로 떨어졌다.

뜨거운 뺨과 달리 미지근한 눈물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다행스럽게도 메마른 눈물샘이 또다시 눈물방울을 떨어트리는 일은 없었다. 정희연은 손등 위로 스며드는 미지근한 액체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어둑어둑한 하늘이 시야로 스며들었다.

커튼이 닫히지 않은 창은 밤하늘의 속살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방에서 쓸모없는 존재를 꼽으라면 단연 저 커튼이었다. 밤에도 낮에도 창을 가리는 쓰임을 다한 적이 없었으니까. 방의 주인이 커다란 창을 통해 보이는 하늘을 좋아한 탓이었다. 담장 안에서 살 때는 미처 상상해 본 적도, 감히 바란 적도 없는 풍경이었다.

그제야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무의식적으로 숨을 참고 있었는지 자그마한 한숨은 무척이나 고요하고 길게 이어졌다. 정희연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아래로 온갖 빛이 반짝거렸다.

“예쁘다.”

한 번도 예쁘지 않은 적이 없는 빛이었다. 어쩌면 평생 밟아 볼 일이 없던 빛이었을지도 모른다. 처음 보는 알파를 따라 이곳까지 오지 않았더라면.

왜 높은 곳에서 내다보이는 하늘과 발밑으로 내리깔린 빛이 좋은지 여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담장 안에서 보던 풍경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정희연은 유리창 위로 손을 올렸다. 어두운 밤하늘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혼자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을 때면 알 수 없는 감정이 흘러들고는 했다. 그럴 때마다 눈 앞에 펼쳐진 하늘과 아래로 늘어뜨려진 풍경을 보면 마음이 조금은 괜찮아지곤 했다. 돌이켜 보면 알 수 없는 감정의 이름이 불안이었던 모양이다. 혼자 남겨진 순간이 담장 안과 다를 바 없다는 불안.

그래서일까, 담장 안에서 볼 수 없던 순간을 눈에 담으면 마음이 괜찮아졌다. 이곳이 우범 지대라는 의미나 다름없었으니까.

정희연은 천천히 팔을 늘어뜨려 스노우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창가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옆에 연 대표가 있으면 좋겠지만, 자다 깨서 그의 침실에 갈 정도로 어린아이는 아니었다. 아무리 타인과의 교류가 부족했다지만 염치라는 걸 모를 정도로 뻔뻔하지는 않았다.

“아. 주사 맞을 때 됐는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나서야 얼핏 꿈꾼 내용이 떠올랐다. 정희연은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발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왜 별것도 아닌 내용이 꿈에 나왔는지, 눈물은 또 왜 고여 있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벽에 툭 머리를 기대자 차가운 감각이 관자놀이를 지나 열 오른 뺨을 감싸 안았다. 확인할 길은 없어도 뺨이 발갛게 물들었을 것만 같았다. 정희연은 그의 품과 다리 사이에 내려 둔 스노우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반짝이는 가루와 하얀 눈은 공중에 흩날리는 대신 유리구 바닥에 얌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예쁜 풍경이었다.

‘싫증 나면…. 버리면 그만이지, 희연아.’

연 대표가 스노우볼을 사 주며 내뱉은 말이 떠올랐다. 정희연은 차가운 유리구를 손가락으로 툭 건드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에게 받은 선물인데, 싫증 날 리가 없었다.

몸이 공중으로 붕 뜬 느낌이 들었다. 정희연은 막 잠에서 깬 사람처럼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왜 침대에서 안 자고 저기서 자지. 애기라 그런가 잠투정을 다 하네.”

정희연은 남자의 얼굴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널찍한 품에 툭 머리를 기댔다. 잠에서 깨어났으니 몸도 깨어나야 하는데 어쩐지 팔다리가 축축 늘어졌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스스로 걸어야 한다는 자각이 있었지만, 연 대표의 품이 편안해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대표님.”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잡은 남자의 옷을 꼭 쥐며 입을 열었다.

“응, 희연아.”

지금처럼 계속 안겨 있고 싶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상식이 그의 욕심을 이겼다. 아무래도 내려 달라고 한 뒤 스스로 걷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저 술 안 마셨는데요…?”

“술?”

뜬금없는 단어에 연 대표는 걸음을 멈춘 뒤 제게 안긴 오메가를 내려다보았다. 정희연은 무언가가 마음에 걸리는 듯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가 이내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쳐 왔다. 잠든 몸을 안아 올릴 때까지만 해도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데 눈 밑이 평소보다 붉었다. 이제 보니 페로몬도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연 대표는 다정한 얼굴을 가장한 채 정희연의 상태를 꼼꼼히 확인했다.

“술 마신 사람만 안기는 거 아니에요?”

순진한 물음에 그는 피식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쩔까.

“자고 있던 사람도 안겨도 돼.”

술에 취하든 잠에 취하든 타인을 직접 안아 줄 정도로 아량이 넓지 않은 남자가 뻔뻔하게 말했다. 굳이 하지 않던 행위일 뿐,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니 거리낄 게 없었다.

“아, 그렇구나.”

정희연은 조금 안심하며 연 대표의 어깨에 콩 이마를 부딪쳤다. 대표님께 안긴 건 좋지만, 술을 마신 것도 아닌데 다 큰 성인이 안겨도 되는 걸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자고 있던 사람이나 술을 마신 사람이나 정신이 없는 건 똑같으니 안아서 옮겨도 되는 모양이었다.

“잠들 줄 몰랐는데 깜박 잠들었어요. 원래 침대에서 자는데…. 잠투정 아니에요.”

정희연은 뒤늦게야 연 대표가 지나가듯 물은 말에 답했다.

“으응. 그랬어?”

“네. 눈만 감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연 대표는 가볍게 정희연을 내려 두었다. 그새 잠에서 깼는지 갈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침묵을 유지한 채 말간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침실 밖으로까지 흘러나오는 페로몬에 짐작하긴 했으나, 조만간 히트가 오려는 모양이었다. 발갛게 물든 얼굴은 그렇다 치더라도 분위기가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곤란한데. 연 대표는 정희연의 눈 밑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혼잣말을 삼켰다.

“희연아.”

순한 눈동자가 남자를 향했다. 가늘게 흔들리는 속눈썹과 반쯤 열린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느릿한 숨소리가 알파의 본성을 충동질하기에 충분했다.

“울었어?”

다행히 충동이란 연 대표에게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그는 페로몬에 반응하려는 손을 어렵지 않게 억눌렀다.

팔려 온 후부터 달려든 오메가가 한둘이 아니었다. 개중에는 히트 중인 오메가는 물론 우성도 포함되어 있었다. 능숙하게 제 페로몬을 이용하는 우성 오메가에게도 넘어가지 않았는데 풋내 나는 정희연의 페로몬에 넘어갈 리가 없었다.

알파는 문란하다는 사회적 편견이 도처에 깔려 있었다. 대부분 맞는 말이었으나, 연 대표는 쓸데없는 섹스는 피하는 편이었다. 물론 러트가 닥치면 오메가와 몸을 섞었으나 그마저도 절반 정도는 억제제를 먹고 지나가고는 했다. 그에게 섹스는 페로몬을 배출하는 행위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돈이든 호승심이든 유혹해 오는 오메가에게 넘어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아니요. 안 울었어요.”

정희연은 연 대표의 느른한 얼굴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울었어?”

