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그 모습을 놓칠 리 없는 루블리안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아주 귀엽게 여기는 듯한 웃음이었다. 그에 얼굴이 더 달아올라 숨기려 들었으나, 당연하게도 루블리안이 막았다.
“내 얼굴 놔.”
“안 돼요. 지금 너무 귀엽단 말이에요.”
“……진짜 이럴래?”
“응, 이럴 건데. 이러면 안 돼, 여보? 나는 여보 남편이잖아. 응?”
웃음기가 서리지 않은 부분이 없었다.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모습에 됐다 싶었다. 저렇게 온 세상의 행복을 끌어모은 듯한 얼굴을 하는데, 어떻게 말리겠는가.
나는 오늘도 졌다. 루블리안한테.
[저 이제는 진짜 말해도 돼요?]
‘말해. 그런데 어차피 평행 세계 백시현에 관한 거 아닌가.’
[맞아요. 우선 저쪽 백시현은 나름대로 잘 지내고는 있어요.]
나름대로 잘 지내고 있다는 말에 먼저 든 건 의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굳이 나를 만날 필요가 있나 싶었다.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자, 신이 다 안다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시현을 기다리고 있거든요. 편지, 기억해요?]
‘편지?’
자꾸만 옆에서 신이랑 대화하지 말라며 칭얼거리는 루블리안의 허리에 팔을 감아 잠시간 조용히 시켰다. 그러고는 머리를 굴렸다.
편지. 편지…….
‘아. 여기 세계로 돌아오기 전에 남겼다는 그거?’
[네. 읽어 보셨나요?]
‘읽어 봤지. 루블리안이 안 보여 주려고 하다 마음을 바꿨거든. 그래서 봤어.’
입술을 비죽이면서도 ‘여보 거니까 보는 것도, 보지 않는 것도 여보가 선택해야죠.’라고 했던 루블리안이 떠올랐다. 질투하면서도 존중 하나는 제대로 했다. 그래서 더 좋았다.
[거기에 쓰여 있던 내용을 기억하세요?]
‘대충. 언젠가 다시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는 문장이 있긴 했는데, 그거 때문인가.’
[네. 사실 표면적으로는 잘 지내고 있는데, 평행 세계 시현은 곁에 의지할 대상이 없으니까요. 속은 좀 곪았죠.]의지할 대상. 확실히 그 대상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는 컸다. 나야 루블리안이 있지만, 평행 세계 백시현은 루블리안이라면 치를 떨지 않을까 싶었다. 하도 당한 게 많으니 말이다.
물론 나도 평행 세계 미친놈은 싫었다. 그간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런 요지로 만남을 추구하는 거예요. 음, 신계 때문에 고생한 건 저쪽도 있으니까 보상 및 케어로요.]
‘그 보상 및 케어에 내가 들어가는 거고?’
[네. 앞서 말했듯 평행 세계에서 시현과 대화했던 걸 떠올리면서 버티고 있으니까요.]
신은 지금 당장 답을 내려 줬으면 하는 것 같은데, 쉬이 결정하기 어려웠다. 다른 사람이라면 칼 같이 거절했을 테지만, 곧 재로 부서져 허공을 부유할 것만 같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루블리안이 보였던 반응으로 그가 이 만남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원체 질투가 심하니 대충 그림이 그려졌다.
‘확정은 아니지만, 갈 거면 루블리안도 함께야.’
[루블리안도요?]
‘그때 들었지 않나. 평행 세계 백시현이 둘이서만 이야기하냐고 할 때, 내가 애인이 질투가 심해서 안 된다고 한 거.’
무심히 예전의 일을 언급하자, 데굴데굴 눈동자 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신이 깨달음을 얻은 듯한 감탄사를 흘렸다. 머릿속에서 바깥을 향해 송곳을 쿡 찌른 느낌이었다. 다행히도 외마디 감탄사라 아픔은 빠르게 가셨다.
어떻게든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게 하려고 기를 쓰는 루블리안의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나 이건 면역이 있는지 얌전해지는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내가 애정 가득한 직설적인 말에 아직 적응을 못 했다면, 루블리안은 내 스킨십에 적응을 했다. 어느 정도만.
[우선 갈 거예요? 만나 줄 거예요, 시현?]
‘루블리안까지 데려갈 수 있는 권한을 받아오면. 나만 데려갈 생각이었잖아.’
정곡을 찌른 듯 신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대답을 기다리며 루블리안의 심술을 받아 주고 있자, 곧 정적이 깨진다.
