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우선 밥 먹고 깨운 다음에 보내는 거 어때요? 오늘 밤도 저랑 바쁘게 보낼 텐데 그 장면을 보여 줄 수는 없잖아요.”
입에 밥을 뜬 수저를 넣은 상태였기에 말을 자르지 못했다. 얼굴이 확 붉어졌다. 시간이 꽤 흘렀음에도 저런 말에는 면역이 없었다. 간절히 생기길 바라는 수준이었다.
“너 진짜…….”
“왜요?”
다 알면서 모른 척 생글거린다. 놀리려는 의도가 빤히 보였다. 여기서 무어라 해 봤자 더 놀리기만 할 테다.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음식물을 씹었다.
밥 먹는 동안 루블리안은 계속해서 내 주의를 끌었고, 평행 세계 미친놈은 역시 일어나지 않았다. 마신이 수를 쓰지는 않을까 했는데, 괜한 의심이었나. 그런 생각을 하며 밥을 삼키고 수저를 움직였으나, 챙 소리만 날 뿐이었다. 밥 다 먹었다.
“맛있게 잘 먹었어. 설거지는 내가 할게. 너는 다 먹고 쟤 깨워.”
식기들을 들고 싱크대로 향했다. 뒤에서 루블리안이 자기가 하겠다고 하는 게 들렸지만, 무시했다. 웃기게도 매일 설거지는 누가 하느냐에 대한 토론이 일어났다. 그것도 미루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하겠다는 걸로.
“즈 다 머거쓰요.”(저 다 먹었어요.)
곧 터질 것 같이 빵빵한 하얀 뺨이 움직였다. 우물거리는 입술에서 급박함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설거지를 시키지 않겠다는 속내가 엿보였다.
기가 찼다. 누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남은 밥을 한 번에 먹냐고.
“넌 요리 했잖아.”
“으버느 가즈해즈으요.”(여보는 과제 했잖아요.)
“그건 집안일이 아니고. 요리는 집안일이고. 심지어 너는 내 과제도 도와줬잖아.”
루블리안도 인정하긴 하는지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내 손을 바라보며 얼굴로 일 시키기 싫다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릇만 주고 쟤 깨워.”
“네에…….”
미련이 남은 모양인지 힐끔힐끔 고무장갑을 끼는 날 보다 고개를 푹 숙인다. 어떻게 해도 설거지 당번을 자신한테 넘겨주지 않으리란 걸 실감한 듯했다.
쏴 하는 물소리와 뽀득뽀득 소리가 묘하게 어우러졌다. 그릇이 몇 개 없어 설거지는 일찍 끝났다. 주변에 튄 물을 행주로 닦고 고무장갑을 싱크대에 걸쳤다.
뒤를 도니, 루블리안이 평행 세계 미친놈을 발로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건드리기도 싫다는 걸 온몸으로 나타낸다. 차라리 내가 깨우는 게 빠르겠다 싶어 다가가는 순간, 마법진이 나타났다.
그리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눈을 떴다. 마법도 써주기 싫어서 여태 발로 툭툭 건드리고만 있던 모양이다.
“이제 돌아가.”“뭐?”“마신의 계약 푸는 조건, 스물두 살의 내가 행복한 거잖아. 아까는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니라서 도저히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는데, 이젠 할 수 있거든.”
무릎을 구부려 누워 있는 그를 덤덤히 바라봤다. 곧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마신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증오하는 내가 행복한 게 꼴 보기 싫다거나.
“나 행복해.”
“…….”
“물론 시발, 조별 과제 같은 건 빡치고 연 끊는다고 했더니 자기가 날 그렇게 키웠냐고 따지는 생물학적 혈연도 귀찮아. 그렇게 관심 없었으면서 놔주기는 싫은 건지 아득바득 연을 이어 가려는 게 멍청해 보이기도 해.”
생물학적 부모님에게는 원래 세계로 돌아오자마자 절연을 선언했다. 그들은 성적이 어느 정도 나와 남들에게 자랑거리로 삼기 좋은 패인 날 놔주고 싶진 않았는지, 연락을 끊임없이 해 왔다. 차단하고, 번호를 바꾸더라도 계속.
그 끈질김이 귀찮기만 했다. 내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 사람에게 굳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거머리 같은 이들이 떨어져 나가길 바랐다. 루블리안과 평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기도 바빴으니 말이다.
나는 다음 말을 기다리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 조금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근데도 행복해. 애인이 귀엽고, 시끄럽지만 친구들은 활달해서 보는 재미가 있지. 또 맛있는 걸 먹을 때도 소소하게 즐거워.”
