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99)화 (99/112)

3.

그걸 아는 사람이 하교하고 집에 오자마자 그런 짓을 해? 어처구니가 없었다. 용사 일 때문에 잊은 부분을 다시금 공부하기도 바쁜데, 늘 길게 숙면했다. 심지어 기절로 시작한 숙면이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던 생각을 꿰뚫어 본 건지 루블리안이 “으음-.”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다 든 생각을 입에 담았다.

“……그런데 갑자기 가고 싶은 곳은 왜?”

“시현이 좋아하는 풍경을 저도 보고 싶어요. 그걸 보고 같은 감상을 느끼고 싶어요.”

“…….”

“이 세계에서 시현이 어떻게 지냈는지, 어딜 좋아하는지. 그런 거 저는 잘 모르니까요. 그래서 알고 싶어요.”

작은 키득거림이 말소리를 뒤이었다. 장난스러움이 가미되어 있긴 했지만, 진솔했다. 진심을 한가득 담은 말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소리에도 색이 있다면, 진한 분홍색이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인간적으로 내일은 무리야.”

“네에.”

“……대신 이야기로 해 줄게. 다음에 같이 갔을 때, 내가 말해 준 거 떠올리면서 구경해.”

별거 아닌 말이었으나, 어쩐지 민망해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푸르른 눈동자 때문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시선을 제자리로 원상 복귀하지 못하고 있으니, 줄기차게 시선이 달라붙는다. 용사 시절 겪은 일 덕분에 늘 가볍게 무시했던 따끔거림이었으나, 그 대상이 애인인 루블리안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만 좀 봐.”“여보가 저를 안 보잖아요. 그럼 제가 여보를 봐야죠.”

“그게 무슨 논리야.”

어이가 없어서 민망함이 좀 가셨다. 고개를 돌리자, 바로 시선이 맞닿는다. 우리를 비추는 조명보다도 화사하게 미소 지은 루블리안은 곧 내 손을 꼭 잡아 왔다. 이내 깍지 낀 손을 살살 흔들며 재촉한다.

“얼른 말해 주세요. 어딜 가장 좋아해요?”

“여기랑 조금 거리가 있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 어릴 적에 살았던 집이 있어. 어릴 때는 할머니랑 같이 살았거든.”

무어라 운을 떼야 할지 고민하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의외로 말문을 트고 나니,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특유의 할머니 냄새. 따뜻한 전기장판 위의 포근한 이불. 동그란 문손잡이. 달그락달그락 요리하는 소리. 분홍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하시는 할머니의 뒷모습. 사진으로 남겨 놓은 듯 선명한 풍경에 자연스레 입이 열렸다.

“어릴 때 나는 할머니 손에 길러졌어. 걔는 부모님이 데려가고. 걔는 누군지 알지?”

“알죠. 여보랑 하~나도 안 닮은 그 쌍둥이 아니에요?”

‘걔’라고 지칭했을 뿐인데도 루블리안은 빠르게 알아들었다. 학교에서 하는 행동을 봤으니, 눈치 빠른 그가 모를 리 없긴 했다.

“맞아. 생물학적 부모는 걔가 천재라서 좋다고만 하고, 어린 나는 신경도 안 썼어. 어떻게 할머니한테서 그런 쓰레기가 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그 유년 시절이 꽤 괜찮았어. 부모가 없다는 소리 듣고 화내 주는 할머니가 계셨고, 좋은 이웃도 있었거든.”

부모가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자마자, 깍지 낀 손에 힘이 실렸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데 루블리안이 분노했다. 이름을 알려 준다면 그 수많은 동명이인 중 범인을 찾아 보복을 가할 것 같은 눈빛이었다. 상당히 살벌했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생물학적 부모의 집에서 살던 날과 대조되게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옆에 있었다.

“아무튼 그래서 어릴 때 살던 그 동네를, 그 집을 가장 좋아해. 거기에 좋은 추억들이 한가득 남아 있거든.”

“그런 것 같아요. 지금 시현 얼굴, 정말 편안해 보이거든요.”

그런가? 루블리안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어떤 표정인지 궁금해졌다. 주변 사람들에게 한 번씩은 꼭 디폴트값이 무표정 아니냐, 차갑다, 다가가기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편안한 얼굴인 내가 상상되지 않았다.

“같이 인사드리러 가요.”

