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요청으로 이세계에 끌려온 백시현은 자신의 임무인 마왕 토벌을 무사히 끝낸다. 하지만 승리의 기쁨을 즐기기도 잠시, 시현은 세계의 균형을 위해 자신이 살던 세계로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이곳에서 만나 궂은일을 함께했던 동료들에게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못 한 채. 그렇게 되돌아가 조용히 지내는 시현의 곁에 한 남자가 찾아온다. 그것도 용사일 무렵 함께 마왕을 처치하던 동료와 닮은 이가. 심지어 얼굴만 닮은 것도 아니다. 꿀 떨어지는 목소리, 개 같은 성격, 말끝을 늘리는 애교스러운 말투까지. 완전 똑같다. 이 정도면 걔가 차원 이동해서 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라 몰래 찔러봤는데……. “으응. 나 불렀어?” 이 또라이는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긍정이나 하고 앉아있다. 잠깐, 차원 이동하면 결국 죽지 않나? 이런 미친…. 이 생각 없는 놈을 돌려보내는 것도 머리가 아픈데 설상가상, 이 놈과 똑같은 얼굴을 한 다른 인물이 나타나 인질을 붙잡고 시현을 협박하기에 이른다. “자기야, 살리고 싶어?” “뭘 원하는데.” “쉬워. 자기가 직접 나한테 오기만 하면 돼.” 고민의 시간은 짧았고, 시현은 그를 지키고자 최선의 선택을 하는데…. *** 시선이 마주친다. 쾌청한 하늘 같기도 하고, 물결치는 바다 같기도 한 눈동자는 호소하고 있었다. 가지 말라고. 제발, 이리로 오라고. 애달픈 눈빛에 손끝이 움찔거렸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 움직이는 루블리안의 목울대는 여전히 피를 삼키고 있는 것 같았다. 이 거리에서도 저런 상태인데, 더 가까이 가면 어떻게 될지 뻔했다. ……그래도 여기에 계속 있는 것보단 낫겠지. 우리는 서로를 믿는 동시에 믿지 않았다. 이 모순된 문장이 우리라서, 우리니까, 우리에게 허용됐다. “루블리안.”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럽게 이름을 입에 머금자, 루블리안이 멍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 빈틈을 노렸던 나는 손으로 그의 눈을 가리며 온몸이 치료되게끔 치유를 썼다. 단 한 번도 다정히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게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 무어라 말을 붙이기 힘든, 그런 기분이다. 나는 원래 걸었던 보호 마법 위로 슬립 마법을 중첩했다. 그와 동시에 신성력으로 만든 장벽도 없앴다. “안녕.” 점점 정신이 혼미해지는 루블리안에게 자그마한 속삭임을 건넸다.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건넨 작별 인사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