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이 교수는 협동심을 중요하게 생각하긴 했으나, 무임승차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름을 빼더라도 이 빌런들의 대화 기록이 존재하는 이상 감점은 당하지 않을 테다.
“도와줄게요. 어떤 부분 자료 필요해요?”
“……넌 다 했어?”
“그럼요. 저는 음, 팀원 운이 좋았어요.”
루블리안이 눈을 도르르 굴리다 눈치 보며 답했다. 내 팀원 운이 조졌다는 걸 알아 그런 게 분명했다.
할머니 장례식이라고 한 새끼는 수소문해 본 결과, 아주 유명했다. 재작년에도 할머니, 외할머니를 다 팔아먹었다고 하더라. 작년에는 할아버지, 외할아버지였고.
갑자기 가족 모임이 생겼다고 한 놈은 다른 동기 놈이 놀러 가는 걸 사진 찍어 보냈다. 그게 한 시간 전이었다. 시발.
“그럼 미안하지만, 이 부분만 좀 찾아 줄래?”
“좋아요. 대신 뽀뽀 해 주기.”
루블리안이 귀엽게 눈웃음치며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간지러운 느낌에 짜증이 가라앉고 웃음이 났다. 나는 꿀이 흐르는 듯한 금발에 머리를 기댔다.
“이러고 있으면 못 해 주는데.”
“그럼 조금만 있다가 해 줘요. 네?”
“그러든가.”
조르는 모습은 이제는 눈 감고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익숙했다. 나는 기댔던 머리를 떼고 다시 자료 조사와 ppt 만들기를 시작했다.
더 노닥거리다간 루블리안이 도와주더라도 오늘 안에 못 끝낼 게 확실했다. 내 분량은 이미 다 끝낸 지 오래였으나, 미친 빌런들이 맡았던 분량이 꽤 많았다.
어느 정도 끝나갈 때쯤, 바닥에 쓰러진 그대로 방치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눈에 들어왔다. 안 옮긴 나도 나지만, 루블리안도 루블리안이었다. 뭐, 저 미친놈이 했던 짓을 생각하면 당연하지만 말이다.
“시현, 나머지는 밥 먹고 해요. 그 정도 시간은 있잖아요.”
“다 하고 먹을게.”
“아까도 그렇게 말하고 아침, 점심 걸렀잖아요. 저녁은 먹어야죠…….”
힘없는 음성이었다. 표정 또한 시무룩하기 그지없다. 한국인은 난데 왜 쟤가 밥에 집착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와 동시에 갑작스럽게 김민식과 이리형이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말이 떠올랐다.
루블리안은 아무리 봐도 토종 한국인이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인에 가깝지. 그래서 그런지 그 얼굴로 누구보다 한국인다운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인지 부조화가 온다고 그랬었다.
그 둘도 바쁜 것 같던데. 만날 시간이 있긴 하려나. 나는 다른 쪽으로 새는 생각을 붙잡고는 입을 열었다.
“거의 다 끝냈어. 30분만 기다려 줘.”
이어 고개를 들고 식탁에 밥을 옮기는 루블리안을 응시했다. 부러 고개를 갸웃거리자, 루블리안이 입을 꾹 다물었다. 저도 모르게 알겠다는 말이 나올까 봐 저러는 게 자명했다.
내가 먼저 하는 스킨십에는 익숙해졌으면서, 조르는 건 아직인가 보다. 귀엽긴.
“루블리안.”“…….”
“남편아.”
“……그렇게 웃으면서 부르면 내가 봐줄 것 같아요?”
양 볼에 바람을 조금 넣고는 입술을 삐죽이는 모습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그에 더 뾰로통해지는 얼굴이 보였다.
“그럼 아니야?”
내가 루블리안의 얼굴을 좋아하고, 그라는 존재 자체를 좋아하는 만큼 루블리안도 그랬다. 같이 몇 년을 살면서 견고한 확신이 생겼다.
예상대로 루블리안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멍해졌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 몰랐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시, 시현, 왜 이렇게 뻔뻔해졌어요? 물론 그것도 귀여워서 죽을 것 같아요…….”
“네가 사랑하면 닮는다며. 그리고 죽을 것 같다는 소리하지 말랬지. ‘그때’ 생각나서 심장 철렁하니까.”
덤덤히 봉인을 위해 눈앞에서 죽었던 것을 언급하자, 루블리안이 멈칫했다. 몇 년이 지나도 그때 일은 본인이 잘못했다는 걸 아는지 언급만 하면 입이 조개처럼 다물린다.