툭 귀로 떨어지는 말에 얼떨떨해졌다. 맥락상 할머니를 말하는 것 같은데, 돌아가셨단 사실을 눈치챘는지 모르겠다. 생물학적 부모와 같이 살고 있던 걸로 추론한 건가 싶기도 했다.

“……할머니께?”

“네. 어린 시현을 책임져 주신 분이잖아요. 인사드리고 싶어요. 저희 결혼까지 약속한 사이라고 말씀도 드려야 하는걸요.”

뒤이어 살아생전 어떤 꽃을 가장 좋아하셨냐고 묻는다. 눈치와 감으로 할머니의 죽음을 알아차린 게 맞는 듯했다.“시현을 돌봐주신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시현이 보기엔?”

“따뜻하시고 올곧으셨지. 정의로우시고 책임감 있으셨어.”

죄책감도 있으셨지. 마지막 말은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게 죄지은 것이 없었고, 루블리안에게 우리 할머니는 그저 좋은 사람, 따뜻한 사람으로 남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실제로도 그런 사람이셨고.

“할머니도 너 보면 좋아하실걸. 훤칠하게 생겼다고.”

“으음. 시현을 채가는 건데도 그러실까요?”

애교스러운 음성의 말끄트머리가 늘어졌다. 깍지 낀 손등에 입을 맞추고는 이미 답은 정해져 있다는 듯 군다. 반달로 접힌 눈꺼풀 아래로 보이는 찬란한 눈동자는 어서 대답하라며 답을 촉구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나는 몸을 움직여 거리를 좁힌 뒤, 한쪽 팔을 루블리안의 허리에 둘러 꽉 껴안았다. 이러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당연한 소리 하지 마. 오히려 엄청나게 좋아하셨을 거야.”“정말요?”“어.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겠어. 정말로, 정말로 좋아하셨을 거야.”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루블리안이 나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낀다. 괜히 저 맑은 바다 같은 눈동자를 볼 때마다 그 속에 담긴 애정을 느끼는 게 아니었다.

할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바로 알아차렸을 테다. 저 눈동자 속 애정을, 루블리안이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사랑하고 있음을.

“……다행이에요.”

확고한 믿음이 담긴 대답에 루블리안이 풀어진 얼굴을 했다.

“그럼 다음 주…… 아니, 시험 끝나면. 그때 꼭 같이 가는 거예요?”

이어 약속을 했다.

손을 꼭 붙잡고 행복한 얼굴로 인사드리러 가자고.

_oOo_

주말이 지나, 다시 돌아온 월요일 오후. 앞자리 의자를 빼낸 김민식이 등을 돌리고는 앉았다. 그러고는 턱을 괴고 장난스럽게 입술을 끌어올렸다.

“너는 왜 날이 갈수록 상처가 늘어나냐?”

그의 시선이 내 목덜미와 팔에 달라붙은 반창고에 닿았다. 확실히 저번 주 금요일에 붙이고 있던 것보다 수가 늘었다. 그야 그럴 것이 일요일에는 내 원성과 합의한 횟수제로 편히 쉬었지만, 토요일에는 오전이 다 가도록 물고 빨았으니 당연했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벽돌 부스러기, 모기, 고양이 손톱자국…… 또 뭐였더라. 암튼 그렇게나 다치더니 이번에는 또 뭐야?”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박시찬이 김민식의 말을 뒤이었다. 이리형조차 불신의 눈으로 나를 응시하는데, 곤란하기 짝이 없다. 아무도 화제를 돌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 팔에 매달려 어깨에 머리를 기댄 루블리안은 샐샐 웃고 있기만 했다. 이대로 사실이 밝혀져도 좋다는 듯이. 그랬다면 좋겠다는 듯이.

“어쩌다 보니.”“우리는 자세한 설명을 요청했거든, 백션?”

새까만 눈동자 속에 얼버무림에 넘어가지 않겠다는 의지가 넘실거린다. 상당히 고집스럽고 부담스러운 눈길에 시선을 다른 곳에 두자, 입꼬리를 올리고 웃참챌-웃음 참기 챌린지-을 하는 김민식이 보였다.

인생에 도움이라고는 하등 안 되는 놈.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화제를 끌어온 장본인, 김민식은 반창고의 이유를 어렴풋이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루블리안과 하도 미묘한 기류를 흘려댔으니, 눈치 빠른 저놈은 모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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