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12)화 (112/112)

16.

대신 발걸음을 조금 더 빠르게 했다. 같이 가자는 웃음기 가득한 음성이 들려왔으나, 모른 척했다. 지금 그를 마주 보면 얼굴에 열이 오를 게 분명했으니까. 지금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을 게 분명했으니까.

벌써 바다에 발을 담그고 왔는지, 모래가 가득 묻은 발을 움직이며 이리형이 내게 다가왔다.

“백션, 올해두 귀엽고 깜찍한 리형이랑 바다 안 들어갈 거야?”

“징그럽고, 끔찍한, 이라고, 끔찍한!”

“악! 악! 아프다고, 미친 새끼야악!”

숨을 들이켜는 구간마다 이리형의 등을 때린 김민식에 박시찬이 한 걸음 물러났다. 보기만 해도 아프다는 얼굴이었다.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대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주변 시선이 몰렸다. 나는 이 소란을 소강시킬 생각이 없는 세 명을 무시한 채, 파라솔을 설치했다.

그 밑에 돗자리를 깔고 앉으니, 그나마 나았다. 아직 오전 11시였으나, 햇볕은 뜨거웠다. 선선한 바람이 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그늘에 루블리안과 오도카니 앉아있자, 뜨거운 태양 아래에 있던 세 명이 달려온다. 그들의 뜀박질 때문에 방금 핀 돗자리에 모래가 뿌려졌다.

“백션, 짐은 여기다 놓고 바다 가자. 올해도 빠지려 하는 거 아니지?”

박시찬이 내 팔을 붙잡았다. 그 행동에 루블리안이 재빠르게 반응했다. 한 손으로는 붙잡힌 내 팔을 빼내고, 다른 팔로는 나를 껴안아 뒤로 훅 잡아당긴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박시찬이 보였다. 더불어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낯의 이리형도. 김민식은 또 드라마 시청 모드였다. 묘한 기류의 한 가운데 있는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참에 이리형한테도 말하는 게 낫겠지.

“나 얘랑 사귀어.”

껴안긴 그 자세 그대로 손만 움직여 루블리안의 뺨을 잡았다. 넋이 나간 이리형의 표정이 급변했다. 마치 뭉크의 절규 같았다.

“무슨 개소리야 이게?!?”

루블리안을 향해 삿대질하고는 더 말을 잇지 못하던 이리형이 주변이 조용한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시선을 피하는 박시찬과 당당한 김민식을 보더니, 더 크게 소리 질렀다.

“너희는 이거, 이걸 알고 있었어?!”

“대충 뭐…….”

“너랑 다르게 우린 눈치란 게 존재하니까.”

둘의 대답에 더한 충격을 받은 건지, 이리형이 입을 떡 벌렸다. 이윽고 물기 어린 고동색 눈동자가 내게 향한다. 억울하고 속상해 미치겠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이건 배신이야!”

그리 외치고 달려가는 모습을 모두가 한심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조력자에게 배신당한 비련의 조연도 아니고. 기가 막혔다.

“쟤 요즘 넷X리스에서 뭐 보길래 저래.”

“나도 몰라. 걍 성인 됐다고 좋아하더니 더 돌아버린 듯.”

내 물음에 어깨를 으쓱이며 답한 김민식이 움직였다. 혼자가 된 이리형이 사고 치느니, 자기가 감시할 요량인 듯했다. 매일 다투고 때리면서 사이는 좋았다.

“넌 안 가?”“와…… 사랑보다 우정이라 이거야? 우리 함께한 시간이 얼마나 긴데 이래, 백션……. 흑흑.”

이리형이 옛날 드라마에 나올 법한 대사를 쳤을 때보다 더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 싸한 기류를 느꼈는지, 우는 척을 그만둔 박시찬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어떻게 저렇게 비슷한지.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순간, 무릎이 묵직해졌다. 고개를 숙이자, 내 무릎을 베고 누운 루블리안이 보였다. 사르르 눈을 접어 웃는 것 하나만으로 분위기가 말랑해졌다. 숨 막히지 않을 정도로 내 허리를 껴안은 그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바다 좋아해?”“시현이 좋아하잖아요.”

그러니까 저도 좋아요. 그리 대답하고는 내 배에 얼굴을 문댔다. 간지러워 얼굴을 떼어내자, 아쉽다는 기색을 내비친다.

“제 눈 색 닮아서 그런 거죠? 종종 시현은 제 얼굴도 얼굴이지만, 눈을 홀린 듯 바라보는걸요.”눈꼬리가 접히고, 입꼬리가 올라가고, 보드라운 뺨이 씰룩 움직인다. 그 변화를 눈에 새겨넣고 싶었다. 웃는 모습을 몇 년이 흘러도 변색하지 않게 기억하고 싶었다.

“저기 사람 너무 많아서 싫은데, 우리는 우리끼리만 놀까요?”

바람이 작은 속삭임을 싣고 날아왔다.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사람이 많은 것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고,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유혹이었으니까. 정신을 차린 이유는 간단했다.

“백셔어언!”

“어후, 저 애새끼.”

“내 생각에 쟤는 이현한테 맞는다……. 저기만 핑크였는데 우중충해졌잖아.”

다가오는 삼인방 때문이었다. 그리고 박시찬이 한 마지막 말은 실제로 실현되었다. 다시는 소외시키지 말라며 찡찡거리는 이리형을 기어코 루블린안이 쳤다. 다행히도 힘 조절을 했는지 어디 하나 부러지지도 않았고, 멍들지도 않았다.