누군가 그 일을 언급하는 게 이제 아무렇지 않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아니’라고 답할 테지만, 그때보다 나은 건 맞았다. 내가 속한 세계는 상대적 평화로웠고 마물, 마왕 같은 루블리안을 위협할 만한 요소가 없었다.
“당신도 그랬으면서.”
“나는 네가 잊을 걸 알고 한 거였잖아. 그래도 미안해.”
“으응. 저도 미안해요…….”
순순히 사과하자, 루블리안도 그랬다. 자칫하면 싸울 수 있는 화제였지만, 우리 둘 다 서로를 너무 사랑하는 나머지 언제나 선뜻 잘못을 인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30분만 딱 기다려 줘. 얼른 끝내고 밥 먹을게.”
“알겠어요. 기다릴 테니까 무리는 하지 말아요. 조금 늦게 먹어도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모른 척 고개를 끄덕이곤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밥 먹고 발표 준비도 해야 했다.
바쁘게 ppt를 완성하자, 어느덧 42분이 지나 있었다. 루블리안은 내 앞자리에서 지긋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자길 보나 기다린 모양이다.
“다 했어.”
“그럼 이제 먹어요. 불고기 먹고 싶었다면서요.”
노트북이 올라간 부분을 제외하면 테이블 위는 밥과 반찬으로 가득했다. 하던 일을 끝내면 바로 밥 먹일 생각이었나 보다.
“고마워.”
“뭘요.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건데요.”
“그래도 요리는 힘드니까.”
내 말에 루블리안이 배시시 웃었다. 화려한 낯이 순해졌다.
“늘 말하잖아요. 당신은 맛있게 먹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깊은 울림이 느껴지는 음성에는 진심이 한가득하였다. 정말 그거면 된다는 듯한 얼굴은 곧 봄바람을 몰고 올 것만 같았다. 뭐든 애인의 진심 어린 한마디면 사르르 녹는다는 박시찬의 말을 다시금 이해했다.
“……네가 만드는 건데 안 맛있을 수가 없지.”
“여보오오.”내 극찬에 감동했다는 듯 루블리안이 말끝을 길게 늘이며 날 불렀다. 그러나 곧 눈꼬리가 장난스러움을 매달고는 접어졌다.
“그렇지만 전 여보가 만드는 건 맛있게 먹기 힘들어요.”
“억지로 먹이기 전에,”
“네에. 그만할게요. 그러니까 밥 먹어요.”
말하는 도중 루블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어 식탁에 올려진 노트북과 책들을 빈 의자 위로 옮겼다. 수저와 젓가락을 내 앞에 놓아주기까지 하는 게, 얼른 밥 먹으라고 재촉하는 모양새다.
그 행동에 나는 수저를 들어 올렸다. 요리를 그다지 못하긴 하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치고 들어왔지만, 이내 속으로 반박하는 걸 관뒀다. 루블리안이 나보다 요리를 잘하는 건 사실이니 말이다.
“삐졌어요?”
“아니. 그럴 만한 일은 아니지. 너보다 못하는 건 사실이니까.”
“으음.”
난감하다는 눈길이 닿았다. 삐지지 않았다고 했는데, 혼자 무슨 착각을 하는 건지 머릿속이 훤했다.
“아니라고.”
“거짓말.”
“그럼 삐졌다고 하든가.”여기서 더 아니라고 해 봤자, 한 번 확신한 이상 루블리안은 제 의견을 거두지 않을 테다. 나는 뻔뻔스럽고 고집이 세며 귀여운 루블리안을 잘 알았다.
“그보다 저놈은 왜 이렇게 오래 자?”
여전히 바닥에 누워 있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눈짓했다. 마음에 안 드는 대상을 언급해서 그런 건지, 내 관심이 다른 곳으로 향해서 그런 건지. 루블리안은 평행 세계 미친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입술을 뗐다.
“여보가 열심히 과제 할 때 수면 마법 좀 썼어요.”
“웬일로 좋은 일 했네.”
“그렇죠? 시현도 저랑만 있고 싶었죠?”
화려한 낯이 금세 밝아졌다. 얼굴에 형광등 기능이 있나. 일순 빛이 눈을 찌르는 듯해 눈꺼풀을 내렸다가 느릿하게 올렸다. 그러고는 루블리안이 착각한 부분을 짚어줬다.
“그것도 맞는데, 내가 말한 대상은 쟤야. 머릿속을 마신이 휘젓고 있을 텐데 마법 덕분에 푹 잘 거 아니야.”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좋은 일을 해 줬다는 사실을 적시한 탓인지 표정이 급격하게 안 좋아졌다. 빠르게 밝아졌다가, 어두워지는 모습을 보니 형광등 기능설에 힘이 더해졌다. 현실적으로 그런 게 있을 리 없는데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