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꿈을 통해 만난다니 아쉽네요.”
마치 실체가 아니라서 아쉽다는 듯했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건지. 예상이 안 갔다.
“병풍처럼 있기로 한 거, 안 잊었지?”
“네에. 그럼요. 여보가 잘못 말해서 조각상처럼 있기로 한 거 안 잊었냐고 한 것도 기억하는걸요.”
루블리안이 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순진한 척하는 게 수준급이었다. 하도 보아서 눈꼬리에 아롱아롱 달린 장난기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래도 귀엽게 보여서 문제였다. 저런 행동을 보고 그냥 넘어갈 때마다 콩깍지가 제대로 씐 게 분명하다던 박시찬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그다지 듣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때였다. 테이블과 의자만 덩그러니 놓인 흰 공간에 네모난 문이 생겨났다.
“……아.”
이내 문이 열리고, 나와 똑같은 새까만 흑발이 드러난다. 시선이 교차하고, 상대가 눈을 크게 떴다. 무관심해 보이던 낯이 선명한 감정을 띠었다.
그것은 반가움 혹은 그리움이었다.
그도 아니면 둘 다라든가.
“안 앉아?”멍한 표정으로 멀뚱히 서 있는 게, 먼저 입을 열진 않을 것 같아 물었다. 그러자 평행 세계의 백시현이 느리게 움직였다. 의자를 빼내어 앉은 그는 여전히 말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 같았다.
피차일반이었으나, 내가 대화를 이어가지 않으면 몇 시간이고 이러고 있으리란 직감이 들었다. 그 침묵과 지루함을 못 견뎌 예쁜 병풍이 다 뒤집어엎는 가능성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말문을 트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나오는 소리는 없었다. 내가 살가운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다. 여태 친구는 박시찬, 김민식, 이리형 셋뿐이었고, 나는 이 좁은 인간관계에 만족했다. 더 늘릴 생각이 없었으니, 누군가에게 다가가기란 내게 미지의 영역이었다.
용사가 되기 이전에는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 어찌어찌 잘한 것 같은데, 그것도 몇십 년 전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이었으니까.
셋밖에 없는 친구 중 가장 친화력이 좋은 박시찬을 떠올렸다. 친구를 새로 사귈 때, 걔가 뭐라고 했더라.
“……이렇게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어.”
고민하는 사이, 들려온 목소리는 내 것과 아주 흡사했다. 그러니까 평행 세계 백시현이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그 사실에 나는 약간이지만, 놀랐다. 방금까지도 말할 기색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나도 몰랐어. 신이 와서 제안해주더라고.”
“내가 너한테 보낸 편지 때문인 것 같더라.”그렇게 말하는 그에게서 소량의 미안함과 들뜸이 느껴졌다. 그 감정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잘 알았다. 나도, 내 앞에 있는 그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했으니 당연했다.
또다시 적막이 공간을 차지했다. 더 할 말을 못 찾은 건지, 할 이야기를 고르는 건지. 평행 세계 백시현은 반듯한 자세로 앉아선 눈을 깜빡였다. 신이 말한 대로 나름 잘 지내고 있긴 한지, 그는 전처럼 툭 치면 부서질 모래성 같지는 않았다.
“나는 대학에 입학했어. 너는 어때.”
그 사실을 확인한 나는 평행 세계 백시현에게 근황을 물었다. 옆에서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루블리안에게서 위기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정적이 계속 이어지면 깽판을 치고야 말겠다는 분위기를 풍겼다.
“나도 합격했어.”
대답은 그게 끝이었다. 또 대화가 툭 끊겼다. 몇 번 다시 말을 걸어 대화를 시도해봐도 결과는 같았다. 슬슬 나랑 대화하려는 의지가 있긴 한 건가 싶었다. 진로가 심리 상담가도 아닌데, 강제 직업 체험을 하는 기분이었다.
원래 이렇게 남에게 말을 붙이는 성정이 아니다 보니 스트레스가 쌓였다. 나를 잘 아는 루블리안 또한 내 상태를 파악했는지 표정이 안 좋아졌다. 한쪽은 입을 열지 않아서, 다른 한쪽은 곧 터질 시한폭탄 같아서 힘들었다. 이럴 거면 왜 이 자리를 만든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넌 나랑 말하기 싫어?”
“아니야.”