_oOo_

그렇게 투덕거리다가 용사 커밍아웃도 했었지. 나를 자기가 훨씬 오래 봤다는 이리형의 유치한 발언에, 함께한 시간 운운했던 박시찬의 말이 떠오른 루블리안이 욱했던 탓이었다. 숨길 수가 없어 말했던 날, 그들은 믿어주었다.

미친 사람 취급받을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내가 확신이 없어, 평행 세계 백시현과 상담하는 조건으로 얻은 소원권을 이용해 증거까지 보여줬었다. 울음바다, 웃음바다가 다 되었던 날이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는데, 약하게 내 뺨이 물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그때 봤던 바다가 생각나는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생각해요?”

나직한 물음이 떨어졌다. 갑자기 말수가 줄어든 내가, 겨울방학이 시작됐을 무렵 바다에 갔던 일을 추억하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응, 잠깐.”

“이번에는 누가 운전할까요?”

나를 빤히 응시하던 루블리안이 의문을 내비쳤다. 조금 더 그때를 추억하고 싶어 하는 나를 알아차린 게 틀림없는 물음이었다. 그 배려가 기꺼웠다. 몇 년이 지나도 이런 점은 변함이 없었다. 괜히 팔이 안으로 굽는 게 아니었다.

잠시간 나는 고민에 빠졌다. 저번에는 미성년자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된 우리를 위해 김민식네 아버지가 운전해주셨다지만, 이제 우리는 어엿한 성인이 된 지 오래였다. 다들 운전면허가 있기도 했다.

“이리형은 안 돼.”

“당연하죠. 포함도 안 시켰어요, 저는.”

당연하다는 듯 동의하는 루블리안을 보고는 이리형의 차를 탄 뒤, 토를 한 박시찬을 떠올렸다. 차멀미가 없는 사람이 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게 할 정도의 운전실력이었다. 거기에 몸을 맡기는 건 무리였다.

“너랑 나도 안 돼.”“으음, 뒷자리에서 둘만의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장난스럽게 콧잔등을 찡긋한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되도록 스킨십을 자제하려는 나를 자주 봐왔으니,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이번에는 틀렸지만.

“그런데 왜. 싫어?”

몇 년 동안 같이 살면서 나도 뻔뻔함과 능청스러움이 늘었다. 사랑하면 닮는다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된 건, 내가 자신을 너무 사랑하게 만든 루블리안 탓이었다.

이런 답이 되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한 건지, 루블리안의 얼굴이 곧 터질 것 같았다.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변화가 확실했다. 자칫 손을 가져다 대면 화상을 입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붉었다.

루블리안이 당황스러운 눈치로 입을 뻐끔뻐끔 열었다가 닫는데, 소리는 하나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목울대가 잠잠했다. 오랜만에 뚝딱거리는 모습이다.

“……조, 좋아요.”

연기가 아닌 진심으로 수줍어하는 루블리안에, 무심코 입을 맞추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갑작스러운 친구의 침입으로 인해 잠잠해졌던 열기가 살아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입술을 맞댔다. 아랫입술이 깨물려 입을 벌리자, 뜨거운 살덩이가 입속을 부드럽게 유영했다. 얽히고 빨리는 감각에 손끝이 저릿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너무나 생생하게 와닿아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내 커다란 손이 내 허리춤으로 들어와 살결을 부드럽게 쓸었다. 그 감촉에 놀라, 무심결에 루블리안의 혀를 씹어버렸다. 그러나 그는 아픈 기색이라고는 하나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흥분을 돋군 모양인지, 사납게 키스했다.

슬슬 숨이 부족해 루블리안의 어깨를 꽉 쥐니, 맞붙은 입술이 떨어졌다. 숨통이 확 트여, 숨을 고르는데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배 속이 오싹했다. 푸른 눈동자에 담긴 욕망이 지나치게 선명한 탓이었다.

“읏.”

예고 없이 어깨가 깨물렸다. 통증은 잠시뿐이었고, 살결이 빨리는 느낌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서서히 쌓이는 쾌감에 내 허리를 만지작거리는 손을 잡아당겼다. 적극적인 태도에 루블리안이 달뜬 숨을 크게 내쉬었다.

“내일 주말이라고 이렇게 자극하는 거예요?”

“주말이 무슨 상관이야. 으응, 어차, 피.”“프리랜서니까? 나는 돈 많은 한량이고.”

주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의 루블리안은 오랫동안 날 놓아주지 않았다. 몇 년이 지나도 체력이 늘면 늘었지, 줄지를 않아 자극한 대가로 나는 내내 울어야만 했다. 좋아서, 힘들어서, 기절했다가 눈만 뜨면 꼭 안아오는 짐승 새끼 때문에.

따사로운 햇볕이 눈꺼풀에 내려앉아, 느지막하게 눈을 떴을 차였다.

“시현.”

웬일로 자는 척을 하지 않고, 루블리안이 나를 호명했다. 마지막 기억이 욕실에서 씻고 난 뒤였다. 거기서 필름이 끊겨 있는 걸 보니, 그때가 마지막인가 보다. 아픈 허리를 손으로 문지르며 루블리안을 응시하자, 그가 사르르 눈을 접어 웃었다.

“생일 축하해요. 사랑해요.”

비록 짐승 새끼 때문에 움직일 수는 없지만, 좋은 아침이었다. 루블리안과 사귄 이후로 늘 그랬듯 행복한 생일의 시작이었다.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외전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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