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어지간히 자신감이 깎였는지, 점점 고개가 수그러진다. 이제는 새까만 정수리가 보였다.
“잘못을 받아들이는 시간이 오래 걸려서 고등학교를 들어와서야 어떻게든 내 태도를 바꾸고 사과를 하려고 했어.”“인지했을 때가 언젠데.”
“……초등학교 고학년 때.”
머뭇거림에서 겁이 느껴졌다. 스스로 오래 걸렸다는 걸 알기에, 용서받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닌지 걱정해서 그런 걸 테다.
“지금 당장 용서해 달라고는 안 해. 용서는 내가 아니라 네가 해야 하는 거니까.”
“그럼 지금 날 왜 붙잡은 건데. 네 죄책감 덜려고? 아니면 이래서 어쩔 수 없었다는 하소연?”
“……어쩌면 둘 다 맞을지도 몰라.”
결코 아니라는 말은 못 한다. 애초에 사과란 게 보통 그런 거였다. 잘못에서 비롯된 자기 죄책감을 덜려는 수단.
웬일로 한적한 아파트 단지 근처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루블리안이 살며시 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돌아가자는 재촉에 못 이겨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 백정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아까보다 또렷하게 발음했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말은, 잘못했다는 말은 진심이야.”
“…….”“그리고 오늘 하고 싶었던 말은 이거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 차분히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진다.
“내가 널 눈엣가시 취급했던 기간만큼 계속해서 사과할게. 그러니까 그 기간이 끝나면 다시 한번만 생각해 주면 안 될까?”
저 말을 듣고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귀찮다.
눈엣가시 취급한 기간이 적어도 고등학교 전까지는 된다는 건데 십여 년간 사과를 들으라니. 다른 놈들이 곁에 있었다면 신종 괴롭힘 아니냐며 질색했을 발언이었다.
“지금 용서해 줄게.”
“뭐?”“어차피 너한테 별다른 감정 없어.”
이 말이 더 상처일 수 있다는 것쯤이야 알았다. 그렇지만 그걸 신경 써 줄 이유가 없었다. 굳이 배려해 주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친구도 뭣도 아닌, 귀찮음만 주는 사람 한 명일 뿐이니 당연했다.
“죄책감 느끼지 말고, 귀찮게 하지 말라는 거야. 어차피 네가 한 행동, 난 신경도 안 썼으니까.”
어딘가 허망해 보이는 백정혁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고는 등을 돌렸다. 이어 루블리안에게 잡힌 손에 힘을 주고 발을 떼어냈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가, 집으로 향했다.
“당신은 너무 다정해서 문제예요.”
“무슨 헛소리야.”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하는 말에 대꾸했다. 말하는 타이밍도 뜬금없었지만, 내가 다정하다는 말이 가장 이해가 안 됐다. ‘그’ 몬트리오조차도 내가 다정하다는 말은 못 할 텐데.
신발을 벗고, 겉옷을 벗었다. 뒤이어 들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아 뒤를 돌아보니, 루블리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묘하게 모난 눈빛으로.
“뭐가 또 마음에 안 들어.”
“시현이 결국 그 쌍둥이한테 다정한 것도, 스스로 다정한 걸 모른다는 것도 다요. 이런 면에서 눈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진짜 귀엽지만, 시현이 그걸 모르니 너무 슬프네요.”
루블리안이 한쪽 손을 제 뺨에 대고는 귀엽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후우.” 소리가 워낙 커서 귀에 제대로 꽂혔다.
“어떻게 자기가 그렇게 다정하고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걸 모르지?”
“자꾸 단어가 추가된다?”“으응? 아닌데요. 저는 시현이 다정하고 귀엽고 사랑스럽고 예쁘다고밖에 안 했어요.”
신발을 벗고 들어온 루블리안이 나를 끌어안았다. 장난기가 다분한 웃음소리가 따뜻했다. 루블리안 특유의 포근한 향이 코를 간지럽히고, 심신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말없이 교복을 파고드는 손은 정신을 어지럽혔다. 바로 못된 손을 잡아채고, 품에서 빠져나왔다. 뜨끈한 온기가 사라져 허전함을 느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아, 그리고 저번에 정한 횟수제와 별개로 오늘부터 스킨십은 금지야.”“네?!”