재차 묻는 목소리에는 입술 안쪽을 살며시 깨물었다. 정희연은 슬쩍 시선을 내리깔며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눈물이 나긴 했지만, 자다가 일어난 상황이었고 그마저도 고작 한 방울이었다. 그러니 울었다고 보기에는 힘들지 않을까 싶었다. 혹시 울었는데 기억을 못 하는 걸까? 기억은 없지만, 대표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얼굴에 티가 났을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눈꺼풀을 내리깐 시간 역시 길어졌다. 덕분에 정희연은 연 대표의 미간 사이로 금이 가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실 자다가 일어났는데 눈물 고여 있었어요. 운 건 아닌 것 같은데….”

“악몽 꿨어?”

그게 악몽이던가. 주기적으로 일어나던 일이었을 뿐이다. 정희연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일상적인 꿈이었어요.”

“무슨 꿈?”

“주사 맞는 꿈이요.”

연 대표는 불편해진 심기를 감추기 위해 비스듬히 웃었다. 정희연은 자각하지 못하는 듯했으나, 악몽이 분명했다. 연 대표는 정희연에게 그 순간이 고통스러웠냐고 묻는 대신 이유태를 떠올렸다. 불편해진 심기를 해소하기에는 그럭저럭 나쁘지 않을 듯했다.

“대표님.”

“응, 희연아.”

“오늘 집에 있어도 돼요?”

정희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과 함께 있고 싶었지만, 페로몬 때문에 회사에 가는 게 불가능하니 차라리 혼자 집에 있고 싶었다. 이해진을 만나러 가는 게 싫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몸이 자꾸만 나른해지는 게 수상쩍었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아프면 곤란했다.

“집에 있고 싶으면 집에 있어야지.”

연 대표는 이유를 묻는 대신 순순히 수긍했다. 정희연이 이해진을 만나러 가지 않는 게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렇게 한창, 오메가의 얼굴을 살피던 그는 등을 돌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오래지 않아 돌아온 남자의 손에는 생소한 물건이 들려 있었다.

“아.”

연 대표는 침대에 걸터앉자마자 정희연의 턱을 감쌌다. 그리고는 입을 벌리라는 듯 짧은 음절을 내뱉었다. 정희연은 그제야 남자의 손에 들린 물건이 몇 주 전, 김지원이 약과 함께 가져온 체온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희연아. 아, 해야지.”

몸이 둔해지니 정신도 둔해지는 모양이었다. 정희연은 천천히 입을 벌렸다. 체온계가 부드럽게 혀 밑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감촉에 반사적으로 혀를 움찔거리자 알파의 눈이 순식간에 가느스름해졌다.

정희연은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시트를 쥐었다. 보기 드물게 무표정한 연 대표의 얼굴이 키스하던 순간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혀 밑으로 들어온 게 체온계가 아닌, 턱을 감싸 쥐고 있는 손가락인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혀 아래로 침이 고이며 아랫배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어떡하지. 뚫어질 듯한 남자의 시선에 정희연은 입을 다물지도 시선을 피하지도 못했다. 키스하던 순간을 떠올린 탓일까, 급작스럽게 진한 꽃향기가 부유했다. 낯선 향기였으나 분명한 오메가 페로몬이었다. 정희연은 당황해 또다시 혀를 움찔거렸다. 동시에 턱을 쥐고 있던 남자의 손끝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희연아.”

연 대표는 느릿하게 정희연의 이름을 부르며 체온계를 떼어 냈다. 가늘게 이어지던 타액이 금세 끊어졌다. 그는 평온한 얼굴로 정희연의 입술에 묻은 타액을 닦아 내며 조용히 속삭였다.

“열 있네.”

정희연의 입술에서 시선을 떨어트린 남자는 다시금 체온계의 숫자를 확인했다. 히트가 오면 열이 오르는 게 당연하지만, 몸이 그렇게 느낄 뿐 실제로 체온이 올라가는 건 아니었다. 히트 때문에 열이 오르나 싶었는데, 체온을 보니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김지원을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만…. 연 대표는 불과 몇 초 전 그를 급습한 페로몬을 떠올리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곧 히트가 터질 오메가에게 다른 알파라니. 안 될 말이었다.

“선약이 있어서 그것만 끝내고 바로 올 테니까 자고 있어.”

“네.”

정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안으로 꼬물꼬물 들어갔다.

“잘 때까지 옆에 계셔 주실 거예요?”

“응.”

“아, 그럼 빨리 잘게요.”

빨리 자겠다는 대답이 웃겼는지 연 대표는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천천히 자.”

“네. …대표님, 빨리 오세요.”

“우리 희연이 아직 애기는 애기네. 혼자 있는 거 싫어하고.”

정희연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눈을 감았다. 아니라고 대답하자니 페로몬 문제가 마음에 걸렸다. 다행히 금세 잠이 쏟아졌다.

“…….”

연 대표는 약속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요히 기다렸다. 느른한 시선은 알파 앞에서 무방비하게 잠든 오메가에게 고정된 채였다. 일견 건조해 보이면서도 어딘가 질척하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그는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흘러나오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차에 올라타며 시간을 가늠했다. 히트일 가능성은 차치하고서라도, 빨리 오라던 아기를 두고 집을 오래 비울 수는 없었다.

***

강서의와의 만남이 생각보다 제법 길어졌다. 도어 록을 닫던 남자의 손이 우뚝 멎었다.

“…….”

페로몬이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탓이었다. 근래에 익숙하다면 익숙해진 짙은 꽃향기였다. 연 대표는 오메가의 페로몬에 동요하는 대신 무슨 꽃이지,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언제 멈췄냐는 듯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남자의 움직임에서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그는 정희연이 있는 방으로 눈길을 주며 천천히 움직였다. 다른 알파들이 그러하듯 오메가의 페로몬에 눈이 돌아가지는 않았지만, 연 대표의 인내심과 알파의 본능은 엄연히 별개였다. 코트를 벗는 손등 위로 자연스레 시퍼런 핏줄이 돋았다. 남자는 곧바로 방문을 여는 대신, 상비약이나 다름없는 억제제를 꺼냈다. 다급하게 굴수록 다치는 건 알파가 아닌 오메가 쪽이었다.

잔잔하게 맴돌던 페로몬이 해일처럼 몰려와 순식간에 범람했다. 페로몬은 그 주인의 상태에 영향을 받으니 정희연이 본능적으로 알파의 존재를 눈치챘다는 소리였다.

제대로 다룰 줄 몰라 농염함과는 거리가 먼, 서툴기 짝이 없는 페로몬이었다. 그러나 연 대표를 충동질하기에는 충분했다.

“하, 씨발.”

남자는 나지막하게 욕을 내뱉으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검은색 코트가 갈 자리를 잃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드레스 룸으로 향하던 발걸음이 지체 없이 방향을 바꿨다. 연 대표는 억제제를 씹어 삼키며 방문을 열었다.

“대표, 흐…. 대표님.”

정희연은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시트를 꼭 쥐고 있는 오른손과 달리 왼손은 엎드린 다리 사이로 모습을 감춘 채였다. 자위해 본 적도 없는 듯, 어리숙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발개진 눈 밑으로 열락에 들뜬 눈물이 흥건했다.

“희연아.”

연 대표는 눈으로 정희연을 잡아먹으며 느릿하게 그 이름을 짓씹었다. 정희연이 몽롱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며 헐떡이고 있었다. 가쁜 호흡을 내뱉을 때마다 흘러내린 잠옷 사이로 하얀 어깨가 움찔거리며 떨렸다. 열 오른 뺨과 반쯤 벌어진 입술이 색정적이었다.

