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11)화 (111/112)

15.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만큼, 나와 루블리안이 갑작스러운 방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세 사람이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방문한 이유가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백션, 지금 우리가 왜 왔는지 생각하고 있지?”

학생 신분을 벗어나 완전한 사회에 들어선 뒤로부터 ‘-죠.’를 버린 이리형이 알만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 알만한 놈은 제대로 된 대답도 하지 않고 맥주캔을 뜯었다. 홀짝 마시는 모습 위로 앳된 얼굴이 겹쳐졌다. 이들이 나이가 들었다는 게 새삼스럽게 와닿았다.

“내일 네 생일이잖아.”

“벌써 그렇게 됐나.”식탁 위에 있는 달력을 보니, 파란 동그라미와 별표가 가득한 날이 있다. 내 생일이었다.

루블리안은 새해마다 달력을 사 왔다. 그러고는 질리지도 않는지 내 생일을 꼭 눈에 띄게 표시했다. 그 모습이 즐거워 보여, 루블리안이 파란 펜을 들 때면 나 또한 동참해 루블리안의 생일을 연갈색 펜으로 표시하곤 했다.

“매년 생일마다 연락하면 늦게 보고, 만나자고 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몇 년이나 그게 반복되니까 올해만큼은 얼굴 보고 축하해주고 싶었거든.”

어느새 맥주캔을 내려놓고, 두 팔을 조금 뒤로 하여 상체를 뒤로 빼고 있던 이리형이 어깨를 으쓱였다. 놀러 가자는 건 겸사겸사 한 말이라는 듯이.

“그래도 내일 들이닥칠 생각은 안 했다?”

“…….”

“상도덕 지켰으니까 눈 좀 그렇게 뜨지 말라고.”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는 루블리안을 향해 김민식이 말했다. 상당히 떨떠름하고, 질색하는 모습이었다. 몇 년간 수없이 봐온 모습이기도 했다.

“으, 무서워서 살겠냐? 나는 시발, 쟤가 저렇게 눈 뜬 덕분에 누구한테 혼나는 게 무섭지가 않더라.”“아, 미친! 너도?”

“쟤는 백시현한테만 얌전 떨잖아. 쟤랑 한 번 지내보면 다른 사람의 호통따위야.”

서로 쿵짝이 잘 맞는 세 명은 한결같았다. 멍청하게도 그 무섭게 눈을 뜨는 사람한테 앞담을 깐다는 점이.

내 왼쪽 손 위로 제 손을 포개고 있는 루블리안의 얼굴은, 굳이 말할 필요 없이 매서웠다. 아까와 다를 바 없이 웃는 낯으로 그 흉흉한 기세를 드러낸다는 점이 제일.

그를 바라보다, 내핵까지 무덤을 파는 세 명을 응시했다. 뜯은 맥주도 다 못 마시고 쫓겨나게 생겼다. 그러는 편이 내게는 더 이로워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서서히 소리가 죽어갔다. 처음은 김민식이었다. 그는 바로 앞에 있는 루블리안을 보더니, 뒤늦게 깨달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박시찬이, 마지막으로는 이리형이 조용히 했다. 평소 눈치 순이었다.

“나가.”“그…….”

“나가라고.”

잘못 삐끗하다간 베일 눈초리였다. 어조 또한 단호했다. 그 모습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본 세 명이 빠르게 일어났다.

“넵.”

“간다, 가.”

“생일 축하해, 백션~!”

야무지게 자신들이 먹던 맥주캔을 챙겨 우르르 현관으로 나갔다. 아니, 근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진짜 너무하다니까. 온 세상 커플 다 X됐으면. 근데 쟤네가 망하면…… 뭔가 세계 멸망할 것 같지 않냐? 너 몇 모금 마시고 취했냐? 으, 지 커플이라고 이렇게 옹호하네. 평소 그다지 시끄럽지 않던 집안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나갈 때나, 들어올 때나 똑같이 말이 많았다.

이윽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닫히는 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드디어 시끄럽지만, 마음만은 가상한 놈들이 집을 떠난 것이다.

“저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요, 시현.”“쟤네가 내 친구인 게?”

“네에. 어떻게 저렇게 머저리 같을 수 있을까요?”

쟤들이 자리를 일어서자마자, 내 허리에 팔을 두른 루블리안은 진심으로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곧 그 얼굴이 내 어깨를 파고들었다.

“상식적으로 누가 30분 전에 연락하고 들이닥쳐요. 그것도 연인이랑 알콩달콩 사는 집에.”

