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 - 4화 (5/20)

1

녹슨 쇠에서는 낡은 비린내가 났다. 정희연은 무릎을 당겨 앉은 자세 그대로 벽에 얼굴을 기댔다. 사실 벽이라고 부르기에도 여의치 않은 공간이었다. 얼기설기 얽힌 철물 사이로 머리카락이 삐져 나갔으니까. 듬성듬성한 철장을 온전한 벽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터였다.

뜬장 안에 갇힌 오메가는 무릎을 꼬옥 그러쥔 손과 제 발끝을 향해 멀거니 시선을 던졌다. 추위에 노출된 맨살이 뺨처럼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꼬물꼬물 움직인 그는 왼손을 오른쪽 소매 안에, 오른손을 왼쪽 소매 안에 구겨 넣었다. 살을 에는 추위는 그대로였지만, 맨살이 노출되는 것보다는 한결 나았다.

정희연은 발갛게 물든 코를 훌쩍거리며 발가락을 움직였다. 거친 칼바람에 노출된 발등이 따가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살결이 조금씩 부르트며 미약한 통증까지 느껴졌다. 쇠로 만든 철장을 그대로 밟고 있어 더 아릿하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추워….”

몸을 한층 더 옹송그리면서도 나가려고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몸을 구긴 맞은편에 위치한 철장의 문에는 보란 듯이 커다란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이곳에서 나가려면 누군가 문을 열어 줄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벌에 익숙해진 오메가는 울지도 않았다. 그저 기다릴 뿐이었다. 누군가가 와서 자물쇠를 풀어 주기를.

처음 뜬장에 갇힌 게 열두 살 무렵이었다. 그때는 울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희연은 무릎을 조금 더 가까이 끌어안았다. 철장이 주는 불안정함 때문에 몸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그렇지 않아도 늘씬한 몸이 더 자그맣게 보였다.

자그마한 몸을 가둬 둔 뜬장은 단어 그대로 공중에 떠 있는 철장이었다. 바닥이 땅에 닿지 않으니 바람이 불 때마다 철장은 미묘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땅과 그리 높게 떨어져 있지는 않았지만, 심리적인 불안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차라리 꽉 막힌 벽이 있다면 조금 나을 텐데, 바닥까지 구멍이 숭숭 뚫린 철장은 사람의 몸을 긴장시켰다. 편안히 앉을 수도, 편안히 기댈 수도 없는 끔찍한 공간이었다.

정희연은 천천히 시간을 셈했다. 아직 초가을이니 오늘은 늦게 꺼내 줄지도 모른다. 한겨울이나 한여름에는 갇혀 있는 시간이 짧은 편이었지만, 봄이나 가을에는 이곳에서 버텨야 하는 시간이 제법 길었다. 어찌 됐든 모든 건 할아버지인 정 회장의 심기에 달려 있었다.

“내가 또 잘못했나 봐.”

뜬장에 갇힌 걸 제 탓으로 여기며 정희연은 힘없이 기대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떼어 냈다. 그는 멀거니 발끝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지탱할 힘도 없다는 듯 무릎 위로 툭 이마를 기댔다. 무릎에 이마를 붙이면 자세가 더 불안정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이러고 싶었다. 그에게는 사람의 체온이 필요했다. 그게 설령 정희연 자신의 체온이라 하더라도.

쌀쌀하게 느껴지는 바람과 고립된 외로움을 견디며 죄 없는 오메가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 위해 노력했다. 무슨 잘못을 했는지 도통 떠오르지 않았으나 벌을 받는 걸 보면 제가 잘못한 게 분명했다. 잘못하지 않았다면 뜬장에 갇히지도 않았을 테니까.

벌을 받는 게 정희연이니, 잘못한 사람도 정희연일 뿐이다.

“…….”

정희연은 차가워진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이곳에 끌려오기까지의 하루를 회상했다.

평소처럼 같은 시간에 일어났고, 아침을 먹었고, 공부하고, 점심 먹고…. 그 이후에 우연히 정 회장과 마주쳤다. 노인은 정희연을 품평하듯 훑어보더니 쯧, 혀를 차며 그대로 뺨을 후려쳤다. 귓가를 파고드는 이명 때문에 정희연은 노인의 호통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아빠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뺨 한 대에 그대로 넘어졌고, 그 길로 이유태에게 질질 끌려 덩그러니 방치된 뜬장에 들어온 참이었다.

“회장님 화나셨구나…. 내가 잘못했네.”

정희연은 뜬장에 갇힌 이유를 납득했다. 제 존재가 또다시 회장님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그게 잘못의 전부였다.

고개를 조금 돌려 무릎에 뺨을 기댔다. 하필 부어오른 뺨이었다. 퉁퉁 부은 살이 무릎에 짓눌려 아팠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정희연은 굳이 얼굴을 돌리는 대신 고요히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을 응시했다.

추위로 몽롱해진 시야 안으로 아름답고 커다란 정원이 불쑥 들어왔다. 그가 평생을 살아온 집은 평수가 넓었고, 정원은 그보다 훨씬 넓었다. 열아홉까지 담장 안에 감금된 채 살아왔으면서도 미치지 않은 건 그나마 이 정원 덕분일지도 모른다.

미개한 뜬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름다운 정원이었지만, 정희연은 그 불협화음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벌을 받기 시작할 때부터 너무나도 당연하게 뜬장이 정원 한쪽에 자리 잡고 있던 탓이었다.

정원 바닥에는 가을이 다가오는 걸 알려 주기라도 하듯 단풍잎과 은행잎이 잔뜩 깔려 있었다.

툭.

정희연은 물끄러미 떨어져 내리는 낙엽을 응시했다. 노란색 은행잎이 하늘하늘 떨어져 맨발등에 닿았다. 그는 은행잎이 떨어진 발을 조금 꼼지락거렸다. 제법 부산스러운 움직임이었으나 노란 잎은 용케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정희연은 소매에 숨겨 둔 손을 꺼내 은행잎을 주워 들었다. 사뭇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으나 노란 나뭇잎은 자그마한 접촉 하나에 금세 바스러지고 말았다.

깜짝 놀라 무의식적으로 손을 턴 순간, 자세가 무너졌다. 정희연은 그대로 뜬장 위로 넘어졌다. 녹슨 비린내가 얼굴을 향해 달려들었다.

“……!”

그는 화들짝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구멍이 숭숭 뚫린 뜬장에 갇혀 있었는데 지금은 사방이 가로막힌 공간이었다.

“어….”

뜬장과 비슷한 녹슨 쇠 냄새가 코끝을 찔러 댔다. 잔뜩 굳은 소금 냄새도 함께였다.

바다 냄새.

정희연은 벽을 더듬었다. 울퉁불퉁한 벽의 차가운 온기가 손끝을 타고 그대로 전해져 왔다. 한참 손을 더듬거리던 그는 주변을 살피며 시선을 내렸다. 맨발이던 발에 어느덧 운동화가 신겨 있었다. 하얀 양말도 함께였다.

“아.”

정희연은 어렴풋이 꿈을 꾸고 있음을 눈치챘다. 그가 갇힌 공간의 이름도 이제는 알고 있었다. 뜬장이 아닌 화물용 컨테이너였다. 또다시 컨테이너에 갇힌 오메가는 나가기 위해 벽을 두드리는 대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리고는 뜬장에서처럼 무릎을 끌어안았다.

평소 같았으면 벌이 끝나길 바라며 아무렇지 않게 기다렸을 텐데, 문득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님…. 연우범.”

정희연은 연 대표의 이름을 혀끝에서 굴렸다. 꿈에서 깨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보다 남자의 이름을 부르는 편이 나았다. 처절하게 발버둥 쳐도 꿈이란 마음대로 깰 수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차라리 연 대표의 이름을 부르며 남자를 떠올리는 게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이 될 것 같았다.

기다림은 길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불안이 점점 더 크게 몸집을 불리기 시작했다. 기다리는 행위 자체는 익숙했으나 연 대표를 기다리는 것은 결코 익숙하지 않았다.

끼기기기긱-.

귀를 찢을 듯한 소음과 함께 시야 끝에 닿아 있던 문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훤한 달빛이 쏟아지며 공기를 부유하던 소금기가 고스란히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구둣발 소리가 그 뒤를 따라 점점 가까워졌다. 갑작스레 들이찬 빛 때문에 눈이 부셨으나 정희연은 눈꺼풀을 내리까는 대신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거리낌 없이 뜬장을 짓밟는 소리가 이어지더니 익숙한 인영이 흐릿한 시야 안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대표님.”

정희연은 연 대표를 불렀다. 그의 부름에 비스듬히 고개를 숙인 남자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못 알아보시면 어떡하지? 불현듯 걱정이 밀려왔다. 정희연은 무릎을 감싼 손에 힘을 실으며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응, 희연아.”

남자의 다정한 목소리가 이름을 불렀다. 정희연은 꼭 깨물었던 입술을 벌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쥐가 난 것도 아닌데 발가락 끝이 간질거렸다.

“이리 와.”

두꺼운 팔이 허리를 감싸 안았다. 정희연은 습관처럼 연 대표의 품에 안겼다. 남자의 코트에 코를 박자 익숙한 체취가 느껴졌다. 희미한 담배 냄새.

“집에 가야지.”

집에 가자는 말이 듣기 좋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익숙한 차 앞에 서 있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을 홀로 내버려 둔 채 문을 닫는 대신, 곧바로 차에 올랐다. 출발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희연은 그를 데리러 온 알파의 얼굴을 힐긋 쳐다보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희연아. 손잡아 줘?”

“…네.”

픽 웃은 남자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에 손가락을 얽어 왔다. 뜬장에서 바라 마지않던, 사람의 체온이었다. 정희연은 체온이 맞닿은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며 잠이 몰려왔다.

“흣.”

눈을 떴을 때는 몸이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

정희연은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물방울이 잔뜩 들러붙은 것처럼 시야가 온통 불분명했다. 졸음기인가 싶어서 눈가를 문지르고 싶었지만, 손이 잡혀 있는 탓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재차 눈을 깜박이자 눈꼬리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뺨을 타고 내려가는 미지근한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선득했다.

“희연아.”

드물게도 사납게 들리는 연 대표의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이던 정희연은 자신이 입을 벌린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목소리가 가슴에서 막혀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깼어?”

옭아매던 손이 떨어져 나가더니 땀에 젖은 정희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몸이 흔들리는 감각은 여전했다.

“아, 흐….”

신음처럼 들리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하아…. 벌써 잠들면 어떡하지.”

연 대표의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나태하고 느른한 속삭임이 아닌, 무언가를 갈급하듯 거칠게 곤두선 목소리였다.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남자의 등을 긁었다. 연 대표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슈트 대신 맨살결이 느껴졌다.

“……?”

머리가 핑핑 울리고 배 속에서 열기가 고이는 느낌이었다. 어딘가가 쾅쾅 부딪치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도 애기네.”

“흣, 대표, 님….”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정희연은 고개를 마구 도리질했다. 호흡이 모자라 절로 입술이 벌어졌다.

“키스해 줘?”

커다란 손이 열 오른 뺨을 붙잡았다.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달아오른 입술들이 순식간에 맞물렸다.

“헉!”

정희연은 상체를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창 안에 담긴 야경이 눈에 들어왔다. 창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꿈에서 방금 끌려 나온 탓에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콩닥거리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귓가에 선명히 들릴 정도였다.

그는 가슴 위에 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거울을 보지 않았어도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억제제가 듣지 않던 때보다 더 열이 오른 듯했다. 밭은 호흡과 콩콩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면 차가운 물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았다.

“아.”

침대에서 내려온 순간 하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리 사이가 젖어 있었다.

“어떡하지.”

정희연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잠을 자다 실례를 한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졌다.

불을 켠 그는 침대부터 확인했다. 다행히 시트는 자기 전과 다를 바 없이 보송보송하고 깨끗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정상적인 침대 상태를 확인한 정희연은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샛노란 수면 양말부터 벗은 뒤 잠옷 바지를 벗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속옷만 조금 젖어 있었다.

“어떡하지….”

젖은 속옷을 발견한 순간 그러잖아도 홍조가 깃든 뺨이 더 붉게 달아올랐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닌데 정희연은 황급히 물을 틀어 속옷을 빨기 시작했다. 손이 워낙 느린 탓에 빨래가 생각처럼 쉽지 않았지만 섬세한 기술이 필요한 일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어떡하지…?”

정희연은 괜스레 했던 말을 반복하며 속옷을 비틀었다. 어린애들처럼 실례를 한 건 아니지만 창피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깨끗하게 빤 속옷을 힘껏 짜고 허리를 세운 순간 거울 속의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얼굴은 물론 귀와 목까지 울긋불긋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누가 봐도 못된 짓을 하다가 걸린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하….”