언제나 행복하다는 건 있을 수 없다. 여러 감정을 느끼는 이상, 가끔 사소한 걸로 기분이 상하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 것에 슬퍼지기도 한다. 아무리 가진 게 많은 사람일지라도 원하는 것이 너무나 쉽게 손아귀에 들어와 따분함을 느끼는 일이 다반사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다.
“그러니까 나는 이 생활에, 삶에 만족하고 행복해. 지금 배부르고, 애인이 질투해서 기분이 좋거든.”
슬픈 일보다, 감정이 상하는 일보다 행복한 일을 더 많이 만들도록 하는 것.
나는 그렇게 잘살고 있었다. 가끔은 짜증 내고, 고집부리지만 그것의 배로 즐거워하며.
“이제 네 세계로 돌아가. 계속 마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건, 그 신 새끼한테서 받은 축복 때문이니까. 돌아가서 나와 거래해. 풀어 달라고.”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말을 마친 나를 빤히 응시하더니, 이윽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행복한 네가 싫어. 영원히 불행했으면 하는데…… 네 행복을 바라기도 해.”
눈꺼풀이 올라가고 루블리안과 같으면서도 다른 푸른 눈동자가 나를 담아낸다. 여러 감정이 혼잡하게 섞인 게 보였다.
“사랑하고 미워했어, 자기야.”
안녕.
그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사라졌다. 마법진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전, 그 찰나의 순간에 본 그는 조금은 후련해 보였다.
저러고 과거의 나한테 그렇게 군건가. 어이가 없었으나, 미친놈다운 행보다 싶었다.
그렇게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의 길고 질긴 악연은 끝이 났다.
스물두 살의 백시현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끝으로.
Chapter 외전 4. 추억을 기리며.
“크, 이제야 살겠네!”
연락도 없이 남의 집에 들이닥친 세 명 중 한 명인 박시찬이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소리쳤다. 슬슬 나이가 들긴 했다는 느낌을 받긴 했으나, 저리 아저씨 같을 줄은 몰랐다. 제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박시찬이,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듯 머쓱하게 웃었다.
그게 방아쇠가 된 듯 아직 맥주캔을 따지 않은 김민식과 이리형이 박시찬을 놀려먹기 시작했다. 이제 아저씨가 다 됐네! 뭐래, 아직 창창하거든?! 방금 건 진짜 걍 K-저씨였어. 너랑 나랑 같은 나이라는 거 잊지 마라. 그냥 그런 고등학교 때와 다름없는 말들의 향연이었다.
“야.”당일 연락으로 집에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걸, 특히 불쾌하게 여기는 루블리안이 딱 한 마디를 했다. 그러자 모두들 합죽이가 된 듯, 시끌벅적하던 거실이 침묵에 잠겼다. 무슨 거대한 파도에 침몰한 배를 보는 줄 알았다.
“왜 왔는데.”
방금까지 활기로 차올랐던 공기가 빠르게 식어갔다. 그럴 만했다. 저들이 문자를 보내오기 전까지 루블리안은 나한테 수작을 걸고 있었고, 나는 거기에 넘어가 줄까 고민하고 있었으니.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루블리안이, 코앞에 있는 기회를 놓치게 만든 걸 좋아할 리 없었다.
그들이 사 온 맥주캔 하나를 따, 입에 댔다. 알고 지낸 지 11년이 다 되어가서 그런지 취향 하나는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 홀로 느긋하게 맥주캔을 기울이니, 말려달라는 눈초리가 내게 닿는다.
그 시선을 무시로 일관했다. 자업자득인 것도 있고, 나 또한 당일 통보로 집에 방문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나보다 루블리안이 더욱 화가 난 상태라,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것뿐이었다.
“그…… 곧 휴가철이잖아?”
내가 누구의 편도 들지 않으리란 걸 먼저 알아차린 박시찬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맹수에게 접근하는 소동물 같은 모양새였다. 어울리지도 않는 소동물을 연상시켜내는 것도 재주였다. 나는 또다시 맥주를 한 모금 삼켰다.
“그래서?”
“같이 1박 2일로 바다를 가지 않겠냐는, 그런 거지.”
말을 끝마친 박시찬이 머쓱하다는 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그 모습을 보다 자연스레 든 의문이 있었다. 그걸 왜, 오늘 우리 집에 와서 말하는데. 30분 전에 우리 집에 오겠다고 통보를 한 메시지 기능을 어째서 이용하지 않은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