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와 평행 세계 백시현이 만났을 무렵, 우리의 차이점이라고는 연애 여부밖에 없었으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거기다 평행 세계 백시현에게는 의지할 사람도 없었으니, 여러 가지가 맞물려 저런 답이 나온 게 분명했다.
“지금은 안 해. 아무리 좋아해 보려고 해도 안 돼서 관뒀어.”
평행 세계 백시현은 잘못을 고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테이블 위로 꼼질 거리는 흰 손이 보였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신이 가이드북이라도 내려줬으면 하는 심정이었다.
“이 주제는 우선 넘어가고…… 아까 사과했잖아. 왜 여태 짧게 대답한 건데?”
“더 오래 만나고 싶어서.”
“뭐?”
“그 속도로 대화를 계속하면 더 이상 말할 게 없을 테니까.”요컨대 대화 주제가 떨어져, 자신을 이해하는 이와 헤어지는 게 싫었다는 말이었다.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름 멀쩡하기는 무슨. 착각도 제대로 했다. 나는 지끈거려오는 머리를 손으로 꾹꾹 눌렀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꽤 망가져 있었다. 용사로서 간 세계에서 겪은 비현실적인 일들을 공감해줄 사람이 곁에 없었으며, 고작 열아홉 살에 여러 일을 겪었다. 동료에게 배신을 당한다거나, 마왕으로 변해 목이 잘린다거나 하는. 그 이후 정신적 보살핌도 얻지 못했으니, 만일 그가 멀쩡했다면 그게 더 이상했을 테다.
“너는 못 들었나 본데, 우리 오늘만 보는 거 아니야.”
“……아니야?”
미미하지만, 확실히 눈이 커졌다. 놀라움이 깃든 건 연갈색 눈동자뿐이 아니었다. 루블리안도 그건 처음 듣는 소리라는 것처럼 반응했다. 당연했다. 지금 막 내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었으니까.
“어. 아니야. 그러니까 이야기 다 해도, 다시 만날 기회는 있어. 다시 만나면 그때는 그동안 뭐 했는지 이야기하면 되는 거고.”
스스로 귀찮은 짓을 자처한다는 게 우스웠다. 평행 세계 백시현이 저런 상태인 걸 내가 책임질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보상해야 할 이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도 이러는 건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동정이었고, 같은 사람이라는 것에서 오는 유대감이었다. 딱 그 정도의 값싼 감정이었다.
“알겠지.”
“……응.”
평행 세계 백시현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날의 대화는 일단락되었다. 나가려는 마음을 먹자, 들어왔을 때랑 같은 위치에 문이 생겨났다. 조금 퉁명스러운 낯의 루블리안을 잡고 발걸음을 떼었다.
“다음에 봐.”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트니, 더 만날 수 있다는 것에 안심한 얼굴이다. 언제인지 정확한 날은 말하지도 않았는데, 마냥 좋은 것 같았다. 그 태도에 한숨이 흘러나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팔자에도 없는, 잘 알지도 못하는 심리 상담을 하게 생겼다.
눈을 뜨고, 꿈이 아닌 현실이라는 걸 직시하자마자 나는 옆을 바라보았다. 루블리안의 두 눈은 꼭 감겨 있었다. 같이 나와도 깨어나는 데에 시차가 있나 싶었다. 나는 부드러운 금발을 한차례 쓸어넘기고는 신을 찾았다.
‘신.’
[네, 시현.]
‘난 심리학과가 아니야. 자원봉사자도 아니고.’
끙, 앓는 소리가 들렸다. 서두 없는 말이었으나, 신은 말뜻을 다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하긴 모를 리가 없지. 이때까지 평행 세계 백시현의 상태를 확인한 것도 저 신일 터였다. 그러니 내게 이야기 좀 해보라고 하지.
‘하아. 몇 번 더 꿈에서 만날게.’