한숨을 폭 내쉰 그는 속옷이 잘 마르도록 걸어 둔 뒤 잠옷을 완전히 벗었다. 기분이 찝찝해 샤워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한참 동안 샤워를 하고 나와 다시 잠옷을 챙겨 입었다. 속옷은 물론 잠옷과 수면 양말 전부 새것이었다. 괜히 침실을 한 번 둘러본 정희연은 증거를 은폐하려는 사람처럼 벗어 둔 잠옷과 양말을 세탁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어떡하지.”

미지근한 물에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여태 얼굴이 붉었다. 정희연은 했던 말을 또다시 반복하며 침대 위를 쳐다봤다. 잔뜩 흐트러진 이불을 보고 있자니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결국 그는 침대에 눕는 대신 창가로 도망갔다.

“…….”

열을 식힐 겸,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자 겨울의 찬 기운이 스며들었다. 꿈속에서 겪은 상황이 계속해서 머릿속을 쫓아다니는 통에 당황스러웠다. 대표님을 상대로 그런 나쁜 생각을 하다니. 야한 꿈을 꿨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건 둘째치고, 연 대표를 향한 죄책감이 치솟았다. 정희연은 창가에 콩 이마를 부딪쳤다.

아무리 멋모르고 자랐다지만, 밤새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았다. 정희연은 이 현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론상으로는.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꿈을 꾼 적이 없어 당혹스러웠다. 자연스러운 생리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야한 꿈을 꾼 적도, 그 때문에 잠에서 깨어난 적도 없었다. 자위를 해 본 적도 없는 몸이었다. 그럴만한 기분이 든 적도 없었을뿐더러 무엇보다 성욕이라는 욕구는 알파와 베타에게만 한정되는 줄로만 알았다.

“잡종이라서 그런가…?”

정희연 자신을 잡종이라 칭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잡종이기 때문에 더 엄격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정 회장이 말한 교육이란 오메가로서 지녀야 하는 올바른 가치관에 대한 것이었다.

“내가 이상한 거면 어떡하지….”

오메가가 야한 꿈을 꾸다니. 혹시 잡종이라서 그런 게 아닐까 심각히 걱정스러워졌다. 오메가들도 이런 현상을 겪는 게 정상인지, 아니면 제가 잡종이라 드물게도 이런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정희연은 마구잡이로 범람하는 당혹감과 불안, 부끄러움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이유태에게 배운 것들을 머릿속으로 뒤적였다. 알파나 남성체 베타들이 꿈을 꾸며 흥분할 때가 있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기억을 더 뒤적여 보았으나 오메가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집사님께서 말하지 않은 부분이니, 잡종인 저에게만 일어나는 못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아, 대표님께서 집사님한테 배운 거 잊어버리랬는데.”

이런 기본 지식조차 믿지 말아야 하는 걸까, 고민스러워졌다.

정희연은 또다시 폭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이 문제를 대표님께 여쭤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묻기 위해서는 꿈 얘기를 해야 할 텐데, 생각만 해도 낯뜨거워지는 내용이었다.

정희연은 다시 창가에 콩 이마를 부딪쳤다. 대표님께 죄송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희연아.”

정희연은 뺨을 건드는 손길에 몸을 뒤척였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웃음기 섞인 목소리가 귓가에 닿고 나서야 그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직선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 부셔 인상을 찌푸려야만 했다.

“대표님…. 아침이에요?”

“응. 아침이에요.”

정희연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연 대표 등 뒤에 놓인 침대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어디 누워 있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밤새 창가를 서성거리다가 침대도 아닌 창문 밑에서 잠든 모양이었다. 콩, 이마를 박은 기억과 함께 어젯밤의 사건들이 저절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뺨이 발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스무 살 되자마자 늦잠 자기로 했어?”

“아….”

연 대표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스무 살이라는 단어가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해가 바뀌었으니, 오늘부터 스무 살이었다.

“아직도 애기네. 늦잠 자고.”

연 대표는 일어나라는 듯이 멍하니 앉아 있는 오메가를 향해 팔을 뻗었다. 습관처럼 그 손을 잡으려던 정희연은 퍼뜩 움직임을 멈췄다. 꿈속에서 들었던 말이 방금 연 대표가 한 말과 겹쳐진 탓이었다. 죄송함에 대표님을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정희연은 슬쩍 남자의 손을 피하며 느릿하게나마 몸을 일으켰다.

“저 이제 애기 아닌데….”

꼬박꼬박 대답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희연은 알파의 집요한 시선을 피하느라 연 대표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으응. 애기 아니야?”

“네.”

평소보다 미묘하게 늘어진 말투 역시.

식사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자 직접 부르러 온 모양이었다. 주방으로 나가자 벌써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처음 보는 음식에 정희연은 물끄러미 그릇을 내려다봤다. 뽀얀 국물에 하얀 떡이 가득 담겨 있었고 그 위에는 고명이 잔뜩 얹어져 있었다. 노란색 계란 지단, 하얀색 계란 지단, 주황색 당근, 갈색 고기와 초록색 파가 정갈하게 고운 빛을 띠었다.

“예뻐요.”

“예뻐?”

떡국에도 예쁘다고 말하는 오메가를 보며 연 대표는 턱을 괴었다.

“대표님이 만드셔서 예쁜가 봐요.”

연 대표는 대답 대신 턱을 괸 자세 그대로 정희연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평소였으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을 텐데, 젖살 오른 얼굴은 떡국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정희연이 일부러 시선을 피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알파의 새까만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잘 먹겠습니다.”

티 나게 눈을 피하면서도 정희연은 예의 바르게 감사 인사를 건넸다. 예쁜 고명을 섞은 뒤 뽀얀 국물 안으로 숟가락을 집어넣자 어슷하게 썰린 떡이 그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국물과 떡을 함께 입에 넣고 씹자 고소한 맛이 느껴졌다. 같이 씹히는 당근과 계란 지단도 맛있었다.

“희연아.”

“네?”

연 대표는 한발 물러서기로 하며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희연이 나이만큼 먹으려면 스무 그릇은 먹어야겠네.”

정희연의 시선이 그제야 연 대표를 향했다. 떡국을 먹은 하얀 뺨이 부지런히도 오물거렸다.

“저는 그렇게 많이 못 먹는데….”

농담을 진심으로 받아들인 듯, 미간이 슬쩍 찌푸려진 얼굴이었다. 몇 그릇이나 더 먹을 수 있을까, 진지하게 걱정하는 눈치였다.

“원래 떡국 한 그릇 먹어야 한 살 느는 거야. 몰랐어?”

“네? 나이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드는 건데요…?”

연 대표가 나지막하게 웃고 나서야 정희연은 그가 자신을 놀렸음을 깨달았다.

“저 이제 스무 살이에요.”

“으응. 스무 살이야?”

“네.”

정희연은 꼬박꼬박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건.”

“하고 싶은 거요?”

“응.”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정희연은 입 안 가득 넣은 떡국을 열심히 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지난번에도 대표님과 비슷한 대화를 나눴지만, 그때와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연 대표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잘 모르겠는데…. 대표님이랑 있어서 다 좋아요.”

순한 대답에 연 대표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대답은 평소와 다르지 않은데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랐다. 분명 뭔가를 숨기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저 조그맣고 하얀 오메가가 자신에게 숨기는 게 있다는 사실이 남자의 신경을 갉작였다.

“정 회장은?”

“회장님이요? 회장님이 왜요?”

“악감정 없어?”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회장님에게 품고 있는 개인적인 감정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보다는 다른 생각이 머릿속을 넘칠 듯 범람하고 있었다. 정희연은 그 생각을 떨쳐 버리기 위해 떡국을 먹는 척, 슬쩍 연 대표의 시선을 피했다. 남자가 자꾸 고개를 기울이는 탓에 계속해서 눈이 마주쳤다.

평소였다면 괜찮았겠지만, 간밤의 꿈 때문에 죄송한 마음이 들어 똑바로 쳐다보기가 어려웠다.

“희연아.”

연 대표는 느긋하게 정희연을 불렀다.

“네?”

티 나지 않게 눈을 피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눈치 빠른 남자에게는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다.

“왜 나 안 봐?”

노련한 알파는 남수현이 들으면 역겹다고 할 법한, 다소 가증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대표님 예쁘다며. 이제는 안 예뻐?”

가당치도 않은 물음에 정희연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진심으로 예쁘다 생각하는 대표님께서 섭섭한 얼굴로 묻고 있었다. 속상하다는 듯 서운해 보이는 얼굴이라, 정희연은 크게 당황했다.

“네? 아니요. 대표님 예뻐요….”

“예쁘다면서 왜 눈도 안 마주칠까.”

정희연은 숟가락을 들고 있던 손에 꼭 힘을 실었다.

“우리 애기 예쁜 거 좋아하잖아.”

“네. 좋아해요. 대표님도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안 봐줘.”

숟가락에 꼬옥 힘이 실린 것처럼 입술을 깨무는 잇새에도 꼬옥 힘이 실렸다. 정희연은 눈만 깜박이며 연 대표를 응시했다. 대표님 때문에 곤란하기 짝이 없었다.

긴 속눈썹이 주인의 불안정한 감정을 따라 마구 팔랑거렸다. 정희연은 차를 마시며 힐긋 연 대표를 훔쳐봤다. 연 대표는 예쁨 운운한 이후부터 대놓고 정희연을 쳐다보는 중이었다. 한 사람에게만 불편한 침묵이 오갔다.

결국 정희연은 찻잔을 쥔 손을 꼼지락거리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핑계라도 둘러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대표님.”

“응, 희연아.”

“어제….”

“어제?”

고민하듯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이 하늘하늘 올라서더니 이내 대각선 방향에 앉은 알파를 향했다.

“왜 저한테 뽀뽀하셨어요…?”

말간 얼굴이었다.

연 대표는 정희연이 건넨 단어를 혀끝에서 굴렸다.

뽀뽀.

그가 정희연에게 행한 행위치고는 지나치게 귀엽고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단어였다. 기실 오늘 새벽에 있었던 일은 폭력이나 다름없었다. 젖살이 채 빠지지 않은 뺨을 누르고, 멋모르는 입술을 벌리고, 담배 연기를 불어넣지 않았던가.

연 대표에게는 폭력의 범주에도 들어가지 못할 만큼 미약한 강제성이었으나 아무것도 모르는 오메가에게는 분명한 폭력이었다. 상대방이 폭력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더라도.

정희연과 눈이 마주친 순간 연 대표를 충동질한 감정은 뽀뽀라는 단어의 사랑스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집착, 소유욕, 갈망, 갈급함. 연 대표에게는 익숙하나 정희연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난폭한 감정들이었다.

“희연아.”

연 대표는 정희연의 이름을 불렀다. 여느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말간 오메가에게만 흘러나오는 다정한 목소리는 날카로운 충동을 숨기기에 충분했다.

“네?”

“그게 뽀뽀 같아?”

정희연이 뽀뽀라고 칭한 남자의 행위는 일종의 착취였다. 정희연의 숨결을 앗아 가고 겁탈한, 폭력과 다름없는 착취.

“네? 네.”

정희연은 찻잔의 따스함을 손바닥으로 감싼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입술과 입술이 닿았으니 뽀뽀가 맞았다. 그 행위를 입맞춤이나 키스라고 표현하기에는…. 정희연은 머릿속에서 점점 더 진해지는 행위들을 황급히 떨쳐 냈다. 간신히 눌러 둔 꿈이 자꾸만 새어나오려 하고 있었다. 정희연은 다른 생각을 떠올리기 위해 연신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아. 그럼…. 입맞춤…?”

뽀뽀에서 나아간 입맞춤이라는 단어에 연 대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정희연은 알파가 일방적으로 강제한 행위를 그런 간질간질한 단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오메가를 속이고 있었으나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하고 싶어서 했는데.”

연 대표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접었다. 정희연에게 제 행동이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 알려 줄 생각이었으나 오늘 아침의 삐딱해진 심기가 다른 방향을 종용했다. 정희연이 제 손을 피할 때부터 비틀어진 심기였다.

눈매가 가늘어짐과 동시에 연 대표의 입꼬리가 느릿하게 올라갔다. 의도적인 표정 변화가 사나운 성정의 알파를 한결 느른해 보이도록 만들었다. 연우범은 그렇게 제 본심을 감췄다. 익숙하고 교묘하게.

“저한테…. 뽀뽀하고 싶으셨어요?”

“응.”

직설적인 대답에 정희연은 조금 당황해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고 싶으면 그렇게 입술을 맞춰도 되는 걸까?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이나 동물들에게도 뽀뽀하는 걸 보면 괜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럼…. 저도 해도 돼요?”

순진한 물음에 연 대표는 뜻밖의 말을 들은 사람처럼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남자의 입꼬리가 한층 더 깊게 패었다.

“하고 싶어?”

“아직은 잘 모르겠는데…. 나중에 하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요.”

“희연이가 하고 싶으면 해야지.”