진심으로 놀란 얼굴이었다. 동그랗게 뜨인 눈, 위로 한껏 올라간 눈썹, 벌어진 입술. 차례차례 확장된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시현? 제가 뭐 잘못했어요?”
물기를 머금은 푸르른 눈동자가 요동쳤다. 그래서 그런지 파문이 일어난 호수를 앞에 두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곧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사람 앞에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나였다. 물론 저 눈물이 연기이니 이리 태평하게 굴 수 있는 거였다. 연기가 아니라면 발 빠르게 반응했겠지.
“시험이 몇 주 안 남았으니까. 일주일 내내 너랑 그…… 거 하느라 공부 하나도 못 했다는 건, 너도 알고 있잖아.”
“그렇지만, 시현도 좋았잖아요. 좋아하잖아요.”
내가 두 발자국 멀어져 벌어진 거리를 루블리안이 좁혔다. 내 양손을 꼭 붙잡고 애처롭게 나를 바라봤다. 까딱하면 넘어갈 게 분명해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쉬이 빠지지 않았다.
빼내려고 할 때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는 힘을 준다. 그 와중에 힘 조절을 하는지 아프지는 않았다. 난감하다.
“좋, 아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야.”“시현, 공부 좋아해요?”
“아니.”
질문의 의도를 예측하기 어려웠으나, 대답만은 착실하게 했다. 그에 루블리안은 상체를 숙여 거리를 더 좁히더니 코앞에서 살그머니 웃으며 속삭였다.
“좋아하지 않는 걸 하기보다는 좋아하는 걸 하는 게 더 실용적이잖아요.”
살갗에 숨결이 간지럽게 내려앉았다. 손끝이 저릿하고, 배 속에 무언가 고이는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숨결 하나일 뿐인데 그랬다. 이러다가는 오늘 그 흉측한 것을 맞이하게 생겼다.
나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이렇게 얼렁뚱땅 스킨십에 넘어간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이번에는 제대로 잘라 내야 했다. 수시인 고3에게 1학기 기말고사는 상당히 중요했다.
“앞으로는 공부도 좋아하기로 했어. 안 돼.”
_oOo_
루블리안 셀턴은 죽을 맛이었다. 시현이 시험이 끝날 때까지 스킨십은 안 된다고 선언한 뒤로부터 끌어안은 적이 손에 꼽았다. 손을 잡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이 정도도 안 되냐고 물었을 때, 시현은.
“손만 잡고 끝낼 자신 있어?”
팩트로 루블리안을 때렸다.
“회복 포션을 쓰면 되잖아요.”
“그거 이제 없어. 저번에 등교할 때 다 썼잖아.”
다른 방안을 냈을 때는 눈빛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 집요했던 밤을 떠올리게 만든 대가였다.
그렇게 루블리안은 꼬박 3주를 참았다. 며칠 동안 사랑을 나눴던 걸 상기하면서 버틴 덕이었다. 그조차도 없었으면 글쎄, 말라 죽었을 수도 있다. 루블리안은 진실로 그리 생각했다.
“백션, 쟤 드디어 살아났다?”
“시험 끝나서 그런 건가? 안 어울리게 공부 열심히 하네.”
시현 친구들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루블리안은 뚫어져라 시현의 뒷모습만을 응시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얼른 집에 돌아가 시현을 물고 빨 생각밖에 없었다. 그만큼 3주간의 스킨십 금지는 그의 욕구에 불을 지폈다.
“다들 자리에 앉아라. 종례한다.”
담임 선생님이 정답 이야기로 시끌벅적한 교실에 들어서자, 하나둘 제자리로 가기 시작했다. 정답이고 뭐고 우선 집에 가겠다는 K고딩의 의지였다.
“다들 수고했고 집에 가서 푹 쉬어라.”
언제나 그렇듯 짤막한 종례였다. 루블리안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백시현에게로 향했다. 그의 안중에 시험 점수라고는 없었다. 그야 그럴 것이 그는 과거 마탑주였던 만큼 머리가 비상했다. 외우고 응용하는 것쯤이야 진절머리 나게 했다.
“시현, 가자.”
“너…….”
시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루블리안은 와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에 불안하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루블리안은 시현의 가방을 제가 메고는 빠르게 교실을 나갔다. 그러고는 순하게 눈을 끔뻑거리며 언제 나오냐며 시현을 재촉했다. 그 모습에 시현은 박시찬, 김민식, 이리형에게 인사를 대충 건네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불안하다고 생각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