“그렇긴 하지.”

머저리 취급을 하면서도 루블리안은 그들을 꽤 가까이 여겼다. 내 친구라는 이유도 있긴 하지만, 진짜로 안 좋아했다면 들여보내지도 않았을 테다. 몇 년간 친분을 유지하지도 않았을 거고, 앞담을 봐주지도 않았겠지. 나는 맥주를 한 번 더 마시고는 허리에 둘린 팔을 툭툭 쳤다.

“안 놓으면 안 돼요?”

내 목에 입술을 문지르며 루블리안이 애교를 부렸다. 몇 년이 흘렀는데도 나 또한 세 명과 다르지 않았다. 한결같이 그의 수작에 흔들렸다.

“……치우고 안고 있으면 되잖아.”

“방금 막 껴안았는데.”

말꼬리를 늘이며 대답한 루블리안이 곧 작정하고 살랑거렸다. 결국 나는 테이블 위를 나중에 치우겠다고 약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앉아서 조곤조곤 말을 하고 있다 보니, 갓성인이 되었을 무렵이 생각났다.

“이번에도 엄청 시끄럽겠는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그걸 놓치지 않은 루블리안이 내 턱에 짧게 입을 맞추고는 물었다.

“바다 가는 거요?”

“어. 지금도 저렇게 소란스러운데 바다에 가면 얼마나 더 하려나.”

나이가 들어 조금은 덜 시끄럽지 않을까.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오늘 한 것만 봐도 절대 아니리라는 답을 내릴 수 있었다. 상사한테 쪼이면서 일하면 힘이 더 빠져야 하는 거 아닌가. 오히려 분노를 원동력으로 더 힘을 발하는 것 같다.

“그래도 그때 시현, 즐거워 보였어요.”

그 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사붓하게 눈꼬리를 접어 웃는 모습이 보였다. 행복하다는 감정이 여실하였다. 그게 사랑스러워 턱이 아닌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너도 그랬어.”그날은 유독 하늘이 청명한 날이었다. 꼭 루블리안의 눈동자를 빼닮았었다.

_oOo_

“와씨, 바다다!”

감탄사를 흘린 이리형이 빠르게 뛰쳐나갔다. 그 뒤를 박시찬이 이었고, 김민식은 창피한 것들을 본다는 시선을 하다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맨 마지막으로 차에서 나온 나와 루블리안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김민식, 이 자슥아! 넌 아빠한테 인사도 안 하냐?”

“아빠, 땡큐!”

“어휴, 저것도 아들이라고…….”

앞서가던 김민식이 뒤돌아 간단한 인사를 건네자, 그의 아버지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자식 키워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소리까지 나오는데, 그 자식인 놈은 태연하기만 했다. 하도 들어 별 타격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시현이랑 현이! 너희들도 재밌게 놀다 오거라!”

“네, 감사합니다.”등을 돌려 상체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신난 아들에게 반쯤 무시당한 걸, 내 인사로 치유하는 건지 표정이 확 밝아지셨다. 김민식의 성격과 딴판이셨다.

짐들은 다 김민식네 아버지께 맡겨놓고 바다로 향한 놈들에게서 꼬리가 보이는 기분이었다. 바다. 그냥 바다일 뿐인데, 놀러 왔다는 사실 자체로 흥분한 것 같기도 했다.

“시현, 바다 들어갈 거예요?”

“발만 담그고 싶긴 한데…… 쟤네가 빠트릴걸.”

안 봐도 뻔했다. 가만히 파라솔 밑에 앉아 휴식을 취하면 물에 젖은 축축한 손이 내게 닿을 것이다. 내 팔이랑 다리를 잡은 채로 바닷물에 던져버리겠지. 작년, 아니 이제는 재작년인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한 번 그렇게 당했었다.

“제가 지켜줄게요.”무심히 답한 말에 루블리안이 진지하게 말했다. 자유로운 한 손을 꽉 쥐고는 결연한 표정을 짓는 게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나는 잠시 정신을 차리기 위해 눈을 굳게 감았다가 떴다. 뜨거운 햇살이 눈꺼풀에 스몄다.

“……됐어. 뭘 지키기까지 해.”“으응, 좋다는 거죠? 알겠어요.”“또 멋대로 해석하지.”

“그치마안. 시현이 저를 엄청 귀엽다는 듯이 바라봤는걸요.”

생글생글 웃는 루블리안의 시선을 피했다. 귀엽다고 생각했던 게 사실인지라, 말문이 막혔다. 사귄 후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 하고 있으니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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