“옷부터 벗을까.”

완벽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명령인지 허락인지 모를, 모호한 말투였다.

정희연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희부연 시야 때문에 모든 것이 불분명했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곤두섰다가도 금세 무딘 곳으로 추락하길 반복했다. 몸이 덜덜 떨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집사님과 헤어진 게 두 달 전쯤이니 원래대로라면 주사를 맞을 시기였다. 그 주기가 다가오면 늘 몸이 들뜨고는 했으므로 처음에는 단순히 아픈 것이라고 여겼다. 잠이 쏟아지는 것도, 열이 오르는 것도, 주사를 맞기 직전의 몸 상태와 비슷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한 건 잠에서 깨어난 무렵이었다.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며 잠에서 이끌려 나왔다. 아플 때 내뱉던 신음과는 분명히 결이 다른 소리였다. 스스로의 생경한 목소리에 의문을 품기도 전에 축축한 속옷이 느껴졌다. 대표님 꿈 안 꿨는데…?

당황해 침대에서 일어서려는 찰나 오한이 파도처럼 온몸을 덮쳐 왔다. 어쩌면 오한이 아닌 열기였을지도 모른다. 뒤가 자연스레 젖어 들었고 성기는 꼿꼿하게 곤두서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밀려온 열락은 순진한 오메가를 묶어 두기에 충분했다.

밑으로 내려서기 위해 바둥거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지금껏 겪어 보지 못한 감각은 공포나 다름없었다.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침대 시트를 쥐어짜며 몸을 관통한 열기를 견뎌 내기 위해 애썼다. 그마저도 팔다리가 자꾸만 늘어지는 바람에 힘을 싣는 게 여의치 않았다. 보드라운 잠옷은 물론 발등에 닿는 시트의 감촉까지 그를 둘러싼 모든 천들이 여린 피부를 마구잡이로 자극했다. 낑낑거리는 신음과 함께 발가락 끝이 자꾸만 곱아들었다.

그간 강제적으로 히트를 거세당했던 오메가는 제게 닥친 일이 히트 사이클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저 헐떡거리며 자신의 페로몬에 짓눌릴 따름이었다.

정희연은 눈물이 고이는 이유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가까스로 한쪽 손을 움직였다. 아래가 이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배에서는 뭉근한 통증이 느껴지는데, 성기는 의지와 상관없이 꼿꼿하게 곤두섰다. 동시에 몸 안쪽 어딘가가 간지러웠다. 뒤에서는 진득거리는 듯 물기 어린 액체가 흘러나왔다.

간신히 잠옷 바지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는데 연 대표가 들어온 것이다.

“대표, 님.”

정희연은 습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게 엉망이었다.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투둑 떨어지며 침대 시트를 동그랗게 물들였다.

“응, 희연아.”

스리피스 슈트를 완전히 갖춰 입은 남자가 다정하게 대답하며 걸어오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시에 온몸을 짓누르던 페로몬이 조금씩 옅어졌다. 머리를 혼몽하게 만들던 짙은 꽃향기가 남자의 기세에 밀려나는 느낌이었다.

“흑, 이상해요….”

정희연은 여전히 몸을 가누지 못했다. 완연하게 느껴지는 제 페로몬이 이상했고, 말을 듣지 않는 몸이 이상했으며, 자꾸만 힘이 들어가는 아랫배와 당연하다는 듯 젖어 드는 뒤쪽이 이상했다.

“이상한 거 아니야.”

연 대표는 사나워지려는 표정을 감추며 엎드린 몸 아래로 팔을 집어넣었다. 작은 접촉에도 성감이 오르는지 하얀 어깨가 얕게 파들거렸다. 공기를 부유하던 페로몬이 순식간에 짙어졌다.

“애기 히트 터졌네.”

가볍게 팔을 움직인 남자는 엎드린 정희연을 바로 눕도록 만들었다. 잔뜩 흐트러진 잠옷 덕분에 하얀 피부 위로 푹 파인 배꼽이 보였다. 바지는 반 정도 내려가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였다. 알파의 눈이 순식간에 가느스름해졌다.

“히트, 요?”

“응. 히트 사이클.”

헐떡이는 몸 위에 올라타며 연 대표는 다정한 어조로 속삭였다. 남자의 무릎 꿇은 다리가 가느다란 몸을 가두었다. 정희연은 연신 헐떡거리며 저를 가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몸이 성을 지키는 기사처럼 견고해 보였다.

연 대표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겼다. 손등 위의 시퍼런 핏줄과 팽팽하게 땅긴 턱, 잔뜩 굳은 뺨이 정희연의 시선을 앗아 갔다. 눈이 마주치자 상체를 세우고 있던 남자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시원하게 느껴지는 손이 발갛게 부은 눈가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저, 흣, 히트 사이클 터진 적 없는, 데…?”

“알아.”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연 대표의 손에 뺨을 비볐다. 평소에는 존재조차 느껴지지 않는 옷감이 피부를 예민하게 자극하는 바람에 진저리를 친 게 불과 몇 분 전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대표님과 맞닿는 건 괜찮았다. 눈물을 훔쳐 낸 알파의 손이 젖은 뺨과 턱을 한 번에 잡아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이내 열 오른 눈가 밑으로 남자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젖은 탓에 촉 하는 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뽀뽀, 흑, 하고 싶으셨어요?”

“응.”

연 대표는 이런 상황에서도 뽀뽀 운운하는 오메가를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다정하게 보일 법한 미소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정희연의 페로몬이 너무 강하게 느껴져 곤란했다. 다른 알파였다면 눈이 뒤집혀 달려들 만한 농도였다. 일부러 페로몬을 쌓아 두게 했다더니, 정 회장이 노린 것도 이런 상황이었을 것이다. 다른 알파가 이 페로몬을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순식간에 피가 식었다.

그러나 남자는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제 페로몬까지 마음대로 풀어 내면 저 자그마한 몸에 무리가 갈 게 뻔했다. 정희연이 스스로의 페로몬에 짓눌려 힘들어하는 게 뻔히 보였다.

“저도 할래요.”

알파를 유혹하기 위해 열 오른 입술이 달싹였다. 호흡 때문인지, 신음 때문인지 칭얼거리듯 조르는 목소리였다.

계속 이렇게 나오면 곤란한데. 뽀뽀든, 키스든, 오늘은 정희연이 저를 건드리게 둘 생각이 없었다. 자제하지 못한 적은 없으나, 저 자그마한 손이 저를 건드는 순간 자제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었다.

“희연아. 대표님이 옷부터 벗을까, 했잖아.”

연 대표는 단정하게 잠긴 잠옷 단추를 한 손으로 풀어내며 조용히 정희연을 달랬다. 단추가 풀릴 때마다 하얀 몸이 움찔거리며 가련하게 떨렸다. 페로몬 때문에 예민하게 달아오른 피부가 잠옷에 쓸리는 감촉까지 성감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아, 흐….”

공기에 맞닿은 피부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정희연은 신음을 내뱉으며 바르작거렸다. 인간의 육체인 이상 공기가 낯설게 느껴질 리 없는데도, 단추가 벗겨지고 잠옷이 벌어질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으며 배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울컥 뒤가 젖어 들었다.