[좋아요. 까짓거 받아오죠. 다음에 다시 올게요, 시현.]
어딘지 모르게 결연함이 엿보였다. 큰 결심을 한 모양새라, 그렇게까지 굳게 다짐할 일인가 싶었다. 루블리안의 전적이 화려하긴 하지만, 암살자를 제외하고는 따로 누굴 죽인 적도 없었다. 골탕 먹인 적은 있어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굽다 못해 딱 달라붙었다. 완전한 편애 판정이었으나, 상관없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 내 편을 해줄 사람한테 이 정도를 못 할 리가.
‘루블리안도 도덕 배웠어. 준법정신 잘 지키고, 마력도 없어서 걱정할 일 없을걸.’
[……루블리안이 도덕을 배워 봤자 아닌가요?]
떨떠름한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속내가 들어차 있었다. 그러나 몇 분 안 돼서 태도를 변경했다. 조건이 있긴 하지만, 만나는 걸 내가 동의했다는 것에 의의를 두려는 모양새였다.
신은 얼른 루블리안까지 허가를 맡겠다며 떠났다. 그제야 웅웅 울리던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드디어 찾아온 편안함이었다.
“드디어 갔어요?”
“어. 갔어.”
“대답은 역시, 가기로 한 거 맞죠?”
부러 잠긴 음성을 내어 서운함을 줄줄 흘린다. 처연하게 눈꺼풀을 내리는데, 팔랑이는 금빛 속눈썹이 촉촉해 보였다. 만지면 물기 하나 묻어나지 않을 텐데도 루블리안의 외모는 그런 착시를 불러왔다.
나는 손을 뻗어 루블리안의 양 뺨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이어 숙인 고개를 들게 하자,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순간 온갖 파란 것들이 생각났다. 예를 들자면 바다, 하늘, 보석 같은 것.
“심술 그만 부려. 너도 같이 가야 한다는 조건 붙였으니까.”
잡고 있던 볼을 죽 당기자, 약한 힘이 분명한데도 루블리안이 “아야.”하고 엄살을 부려 왔다. 이 엄살 심하고, 애교와 질투 넘치는 못 말리는 놈이 내 애인이었다. 내 남……편이었고.
“널 놓고 갈 리 없잖아. 전에도 애인이 질투가 심해서 둘이서는 안 본다고도 했고.”
무덤덤하게 말을 덧붙이자, 루블리안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나를 껴안고 있는 상태라 숙여도 그의 하관 정도는 확실히 보였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라든가, 금발 사이로 보이는 붉은 귀라든가.
“좋아해.”
“……알아요.”
“거기서는 나도라고 하는 거라며.”
입술 사이로 작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전이랑은 정반대였다.
“……저는 시현이 웃는 게 정말 좋아요. 작은 웃음일 뿐인데 보고만 있어도 행복해져요. 그러니까 사랑해요.”
맥락을 알 수가 없었다. 내가 웃는 걸 보면 행복해진다고 하더니, 갑자기 사랑한다고? 웃어 달라고 한 말인가 싶기도 했다.
“그거 알아요, 여보? 지금 웃고 있는 거.”
이가 아릴 정도로 단 케이크를 상기시키는 눈웃음이었다. 가는 호선을 그리는 눈매가, 반절 가려진 파란 눈동자가, 발그스름한 뺨이, 온통 수채화로 그린 듯했다. 따스했고 동시에 화려했다.
멍하게 있다 손을 옮겨 내 입가를 만져 보자, 둥글어진 입매가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미소 짓고 있었다. 루블리안에 의해서.
그 순간 하나의 가정이 머릿속을 스쳤다.
“네 덕분이야.”
루블리안이라면, 어릴 적 할머니와 살 때처럼 내가 큰 소리로 웃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_oOo_
결국 평행 세계 백시현과의 만남이 성사되었다. 원래는 평행 세계 백시현의 고유 세계에서 만나려 했으나, 루블리안 때문에 기각되었다. 루블리안이 열네 개의 세계를 반파했던 일 때문이었다.
그때 시말서를 얼마나 많이 썼는지 아냐며 훌쩍이는 신이 생각나 머리가 다 지끈거리는 기분이었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고 있으니, 루블리안이 걱정스럽게 나를 바라보았다.
“또 신이 뭐라고 해요?”
“아니. 괜찮아.”
손을 양옆으로 휘젓자, 루블리안이 나를 한 차례 더 훑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이 아니라는 걸 파악한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