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104)화 (104/112)

8.

[시현! 잘 지내고 있어요?]

누워서 쉬고 있는데 전조 없이 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이닥쳤다. 몇 개월 만의 인사에 훅 두통이 끼쳐 미간을 찌푸리자, 루블리안의 검지가 주름을 없앴다.

‘갑자기 뭐야? 또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지?’

몇 개월 사이 잠들어 있던 의심이 훅 머리를 들었다. 신과 대화를 할 수 있었던 상황이 다 용사, 마왕 처치, 세계 침범자, 마신 봉인 그런 류였기에 어떻게 보아도 당연한 판단이었다.

[아니에요! 그냥 시현이 보고 싶어서 온 거뿐인걸요! 겸사겸사 전할 소식도 있고요.]

물어보기 무섭게 신이 부정했다. 붕붕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게 고개라도 젓고 있나 싶었다.

그보다 전할 소식? 무작정 보고 싶다고 찾아오기는 힘들 테니 주된 목적은 저것일 테다.

‘전할 소식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안 해. 안 가. 안 사.’

[네? 그런 거 아니에요! 신을 잡상인 취급하는 사람은 시현이 처음일 거예요…….]

‘신이랑 말해 본 사람이 적을 테니까.’

[그, 건 그렇죠.]

신이 저도 모르게 수긍하다 말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이내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는 쨍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아무튼 이제 시현이랑 이야기는 일주일 중 3일 정도 할 수 있어요. 주신님이 허가를 내려 주셔서 합법이랍니다! 그리고 전할 이야기란 건 이거예요.]

뒤로 갈수록 음성이 진지해졌다. 신이면서 이런 무거운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실없는 생각을 이으며 다음 말을 기다렸을 때였다. 나온 말은 상당히 뜬금없었다.

[시현, 평행 세계 시현이랑 이야기해 볼 생각 없어요?]

‘……갑자기?’

[시현한테는 갑작스러울 수 있지만, 전부터 생각하던 거예요. 지금은 시현이 대학도 입학했고, 곁에 루블리안도 있고. 여러모로 안정된 상태라 이제야 물어보는 거예요.]

마신이 봉인된 이후로 주신이 할 일이 많아 허가도 최근에 낫다며 신이 이야기를 덧붙였다. 자길 혼자 내버려 두냐는 루블리안의 손길에 어울려 주면서 고민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을 만나는 게 옳은 선택인가. 순간 몇 개월 전 보았던 텅 빈 연갈색 눈동자가 떠올랐다. 이미 몇 개월이나 지났는데, 지금 와서 연락해 봤자 뒷북 아닌가.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갔다.

[개인적으로는 만났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그때 시현이 너무 유죄였어요. 실수로 나 자신에게 반하는 일이 일어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요, 저는.]

‘그게 무슨 헛소리야.’

평행 세계 백시현이 나한테 반하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나. DNA까지 똑같은 사람한테 무슨.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며 신은 제가 다 답답하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라서 그런가, 열려 있어도 너무 열려 있었다. 다른 세계의 나도 나인데 어떻게 그런 시선으로 본다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었다.

“여보, 신이 뭐라고 해요?”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기다리기 지쳤는지 루블리안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를 다정히 껴안는 팔과 따뜻한 품은 덤이었다.

“나보고 평행 세계의 나, 그러니까 백시현 만나 볼 거냐는데?”

“……저한테는 말 못 건데요? 하고 싶은 말 있는데.”

여전히 웃는 낯이긴 했지만, 그 표정에서 살벌함이 느껴졌다. 평행 세계 백시현을 만난다는, 그 전제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저어얼대 안 돼요! 헤어지기 전에 말했듯이 용사가 아닌 시현에게 이렇게 말 거는 것부터가 규율에 어긋난 거예요. 그런데 시현에게 전달할 소식이 있다는 명분이 있으니 가능한 거죠. 아무런 명분 없는 루블리안은 불가능하답니다!]

언뜻 뿌듯함까지 느껴지는 투였다. 주신에게 허락 맡은 게 좋은 건지, 루블리안과는 대화를 못 하게끔 한 자신이 대견한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개인적으로 후자 같긴 했다.

“안 된대.”

“아쉽네요. 그렇지만 여기서 말하는 건 들리지 않을까요?”