처음 겪는 날카로운 성감에 놀란 오메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밀었다. 발꿈치에 시트가 걸리자 자그마한 발가락들이 절로 곱아들었다. 모든 접촉을 성적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페로몬 탓이었다.

“대표, 님….”

정희연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매달릴 게 필요했다. 느린 속도로 단추가 벗겨지는 와중에도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연 대표를 마주 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흐읏…. 키스하고 싶어요.”

처음 키스하던 날을 떠올리며 정희연은 혀를 내밀었다. 배에 고여 있던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가며 입 안까지 뜨겁게 달아올랐다. 느긋하게 단추를 풀어 내리던 손이 멈칫했다. 이내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욕을 짓씹었다.

“하, 정희연.”

“흣!”

혀가 부딪치나 싶더니 남자의 살덩어리가 자그마한 혀를 밀어붙이며 무자비하게 입 안을 파고들었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으며 시원한 체온이 들끓는 입 안으로 옮겨 왔다.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연 대표의 목에 팔을 감으며 입술을 조금 더 벌렸다. 뜨거운 점막이 두꺼운 살덩이로 가득 차자 순식간에 기분이 몽롱해졌다.

몸을 감싸고 있던 잠옷이 금세 허물을 벗어 냈다. 배를 뒤덮은 얇은 옷감이 사라지자 공기에 고스란히 노출된 피부가 호흡을 따라 얕게 올랐다 꺼지길 반복했다. 정희연은 단추를 풀어낸 남자의 손이 제 뺨을 감싸는 것을 느끼며 서툴게 혀를 움직였다.

“흐읏, 응…. 아!”

저도 모르게 허리를 움직이려는 순간, 신음이 터져 나왔다. 정희연은 놀란 눈을 깜박이며 연 대표를 응시했다. 입술을 떼어 낸 남자가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알파의 손이 판판한 가슴 위를 덧그리고 있었다.

“희연아. 가슴 만져 주는 거 좋아?”

“흣!”

연 대표가 젖꼭지를 손가락에 넣고 굴릴 때마다 어깨가 움츠러들며 배 속이 간지러웠다. 정희연은 노골적인 쾌락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 더듬거렸다.

“왜, 왜…. 왜 가슴, 만지세요?”

“싫어?”

발정기의 오메가를 눈앞에 둔 알파는 바짝 일어선 젖꼭지를 꾹 누르며 물었다. 동시에 작은 몸이 파들거렸다. 연 대표는 대답을 듣는 대신 반쯤 벌어진 자그마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알파의 혀는 당연하다는 듯 좁고 축축한 점막 안쪽을 파고들었다.

정희연의 입 안은 지나칠 정도로 뜨거웠다. 체온을 쟀을 때도 살짝 높은 편이었는데, 히트까지 겹치니 몸이 더 뜨거워진 모양이었다. 연 대표는 작은 입속을 샅샅이 핥으며 정희연의 가슴을 느릿하게 문질렀다. 얕은 신음이 타액과 함께 삼켜졌다.

“하아, 아….”

버거워하는 호흡이 느껴져 연 대표는 입술을 떼어 냈다. 밑으로 내려가던 알파의 입술이 목덜미에서 멎었다. 그가 남긴 자국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간이 지났으니 당연한 일인데도 그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는 대놓고 미간을 찌푸리며 가느다란 목덜미를 깨물었다. 그조차 기꺼운지 정희연이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긴장시켰다.

하얀 목덜미에 코를 박자 페로몬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연 대표는 그제야 정희연의 페로몬이 어떤 꽃인지 깨달았다. 치자였다. 지독히 향기로운 만큼 빨리 져 버리는 꽃. 겨울을 보지 못하고 금세 죽어 버리는 꽃이었다. 고작 페로몬 향기 따위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연 대표는 얇은 피부를 가볍게 빨아들이며 가슴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대로 정희연의 잠옷 바지를 끌어 내렸다. 침대 위에 늘어진 오메가는 갑작스럽게 주어지는 자극에 눈을 깜박일 뿐, 알파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대표님.”

“응, 희연아.”

정희연을 다리 사이에 가둔 남자는 한쪽 무릎을 움직이며 다정하게 답했다. 그는 작은 몸을 손쉽게 끌어 올리며 오메가의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옷, 얘기 하셨잖아요. 아, 잠깐…!”

연 대표는 옷부터 벗을까, 하고 묻던 자신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비스듬히 웃었다. 알파의 손이 망설임 없이 정희연의 속옷 위를 문질렀다. 앞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희연아. 그건 네 얘기지 내 얘기가 아닌데.”

“아니, 아니에요! 아니야!”

속옷을 벗기려는 걸 알았는지, 정희연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표정을 보아 하니 반말을 내뱉었다는 자각도 없는 것 같았다.

“으응. 아니야?”

연 대표는 상관없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벗겨 냈다. 그리고는 정희연이 다리를 붙이지 못하도록 한쪽 오금을 잡아 제 어깨에 걸쳤다. 히트인 이상, 발정기를 해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에 꼭 삽입 섹스만 있는 건 아니었고.

연 대표는 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풀어 둔 페로몬을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다. 오메가의 발정기를 단순히 페로몬만으로 진정시킬 수는 없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희연의 성기는 여전히 꼿꼿하게 서 있었다. 연 대표는 제 밑에 깔린 오메가를 핥듯이 바라보며 인내했다.

“아으, 흐….”

성기가 공기에 노출된 탓인지, 정희연은 조금 전보다 더 가파르게 헐떡거렸다. 눈매와 뺨은 발갛게 물들었고 크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선홍색 혀가 보였다. 헐떡일 때마다 마른 듯 늘씬한 배가 위로 솟았다 꺼지길 반복했다.

“젖꼭지만 분홍색인 줄 알았더니….”

신음을 막기 위해 입가를 가린 자그마한 손이 보였다. 습관처럼 만지작거리는 손톱은 옅은 분홍색이었다. 하얀 몸에서 색채가 있는 곳이라고는 저 손톱과 입술, 젖꼭지가 전부인 줄 알았더니 성기 역시 옅은 분홍색이었다. 게다가….

연 대표는 매끈한 성기를 쥐며 느릿하게 말꼬리를 늘였다.

“애기라서 그런가…. 우리 희연이 백자지네?”

남자는 가느다랗게 웃었다.

“대표님, 흣…!”

“우리 애기 자위할 줄도 모르고.”

연 대표는 방문을 연 순간 마주했던, 엎드린 다리 사이로 들어간 하얀 손을 떠올리며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벗겨 낸 속옷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으나 그게 전부였다. 제대로 만질 줄도 모르는지 속옷 안은 건드리지도 않은 것 같았다. 자위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의미였다.

“희연아.”

“흐으, 네?”

연 대표는 정희연의 손을 끌고 와 성기를 붙잡게 만들었다. 정희연은 놀란 듯 어깨를 뒤틀었으나 알파의 손이 그 위로 겹쳐지자 헐떡이며 얌전하게 힘을 풀었다.

“잡고 이렇게 움직이는 거야.”

아래로 떨어지는 시선이 사납기 그지없었다. 정희연은 딱딱하게 굳은 연 대표의 얼굴을 바라보며 성기를 쥔 손을 서툴게나마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이 얽혀 있는 덕분에 사실상 그 스스로가 아닌, 연 대표의 악력을 따라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다. 성기로 생소한 자극이 몰리자 뒤쪽이 움찔거렸다.