[정말요?! 어쩐지, 주신님은 이 상황을 이미 다 보신 거네요!]
갑자기 주신이 왜 튀어나와. 탄성을 내지르는 소리에 머리가 찡하고 울렸다. 언제나처럼 저절로 이맛살에 주름이 졌다.
[전달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었잖아요. 사실 그게 하나가 아니거든요.]
‘주신이 무슨 말을 전하라고 했나 보지.’
그것도 지금 상황과 관련된. 주신이 내게 전하라고 한 말이 무엇인지 반쯤 예상이 갔다. 몇 번 더 만나는 대신 조건이 있다고 하려 했으니 말이다.
[네, 맞아요. ‘다시는 안 보길 바라는 아이야, 원하는 게 뭐든 들어줄 테니 그 가여운 아이를 잘 돌봐주렴.’이라고 하셨어요. 주신님은 정말 자애로우신 분이세요.]
황홀하다는 심정이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였으나, 내 관심 밖이었다.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대목이 내겐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그렇다면…….’
_oOo_
아직 꿈의 세계를 나가지 않은 평행 세계 백시현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루블리안을 눈에 담았다. 주술을 걸고, 결국 마왕으로 만들어 죽인 장본인과 다를 바 없는 얼굴. 그는 그 얼굴이 지독히도 싫었다.
“우리 여보한테 의지하지 마.”
“…….”
“그 ‘사랑’을 찾으려 들지도 말고.”
눈을 한 번 깜빡인 순간, 날카로운 눈길이 사라졌다. 그 경고를 남기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이곳에서 벗어난 것이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그 행태를 비웃지도, 코웃음 치지도 못했다.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딘가가 망가졌고, 망가질 부분을 고칠 생각은 하지도 않는 주제에 자신과는 너무도 다른 백시현을 바란다는 걸.
그것도 동경인지, 사랑인지, 부러움인지, 질투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무도 없는 하얀 공간에 홀로 남은 평행 세계 백시현은 느리게 몸을 움직였다. 들어왔을 때처럼 문이 생기고, 그 문을 열고 나가자 퍼질러 자는 세 명이 보인다.
‘박시찬, 김민식, 이리형…….’
대학교에 입학을 하고 나서도 꾸준히 연락을 취하는 애들이었다. 자취한다는 소식에 재빠르게 달려와 이 집을 무슨 비밀 기지처럼 이용하는 애들이었다.
‘얘들한테 말해봤자, 안 믿겠지.’
불안정한 자신을 보고 걱정해서 더욱 유난스럽게 군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용사가 되어 겪었던 일로 인한 충격이 컸다. 사람을 쉽사리 믿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현실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이야기였다.
만약 이 세 명 중 한 명이라도 병원에 가보기를 추천한다면, 그때는 버틸 수 없으리라. 간신히 붙인 조각들이 재로도 남지 않으리라. 평행 세계 백시현은 진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언젠가, 언젠가는…….’
불확실한 미래였다. 현재로서는 말할 생각이 하나도 없으니 오지 않을 미래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인간인지라, 나락까지 떨어져 봤음에도 여전히 인간인지라,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을 붙잡고 있는 것이었다.
“뭐야, 백션 오늘도 악몽 꿈……?”
제대로 눈도 못 뜬 채, 박시찬이 물었다. ‘악몽’이라는 단어를 듣고 잠시간 멈칫한 평행 세계 백시현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니까 더 자기나 해.”
“오키……. 너도 더 자라.”실눈이 완전히 감겼다. 상체를 일으키고 있던 백시현은 다시 몸을 뉘었다. 이내 다음 만남을 기다리며 눈을 감았다.
‘얼른 보고 싶다.’
부디 이번에는 나를 저버리는 친구들이 꿈에 나오지 않기를. 부디 이번에는 목이 꿰뚫리지 않기를. 부디 이번에는 꿈에서만이라도 사랑을 해볼 수 있기를.
부디,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