연 대표의 가늘게 늘어진 입술이 달콤한 거짓말로 사람을 유혹하는 뱀처럼 속살거렸다. 언뜻 보기에는 퍽 다정하게 느껴지는 얼굴이 은밀하게 교활함을 감췄다.

“지금 할래?”

그 와중에 정희연을 당황스럽게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순한 눈매에 매달린 속눈썹이 마구 팔랑거렸다. 정희연은 은근슬쩍 연 대표의 시선을 피하며 손에 들린 찻잔을 입술에 가져갔다. 차가 적당히 식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뜨거웠으면 입술이 데었을지도 몰랐다.

“희연아. 왜 대답이 없어. 지금 할래?”

“지금은 괜찮아요.”

“으응. 지금은 괜찮아? 그럼 애기 하고 싶을 때 해.”

정희연은 향긋한 차를 마시며 마음을 다잡았다. 대표님께 여쭤볼 게 또 있었다.

“그럼 대표님은 계속 뽀뽀하실 거예요?”

“응. 난 계속 뽀뽀할 건데.”

자꾸 뽀뽀라는 단어를 내뱉는 게 웃긴지, 연 대표가 뽀뽀라는 단어를 길게 늘어트렸다. 다른 단어를 써야 하는 걸까, 고민하던 정희연은 대체어를 찾지 못하고 손만 꼼지락거렸다.

“대표님. 그럼…. 다른 사람한테는요?”

커피를 마시기 위해 뻗어지던 알파의 팔이 뚝 움직임을 멈췄다. 짧은 멈칫거림이었으나 연 대표의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에는 충분했다. 유려한 선을 그리던 눈매가 삽시간에 굳어졌다.

“누구한테.”

“네?”

“누구한테 할 건데, 희연아.”

대놓고 찌푸려진 눈썹에도 정희연은 평온한 얼굴로 연 대표를 응시했다. 회장님이나 집사님께서 저런 표정을 지었다면 죄송하다고 말씀드렸겠지만, 대표님은 달랐다. 정희연은 연 대표가 제게 화를 내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아차렸다.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시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우선은 궁금한 것부터 묻는 게 먼저였다.

“네? 저 말고…. 대표님이요.”

“나?”

“네.”

나름대로 심각히 고민하며 던진 질문인지 하얀 뺨이 볼록 솟아올랐다. 연 대표는 소파 팔걸이에 천천히 팔꿈치를 세웠다. 턱을 기댄 남자는 정희연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왜. 내가 아무한테나 뽀뽀하고 다닐 것 같아?”

남자의 물음에 정희연의 머릿속에는 물음표가 떠다니기 시작했다. 아무한테나 뽀뽀하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 같은데, 왜 제게는 하고 싶을 때마다 하겠다고 말씀하셨는지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럼 저는…. 대표님한테 아무나가 아니에요?”

정희연은 순수한 의미로 물었다. 자신에게는 대표님이 아무나가 아닌 것처럼, 저 역시도 대표님께 아무나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었다.

“희연아.”

알파의 눈매가 곡선을 그렸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동자가 어딘가 위험해 보였다.

“걱정하지 마.”

“…….”

“내가 누구한테나 싸게 굴지는 않거든.”

정희연은 조금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덕분에 표정 없는 얼굴에 드물게도 금이 갔다. 여태껏 답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지금은 가슴이 살짝 답답한 것 같기도 했다. 사람들과 섞여 지내다 보니 어느 정도 말귀를 알아듣게 됐지만,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말은 여전히 그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눈밭을 바로 앞에 두고도 발을 멈춘 건 나름의 심각한 고민 때문이었다.

그래서 대표님은 다른 사람에게 뽀뽀를 하신다는 걸까, 안 하신다는 걸까. 저를 비싼 값에 팔아 치울 거라던 이유태의 말을 떠올려 보면 비싼 게 좋은 의미인 것 같기는 했다. 싸게 굴지 않는다는 건 비싸다는 말인데, 그게 만약 좋은 의미라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헷갈렸다.

가만히 머리를 굴려 봤지만, 궁금증에 대한 답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정희연은 나중에 김지원에게 물어봐야지, 생각하며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을 털어 냈다. 지금은 처음 서 보는 눈밭에 집중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래야 잡념이 사라질 테니까.

현재 그가 발을 딛고 서 있는 곳은 연 대표의 집 근처 공원이었다. 마침 쉬는 날이라 잔뜩 쌓인 눈을 밟고 싶어 연 대표와 함께 나온 차였다. 늘 차를 타고 다니던 터라, 운동화가 살짝 파묻힐 정도로 높게 쌓인 눈을 밟는 건 처음이었다.

소복하게 쌓인 눈이 너무 예뻐서 밟기 아까웠으나 정희연은 천천히 한 발 내디뎠다. 발이 폭 하고 빠지며 신발 자국이 남았다.

“희연아.”

“네?”

“손잡아 줄까.”

미끄러울 것 같아 걱정스럽긴 했지만, 정희연은 고개를 저었다. 당분간은 대표님과의 접촉을 피해야 할 것 같았다. 뽀뽀를 해서 이상한 꿈을 꾼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 탓이었다.

“괜찮아요.”

눈밭을 밟느라 정신이 없어 연 대표의 눈이 가느스름해지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연 대표는 정희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전화를 받았다.

“응.”

- 대표님.

김철우의 목소리를 듣자 하니 기다리던 소식인 듯했다.

- 물건 위치 대충 가닥 잡혔다고 합니다.

“남 사장님께서 좆빠지게 뛰어다니셨나 보네.”

빨리 해결하겠다고 하더니, 남수현이 바꿔치기당한 컨테이너의 행방을 찾아낸 모양이었다.

- 보고 작성해서 올릴까요.

“아니. 찾고 나서 보고 올려.”

- 알겠습니다.

짧게 통화를 마친 남자는 고요히 정희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아주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정희연이 혼자서 어디까지 갈지,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었다.

공원에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정희연은 통화하는 연 대표의 목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소복소복 밟히는 눈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덕분에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던 고민거리가 금세 자취를 감췄다.

연 대표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자 여기저기 세워진 눈사람들이 보였다. 신기했지만, 딱히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 대표님께 돌아갈까 싶어 몸을 살짝 돌린 순간, 화단에 주르륵 놓인 눈사람들이 정희연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소담히 눈이 쌓여 있어야 할 화단에 오리 모양 눈사람들이 일렬로 줄 서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예쁘게 만들었지? 가만히 살피자 누군가가 오리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

다른 사람을 함부로 쳐다보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호기심이 들었다. 오리 모양의 노란색 도구로 눈을 쓸어 모으자 오리 모양 눈사람이 뿅 하고 나타났다. 정희연은 조금 멀리 떨어진 연 대표의 기척을 신경 쓰며 조심스레 화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오리 모양이었다.

호기심 어린 시선을 느꼈는지 눈사람을 만들던 여자가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어린 학생 같았다.

“해 보실래요? 재밌어요.”

“제가 해 봐도 돼요?”

“네.”

정희연은 이제 제법 멀리 떨어진 연 대표를 한 번, 오리 눈사람을 한 번 번갈아 보다가 학생이 내민 노란색 도구를 받아 들었다.

“여기 눈 쌓인 거 있죠? 그냥 이렇게 모아 주면 돼요.”

그녀는 양손을 주먹 쥔 뒤 가운데로 모으는 시늉을 하며 설명했다. 정희연은 감사합니다, 인사하며 그녀의 설명대로 팔을 움직였다. 눈이 부족했는지 눈사람 모양이 어딘가 엉성했다.

“아, 아뇨. 이렇게요.”

도구를 가져간 학생이 시범을 보이듯 천천히 눈사람 만드는 법을 보여 주었다. 그녀는 매우 신이 난 얼굴로 정희연에게 다시 도구를 건넸다. 재밌는 모양이었다.

“아, 이해했어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희연은 세 번 만에야 제대로 된 오리 모양 눈사람을 만들 수 있었다.

“재밌죠? 더 만드실래요?”

“아니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빌려주셔서 재미있었어요.”

정희연이 꾸벅 고개를 숙이자 학생 역시 인사를 받듯 꾸벅 고개를 숙이고는 눈이 쌓인 다른 화단으로 사라졌다. 정희연은 마지막에야 제대로 만들어진 오리 눈사람을 빤히 응시했다. 동글동글한 모양에서 특히 부리가 귀여웠다. 그렇게 한참 쳐다보길 몇 분, 그는 제일 예쁘게 만들어진 오리를 조심스레 들어 손바닥 위에 올려 두었다.

대표님 보여 드려야지, 생각하며 등을 돌리는데 순식간에 발이 미끄러지며 몸이 흔들렸다.

“어…!”

무의식적으로 화단을 짚었지만, 발목이 꼬여 바닥으로 넘어질 듯했다. 손바닥에 고이 올려 둔 오리가 눈밭 위로 산산이 흩어지는 게 먼저였다. 그다음은 자신일 터였다.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눈을 꼬옥 감았다. 넘어지지 않고 버틸 만큼 운동 신경이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그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대로 눈밭에 처박힐 뻔한 순간, 두꺼운 팔이 허리를 꽉 감싸 안았다.

“희연아.”

“어….”

“그러게 대표님 손 잡으랬잖아.”

순간적인 힘이 허리를 낚아챈 덕분에 발은 물론 몸 전체가 살짝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대로 넘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몸이 붙들리자, 꼭 감겨 있던 눈이 반사적으로 뜨였다. 정희연은 무의식적으로 제 허리를 감싼 연 대표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코트 때문에 남자의 맨살이 닿지는 않았지만, 팔에 힘이 실린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연 대표는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정희연을 내려 주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발이 땅에 닿은 뒤에도 그의 팔을 붙든 조그마한 손은 떨어질 줄을 몰랐다.

“놀랐어?”

짧은 물음에 정희연이 고개를 위로 젖혀 그를 응시했다. 놀란 것치고는 무덤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연 대표는 허리를 끌어안지 않은 손으로 헝클어진 희연의 갈색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었다. 쓰다듬을 받는 강아지처럼 정희연은 고분고분하게 눈을 감았다. 뭘 할 줄 알고 순순히 눈을 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남자의 손가락이 속눈썹을 길게 문지르고 난 뒤에야 정희연은 눈밭으로 고개를 내렸다.

“아…. 부서졌다. 아까 어떤 분께서 집게 같이 생긴 도구 빌려주셔서 저도 눈사람 만들었거든요. 제일 예쁜 눈사람 대표님께 보여 드리려고 했는데….”

당연하게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눈사람은 폭신폭신한 눈밭 위에 떨어져 완전히 산산조각 나 있었다.

“으응. 보여 주고 싶었어?”

“네. 다른 건 잘 못 만들었는데….”

연 대표는 정희연의 눈길이 향한 곳으로 시선을 보냈다. 일렬로 서 있는 오리 눈사람 군단 끄트머리에 다소 허술한 오리 두 마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정희연을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팔만 뻗어 맨 끝에 있는 오리를 건드렸다. 남자의 커다란 손에 비해 하염없이 작아 보이는 눈사람이었다. 톡 튀어나온 부리를 손끝으로 건드리자 품에 안겨 있던 정희연이 움찔 몸을 떨었다.

“누구랑 그렇게 다정하게 대화했어, 희연아.”

“아. 저거 만드는 도구 빌려주신 분께서 어떻게 하는지 알려 주셨어요. 대화는 별로 안 했는데….”

정희연은 연 대표가 눈사람을 쓰러트릴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연 대표는 피식하고 웃으며 손을 떼어 냈다.

“또 무슨 얘기 했어?”

“더 만드실 거냐고 저한테 물어봤는데 괜찮다고 했어요. 오리예요. 귀엽죠.”

“응. 귀엽네.”

남자의 눈에는 눈 덩어리일 뿐이었으나, 그는 정희연에의 장단에 맞춰 대답했다.

“눈 처음 밟아 봤는데 소리 좋아요. 밤에 밟으면 더 잘 들릴 것 같아요.”

“밤에 나오고 싶어?”

연 대표는 정희연을 살피며 물었다. 시선을 내리자 자신의 턱 끝에 닿을까 말까 한 오메가가 오른쪽 손목과 손바닥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까 넘어지며 화단을 붙잡더니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음…. 잘 모르겠어요. 밤에는 더 조용하니까 소리가 더 잘 들릴 것 같다는 생각만 했어요.”

“잘 모를 때는 해 보면 돼.”

“네에.”

연 대표는 오메가의 허리를 붙잡고 있던 팔을 느릿하게 떼어 냈다. 그리고는 정희연의 오른쪽 손등을 제 손바닥으로 덮었다. 끌어안긴 자그마한 몸이 어깨를 움츠렸다. 연 대표는 정희연이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는 생채기가 난 손바닥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

정희연이 얕게 신음을 내뱉었다. 손을 뒤집어 살피자 피가 살짝 비쳤다.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쓸린 탓에 꽤 아플 듯했다. 흉터가 남을 정도는 아니어도, 소독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희연아. 소독하려면 들어가야겠는데.”