사르르 접히는 눈꺼풀에 푸른 눈동자가 3분의 2 정도 가려졌다. 가늘어진 눈매가 시선을 끌었다. 잠시 얼굴에 홀려 멈칫하다 살살 옆구리를 매만지는 커다란 손에 이성이 돌아왔다.

“들리겠지.”

그리 대답하며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파렴치한 손을 낚아채 밖으로 빼냈다. 간식을 빼앗긴 고양이 같은 올망졸망한 눈빛이 내게 닿았으나, 눈을 감음으로써 차단했다.

시야가 차단되자 촉각과 청각이 민감해졌다. 뺨에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의 푹신함이라든가, 좀 더 밀착되는 단단한 몸이라든가. 안 되겠다 싶어 눈을 뜨니,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의 화려한 낯짝이 보인다. 아주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보는 듯한 눈빛에 배 속이 울렁였다.

“시현, 안 가면 안 돼요?”

거기다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달짝지근해서 괜히 귀가 찐득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에 신이 소리를 내질렀다.

[안 가려고요?!]

마치 크고 높은 목소리가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그 탓에 수십 번 접은 종이처럼 인상이 구겨졌다. 두통이 심했다.

내 모습을 보더니, 대충 상황 파악을 했는지 루블리안은 나보다도 더 험악한 얼굴을 했다. 나와 시선이 얽히자 반사적으로 빙그레 웃긴 했으나, 그 찰나의 변화가 뚜렷해 눈치를 못 챌 수가 없었다.

“하도 찌푸려서 얼굴에 주름지겠어.”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마를 문지르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나 루블리안은 농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한껏 굳은 얼굴을 하더니, 곧 작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어쩌죠? 이 정도면 신이 시현에게 보상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무려 우리 여보의 얼굴에 주름이 지게 했는데?”

푸르른 눈동자가 내게 향해서는 떨어지지 않았다. 강한 집념이 느껴질 정도로 끈덕지게 달라붙는 시선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루블리안이 아, 하고 외마디를 내뱉었다.

“물론 주름이 져도 예뻐요. 우리 여보가 안 예쁠 수가 없죠.”

당연한 진리를 말한다는 태도에 낯이 뜨거워졌다. 흔히 말하는 팔불출 같은 모습은 여전히 익숙해지기 어려웠다. 내가 루블리안한테 하는 건 아무렇지 않은데, 당하는 건 낯부끄러웠다. 루블리안과 만나기 이전에 저런 살랑거림을 들어본 적이 없어 더욱 그러했다.

“그렇지만 그 주름도 저로 인해 졌으면 좋겠단 말이에요. 그게 아니라면 시현이 너무 행복한 나머지 웃어서 생기거나요.”

불가능한 소리를 태연하게도 해댔다. 무덤덤하게 살다 보니 웃음은 거의 사라진 채였다. 지금은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폭소하며 즐겁게 웃을 날이 있을까 싶었다.

할머니랑 살 때는 그래도 웃었던 것 같은데. 그 집에 들어가고 나서부터 없어졌나. 합리적인 추론이 머릿속에 떠오를 때였다.

[다 꽁냥거리셨어요……? 저 이제 말해도 돼요?]

슬그머니 신이 입을 열었다.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게 여실한 반응이었다.

“또 신이 말 걸었어요?”

신에게 답을 주기도 전에, 관심이 잠시 다른 데로 돌려졌다는 걸 알아차린 루블리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블리안이 나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푹 파묻혔다. 옷이 얇아서 그런지 몸의 근육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우선 놓고 말하자.”

“으으응. 싫어요.”

루블리안이 말끝을 늘이며 도리질 쳤다. 살짝 몸을 내려 내 어깨에서 그러는데, 상당히 간질거렸다. 머리를 비비는 것뿐이었는데 손끝이 움츠러들었다.

미치겠다. 얼마나 해댔으면 이런 애교 하나에 반응하는 건지. 루블리안이 너무 집요한 탓이었고, 루블리안의 체력이 너무 좋은 탓이었고, 루블리안이 제 얼굴을 너무 잘 쓰는 탓이었다. 나는 오목조목 따지며 루블리안을 탓했다.

“얼른.”

“흐으음. 왜요? 또?”

루블리안이 내 귓가에 입을 붙이고는 속삭였다. 뜨거운 숨결과 입술의 감촉 때문에 뱃속이 오싹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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