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뭐야. 이 김민식이랑 백션의 찐한 눈 맞춤은? 소외된 리형이 넘나 서럽죠~”
“지랄. 개소하지 마.”
웃고 있지만, 기세가 흉흉해진 루블리안을 일별하고는 과장되게 물러나는 게 확실했다. 저 원수 같은 새끼는 알면서 재미로 이러는 거였다.
“현아. 살기 줄여.”
루블리안의 귓가에 속삭이자, 그가 내 어깨에 머리를 비볐다. 곧 섬뜩하던 기세가 무뎌진 칼날처럼 변했다. 목숨의 위협에서 벗어난 김민식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보였다.
“싫어도 내가 싫어해야 하지 않나.”
“와, 시발. 존나 어이없네. 내가 싫어해야지, 당연히!”
덤덤한 내 말에 발끈한 김민식을 가만히 응시하다,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고는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책상을 톡톡 치며 입을 열었다.
“성적, 운동, 얼굴. 다 내가 나은데?”
일대 조용해졌다. 같은 반에 있던 다른 애들도 이쪽을 바라보는지 시선이 느껴졌지만, 익숙하게 무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민식이 “허, 아니, 와…….”하며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가 막힌다는 반응이었다.
“너 지금 존나 재수 없어.”
“누가 알면서 언급하래?”
‘무엇을’이란 목적어가 빠졌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먼저 잘못한 걸 알긴 아는지 김민식은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반 내가 술렁였다. 김민식도 나도 안 좋은 말을 들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나는 재수 없다는 걸로, 김민식은 나보다 다 못한다는 걸로. 나만이라면 무시하면 됐지만, 김민식이 껴 있었다. 짜증 나고, 원수 같은 놈이어도 친구긴 했다.
“그리고 애인 있으니까 내가 더 싫어해야지.”
무심히 김민식에게 너는 솔로지 않냐는 시선을 보내자, 찰나의 침묵 끝에 반 내가 시끄러워졌다. 특히 내 주위에 있는 박시찬과 이리형이.
“자, 잠시만! 백시현, 너 연애해?!”
“이거 구라 아니고 찐이야?!? 사실 온 세상이 나랑 박시찬을 속이는 몰카 아님??! 진짜, 아니, 어??”
가까운 곳에서 소리를 빽 지르니, 고막이 아팠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고백했을 때보다 반응이 격렬했다.
하긴,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가. 그리 생각하며 멱살이라도 잡고 나를 털털 털 기세인 이리형과 박시찬을 무시했다. 애인이 바로 옆에서 나를 끌어안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근데 김민식 저 새끼는 왜 이렇게 조용해?”
내가 꿋꿋이 입을 다물고 평소처럼 무시로 일관하자, 박시찬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돌아갔다. 검은색 눈동자에서 번뜩 이채가 스쳤다.
“그렇네? 너 뭐 알고 있어? 빨리 불어!”
박시찬이 돌린 관심을 이리형이 덥석 물었다. 김민식은 낭패라는 얼굴로 줄행랑을 쳤고, 이리형은 그를 따라 교실 밖으로 나갔다. 그것도 수업 시작이 얼마 안 남은 이때.
둘의 ‘나 잡아 봐라’를 멀거니 쳐다보기만 한 박시찬은 이때를 노렸다는 듯 옆 분단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그래서 누군데? 설마…….”
미심쩍다는 눈을 하고는 검지로 제 무릎에 글자를 적는다. 그 글자가 ‘이현’이라는 건 곧바로 알아보았다.
“얘야?”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까만 눈동자에는 역겨움이나 혐오가 없었다. 오히려 불순물 없이 깨끗한 느낌이었다. 박시찬에게 이런 감상이 들어서 그런지 일순간 소름이 돋았다. 박시찬이 이 생각을 알았다면 아까처럼 ‘내가 더 싫거든 대결’이 일어났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이어지던 때였다. 내게 더 달라붙는 몸짓이 느껴졌다. 보나 마나 루블리안일 테다.
“왜?”
“나도 궁금해서. 시현, 알려 주면 안 돼? 비밀로 할게, 응?”
청명한 눈동자에 장난기가 가득 차올라 있었다. 투명한 바닷속에 있는 보물이 사실은 장난감이었던 건가 싶은, 그런 의식의 흐름이 이어졌다.