아쉬웠는지 하얀 뺨이 살짝 솟아올랐다. 그러나 정희연은 제 손바닥을 내려 보더니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연 대표는 잡혀 있던 손을 놓으며 한발 물러섰다. 교묘한 움직임이었다.

정희연은 연 대표에게 잡혀 있던 손목을 조금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앞서 걷기 시작했다. 연 대표는 고개를 조금 기울였을 뿐, 굳이 정희연을 붙잡지 않았다. 언제까지 저를 부르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 나가던 오메가가 또다시 비틀거렸다. 손만 다친 줄 알았더니, 걷는 모양새를 보니 발목에도 무리가 간 듯했다. 절뚝이는 걸음이 아슬아슬하기 짝이 없었다.

연 대표는 이번에도 성큼성큼 다가가 가볍게 정희연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 품에 들어오는 오메가가 고개를 뒤로 젖혀 그를 응시했다. 새하얀 눈밭과 지나치게 잘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왜 손잡아 달라고 안 해, 희연아.”

“아…. 손잡으면 안 되는데.”

“왜?”

정희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지 않아도 대표님께 안긴 순간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이 콩콩 뛰어 혹시라도 그 소리를 들킬까 봐 간신히 떨어져 나왔는데 또다시 대표님께 안긴 자세가 되고 말았다. 조금 전처럼 얼른 빠져나와야 하는데 손까지 잡아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응?”

연 대표가 어르듯이 물었으나 정희연은 이번에도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대표님이 또 야한 꿈에 나올까 봐 신체적 접촉을 피하고 싶다고 솔직히 털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매끄럽게 대화 주제를 돌릴 재주도 없었다. 결국 정희연은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요.”

“그냥?”

“저도 이제 성인이니까….”

“우리 희연이 아직 애기잖아.”

연 대표는 정희연이 뭐라고 대꾸하기도 전에 공중에서 달랑거리는 손가락을 툭 건드렸다.

“그러니까 넘어지지.”

맞닿은 손가락이 움츠러들었다. 차가운 공기 탓에 손이 얼었는데도 이상하게 손끝은 빨갛게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정희연은 맨발이 된 발을 꼼지락거렸다. 손바닥에는 네모난 반창고가 붙여진 채였다.

“희연아.”

직접 상처를 소독하고 밴드까지 붙여 준 남자가 툭, 욕조를 건드리며 그곳에 걸터앉도록 했다. 들어오는 길에 살짝 절뚝거린 탓에, 발목까지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네.”

정희연은 얌전하게 남자의 말을 들으며 욕조에 엉덩이를 붙였다. 연 대표가 몸을 기울이더니 한쪽 무릎을 세운 자세로 꿇어앉았다. 정희연의 종아리 뒤로 손을 뻗은 남자는 약하게 절뚝거리던 다리를 잡아챘다. 마침내 가느다란 발목이 무릎을 세운 연 대표의 허벅지 위로 올라왔다.

정희연은 욕조를 짚은 손을 꼼질거렸다. 움직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몸이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졌다.

“아파?”

연 대표는 한 줌도 되지 않을 법한 발목뼈를 손가락 끝으로 만지며 물었다.

“괜찮아요.”

정희연은 발목이 약한 편이었다. 도망갈까 봐 일부러 약하게 키웠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정 회장의 사업 방식을 생각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도 아니었다. 제대로 뛰어 본 적도, 담장 안에서 뛸 만한 일도 없었을 테니 일부러 약하게 키웠다는 말은 사실일 터였다.

“우리 희연이는 발목이 한 줌이네.”

품평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정희연은 저도 모르게 발목에 힘을 실었다. 연 대표에게 붙잡힌 발을 빼고 싶었으나, 발목을 쥔 손에 악력이 실린 탓에 마음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대표님께 맨발을 보이고 있는 상황이 조금 부끄럽게 느껴졌다. 보이지 말아야 할 수치스러운 곳도 아닌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발도 작고.”

이어지는 말에 정희연은 괜히 발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여기는 부었는데.”

연 대표는 한 손에 들어오는 발목을 뭉근하게 쓸어내렸다. 확실히 조금 부은 것 같았다.

“저 괜찮은데….”

“저녁까지 지켜보고 계속 아프면 김지원한테 연락하고.”

“정말 괜찮은데…. 원래 자주 이래요.”

정희연은 황급히 말을 주워 삼켰다. 하루 종일 잘 거라던 김지원의 말이 떠오른 탓이었다. 휴일인데 이런 사소한 일로 연락할 수는 없었다.

“자주?”

“네.”

되묻는 말에 정희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 통증쯤이야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걷지 않고 조금 쉬다 보면 괜찮아질 통증이었다.

그보다는 대표님께서 손을 좀 놔 주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늘 밤에도 이상한 꿈을 꿀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연 대표는 정희연을 빤히 쳐다보다가 손을 물렸다. 남자의 커다란 손이 자그마한 복사뼈를 스치며 떨어져 나갔다. 머뭇거림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으나 어딘가 게으르게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자그마한 접촉에 하얀 맨발이 움찔 떨렸다.

“걸어 봐.”

연 대표는 정희연의 발을 내려놓은 뒤 몸을 일으켰다. 알파의 집요한 시선이 오메가의 발목에 달라붙었다. 정희연은 천천히 일어서서 조심스레 욕실 안을 걷기 시작했다. 살짝 절뚝거리기는 했지만, 크게 아프지는 않은 듯, 평온한 얼굴이었다.

“대표님.”

정희연은 욕조에서부터 방으로 이어지는 문까지 걸어간 뒤 괜찮다는 뜻으로 연 대표를 불렀다.

“응, 희연아.”

대답하는 목소리가 지척이 아닌, 안쪽에서 들려왔다. 정희연은 연 대표의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느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남자의 시선은 정면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정희연은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벌렸다.

“희연아.”

남자의 시선이 그제야 정희연에게 달라붙었다. 연 대표가 살살 눈웃음을 치듯 눈꼬리를 접었다. 한껏 즐거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거 뭐야?”

남자가 턱짓하는 곳에는 어젯밤, 깨끗하게 빨아서 널어 둔 속옷이 걸려 있었다.

“속옷인데요…?”

당황해 머릿속이 새하얗게 질린 와중에도 정희연은 착실하게 대답했다.

“응. 속옷이 왜 여기 있을까.”

“그게….”

“우리 희연이….”

“아니….”

“대표님 생각하면서 자위했어?”

연 대표가 예의 다정한 얼굴로 물었다.

상냥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노골적인 질문에 정희연은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다.

“네…?”

평소의 또렷한 대답과 달리 목소리가 살짝 흔들렸다. 짧은 대답에서 당황스러움이 잔뜩 묻어 나왔다.

“대표님 생각하면서 자위했어?”

연 대표는 정희연이 당황한 걸 알면서도 똑같이 되물었다. 여전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아….”

정희연은 말을 흐리며 눈을 끔벅거렸다. 저를 바라보며 예쁘게 웃는 남자의 뒤로 오늘 새벽에 빨아 둔 속옷이 보였다. 당황스러움에 평소보다 가쁘게 숨을 들이마시는 찰나, 돌연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히끅거리는 소리에 연 대표가 눈을 접어 웃었다.

“아닌데…. 아니에요.”

연 대표의 눈꼬리가 조금 더 휘어지고 나서야 간신히 부정하는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정희연은 도망도 가지 못하고 습관처럼 양손을 모아 손가락을 매만졌다. 손은 물론이고 손톱에까지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꿈을 꾸다 일어났을 때도, 대표님께 맨발을 보였을 때도 부끄러웠지만, 지금은 부끄러움을 넘어서서 창피하기까지 했다. 히끅, 딸꾹질이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으응. 아니야?”

딸꾹질까지 내뱉는 반응에 연 대표는 정희연의 부정이 사실임을 눈치챘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왜 직접 빨았어, 희연아. 세탁해 주잖아.”

정희연은 드물게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입술은 평소처럼 꼭 다물려 있었지만 뺨은 붉게 달아올랐고 긴 속눈썹은 반쯤 내리깔렸다 올라오길 반복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올곧게 연 대표를 향한 채였다. 작게 딸꾹질을 내뱉을 때마다 자그마한 몸이 얕게 튀어 올랐다.

“아…. 그냥.”

“그냥 그랬어?”

“네에….”

정희연은 말끝을 흐렸다. 거짓말을 하려니 콕콕 양심에 찔렸다. 난생처음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에 연 대표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뺨처럼 살짝 부푼 입술이 달싹였다. 입술에 꾹 힘을 실었지만, 가슴 안쪽에서 자꾸만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튀어나오는 딸꾹질이 꼭 제가 한 거짓말 같아 참아 보려 애썼으나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딸꾹질까지 하고. 놀랐어?”

연 대표는 여전히 다정한 낯이었다. 자위했냐고 묻던 때처럼.

“침실까지 걸어 봐. 발목 제대로 보게.”

“네.”

잔뜩 긴장한 오메가는 그제야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대표님께서 이대로 넘어가 주시려는 모양이었다. 약간의 안도감을 느끼며 정희연은 침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게스트룸에 딸린 욕실이라 열 발자국도 채 옮기기 전에 침대에 무릎이 닿았다.

연 대표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정희연의 걸음을 살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정상적인 걸음걸이라고 판단하겠지만, 그가 보기에는 그다지 정상적인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남자는 몸을 쓰는 데 익숙했고, 그만큼 다른 사람의 몸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줄 알았다. 살짝 부어오른 것부터가 괜찮지 않다는 방증이긴 했지만 직접 확인해 보니 역시나 걸음이 미세하게 불안정했다.

아무리 봐도 불안한데. 연 대표는 욕실에 걸린 속옷을 내버려 둔 채 느긋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걸어 다니지 못하게 안고 다녀야 하나, 실없는 생각이 곁을 배회했다.

“앉아야지.”

정희연은 고분고분하게 침대에 앉았다. 침대 끄트머리에 살짝 엉덩이를 대자, 연 대표가 제대로 앉으라는 듯 침대를 툭, 두드렸다. 정희연은 매트리스에 오금이 완전히 닿도록 엉덩이를 뒤로 뺐다.

“희연아.”

연 대표는 욕실에서처럼 아무렇지 않게 무릎을 꿇었다. 정희연의 시선이 남자의 움직임을 따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창피함 역시 함께 가라앉은 듯,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딸꾹질만 제외한다면.

“네?”

조금 전까지 정희연의 발목을 그러쥐고 있던 손이 또다시 발을 낚아챘다. 동시에 아무것도 신지 않은 오른발이 바닥에서 떨어져 나가며 다리가 공중으로 살짝 떠올랐다. 정희연은 연 대표에게 잡힌 자신의 다리를 멀거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남자가 해를 가할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순한 얼굴에 어린 맹목적인 신뢰에 연 대표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무슨 짓을 하든 정희연은 도망가지 않으리라는 확신히 들었다. 비뚤어진 만족감이 남자의 뻔뻔함에 불을 지폈다.

“자면서 대표님 꿈이라도 꿨어?”

그는 부은 발목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아….”

기습적인 물음에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손에 힘을 실었다. 하얀 시트가 하얀 손 아래에서 부드럽게 구겨졌다. 어떡하지. 순간적으로 자리를 피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잡힌 발목 때문에 도망갈 수도 없었다.

“응?”

연 대표의 커다란 손이 부은 발목을 가볍게 눌렀다. 남자의 체온이 닿은 곳에서부터 아릿한 통증이 퍼지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배 속에 열기가 고이는 느낌이라 정희연은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평소 알고 있던 고통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시선을 굴렸으나 결국 그의 시선은 연 대표 앞에서 멎었다. 불가항력이었다.

정희연은 주춤거리며 잡히지 않은 발을 뒤로 물렸다. 많이 움직이지 않았는데도 발꿈치가 금세 침대 프레임에 닿았다. 도망갈 곳은 없다는 듯이.

결국 정희연은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꾸 거짓말을 하는 것도 양심에 찔리고, 차라리 대표님께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대표님, 죄송해요.”

한숨처럼 금방이라도 흩어질 듯 작은 목소리였다. 동시에 하얀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죄송해?”

“네….”

“그게 왜 죄송해.”

서늘한 손이 발목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얇은 힘줄을 느긋하게 문질렀다. 딸꾹질을 할 때마다 발목이 얕게 움직이며 남자의 차가운 손에 뭉개졌다. 창피함에 열이 오른 피부에 서늘한 감각이 닿자 발가락 끝이 곱아들었다.

“꿈에서 내가 무슨 짓 했어?”