“아으, 응, 읏.”

남자의 얼굴이 한층 더 견고해짐과 동시에 발갛게 물든 뺨과 하얀 몸을 내려다보는 시선 역시 집요해졌다. 정희연은 연 대표가 이끄는 대로 휩쓸렸다. 성기를 맞잡은 손이 조금씩 빨라지며 끝에서 프리컴이 질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흐으, 대표, 님….”

처음 주어지는 감각이 낯설어 허리가 움찔움찔 튀었다. 어렴풋이 제 페로몬에 섞여 드는 다른 페로몬이 느껴졌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알파 페로몬은 처음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예민하게 곤두선 감각이 한층 더 날카로워지면서 온몸이 잘게 떨렸다.

뇌가 진탕 녹아드는 기분에 남자의 페로몬이 어떤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정희연은 간신히 연 대표를 부르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지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남자의 커다란 손가락이 정희연의 귀두 끝을 문질렀다.

“하아, 아!”

허리가 위로 튀어 오르며 고개가 저절로 옆으로 돌아갔다. 정희연은 온몸을 떨며 허덕거렸다. 흘러내린 눈물이 콧대에 고이는 감각조차 선득하게 다가왔다.

“우리 애기는 자위할 줄도 모르면서 몸은 왜 이렇게 예민하지.”

연 대표는 짧게 웃으며 옆으로 돌아간 뺨을 잡아 저를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거리낌 없이 눈물을 핥아 마셨다. 억제제를 먹었음에도 슈트 안에서 좆이 팽팽하게 발기한 게 느껴졌다. 그는 옷을 벗지 않았다. 정희연에게 짧게 입 맞추며 퍼붓는 페로몬의 양을 조금씩 늘릴 뿐이었다.

“흐읏, 흐….”

간신히 호흡을 고른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히트 사이클의 의미가 이제야 완전히 이해되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알파 페로몬이 짙어질수록 이성이 휘발되며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아주 잠깐 누그러진 성욕을 반대 형질의 페로몬이 부추기기 시작했다.

“대표님, 하고 싶어요.”

문득 좋아하는 사람과 자고 싶은 게 당연하다던 말이 떠올랐다. 합의되지 않은 관계는 강간이라는 말이 그 뒤를 이었지만, 대표님이 좋으니 상관없었다.

“넣, 흐윽…. 넣어 주세요.”

연 대표는 잇새 사이로 욕을 짓씹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자위도 안 해 본 주제에 뭘 넣어 달라는 건지. 정희연이 섹스의 의미는 제대로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뭘 넣어.”

“대표님 자지요…?”

남자의 뺨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누가 그런 단어 알려 줬어?”

“알파들은, 흣, 그런 단어 좋아, 한다고 했는데….”

정희연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쳤는지 뻔해, 연 대표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위도 안 해 본 오메가 앞에서 자지니 백자지니 지껄인 그가 할 만한 말은 아니었지만.

“대표님 거, 흐윽…. 넣고 싶어요.”

“하, 씨발.”

연 대표 욕설을 내뱉으며 슈트로 손을 뻗었다. 곧 슈트 재킷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킷 없이 셔츠와 베스트로 둘러싸인 몸은 그 자체만으로도 단단해 보였다.

“정희연.”

그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갇힌 오메가를 빤히 쳐다보며 소매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자 남자의 팔뚝이 조금이나마 드러났다. 손목에서 팔로 이어지는 힘줄이 팽팽하게 곤두서 있었다. 잔뜩 힘이 실린 몸과 달리 느긋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연 대표는 페로몬을 조금 더 풀어 내 제 밑에 깔린 오메가에게 퍼붓기 시작했다.

“하으, 흐….”

노골적인 페로몬 샤워에 정희연은 가쁜 신음을 내뱉었다. 아무런 접촉이 없는데도 온몸이 덜덜 떨리며 전신이 흥분으로 물들었다. 정희연은 서툴게 제 성기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 손에 쥐고 있던 성기인데도, 손등을 뒤덮는 알파의 체온이 없어서인지 생경한 느낌이 들었다. 발씬거리는 구멍에서 왈칵하고 애액이 쏟아졌다. 페로몬에 절기 시작한 눈을 들어 연 대표를 응시하자 자신을 내려다보며 시계를 풀고 있는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철컥, 들릴 리 없는 금속성의 소리가 예민해진 귓가를 파고들었다. 시계가 남자의 손목에서 떨어져 나가는 소리였다.

“오늘 울겠네.”

연 대표는 사납게 웃으며 정희연의 구멍 주변을 손가락으로 덧그렸다. 알파의 성기를 받아들일 준비를 마친 구멍이 애액을 질질 흘려 대고 있었다. 회음과 구멍 위를 헤집자 진득한 액체가 기다란 손가락 위로 주욱 늘어졌다. 애액과 함께 흘러 나온 페로몬이 짙어지면 짙어질수록 알파의 뺨이 단단하게 굳었다.

“아! 흣!”

생경한 감각에 정희연은 움찔 어깨를 떨었다. 피부 위가 아닌 몸 안으로 다른 사람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왈칵 쏟아지는 애액 덕분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좁은 구멍을 뚫고 들어오는 감각이 낯설어 몸이 경직됐다.

그러나 긴장도 잠시였다. 히트 사이클을 맞은 오메가는 알파의 침입을 달가워했다. 녹진하게 풀리기 시작한 구멍이 길고 커다란 손가락을 조금씩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몸 위로 덧씌워지는 페로몬과 내벽을 벌리는 알파의 손가락은 첫 히트를 맞이한 오메가의 몸을 달구기에 충분했다.

“하.”

연 대표는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움직였다. 자그마한 구멍이 잘도 받아먹는다 싶었지만, 다른 것까지 받아 내기에는 무리였다. 오메가인 데다 우성이니 쉽게 다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연 대표는 집요하게 정희연의 반응을 살폈다.

정상적인 히트가 아니니 조심해야 한다는 김지원의 충고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흐으, 읏, 응!”

아무리 페로몬이 쌓였다지만, 감도가 지나치게 좋았다. 연 대표는 눈썹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역시나, 두 번째부터는 안쪽을 쑤시는 것도 여의치 않았다. 열 때문에 뜨거워진 내벽이 손가락을 빨아들이듯 달라붙었다. 안이 너무 좁은 탓에 달라붙은 내벽들을 벌리는 데에도 제법 공을 들여야 했다. 억제제를 먹었는데도 흥분이 몰려와 뒤를 쑤시는 손목에 힘이 실렸다.

“대표, 아, 흐….”

“응, 희연아.”

연 대표는 정희연의 눈가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대답했다. 무해하고 순한 인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열에 들뜬 모습을 보니 야하기 짝이 없었다. 이 꼴을 다른 알파가 봤을지도 모른다고. 남자는 헛웃음을 삼켰다.

“다 된 것 같, 흣. 대표님 거…. 넣어 주세요.”

고작 손가락 두 개를 받아먹은 게 전부였다. 다 됐을 리가 없었다. 연 대표는 눈을 좁혀 웃으며 느릿하게 손목을 돌렸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열 오른 신음이 섞여 들었다.

“손가락도 마음대로 못 움직이겠는데… 하, 뭘 넣어.”

“으읏, 응, 아!”