한숨을 내쉬고 말하자, 빠르게 대답이 돌아왔다. 대화하기 싫은 것도 아닌데, 다 단답으로 말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지. 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꿈속인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아픈 기분이다.
“……미안해.”
“뭐가?”
“먼저 물어봐 줬는데 다 짧게 대답해서.”
평행 세계 백시현이 제 앞머리를 매만졌다. 한번 테이블에 박힌 시선은 떼어질 줄을 몰랐다. 살짝 수그러진 고개 때문에 얼굴에 그림자가 진다. 그 때문인지 어쩐지 낯빛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순간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가, 사라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걸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옆을 돌아보자, 루블리안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낯을 했다. 늘 바다나 하늘에 비유했던 눈동자가 지금은 활활 타오르는 용암 같았다.
“왜 그래.”“으응, 아니에요. 그런데 잘생긴 조각도 이제는 말해도 돼요?”
“……병풍이야.”
느물대는 루블리안에게 대꾸하자, 그가 눈을 크게 떴다가 접었다. 자연스레 둥근 곡선을 그리는 눈매를 홀린 듯 바라보고 있으니, 하얀 목울대가 움직인다.
“잘생겼다는 건 부정 안 하네요. 여보랑 오래오래 살아야 하니까 얼굴 관리 잘해야겠다.”
만지작거리던 손을 놓은 루블리안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는 꽃받침을 만들었다. 이어 제 얼굴을 가져다 대고는 생글거린다. 얼굴 하나는 여전히 잘 활용했다.
“너는 좀, 다시 병풍으로 돌아가.”
“드디어 자유를 맛봤는데요? 억압하는 건 침대에서만, 으읍.”
외설스러운 말을 쏟아 내는 입을 막았다. 얼굴이 다 화끈했다. 상황을 봐가며, 둘이 있을 때만 이런 류의 말을 하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모르겠다. 평행 세계 백시현한테 침대 사정을 발설해서 무슨 이득을 본다고.
힐끗 백시현을 곁눈질하니, 그는 아까와 다를 바 없는 얼굴이었다. 이런 말에 면역이 있는 건지, 나보다 훨씬 태연했다.
“방금 루블리안이 한 말은, 잊어.”
“그럴게.”
“……넌 이런 말이 민망하지 않아?”
순수한 호기심이었다. 저쪽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와는 이리도 상반된 반응을 내비치는지에 대한.
“그다지. 연애는 몇 번 해봤지만, 좋아해서 하기보다는…….”
말소리가 흐려졌다. 나와 똑같은 연갈색 눈동자의 초점이 엇나갔다. 마치 먼 곳을 보고 있듯이. 그는 어느 때인지는 알 수 없으나, 과거를 회상하는 눈치였다. 나는 잠자코 뒤이어질 이야기를 기다렸다.
“좋아해 보고 싶어서 그랬던 거라. 네가 그 소리가 민망한 이유는, 좋아하는 사람이 해서 그런 거일걸.”
확실히 다른 이가 나한테 저런 류의 말을 한다면, 무시하고 자리를 뜨지 않을까 싶다. 들어주지도 않을 것 같긴 했다. 그 전에 루블리안이 무슨 짓을 저지를 수도 있겠다. 생각할수록 가정일 뿐인 장면이 구체적으로 변했다.
그 상상을 멈춘 건, 주변이 아주 고요하다는 걸 깨달았을 때였다. 여전히 내게 달라붙어 시선을 보내는 루블리안도, 반듯한 자세로 나를 응시하는 백시현도 말이 없었다. 꼭 내 답을 기다리는 것 같아, 뒤늦게 맞붙은 입술을 떼어냈다.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순식간에 루블리안의 안색이 더욱 환해졌다. 반질반질한 낯짝이 더욱 빛을 내는 게, 꼭 시력을 잃을 것만 같았다. 실제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부러워.”
“……뭐가?”“네가. 나도 너처럼 돼보고 싶어서 ‘사랑’을 해보려고 했는데, 마음처럼 쉽게는 안 되더라.”
흰 얼굴에 체념이 어렸다. 조금 전, 그가 말했던 ‘좋아 해보고 싶었다.’라는 건 사랑을 해보려고 했다는 것에서 비롯된 듯했다. 머리가 띵했다. 나처럼 되어 보고 싶어 사랑을 해보려 했다니. 연애를 했다니.
“왜 하필 사랑이야? 아니다, 대답 안 해도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