연 대표가 살살 가늘게 웃으며 물었다. 정희연은 그 시선을 피하지도 못한 채 괜스레 발만 꼼지락거렸다. 짓궂은 질문에도 진지하게 대꾸하려는지 긴 속눈썹이 짙은 음영을 만들어 내며 흔들렸다.

“대표님.”

“응, 희연아.”

“창피해서 말하기 싫어요.”

“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봐주지 않을 거라는 정희연의 예상과 달리 연 대표는 가볍게 대답했다.

그가 욕실에서처럼 몰아붙일 줄 알았던 터라 정희연은 눈을 깜박이며 제 발목을 지분거리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자신이 죄책감을 가진 것과 달리 연 대표는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죄송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인 걸까? 아니면 대표님은 이런 일이 익숙하신가? 여러 의문이 작은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뛰어다녔다. 연 대표를 향한 죄책감이 물러나자 어쩐지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대표님 때문인데….”

정희연은 솔직히 중얼거렸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야한 꿈을 꾼 건 제 탓이 아니라 대표님 때문인 것 같았다. 그가 제게 입을 맞춰서.

억울한 마음 뒤로 뒤늦게 서운함이 몰려왔다. 오늘 밤에도 또 죄송스러운 꿈을 꿀까 봐 걱정스러워 손을 잡는 것도 피했었다. 그런데 대표님은 제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곤란한 질문을 던지지 않으셨던가. 지금처럼 발목을 문지르는 신체적 접촉까지 포함해서.

복사뼈를 문지르는 손은 분명 서늘한데, 연 대표가 만진 곳마다 열기가 피어올랐다.

“나 때문이야?”

연 대표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표님이…. 저한테 뽀뽀하셨잖아요.”

“그럼 희연이는….”

정희연은 계속해서 히끅거리며 연 대표를 내려다봤다. 진지하게 말하고 있는데 자꾸만 딸꾹질이 튀어나와서 곤란했다.

“내가 뽀뽀할 때마다 꿈꿀 거야?”

노골적인 질문에 정희연은 미간을 좁히며 입술을 달싹였다. 꿈은 무의식이었다. 그 스스로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다른 알파가 하면?”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연 대표가 다른 물음을 던져 왔다.

“잘 모르겠는데….”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이 다소 늦게 튀어나왔다. 정희연은 타이밍이 어긋난 자신의 대답이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아니라고 해야지.”

“……?”

연 대표가 정정해 주고 난 뒤에야 두 번째 질문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아. 다른 알파들이랑은 뽀뽀 안 할 건데요…? 그러니까 그런 꿈 꿀 일도 없어요.”

곧바로 돌아오는 순한 대답에 연 대표는 발목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이대로 있다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손에 힘이 실릴 것 같았다. 가벼운 악력에도 정희연은 손쉽게 부서질 터였다.

태생적인 난폭함을 자제하려 하고 있으나 정희연이 이렇게 굴 때마다 스스로를 제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연 대표는 삐딱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제게 말랑거리는 버릇을 고쳐야 할 듯했다.

그게 좋을 것이다. 정희연에게든, 저에게든.

“희연아.”

“네?”

“자위해 봤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희연은 눈만 깜박거렸다. 깨끗한 눈동자에 당혹스러움이 차올랐다. 너무 놀란 탓에 순식간에 딸꾹질이 멎었다.

“응? 자지 만져 봤어? 아, 오메가는 뒤로 하나?”

“아, 아니….”

정희연은 손가락만 꼼지락거릴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어떻게 반응해야 하지? 지금껏 받은 성교육이라고는 알파가 원할 때 다리를 벌려 주라는 게 전부였다.

거기에 알고 있는 기본 지식을 더해 봤자, 오메가에게 히트가, 알파에게 러트가 왔을 때. 그리고 노팅이 이루어졌을 때 임신 확률이 높다는 게 전부였다.

당황스러움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연 대표만 쳐다보자 그가 가볍게 웃으며 입술을 열었다.

“성희롱하는데 가만히 있으면 어떡해.”

연 대표는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대충 쓸어 넘기며 몸을 일으켰다. 정희연의 고개 역시 그의 움직임을 따라 위쪽으로 움직였다. 연 대표는 말간 얼굴의 오메가를 보며 치솟던 난폭함을 눌러 삼켰다. 제 난폭함을 표출하기에는, 정희연이 지나치게 무해했다.

“성희롱이요?”

“응.”

“성희롱이…. 뭔데요?”

뜻밖의 질문에 연 대표는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 개념조차 모르는 오메가를 나이 많은 알파에게 팔아 치울 생각을 한 정 회장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아까 내가 한 말.”

“자지 만져 봤냐고 물어보신 거요?”

순한 입술 사이로 자지니 뭐니 하는 단어를 직접 들을 줄은 몰랐던 터라, 연 대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갇혀 살았던 과거 때문인지, 정희연은 지나치게 솔직한 면이 있었다.

“뭐든지 네가 불쾌하면 전부 성희롱이야.”

“아, 그렇구나. 몰랐어요.”

“으응. 몰랐어요?”

연 대표는 손끝으로 정희연의 뺨을 툭 건드렸다. 정희연은 무의식적으로 남자의 손에 뺨을 비비며 새로 배운 사실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불쾌하면 성희롱이구나.

하지만 대표님이 제게 성희롱을 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곤란하기는 했어도 불쾌하지 않았으니까. 곤란함과 불쾌함이 명백히 다른 감정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럴 때는 하지 말라고 해야지, 희연아.”

손을 떼어 내려던 남자는 정희연이 고개를 기울여 오자 말랑말랑한 뺨을 문지르며 다정하게 말했다.

“대표님도요?”

“응. 대표님도.”

“다른 사람은 불쾌한데 대표님이 그러시는 건 괜찮은데…? 그러니까 대표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하신 건 성희롱 아니에요.”

조곤조곤 쏟아 내는 말에 연 대표는 뺨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예뻐 죽겠네, 진짜.”

다정한 얼굴이 오늘따라 사나워 보여 정희연은 눈만 깜박거렸다.

***

언제 함박눈이 내렸냐는 듯 비가 잔뜩 섞인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하늘은 회색 도시를 한결 우중충하게 만들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눈과 함께 폭죽이 쏟아지던 새해도 매일같이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였을 뿐이다. 척척한 눈과 잔뜩 흐린 공기가 사람들의 발걸음을 재촉했다. 먼 곳에서 희미한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기분 나쁜 습도도, 불안하게 하늘을 울리는 소리도 정희연에게는 해당하지 않았다.

정희연은 테이크아웃 커피 잔을 든 채 창에 달라붙은 눈송이를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하얀 양손이 두꺼운 컵 홀더를 꼭 쥐고 있었다. 비가 섞인 탓에 유리 위로 달라붙은 눈에서 얼음 결정이 보이는 듯했다. 등 뒤로 종이를 넘기듯 팔랑거리는 소리와 사인을 하듯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라도 일하는 남자를 방해할까 봐 정희연은 조심스레 걸어 테이블 곁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조용히 커피잔을 내려 둔 건 그다음이었다. 우유 거품이 가득한 테이크아웃 용기 옆에는 선물 받은 피칸파이가 놓여 있었다. 정희연은 연 대표가 깔끔하게 잘라 준 파이를 한 입 베어 먹으며 다시 바깥을 응시했다. 여전히 비가 섞인 눈이 내리고 있었다.

현재 그가 앉아 있는 곳은 대표실이었다. 근래에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연 대표가 회사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정희연 역시 덩달아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졌다. 딱히 많은 대화가 오가는 건 아니었지만, 정희연은 이 시간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고소하게 씹히는 파이를 오물거리며 하릴없이 밖을 살피고 있자니 며칠 전 일이 떠올랐다.

대표님을 상대로 야한 꿈을 꾼 일은 창피하지 않게 넘어갔지만, 성희롱의 개념은 여전히 어려웠다. 이유태에게 배운 개념들을 잊어버려야지 생각하고 있지만 너무나도 오랫동안 배워 온 것들이라 빨리 잊어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잘못된 생각들이 무의식적으로 머릿속을 지배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정희연은 시럽이 잔뜩 들어간 바닐라라테를 마시며 고민에 잠겼다. 연 대표에게 성희롱의 개념을 물은 건 단어의 의미를 몰라서라기보다는 그 개념 자체를 받아들이는 게 어려웠기 때문이다.

알파가 원할 때마다 다리를 벌려 줘야 한다면 오메가에게는 희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을 텐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희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파가 원할 때마다 다리를 벌려야 한다는 게 잘못된 명제인데, 자꾸만 잘못된 명제를 기준으로 두고 있었다.

정희연은 이유태에게 배운 잘못된 성 관념들을 머릿속에서 몰아내기 위해 애쓰며 다시금 성희롱의 기준에 대해 생각했다. 대표님께서는 불쾌함이 기준이라고 하셨지만, 그것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응? 자지 만져 봤어? 아, 오메가는 뒤로 하나?’

놀라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이 저런 물음을 던지면 기분이 나쁠 것 같았다. 정희연은 미간을 좁히며 커피 잔을 다시 손안으로 가져왔다. 한 모금 마시자 보드라운 우유 거품이 입술 사이를 파고들었다.

‘다른 사람은 불쾌한데 대표님이 그러시는 건 괜찮은데…? 그러니까 대표님이 저한테 그런 말씀하신 건 성희롱 아니에요.’

‘예뻐 죽겠네, 진짜.’

예뻐 죽겠다고 했으면서도 대표님은 어쨌든 제가 한 말이 성희롱이라고 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대표님이 한 말이 성희롱이 아니게 되는 거지? 정희연은 심각하지 않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연 대표의 발언이 성희롱이었다고 인정하면 될 일이지만, 그를 다른 사람들과 동일 선상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연인 사이가 되면 상관없을까? 하지만 연인이 되려면 마음이 통해야 하는데. 정희연은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표님이 자신과 같은 감정일 것 같지는 않았다.

연 대표가 정희연 자신에게 품고 있을 감정에 관해 생각하자 기분이 조금 우울해졌다. 정희연은 한숨을 폭 내쉬며 애꿎은 파이를 포크로 쿡 찔렀다.

“대표님.”

노크 소리와 함께 벌컥 문이 열렸다. 대놓고 정희연을 구경하던 연 대표는 눈동자만 굴려 심수천을 쳐다봤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에서 미약한 짜증이 묻어 나왔다.

정희연이 소파에 앉은 순간부터 연 대표는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파가 업무용 책상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놓인 덕분에 볼록 솟은 뺨을 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동그란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무표정한 얼굴에 미세한 균열이 일었다. 콧잔등에 주름이 질 정도로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파이를 먹는 입술은 부지런히 달싹였다. 하얀 뺨이 규칙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꺼지길 반복했다. 손에는 커피 잔을 꼬옥 쥔 채였다.

‘대표님. 저 커피 마셔 보고 싶어요.’

‘커피?’

‘네.’

여느 때처럼 정희연에게 차를 건넨 뒤 커피를 내려 마시고 있을 때였다. 한참 찻잔을 내려다보던 오메가가 커피에 호기심을 보였다. 표정을 보아 하니 궁금증을 오랫동안 참은 듯한 얼굴이었다.

‘희연아. 궁금해?’

‘네.’

‘예전부터 궁금했어?’

‘네. 대표님이 마실 때부터 궁금했어요.’

‘말했으면 바로 줬을 텐데.’

‘커피는 원래 어른들만 마시는 건데요…? 카페인 몸에 안 좋아요.’

‘으응. 그랬어?’

연 대표는 픽 웃으며 제가 마시던 커피를 정희연의 입술에 대 주었다. 아주 적은 양의 액체가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가자마자 정희연은 눈썹을 찌푸렸다.

‘써요.’

‘아직 애기네.’

‘애기 아닌데….’

‘다른 커피 마실래?’

‘다른 거요?’

‘있어. 애기들 마시는 거.’

출근하자마자 김철우를 시켜 시럽과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종류별로 사 오게 했더니 그중에 마음에 드는 게 있었던 모양이다. 정희연은 커피를 처음 마신 날부터 내내 차 대신 커피를 달고 사는 중이었다. 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데 심수천이 들어온 것이다.

“곧장 들어오는 걸 보면 급한 일이신가 봐, 심수천 팀장님?”

연 대표는 몸을 일으키며 운을 뗐다. 그의 짜증스러움을 읽어 낸 지우(馶遇)의 1팀 팀장은 속으로 좆 됐다를 외치며 슬그머니 정희연을 살폈다. 요즘은 연 대표의 심기를 직접 살피는 것보다 정희연을 살피는 편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하얀 오메가가 말랑하게 굴면 그의 상사는 심기를 누그러뜨리는 경향이 있었다. 지우(馶遇)의 알파들이 정희연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수려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알았다고 합니다. 괜찮으면 오늘 보자고 하는데요.”