손가락 두 개도 빠듯했다. 정희연이 서툴게 쥐고 있던 성기에서는 정액이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처음인 데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에 몸의 반응이 빠른 듯했다. 연 대표에게는 차라리 다행이었다. 정희연이 오래 버틸수록 그는 오래 인내하지 못할 테니까.

오늘 당장 이 자그마한 몸에 좆을 쑤셔 댈 생각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정희연의 첫 히트를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끝내는 것이었다. 끝까지 할 생각이었다면 억제제를 먹지도 않았을 터였다. 억제제를 먹은 상태에서는 페로몬을 조절하는 게 배로 어려웠으니까.

“흑, 윽, 왜, 왜애….”

정희연은 알파 페로몬에 완전히 전 채 칭얼거리듯 물었다. 연 대표가 자꾸 거절의 말을 하자 서운함이 몰려들었다. 뒤를 쑤시는 감각도, 온몸을 매만지는 손길도 좋았지만, 손가락 대신 다른 걸 넣고 싶다는 욕구가 꾸역꾸역 머릿속을 잠식했다.

임신해야 한다는 생각과 임신하고 싶다는 욕구가 머릿속에서 마구 뒤엉켰다. 세뇌된 배움의 여파인지 혹은 순수한 욕구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연 대표와 이어지고 싶다는 갈망뿐이었다.

“후회하면 어떡하려고.”

연 대표는 잔뜩 벌어진 구멍 주변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달래듯 속삭였다. 히트 사이클을 처음 맞이한 오메가였다.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 모를 게 분명했다. 설사 그게 아니라 하더라도 이 상태로 삽입할 생각이 없었다.

손가락 두 개도 겨우 받아먹고 있는데 높은 확률로 다칠 게 분명했다. 연 대표는 본인의 섹스 습관이 다정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이성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막상 시작하면 어떻게 될지 몰랐다. 상대가 풋내나는 페로몬으로 자신을 충동질하는 오메가라면 더더욱.

제 손안에서 연약하게 흔들리는 오메가를 상처 입힐 수는 없었다. 첫 히트에서 알파에게 강간당하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기도 했고. 아무리 원한다고 하지만 히트에 휩쓸려 하는 말인지, 순수한 바람인지 알 수 없었다. 정희연의 마음을 짐작하고 있긴 했으나, 분명한 건 이 섹스와 상황은 미리 합의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희연은 성적인 일에 무지했다. 섹스를 모르지는 않으나 그마저도 잘못된 가치관이 주입된 상태였다. 무엇보다 고작 페로몬 따위에 휩쓸려 무작정 넣어 달라 조르는 오메가를 안으면 정 회장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셈이나 다름없었다. 상대가 선하의 알파가 아닌, 연우범 자신이라는 점에서 다르긴 하겠지만.

연 대표는 제 본성의 근간인 폭력성과 잔혹성을 믿지 않았다. 그것들을 믿지 않으니 더더욱 정희연에게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다. 침실에 들어서는 순간, 옷부터 벗을까 하고 물은 것도 어디까지나 정희연을 향한 제안이었다. 연우범은 이곳에서 옷을 벗을 생각이 없었다.

“후회 안 해요. 흐윽, 대표님 좋아요.”

“오늘은 안 돼.”

정희연은 몰려드는 속상함에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연 대표에게 거절당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순수한 쾌감으로 흘러나오던 눈물에 서운함이 조금씩 섞여 들었다.

“흐아, 아, 아!”

서운함과 별개로 몸은 쉽게 달아올라 하얀 액체를 뿜어냈다. 사정을 확인한 남자는 천천히 손가락을 빼냈다. 손등과 손목을 타고 흘러내린 애액이 새하얀 셔츠 소매를 적셨다. 그는 고요한 눈길로 정희연의 상태를 가늠하기 위해 눈을 접었다. 슈트 안에서 발기한 성기가 오메가의 페로몬에 꿈틀거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흣, 읏…. 대표님, 흑, 안아 주세요.”

연 대표는 이를 드러내며 가늘게 웃었다. 다른 알파였다면 달려들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인내심과 자제력을 끌어모아 참는 중이라 몸이 붙는 건 피하고 싶었다. 그러나 정희연은 팔을 뻗었고, 남자는 자그마한 몸을 안아 올릴 수밖에 없었다.

“하…. 애기가 안아 달라면 안아 줘야지.”

정희연에게 약해서 큰일이었다.

연 대표의 품에 안긴 오메가는 여전히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그는 힘없이 열린 입술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기울여 입을 맞췄다. 뜨거운 혀가 엉켜 들었다.

“으응….”

정희연이 얕게 신음했다. 연 대표는 삽입 욕구를 키스로 대신하려는 것처럼 집요하게 축축한 입 안을 탐했다. 뜨거운 점막을 제멋대로 거칠게 휘저으며 다른 손으로는 하얀 엉덩이를 만지작거렸다. 정희연은 자세가 불편한 듯 뒤척이더니 아예 연 대표의 목에 양팔을 감으며 남자의 한쪽 허벅지 위로 자리를 잡았다.

타액이 뒤섞이는 척척한 소리와 함께 완벽하게 갖춰 입은 셔츠가 구겨지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정희연은 본능적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엉덩이 밑을 불편하게 만들던 존재가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흐읏, 응….”

페로몬에 전 오메가는 슈트 아래로 발기한 성기에 대고 엉덩이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얇은 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꺼운 살덩어리가 점점 딱딱해지는 게 느껴졌다. 정희연은 몽롱한 눈으로 허리를 흔들며 연 대표를 응시했다. 엉덩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에 힘이 실렸다.

“대표님…. 흣, 좋아요. 해요. 네?”

성의 없게 베스트 단추를 풀어낸 남자의 손이 느릿하게 위쪽을 향했다. 시퍼렇게 핏줄이 곤두선 손은 이번에는 단정하게 맨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연 대표는 품에 안고 있던 몸을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트리며 사납게 웃었다.

“하…. 우리 애기가 이렇게 졸라서 어떡하지. 응?”

남자에게서 흘러나온 페로몬이 짙은 꽃향기를 집어삼키며 짓눌렀다. 연 대표는 반쯤 벌어진 정희연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길고 단단한 손가락이 붉은 혀를 만지작거렸다.

“아침부터 여기 처박고 싶은 거 참고 있는데.”

미끄러지듯 입 안으로 들어온 손가락은 정희연이 느끼는 곳을 죄다 거칠게 문지르며 지나갔다.

“다른 새끼들처럼 좆질 할 생각이었으면 억제제도 안 먹었어.”

“읏, 흐읏. 아흐으….”

“대신 희연아.”

한 손으로 정희연의 머리를 받친 남자는 다른 손으로 제 셔츠 단추 몇 개를 풀어냈다.

“히트 끝날 때까지 봉사해 줄게.”

***

연 대표는 잇자국이 가득한 목덜미를 가만가만 매만졌다. 욕조에 앉아 있는 그는 완전히 옷을 갖춰 입은 채였다. 값비싼 슈트가 물에 젖어 피부 위로 척척하게 달라붙었으나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는 제게 기댄 자세로 잠들 듯 기절한 몸을 쓰다듬으며 고요히 침묵했다.

삽입 욕구가 들 때마다 하얀 살을 짓씹어 놨더니 정희연의 피부에서는 성한 곳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온몸이 잇자국과 키스 마크투성이였다. 무엇보다 목덜미가 볼만했다. 조절한다고 조절했는데, 가느다란 목이 온통 얼룩덜룩했다.