정신을 차린 건, 박시찬이 루블리안을 따라 어울리지도 않는 귀여운 척을 했을 때였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반장, 박시찬 보건실 좀 보내.”
“아니, 이렇게 날 미친 사람 취급한다고? 와…… 이럴 줄 알긴 했는데. 진짜 너무하네!”
우리가 몇 년 우정인데 이러냐며 박시찬이 내게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나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내가 너처럼 행동하면, 너는 안 이럴 자신 있어?”“없지.”
단칼에 나온 답이었다. 이제는 내가 어이가 없었다. 본인도 나랑 똑같이 굴 거면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을 외치고 있다.
“어쨌든 맞나 보네. 너 내가 말한 걔한테만 개무르고, 맨날 무표정이면서 걔한테만 가아아끔 웃어 주잖아.”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려고 일부러 고개를 갸웃거렸다는 투였다. 그걸 확인하려고 그렇게까지 하나. 헛웃음을 내뱉고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박시찬이라면 믿을 만했고, 게이라고 해서 혐오하는 기색이라고는 하나 없었기 때문이었다.
“시현, 왜 나한테는 안 알려 줘?”
“……넌 이미 알고 있잖아.”애교살이 볼록하게 튀어나온 부근을 손가락 끝으로 살며시 문지르자, 눈꺼풀을 내리고는 더 해사하게 웃는다. 만족스럽다는 듯 올라간 입꼬리가 귀여웠다. 여기서 다 밝히고 싶다는 진심이 보여 골치 아팠고.
“너 숨기려고 하긴 하는 거야?”
편견이 지켜 주는 커플이란 게 이런 거냐며 박시찬이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말에 주변을 둘러보니, 내 자리 근처에는 사람이 없었다. 소란을 일으키는 김민식과 이리형이 사라지니, 구경하던 이도 몇 안 되어 아무도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넌 말 좀 가려.”“주위 다 확인하고 개작게 말한 거야. 형님도 다~ 생각이란 게 있다.”
“유언비어 퍼트리지 말고, 닥쳐.”
형님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나보다 몇십 년은 덜 산 놈이.
“아무튼 그렇다고. 오래 가라. 내가 보기엔 절대 안 깨질 것 같은데…… 너랑 걔 둘 사이에 뭐가 깨지는 날이 온다면 그건 애인 머리 아닐까?”“내가 내 애인 머리를 왜 깨.”“아, 노노. 지금 애인 머리 말고. 헤어진 다음에 네가 누구랑 사귀면, 그 사귀는 사람 머리 깨질 것 같다고.”
아.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했다. 내 옆에 있는 루블리안이 아닌 이상, 다른 사람과 사귈 확률은 현저히 낮지만, 만약에라도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박시찬의 말대로 될 것이다. 과연 머리만 깨질까 싶기도 하다.
의자 밑으로 내 손을 가지고 장난치는 루블리안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는 점 또한 확신에 한몫했다. 가정일 뿐이지만,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세상을 하직하지 않으려나 싶다.
“그리고 이거 그 자식이 알면 난리 날 것 같은데.”“……백정혁?”
“어엉. 고등학교 올라오더니 갑자기 돌변해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니까.”
박시찬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 자식의 두뇌 회전을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라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평행 세계 백시현의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가족에게 헌신적으로 군 적이 없었다. 무시하고, 단절했다면 모를까. 그래서 더욱 이제 와 가까워지려는 백정혁, 쌍둥이 동생의 행동을 헤아릴 수 없었다. 오히려 기이했다.
“백시현!”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호랑이가 따로 없네.”
진절머리난다는 얼굴로 박시찬이 말했다. 그에 시선을 돌리자, 앞을 확 열어젖히고는 누굴 찾는 듯 이리저리 고개를 흔드는 백정혁이 보였다. 귀찮기 짝이 없다.
“있으면서 대답을 왜 안 해!”
“굳이 할 이유가 있나.”
“그럼 있지, 왜 없어!”
억울하다는 투였다. 그래서 어이가 없었다. 돌아오고 난 뒤, 차곡차곡 쌓이던 어이가 창고에서 하나둘 빠져나갔다.
“난 네 동생이잖아!”
“형이라고도 안 부르면서 동생은 무슨 동생.”
고개를 까닥이며 무심히 말하자, 백정혁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린다. 여하간 형이라고는 죽어도 안 부를 놈이었다. 그걸 알고 일부러 저 말을 꺼낸 거긴 하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