연 대표는 정희연의 입술에 묻은 우유 거품을 닦아 내며 소파에 등을 기대앉았다. 실실 눈치를 보던 심수천이 다가와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정희연이 안녕하세요, 팀장님, 하고 인사를 건네 왔다. 심수천은 슬쩍 손을 흔들었다.

“의외네.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일을 지시한 남자의 시선은 심수천이 아닌 정희연을 향해 있었다.

“…저 오늘 누구 만나요?”

정희연은 조금 늦게 물었다. 신중한 손길로 파이를 덜어 내느라 연 대표의 시선이 닿은 걸 다소 늦게 눈치챈 탓이었다. 정희연은 파이가 엉망으로 놓인 접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심수천에게 건넸다. 대표님께서 자신의 접시에 담아 준 것처럼 예쁜 모양이 아니라 죄송했지만, 맛은 똑같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연 대표는 정희연이 심수천에게 간식을 건네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굳이 막지는 않았다. 그 틈을 타 심수천은 잽싸게 접시를 받아 제 앞으로 가져왔다. 팀원들에게 자랑할 생각이었다.

“응. 페로몬 다루는 법 가르쳐 줄 사람.”

정희연은 연 대표의 말뜻을 되새김질하듯 눈을 깜박였다. 침묵하는 도중에도 순한 얼굴은 연 대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맹목적인 시선에 남자는 비스듬히 웃었다. 정희연은 그 미소를 홀린 듯이 바라보며 손이 꼼지락거렸다.

“그럼 그분도 저처럼 오메가예요?”

“응. 오메가예요.”

유순한 눈매가 조금 더 크게 뜨였다. 오메가. 정희연은 다른 오메가를 만나 본 기억이 없었다. 아버지가 오메가이긴 했지만 너무나도 오래된, 희미함을 넘어서 낡은 기억이었다. 연 대표와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르지만, 관계를 만들기 위해 오메가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설렘이 몰려오며 드물게도 표정 없는 얼굴이 밝아졌다. 보기 드문 모습에 연 대표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느스름해진 눈매와 뺨을 기댄 손가락, 비스듬한 자세가 연 대표의 불편한 심기를 대변했다.

“희연아.”

“네?”

“다른 오메가 만나니까 설레?”

“네.”

정희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페로몬 다루는 법을 알게 되면 대표님을 곤란하게 만들 만한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 걱정스러움이 한결 놓였다. 무엇보다 연 대표에게는 상담하기 곤란한 문제를 물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령 며칠 전처럼 이상한 꿈을 꾸지 않는 방법이라든가.

“며칠 동안 대표님 못 만나도?”

연 대표의 눈치를 살피며 파이를 먹던 심수천은 터져 나오려는 헛기침을 간신히 눌러 삼켰다. 이해진과의 만남은 단발성이다. 물론 앞으로는 자주 만나겠지만, 오늘은 잠깐 얼굴을 보는 게 전부일 터였다. 그런데도 연 대표는 마치 며칠 동안 만나지 못할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심수천의 눈에는 그게 정희연을 노린 사기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정희연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대표님…. 못 봐요?”

“응.”

“아, 그건 싫은데….”

정희연은 연 대표가 저를 놀리는 줄도 모르고 대번에 시무룩해졌다. 같은 형질의 사람을 만나면 기쁘겠지만, 그렇다고 대표님을 보지 못하는 건 싫었다. 하지만 페로몬을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정희연이 심각해진 걸 알면서도 연 대표는 아무렇지 않게 옆에 앉은 오메가를 떠보기 시작했다.

“싫어?”

“네. 대표님 못 만나는 거 싫어요….”

“그럼 오늘 만나지 말까?”

테이블을 향해 손을 뻗은 남자는 정희연의 입에 파이를 넣어 주며 물었다. 정희연은 맨손으로 건네는 파이를 잘도 받아먹었다. 긴 손가락이 단내가 들러붙었을 입술을 스치며 떨어져 나갔다.

“아, 그것도 안 되는데…. 페로몬 다루는 거 배워야 해요.”

정희연은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연 대표가 건넨 파이를 오물오물 씹어 삼켰다.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데 자꾸만 욕심이 나서 큰일이었다. 손톱을 만지작거리자 분홍색 손톱이 하얗게 질렸다.

“그분도 만나고 대표님 보면 안 돼요?”

“우리 희연이 욕심쟁이네.”

“예전에 대표님이 저한테 욕심부리라고 하셨잖아요. 이제 욕심내면 안 돼요?”

연 대표는 자신이 정희연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픽 웃었다. 예쁜 말만 내뱉는다 싶었다. 어떻게 놀려야 또 예쁘게 구는걸 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찰나, 또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김철우의 목소리였다.

“응.”

김철우는 심수천과 다르게 연 대표의 대답이 떨어지고 나서야 안으로 들어섰다. 정희연의 존재가 익숙한 듯 연 대표 옆에 앉아 있는 오메가를 보고도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언제나 그랬듯이 안녕하세요, 비서님, 하고 인사하는 정희연에게 똑같이 인사를 돌려줄 뿐이었다.

소파 뒤로 다가간 김철우는 연 대표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심수천만 있다면 상관없지만, 정희연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남 사장 쪽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물건? 사람?”

“사람입니다.”

은밀한 이야기에 연 대표의 입술 끝으로 유려한 미소가 걸렸다. 그는 뺨을 손가락에 기댄 자세 그대로 심수천에게 나가 보라는 듯 까딱 고갯짓했다. 심수천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할까요?”

“김철우 비서님이랑 상의해서 잡아 둬.”

김철우와 심수천 사이에 짧은 시선이 오고 갔다.

“그럼 준비해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희연 씨, 파이 잘 먹었어요.”

“안녕히 가세요, 팀장님.”

김철우는 연 대표의 명령이 떨어지고 나서야 허리를 세웠다. 이후의 대화는 정희연의 귀에 흘러가도 무방할 듯했다.

“언제로 할까요.”

연 대표는 손목을 돌려 시간을 확인한 뒤에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오늘.”

“오늘 처리…. 아니, 만나실 겁니까?”

“빨리빨리 처리해야지. 남 사장님 화내실라. 이럴 거면 왜 달달 볶았냐고 한 소리 할걸.”

“그럼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비밀스러운 대화를 나누는 것 치고는 두 사람 모두 평온한 얼굴이었다.

“타이밍 좋네. 안 그래도 오늘 이해진 만나게 할 참이었는데.”

“이해진 씨요? 오늘 말입니까?”

연 대표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가볍게 대꾸했다.

“퇴근은 집이 아니라 수려로 해야겠네.”

조금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를 따라 일어서는 오메가 몰래 처리하려면.

***

정희연은 주위를 둘러봤다. 연 대표와 돌아다니는 일이 잦아 나름대로 여러 장소를 가 봤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장소에 온 건 또 처음이었다. 비슷하게 생긴 식당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으나 미묘하게 공기가 달랐다.

“신기해?”

“네.”

정갈한 한옥을 녹인 건물은 전부 룸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들어오는 길에 넓은 정원이 있었는데, 어느 방에서든 창밖의 정원을 볼 수 있도록 설계된 구조인 것 같았다.

약속을 잡기에는 다소 이른 시간이라 주변이 고요했다.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소리가 전부였다.

“대표님. 모시겠습니다.”

슈트를 입고 이어 마이크를 착용한 알파 경호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식당에 알파 경호원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지만, 정희연은 그러려니 생각하며 연 대표를 따라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둘이 만나고 있어. 잘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대표님은요?”

정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물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연 대표가 곁에 없어도 사실 크게 상관없었다. 궁금한 걸 묻기 위해서는 알파가 없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두고 자리를 뜨는 이유가 궁금했다.

“일이 있어서.”

“네에.”

바쁘신가 보다. 정희연은 금세 남자의 말에 수긍했다. 카디건 밖으로 빼꼼 튀어나온 손가락들이 부지런히 맞물렸다.

“희연아. 할 말 있어?”

“…저 며칠 동안 대표님 못 봐요?”

김철우가 들어오는 바람에 끊긴 대화 주제가 불쑥 튀어나왔다. 차를 타는 내내 조용하더라니,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더 놀릴까, 고민하던 연 대표는 발언을 철회하기로 했다. 진짜라고 믿으면 곤란했다.

“데리러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 다른 알파 따라가지 말고.”

“다른 알파 안 따라가는데요…? 전 대표님만 따라갈 건데….”

“착하네.”

길을 안내하던 경호원은 가장 안쪽 복도까지 들어가고 나서야 멈춰 섰다. 그는 연 대표와 정희연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뒤 등을 돌려 왔던 길로 사라졌다. 정희연은 꽉 닫혀 있는 문과 주변을 살폈다. 어쩐지 분위기가 손님들에게 내어 주는 방은 아닌 것 같았다.

여기서 연 대표와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문득 기분이 이상해졌다. 회사라면 모르겠지만, 그를 만난 이후 이렇게까지 떨어지는 건 처음이었다. 대표님 말씀처럼 아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제 미성년자도 아닌 성인인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고작 몇 시간이지만 이대로 헤어지는 게 아쉬운 것 같기도 했다. 헤어지기 싫어서 괜히 손가락만 꼼질거리고 있는데 불현듯 며칠 전 연 대표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대표님.”

“응, 희연아.”

“뽀뽀하고 싶어요.”

정희연은 연 대표를 올려다보며 제법 당돌하게 요구했다. 뽀뽀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치고는 수줍음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순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미묘한 표정을 지은 사람은 연 대표였다. 그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미간을 슬쩍 좁히며 한쪽 눈썹을 끌어 올렸다.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정희연은 의아해하며 입을 열었다.

“대표님은 하고 싶을 때 한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뽀뽀하고 싶어?”

“네.”

“희연아. 인사야?”

연 대표는 나지막한 웃음을 내뱉었다. 잘 다녀오시라고 뽀뽀로 배웅하는 것도 아니고, 타이밍이 절묘하기 짝이 없었다.

“인사할 때는 뽀뽀 안 하는데요?”

“으응. 인사할 때는 뽀뽀 안 하는 거야?”

연 대표는 정희연의 턱과 뺨을 한 손으로 감싸며 물었다.

“네.”

비스듬히 웃은 남자는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췄다. 촉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금방 떨어져 나갔다.

“희연아. 대표님이랑 뽀뽀하니까 좋아?”

그는 제 체온이 닿았던 정희연의 입술을 꾹 누르며 물었다.

“네. 대표님이랑 뽀뽀하는 거 좋아요.”

정희연은 말간 얼굴로 대답했다. 유순한 눈매가 살짝 휘어지며 눈꼬리가 곡선을 그렸다.

미닫이가 작게 밀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정희연은 문을 닫아 주는 직원에게 감사합니다, 인사를 한 뒤에야 뒤로 돌아섰다. 고급스러운 식탁과 좌식 의자가 놓여 있는 널찍한 방이 나타났다. 미리 준비해 뒀는지 정갈한 도자기 접시와 물컵, 수저 등이 마주 보는 방향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기척이 느껴지지 않더라니, 예상대로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방을 훑은 시선은 저절로 커다란 창을 향해 옮겨졌다. 자세히 보니 창이라기보다는 바깥으로 통하는 문에 가까웠다. 방금 들어온 문처럼 미닫이로 되어 있었고, 짙은 갈색의 창틀 위에는 고급 한지가 발려 있었다.

양쪽으로 열린 창 사이로 너른 정원이 보였다. 들어올 때 언뜻 스쳐 지나갔던 정원이었다. 빗소리가 운치 있게 들려왔다.

정희연은 잠깐 망설이다가 곧바로 의자에 앉는 대신 창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다가서자 정원의 풍경이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돌로 만든 산책로가 잘 가꾸어진 나무들을 낀 채 길게 늘어서 있고 정원 가운데의 작은 연못에는 비들이 끊임없이 낙하하는 중이었다. 물기 섞인 눈이 온전한 비로 변한 듯, 토독토독 떨어지는 빗소리가 듣기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름답게 조경된 정원은 한겨울인데도 푸릇한 빛을 띠고 있었다. 비 때문에 땅이 젖어서인지 정원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면 관상용 정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희연은 조용히 비 내리는 정원을 응시했다. 밖으로 나온 이후 연 대표 없이 낯선 공간에 홀로 남겨지는 건 처음이었지만, 불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옅은 빗소리 위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덧씌워졌다. 정희연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안녕.”

낯선 이가 희미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한눈에 봐도 오메가임을 짐작할 수 있는 외모였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정희연은 꾸벅 배꼽 인사를 한 뒤 남자, 이해진 쪽으로 다가섰다. 정희연이 부르는 호칭이 의외였던지 이해진은 작게 웃었다. 음울한 미인의 얼굴에 희미한 볕이 들었다.

“선생님?”

이해진은 앉으라는 듯 맞은편 자리를 가리키며 호칭어를 되물었다. 정희연은 말 잘 듣는 어린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의자에 앉았다. 얌전한 태도였으나 상대가 웃는 영문을 몰라 의아한 표정이었다.