남자는 느른한 한숨을 내쉬며 물에 젖은 정희연을 만지작거렸다.

“…….”

무언가를 고민하듯 오랜 시간 침묵하던 연 대표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뚝뚝 물이 떨어지는 남자의 품에는 색색거리며 잠든 오메가가 안겨 있었다. 욕조에서 나온 남자는 잠든 오메가의 몸을 꼼꼼히 닦은 뒤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씻길 때부터 몸을 닦을 때까지, 처음 해 보는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섬세한 손길이었다.

연 대표가 들어선 곳은 정희연의 방이 아닌, 자신의 침실이었다. 그는 빛 한 점 새어 들어오지 않는 침대 위에 기절한 몸을 내려 두고 이불까지 덮어 준 뒤 뒤돌아섰다.

정희연을 안아 옮기기 위해 젖은 슈트 위에 샤워 가운을 걸친 차림이었다. 남자는 욕실로 들어서자마자 곧바로 가운을 벗어 던졌다.

“씹.”

반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는 욕설을 내뱉으며 고개를 내렸다. 물에 젖은 슈트 바지 너머로 흉흉하게 서 있는 성기의 형체가 뚜렷했다.

반쯤 마른 머리카락이 기다란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싸늘한 무표정을 한 채 느긋하게 움직이는 남자는 벌거벗은 상태나 다름없었다. 드레스 룸의 은은한 조명이 다부진 피부 위로 쏟아져 내리며 남자의 몸을 고스란히 비췄다. 견고한 근육들이 알파의 움직임을 따라 섬세하게 꿈틀거렸다. 드러난 몸 곳곳이 흉터투성이였으나, 오래된 상처인 듯 그 흔적은 옅었다.

밑바닥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생애를 증명하듯 날카롭고 무자비한 흔적이었다. 특유의 분위기 때문인지 혹은 위협적으로 흘러나오는 페로몬 때문인지, 흉측해 보일 법한 상처는 남자와 지나칠 정도로 잘 어울렸다. 눈가의 흉터처럼 피사체를 완벽해 보이도록 만드는 역설적인 결점이었다.

남자의 완벽은 그의 결점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였다.

“하.”

연우범은 헛웃음과 함께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멋모르고 날뛰는 어린애도 아니고, 이 나이 먹고 자위할 줄은 몰랐는데. 차가운 물 아래에 서서 샤워한 탓에 피부가 선득했으나 아래쪽에 고인 열기는 여전했다. 그는 여전히 반쯤 발기한 성기를 흘긋 쳐다본 뒤 옷을 꺼내 입었다. 성욕이 들끓어 담배라도 피울 심산이었다. 잠든 오메가를 깨물 수는 없으니 흡연이라도 하는 수밖에.

드레스 룸에서 나온 남자는 곧바로 나가는 대신 침실에 들렀다.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침실에서 느껴지는 생동감이라고는 지쳐 잠든 숨소리가 전부였다. 어둠에 익숙한 알파는 어렵지 않게 걸음을 옮겼다. 사이드 테이블이 있을 만한 곳을 건드리자 손끝에 익숙한 물체가 닿았다. 리모컨을 누르자 침실의 커튼이 소리 없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새벽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었으나 겨울이라 밤이 긴 탓에 창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나 잠든 오메가의 얼굴을 비추기에는 어둠을 가르며 들어온 달빛으로도 충분했다.

새벽이 고인 푸른 달빛이 잠든 정희연의 얼굴을 고요하게 비췄다.

“…….”

연우범은 손을 뻗어 정희연의 뺨을 툭 건드렸다. 젖살 오른 뺨은 여전히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성가신 손길일 텐데도 정희연은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괴롭힌 탓에 부어오른 입술 사이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뱉을 따름이었다.

뺨을 누르던 손가락이 당연하다는 듯 입술로 내려가 닿았다.

“으응….”

잠든 오메가가 눈썹 앞머리를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덕분에 입술을 누르던 손가락이 안으로 미끄러지며 혀를 짓눌렀다. 손가락의 주인만이 우연인지 고의인지 알아차릴 수 있는, 모호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남자는 손가락을 물리지 않았다. 제 손가락이 들어간 자그마한 입술을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히트를 겪은 뒤 잠에 빠진 오메가의 혀는 따끈따끈하고 축축했다. 오늘, 아니 정확히 말하면 어제 아침부터 연우범을 충동질하던 살덩어리였다. 그 순간을 떠올린 듯 나른하게 풀려 있던 알파의 페로몬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그러나 남자는 곧바로 제 페로몬을 갈무리하며 느긋하게 손가락을 물렸다. 기껏 가라앉힌 성욕이 언제 고개를 들이밀지 몰랐다.

“…….”

연우범은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의 페로몬으로 히트를 진정시키는 건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온몸을 물고 핥고 빨았으니 단순히 페로몬을 이용했다고 하기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정희연의 히트는 단순한 히트 사이클이 아니었다. 페로몬이 과다하게 쌓여 있는 비정상적인 상태에서 벌어진 사고였다. 과다하게 쌓인 페로몬은 높은 확률로 역치를 넘는 흥분을 불러일으킬 테고, 그 상태에서의 섹스는 독이나 다름없었다. 무리하는 걸 모르고 무작정 조르기만 할 테니까. 우성이라 쉽게 다칠 가능성은 적었지만, 다칠 가능성 자체를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러트와 히트는 쉽게 말하면 발정기다. 몸이 달아오르고 상대방을 유혹하는 페로몬을 흘리는 것도 동물의 발정기와 하등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페로몬의 농간이었다. 러트나 히트가 섹스로 귀결되는 것 역시 페로몬을 뒤집어쓰는 가장 쉽고 원초적인 방법이 몸을 섞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로 말하면 섹스가 없더라도 반대 형질의 페로몬이 섞이면 발정기가 끝난다는 소리였다. 대부분은 상대의 혹은 자신의 페로몬에 굴복해 섹스로 이어지니 그런 경우가 적을 뿐.

연우범이 섹스 없이 정희연의 히트를 진정시킬 수 있었던 것도 페로몬 샤워를 시키다시피 제 페로몬을 쏟아부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견 간단하고 인간적으로 느껴지나,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본능과 다름없는 발정기를 억지로 억누르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제아무리 페로몬 조절에 능통하다지만 연우범 역시 섹스 없이 페로몬을 쏟아 내는 것보다 정희연을 안는 게 훨씬 쉽고 간편했다. 어쨌거나 섹스라는 건 페로몬 조절을 위해 심혈을 기울일 필요가 없으니.

그런데도 굳이 번거로운 방법을 택한 건 제가 주워 왔으니 그 책임을 지기 위해서였다. 약속대로 예뻐해 주기만 할 생각이기도 했고.

연우범은 정희연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한 발 물러섰다. 파란 달빛이 쏟아지며 하얀 오메가의 얼굴을 선명하게 비췄다. 언제 흥분해 섹스를 졸랐냐는 듯 말간 얼굴이었다.

“정희연….”

입에 붙은 이름을 부르며 남자는 몸을 조금 움직였다. 그림자가 생기며 달빛에 드러났던 하얀 얼굴이 어둠에 가려졌다. 연우범은 어둠에 잠식된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요하게 숨을 죽였다. 정희연은 시시때때로 빛에 물들었고, 그럴 때마다 그는 자그마한 오메가를 자신이 속한 세계로 끌어당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무어라 명명할 수 없는 충동이었다.

“너한테는 위험할 것 같은데, 희연아.”

연우범은 잠든 오메가를 향해 자못 다정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정희연을 집요하게 쳐다보던 그는 천천히 물러섰다. 동시에 하얀 나신 위로 푸른 빛이 스며들었다. 꽉 막힌 어둠 속에서 잠을 청하는 그와 달리 정희연은 항상 밝게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잠자리에 들고는 했다.

남자가 그답지 않게 침실의 커튼을 연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래야 정희연이 편하게 잘 테니까.

기척 없이 걷는 게 익숙한 남자는 한 방울의 소음도 남겨 두지 않은 채 침실을 나섰다. 늘 어둠에 잠겨 있던 방 안에는 하얗게 흘러드는 새벽빛과 함께 깊이 잠든 오메가만이 남겨졌다.

이곳은 우범 지대였으나 침대를 차지한 주인은 정희연이었다.

거실로 나온 연 대표는 그대로 발코니로 향하려던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를 발견한 남자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팔을 뻗어 소파에 떨어진 카디건을 집어 올렸다. 정희연의 애착 담요나 다름없는, 자신의 옷이었다.

코를 묻자 페로몬 냄새가 감돌았다. 연 대표 자신의 페로몬이 아닌, 겨울에는 맡을 수 없는 진한 치자꽃 냄새였다. 그는 제 페로몬에 절다시피 한 오메가를 떠올리며 그대로 카디건을 걸쳤다. 모처럼 페로몬을 완전히 개방한 상태니, 입고 있으면 그대로 냄새가 밸 터였다. 그걸 또 정희연이 입을 테고.

밖으로 나가자 싸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연 대표는 추위 따위는 느껴지지 않는 사람처럼 무심한 얼굴로 담배를 꺼내 들었다.

간신히 억누른 성욕을 흡연 욕구로 대신할 생각이었다. 금속끼리 맞부딪치는 소리를 뒤이어 잘 뻗은 입술 사이로 하얀 담배가 물렸다. 붉은 불티가 휘날리며 어두운 밤하늘을 살라 먹었다. 매캐한 연기가 몸 안을 파고드는 감각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제 침실에서 자고 있을 정희연을 떠올리자 자연스레 강서의와의 만남이 꼬리를 물었다. 선하 그룹의 사생아, 강 전무를 만난 건 정 회장과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남자는 그와의 대화를 곱씹었다.

‘대표님께서 원하실 만한 걸 준비해 뒀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표정이 제법 자신만만하더라니. 연 대표는 강서의가 내민 자료를 훑으며 느른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재밌네.’

‘재밌으시다니 다행입니다.’

‘난 솔직히 강 전무님이 못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강서의는 불쾌해하는 대신 히죽 웃었다.

‘뭐, 그렇게 생각하실 줄 알았습니다.’

‘선하 먹고 싶은 욕심이 크긴 한가 봐?’

‘욕심 크게 부려서 나쁠 게 있나. 혹시 모르죠, 내가 사장 자리에 앉은 뒤에 회장까지 오를지? 당장 눈앞에 있는 연 대표님이 그 산증인 아니신가?’

서류를 훑어 내리던 남자는 눈동자만 굴려 맞은편의 강서의를 응시했다. 드물게도 흠칫 몸을 떠는 상대를 바라보며 연 대표는 가늘게 웃었다. 길게 늘어지는 입술이 선뜩했다.

‘경우가 다르지, 강서의 전무님.’

‘…….’

‘난 그냥 그 새끼를 찢어 죽이고 싶었던 거거든. 이 자리에 오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서슬 퍼런 눈동자와 달리 다정하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지금의 지우(馶遇)는 그 결과일 뿐이고. 목적과 결과는 엄연히 다르지 않나. 안 그래요?’

‘뭐….’

‘아무튼, 강 전무님께서 성의를 보여 주셨으니 나도 보여 드리는 걸로 하죠.’

생각보다 길어진 대화였으나 결과는 퍽 만족스러웠다.

연 대표는 담배를 눌러 끄며 시꺼먼 어둠을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내뱉은 담배 연기가 달빛처럼 하늘을 휘저었다.

사냥의 시간이었다.

어쩔까, 고민하던 남자는 담배 냄새를 없앤 뒤 조용한 걸음으로 들어섰다. 첫 히트였으니 옆에 있어 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드물게 침대에서 옷을 갖춰 입은 남자는 정희연의 옆에 눕는 대신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어 앉았다. 뻗어 나간 팔이 잠든 오메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으응….”

그 손길이 나쁘지 않았는지 정희연이 꼼지락거리며 몸을 붙여 왔다. 때마침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받았겠지만, 옆에서 잠든 이가 마음에 걸렸다. 연 대표는 정희연의 머리를 헝클이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린 귓바퀴를 느리게 만지작거렸다. 앓는 소리를 낼 뿐, 깊게 잠든 눈꺼풀은 눈동자를 보여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깊이 잠든 상태를 확인한 남자는 천천히 손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응.”

- 대표님. 남 사장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새벽에 걸려 왔으니 급한 용건이겠거니 생각하던 차였다. 과연 기다리던 소식이었다.

- 물건 찾았다고 합니다.

“알았어.”

- 어떻게 할까요? 지금 당장 옮기는 데에는 문제없습니다.

남자의 시선은 정희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밖으로 흘러나오는 소리가 신경을 갉작였는지, 곧게 뻗은 미간이 슬쩍 좁혀졌다. 연 대표는 잠든 오메가를 토닥이며 조용한 목소리로 통화를 잘랐다.

“자세한 건 문자로 보내.”

- 예? 문자 말입니까?

김철우가 의문을 표했다. 그도 그럴 게 연 대표는 일을 비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 비효율에는 급한 일을 전화 대신 다른 수단으로 처리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애기가 자고 있어서.”

다소 뻔뻔한 대답이었다. 한참 침묵을 유지하던 김철우가 말을 더듬으며 통화를 끝냈다.

-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남자는 속속들이 도착하는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핸드폰에서 흘러나온 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비췄다. 잠깐 화면 위를 머물던 손가락이 매끄럽게 움직여 마지막 문장을 완성했다.

이유태 한 번 더 조져서 애기 과거 좀 알아내.

정 회장과 살게 된 건 다섯 살부터라고 했다. 그럼 그전까지는 부모와 살았다는 얘기겠지. 시선을 내려 정희연을 쳐다보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눈이 마주쳤다. 긴 속눈썹이 하늘하늘 움직이며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대, …표님.”

잠에 취한 듯 잔뜩 뭉개진 목소리가 남자를 불렀다.

“응, 희연아.”

“같이 자요….”

옆에서 자는 건 곤란할 것 같은데. 연 대표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정희연은 희게 웃었다.

“하….”

결국 연 대표는 헛웃음과 비슷한 한숨을 내쉰 뒤 침대에 누웠다. 정희연은 안아 달라는 듯 자연스레 품을 파고들었다. 옆으로 누워 자그마한 오메가를 끌어안자 보송보송한 머리카락이 가슴에 닿았다.

“희연아.”

정희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잠든 듯 고른 숨을 내뱉을 뿐이었다.

“잘 자.”

연 대표는 고개를 내려 동글동글한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창을 통해 쏟아지는 새벽빛이 정희연을 지나 그에게로 쏟아졌다.

낯선 빛이었다. 또한 낯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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