“제가 실수했나요?”

결국 정희연은 물잔을 만지작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실수를 저질렀을까 봐 조금 걱정스러워졌다. 담장 안에서처럼 기본자세가 안 됐다며 맞는 일은 없겠지만, 처음으로 만나는 오메가인데다 선생님이라 실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 과분한 호칭이라서. 내가 무슨 선생님이야.”

“가르쳐 주시는 분들은 다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건데요…?”

말하고 나서야 앞서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희연은 물잔을 꼬옥 쥔 채 곧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아…. 거절하려고 부르신 거여도 괜찮아요.”

“응?”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하셔서요. 거절하실지도 모르는데 제가 앞서 나갔을 수도 있잖아요. 죄송해요.”

이해진이 선생님이 되어 주지 않는다면 곤란했지만, 정희연은 괜찮다고 말했다. 페로몬 다루는 법을 배울 생각에, 그리고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볼 생각에 설렜지만, 거절당한다면 어쩔 수 없었다. 선생님이 되어 달라고 강권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정희연은 시무룩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물잔을 놓고 두 손을 아래로 내렸다. 고작 거절당하는 일로 시무룩해지면 안 되는데, 연 대표가 자꾸 받아 주다 보니 그새 버릇이 들었는지 별것 아닌 일에도 쉽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이해진은 정희연의 얼굴을 살피다 옅게 웃었다. 맞은편의 오메가는 처음과 다를 바 없이 다소 무심해 보이는 얼굴이었으나 반쯤 내리깔린 시선을 보아 하니 퍽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거 아니야.”

그는 맞은편의 빈 물잔에 따뜻한 차를 따라 주며 시무룩한 기색의 정희연을 달랬다.

“그럼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형이라고 해 주면 안 될까? 선생님 소리 들을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서 조금 민망하네.”

“형이요? 가르치는 사람은 다 선생님인데….”

이해진은 정희연이 단어 하나하나를 짚고 넘어가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오래된 감금 생활 탓이다. 사회적인 교류가 없었으니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사소한 질문을 던지고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연 대표가 정희연을 어지간히도 예뻐하는구나 싶었다. 애초에 그 남자가 저런 사소한 질문에 일일이 답해 주지 않았다면 정희연이 지금처럼 구는 일도 없을 터였다. 연 대표가 정희연을 싸고도는 게 신기하기도 했다. 그 남자가 그렇게 성격이 좋은 편은 아닌데.

“가르치는 사람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꼭 선생님이라고 할 필요는 없어.”

상냥한 설명에 정희연은 귀를 기울이듯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이해진은 또다시 설핏 웃었다. 며칠 전에 들렀던 남수현이 정희연을 보고 귀엽다느니 정 회장과 하나도 안 닮았다느니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까운 관계는 형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나는 너랑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형이라고 불러 주면 더 좋을 것 같아.”

“네. 그럼 형이라고 부를게요.”

정희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꼭 선생님이라는 호칭어를 붙일 필요는 없구나. 다른 팀장님들과도 친한 편인데 그분들도 형이라고 불러야 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팀장님이라고 불러도 다들 좋아해 주시니 그대로 부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저녁 먹으면서 얘기할까? 배고파?”

이해진의 물음에 정희연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오기 전에 파이를 먹은 탓에 딱히 배가 고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저녁 식사 시간이니 밥을 먹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좋아하는 거 따로 있어? 연 대표가 신경 많이 쓸 것 같은데.”

“신경이요?”

“입맛 까다롭잖아. 레토르트 절대 안 먹고. 직접 요리하는 것도 그래서라고 알고 있는데.”

정희연은 평소 자신의 식단을 더듬었다. 점심은 보통 자극적인 음식이었다. 그런 취향을 가진 김지원과 함께 먹었으니까. 그러나 연 대표와 같이 먹는 아침이나 저녁은 대부분 그가 직접 요리한 음식들이었다.

그래도 대표님 입맛이 까다롭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먹고 싶다고 하면 기름지고 달고 매운 음식이라도 잘 시켜 주는 사람이었다. 본인은 손도 안 대기는 했지만.

“대표님은 제가 먹고 싶다고 하면 다 주시는데…?”

“라면 같은 것도?”

“네. 편의점도 자주 가는데….”

이해진은 의외라고 생각하면서도 연 대표의 심리를 대강이나마 이해했다. 정 회장이 정희연을 키운 이유는 그가 우성 오메가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원하는 알파에게 팔아 치울 계획이었을 테고, 그러려면 아이를 낳는 데에 적합하도록 건강한 몸으로 키우려 했을 것이다. 당연히 식단도 제한되었을 터다. 완벽한 건강식으로.

그동안 정희연이 못 누리던 것들 누리게 해 주려나 보네. 이해진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다른 질문을 건넸다.

“그럼 안 먹거나 못 먹는 음식은 없어?”

“저 편식 안 해요.”

“정말 아무거나 상관없어?”

“…매운 건 잘 못 먹어요.”

고민하듯 잠깐 침묵을 지킨 정희연이 뒤늦게 말을 덧붙였다. 이해진은 호출 벨을 눌렀다. 머지않아 미닫이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사장님. 부르셨습니까?”

“식사 준비 좀. 차례대로 가져올 필요 없고 한 번에 다 가져와요.”

“네.”

수려라 불리는 이 공간의 소유주는 이해진이었다. 외관만 보면 고급 식당처럼 보이지만, 평범한 식당이라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었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이곳은 깨끗하지 못한 결탁들이 오고 가는 장소였다. 재벌, 국회의원, 연예인, 기자…. 수많은 돈과 정보가 오갔고 개중에는 이해진을 통해 오고 가는 것들도 있었다.

정 회장에게서 이해진을 산 사람은 알파가 아니었다. 오메가였다.

팔려 온 그는 임신 같은 원치 않는 일을 겪는 대신 그녀의 일을 물려받았다. 비단 그가 관리하는 장소는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부촌의 고급 술집들, 은밀한 장소의 또 다른 식당들. 관리하는 게 많아질수록 들어오는 정보의 양도 늘어났다.

그중 하나가 정희연에 대한 정보였다.

“진짜 안 닮았네.”

“회장님이랑요? 대표님이랑 남 사장님도 그 말씀 하셨어요.”

혼잣말을 들었는지 정희연이 차를 마시며 조용히 대답했다. 가만히 닫힌 입술 때문에 무표정해 보이는 얼굴인데도 순한 인상 덕분인지, 싸늘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 회장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건 그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 혼잣말이었는데…. 정 회장 얘기 꺼내서 기분 나빴으면 사과할게.”

“네? 아니에요. 괜찮아요. 기분 안 나빴어요.”

대화는 많지 않았지만 어색함을 느낄 새는 없었다. 그 사이 음식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정희연은 식탁 위에 가득 차려진 음식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하얀색 도자기 위에 담긴 음식들의 종류가 너무 다양하고 또 너무 예뻐서 뭐부터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음식도 많았다.

“이건 뭐예요?”

그의 젓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붉은색 고기 몇 점이 플레이팅 되어 있었다. 붉은 생선이었다.

“회 안 먹어 봤어?”

“날생선 처음 봐요.”

“참치인데, 먹어 봐. 맛있어.”

“어떻게 먹어요?”

아무래도 정희연에게는 궁금한 걸 바로 물어보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이해진은 귀찮아하는 대신 옅게 웃으며 참치 회 바로 옆 접시에 담긴 묵은 백김치를 가리켰다.

“그냥 먹어도 되고, 이거랑 같이 먹어도 돼.”

“형은 어떻게 드시는 거 좋아하세요?”

“왜? 따라 먹게?”

“네.”

이해진은 정희연의 앞접시에 묵은지를 올린 뒤 그 위에 붉은 참치 한 점과 무순을 조금 얹었다.

“먹어 봐.”

낯선 음식이었으나 정희연은 망설이는 대신 곧바로 참치를 입에 넣었다. 날생선을 먹는 건 처음이라 식감이 이상하지 않을까 조금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괜찮았다. 참치는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는 것 같았고, 묵은지도 맵지 않아 맛있었다.

“맛있어요.”

“맛있어?”

“네.”

정희연은 이해진을 따라 하듯 접시에 묵은지를 가장 먼저 올리더니 그 위에 참치를 올리고 또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젖살 붙은 뺨이 볼록 솟아났다. 입술을 꼭 닫은 채 뺨만 움직이는 모습이 소동물을 연상시켰다. 이해진은 음식을 먹는 대신 물끄러미 정희연을 응시했다.

정 회장의 손자에 대한 정보가 들어왔을 때까지만 해도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은 몰랐다.

처음 접한 정보는 ‘선하 그룹 후계자가 곧 결혼할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이해진은 공공연하게 선하의 후계자로 일컬어지는 강서효의 더러운 성적 취향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순진한 우성 오메가를 꼬셔 오려나 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 쓸데없는 소문을 잊어 가던 찰나 다른 소문이 귀에 닿았다.

정 회장에게 남은 오메가가 있다는 소문이었다.

이해진이 치를 떠는 이름이었고, 그날을 기점으로 관련된 정보들을 샅샅이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뜬소문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기자치고 그의 식당이나 술집을 거치지 않은 이는 드물었다. 결국 이해진은 몇 개의 정보를 취합해 중요한 사실을 알아냈다.

정 회장에게 우성 오메가가 있다. 15년 가까이 숨겨서 키운 친손자가.

어찌나 꼭꼭 숨겨 뒀는지 관련된 정보를 파악하는 데 퍽 애를 먹었다. 이해진은 끈기 있게 정 회장의 주변 인물들부터 찾아 나섰고, 마침내 그 손자를 관리한다던 집사, 이유태에 대한 신상 정보를 파악했다. 그리고는 모든 정보를 남수현에게 넘겼다. 그 이후는 쉬웠다.

남수현은 이유태의 지인들을 이용해 몇 다리를 걸쳐 그 베타를 도박판으로 끌어들였다. 당연히도 이유태에게는 감당할 수 없는 빚이 생겼고, 궁지에 몰린 도박 중독자는 손쉽게 정희연을 넘겼다.

선물할 거라던 남수현은 계획을 그대로 지켰다. 그들이 훔친 오메가는 마침내 연 대표의 손에 넘어갔다. 그리고 지금은 이해진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형도 드세요.”

이해진을 상념에서 끌어 올린 건 앞접시에 놓인 참치였다. 어느새 묵은지와 참치가 차례대로 쌓여 있었다. 그가 다른 생각을 하는 동안 정희연이 건네준 듯했다. 이해진은 자신이 해 준 것과 달리 조금 엉망인 참치회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젓가락을 들었다.

“잘 먹을게.”

“네.”

그는 눈앞의 오메가가 건넨 참치를 씹으며 이것저것 다른 음식들을 권하기 시작했다. 연 대표가 예뻐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정희연은 생각보다 잘 먹었다. 먹는 양이 절대적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가리는 것 없이 조금씩 잘 먹는 편이었다. 자그마한 입술이 어찌나 부지런히 오물거리는지 다른 걸 더 먹이고 싶을 정도였다.

“더 먹고 싶은 거 없어?”

“괜찮아요. 많이 먹어서 배불러요.”

“배불러?”

“네. 잘 먹었습니다.”

이해진은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상을 치우게 했다. 새로 내온 차를 따르는 동안 활짝 열린 창밖으로 고요한 빗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요즘 억제제 먹고 있다며.”

식사가 끝난 후에야 이해진은 본론을 꺼냈다. 정희연의 상태에 관한 대강의 정보를 김지원에게 미리 들은 참이었다.

“네.”

“혹시 지금 갖고 있어?”

정희연은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건넸다. 이해진은 곧바로 약을 살폈다. 의사는 아니지만, 시중에 유통되는 오메가용 억제제는 전부 파악하고 있었다. 우성이라더니, 제법 센 억제제였다.

“페로몬 다루는 법 배우려면 당분간 억제제는 끊어야 해. 일단 페로몬이 흘러나와야 하니까.”

“네에.”

“우성이니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배운 적이 없으니까 할 줄 몰랐던 것뿐이지 배우면 어렵지도 않고.”

“네. 말 잘 들을게요.”

이해진은 정희연의 거취 문제를 고민했다. 그를 데리고 있는 알파가 연 대표라 크게 걱정이 되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알파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당분간 형이랑 같이 지낼까?”

“네?”

“싫어?”

“그게 아니라…. 저는 대표님이랑 살 건데요…?”

난색을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 곧바로 거절할 줄은 몰랐다.

순두부처럼 보들보들하게 생긴 주제에 단호하기 짝이 없었다.

“왜?”

이해진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왜, 라고 물을 만한 답은 아니었으나 반사적으로 튀어 나간 물음에 가까웠다. 말을 주워 담을까 생각하는데 정희연이 당연하다는 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대표님이랑 약속했어요.”

따뜻하게 데워진 찻잔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있는 채였다.

“약속?”

“네.”

구체적으로 어떤 약속인지 궁금했으나 그로서는 알 수 없는 내용이었다.

사실 이해진은 연 대표에 대해 아는 게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남자보다는 남수현과 가까운 편이었고, 연 대표에 관해 알고 있는 정보들도 대부분은 대외적인 내용에 불과했다. 이쪽 업계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평범한 정보들이었다.

어쨌거나 연 대표라면 거짓말을 입에 담을 남자는 아니니, 정희연과 무언가 약속했다면 지킬 터였다. 그러나 이해진은 이 상황을 마냥 낙관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그의 알파 혐오증은 차치하고서라도, 페로몬을 다룰 줄 모르는 오메가를 우성 알파 옆에 둔다는 것 자체가 꺼려졌다.

“강요하려는 건 아니야.”

이해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연 대표의 일정은 김철우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이곳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조금 걸릴 테니, 그 전까지 천천히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제 생각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오메가에게 많은 것을 알려 주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보통 알파들은 오메가 페로몬 못 견뎌 하니까 그게 마음에 걸려서 제안한 거야.”

“못 견뎌 해요?”

정희연은 이해진의 말을 되물었다. 밖으로 나와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자신은 모르는 게 많아도 너무 많았다. 특히 알파와 오메가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뭔가를 물어볼 때마다 연 대표가 다정하게 대답해 준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있으나 이런 이야기는 해 본 적이 없었다.

“아.”

이해진은 다소 늦게 정희연의 상식 수준을 깨달았다. 그 역시 정 회장의 손에서 자랐고 늙은 알파의 교육 방식을 모르지 않았다. 알파에게 다리나 벌려 줘라, 이런 말만 했을 게 분명했다. 머릿속에 떠도는 역겨운 기억들을 떨쳐 내기 위해 애쓰며 이해진은 말을 골랐다.

갓 스물이 된 오메가를 대하는 건 오랜만이라 단어의 수위를 어느 정도로 조정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다.

“오메가가 페로몬을 흘리면 알파는 발정해. 특히 넌 우성이니까 페로몬 향이 더 강할 테고.”

“네에.”

이 정도는 정희연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페로몬으로 알파를 유혹하는 거라고 배웠으니까.

“연 대표야 웬만하면 눈 돌아가는 일은 없겠지만.”

이해진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말꼬리를 흐렸다.

“오메가 페로몬을 못 견딘다는 게 그 남자한테는 다른 의미일 것 같긴 한데….”

정희연은 흐릿하게 이어진 혼잣말을 용케 알아들었다. 못 견딘다는 의미에는 발정뿐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도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한 견딤의 문제가 아니라 선호의 문제처럼 들렸다.

“대표님…. 오메가 페로몬 싫어하세요?”

“음, 그것보다는 페로몬 흘리는 걸 안 좋아해서.”

전에도 들어 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지금은 억제제를 먹지만 대표님과 처음 만났을 때는 페로몬을 흘리고 있었다. 다음날 바로 억제제를 먹었으니 괜찮지 않을까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창문을 열던 남자의 얼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전에 다른 분께 들은 적 있는 것 같아요.”

정희연은 찻잔을 내려 둔 뒤 습관처럼 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분홍색 손톱이 다른 손가락에 눌릴 때마다 희게 탈색되었다. 당분간 억제제를 끊으면 대표님께서 싫어하실까? 이해진의 제안처럼 당분간은 대표님과 떨어져 지내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연 대표가 싫어할 만한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정희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대표님한테 물어보고 결정해도 돼요?”

“그렇게 해도 돼. 꼭 나랑 같이 지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네.”

이해진은 정희연이 입고 있는 카디건을 힐긋 쳐다봤다. 겉옷은 들어오기 전에 직원이 받아 정리해 뒀을 테니 저것만 입고 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단순히 크다를 넘어서서 정희연을 한 품처럼 보이게 만드는 카디건이었다. 어딜 봐도 연 대표의 옷이었다.

알파의 페로몬이 대놓고 느껴지지는 않았으나 가까이 다가가면 본연의 체취가 느껴질 터였다. 그 순간 이해진은 정희연이 저와 지낼 일이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연 대표가 정희연을 제게 보내지 않을 것이라는 강한 직감이 든 탓이었다.

둘이 그런 사이인가? 이미 눈이 맞았다고 하기에는 정희연에게서 페로몬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연 대표가 아무에게나 페로몬 샤워를 시킬 남자는 아니지만, 만약 정희연과 그런 관계였다면 이렇게 무방비하게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옷까지 내어 줬는데 페로몬 샤워를 시키지 않고 배길 리가.

“희연아. 너 연 대표 좋아해?”

이해진은 별 생각 없이 물었다.

“네. 대표님 좋아요.”

정희연은 순순히 대답했다. 무해하기 짝이 없는 반응에 이해진은 제가 말한 좋아하다의 의미와 정희연이 말하는 좋아하다의 의미가 동일한지 고민해야만 했다. 어쨌거나 좋아한다는 감정은 여러 갈래였고, 성적인 의미가 담겨 있느냐 아니냐는 큰 차이였다.

“그런 의미야?”

이해진은 반쯤 식은 차를 마시며 최대한 가볍게 물었다.

“그런 의미요?”

다른 의미가 있냐는 듯 정희연이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되물었다. 그렇지 않아도 순한 인상이 고작 눈을 조금 더 크게 떴다고 부드럽게 변했다.

“자고 싶어?”

정희연 그 상태 그대로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자고 싶다는 단어에 그가 알고 있는 의미 외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불현듯 얼마 전에 꾼 꿈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딸꾹질이 튀어나올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상한 꿈은 어떻게 안 꿔요?”

생뚱맞은 물음이 튀어 나갔다.

“꿈?”

차를 마시던 이해진은 의외의 물음에 고개를 바로 세웠다. 갑자기 웬 꿈?

“네. 꿈꿨는데 대표님이 나와서…. 그러니까, 옷을 벗고 있었는데….”

하얀 손가락이 조금 전보다 더 부산스레 꼼지락거렸다. 긴장으로 꼬물거리는 손가락과 달리 정희연은 평온해 보일 정도로 침착한 얼굴이었다.

도리어 이해진이 입술을 벌렸다. 올해 스무 살인 오메가가 마치 그런 꿈을 꾼 게 처음인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놀랄 일은 아닌가. 지금까지 성적으로 자극받은 적이 없었을 테고, 누군가를 성적으로 의식한 적도 없을 테니 야한 꿈을 처음 꾼 게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모르긴 몰라도 연 대표와 무슨 일이 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정희연이 단순히 성적 호기심 때문에 그런 꿈을 꿨을 것 같지는 않았다.

“너 연 대표 좋아하는구나.”

“아까도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는데요…?”

그 남자를 좋아한다고? 이해진은 차를 마시며 마음을 침착하게 가다듬기 위해 애썼다. 정희연이 걱정스러워 목이 타는 기분이었다. 다른 알파도 아닌 연 대표가 좋다는 오메가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이해진 자신의 알파 혐오증이 아니더라도, 그 남자는 위험했다.

“연 대표도 알아?”

“대표님도 알아요. 제가 말씀드렸는데….”

과연 그 남자가 좋아한다는 말을 알파와 오메가 사이의 성애적 의미로 받아들였을지 궁금해졌다.

“그게 아니라 네가 자기랑 자고 싶어 하는 거 아냐는 의미로 물은 거였어.”

“자고 싶다는 거…. 다른 의미도 있어요?”

“응. 섹스.”

아. 역시 다른 의미가 있었구나. 정희연은 입술을 달싹였다. 섹스가 뭔지 모를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았다.

“좋아하면 하고 싶어지는 게 당연한 거야.”

해가 바뀌던 날의 새벽이 떠올랐다.

눈이 내렸고, 폭죽이 쏟아졌다. 씁쓸한 담배 연기가 대표님의 입술을 타고 넘어와 혀끝을 휘젓던 날이었다. 연우범이라는 이름을 들은 순간 정희연은 제 감정을 자각했다. 대표님께 죄송한 꿈을 꾼 것도 단순히 뽀뽀 때문이 아니라 좋아한다는 감정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런 꿈도 꿔요?”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럴 수도 있어.”

이해진은 정희연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 주었다.

“전 제가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어요. 알파나 베타만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상한 거 아니야. 오메가도 똑같아.”

무지한 발언에 이해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비슷한 유년기를 보낸 오메가를 앞에 두고 있자니 술이 당겼다. 그가 호출 벨을 눌러 직원에게 뭔가를 시키는 동안, 정희연은 저 혼자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직원이 나가고 난 뒤에야 이해진이 건넨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대표님한테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고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

“왜?”

“대표님이 안 물어보셨는데요…?”

“물어보면 말할 거야?”

“네? 네. 말하면 안 돼요?”

이해진은 약간의 곤란함을 느꼈다. 정희연이 고백을 한다고 연 대표가 홀랑 잡아먹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너무 순진하게 구니 뭐라고 충고하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보통의 사람들을 기준으로 대답하기를 택했다.

“음, 보통은 안 그러지. 대부분은 상대방이랑 자고 싶다는 욕구를 숨기니까. 그런 이야기는 연인이 된 후에야 하는 거고.”

“아, 그렇구나.”

대표님께 함부로 말하면 안 되겠구나. 새로 알게 된 사실을 머릿속으로 차곡차곡 정리하는 동안 직원이 미닫이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안주와 이해진이 부탁한 소주가 트레이에 담겨 있었다. 정희연은 식탁 위를 채우는 소주병들과 아기자기한 음식들을 멀뚱히 눈에 담았다.

“페로몬 다루는 거 배우려면 시간부터 맞춰야 하니까 그 부분은 나중에 연 대표한테 물어보고 결정해. 네가 당분간 나랑 같이 지내면 굳이 시간 맞출 필요 없으니까. 그게 아니면 스케줄 맞춰야 하고.”

와인만 마실 것처럼 생긴 미인이 소주 뚜껑을 따며 만남의 목적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네.”

처음 보는 술병이 신기해 정희연은 그쪽으로 시선을 두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호기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해진은 시간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연 대표 오려면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간단한 작업은 아닐 터였다.

“술 마셔 봤어?”

그는 커다란 머그잔에 소주를 들이부으며 물었다.

이해진이 정희연에게 건넨 술은 레몬 맛이 나는 맥주였다. 거절하면 혼자 마실 생각이었는데, 정희연은 그의 제안을 완전히 거절하지는 않았다. 술을 마시면 대표님께 혼날 것 같다고 하면서도 음료수와 똑같은 술이라고 꼬드기자 홀랑 넘어온 차였다.

“맛있다….”

정희연은 레몬 맛이 나는 맥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쓴맛이 살짝 섞여 있었지만, 레몬 음료수와 비슷해 꼴깍꼴깍 잘도 넘어갔다. 여태 대표님께서 먹는 걸로 뭐라고 하신 적은 없으니, 많이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정희연은 예쁜 모양의 과일을 오물거리며 제 생각을 합리화했다. 머리가 조금씩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지만 기분이 좋았다.

“연 대표 왜 좋아?”

이해진은 소주를 물처럼 마시며 운을 뗐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안온한 표정이었다.

“대표님 예뻐요.”

진심이 가득 담긴 대답에 이해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야 소주를 마신 사람처럼 보였다.

연 대표가 예쁘다니. 누구나 인정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긴 했지만, 예쁘다는 말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위압적인 덩치와 특유의 분위기 때문에 위험하게 느껴진다면 또 모를까.

실제로도 위험한 남자였다. 으레 투견들이 그러하듯 연 대표는 십대 후반의 나이부터 조폭으로 굴렀다. 팔려 올 즈음 조직이 경호업체로 탈바꿈하면서 그 꼬리표를 달고 일한 적은 없지만 사실상 크게 다른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구르다 5년 전, 주인을 죽이고 그 수족을 죄다 잘라 낸 뒤 지우(馶遇)를 지금의 회사로 탈바꿈시킨 남자였다. 대외적으로는 경호 업무를 처리하지만, 사실상 주 사업은 무기 거래니, 위험한 일을 한다는 데에는 변함이 없었다.

“연 대표가…. 예뻐?”

한 번도 소주가 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처음으로 쓴맛이 느껴졌다.

“네. 대표님 예쁜데요…?”

이해진은 대답 없이 술만 마셨다.

“그리고 다정하세요.”

취기가 살짝 올랐는지 정희연이 조금 붉어진 뺨으로 헤실거렸다. 꾹 닫혀 있던 입술이 처음으로 부드럽게 풀어지는 순간이었다.

그 남자가 다정하다고.

이해진은 연 대표를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남자였다. 차라리 예쁘다는 말이 더 잘 어울릴 지경이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