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97)화 (97/112)

1. Chapter 외전 1. 그렇게 루블리안과…….

허리에서 느껴지는 묵직함에 눈을 뜨자 탄탄한 몸이 보였다. 하얘서 그런지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길이 생각나기도 했다. 몸 곳곳에 어젯밤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본래 고유 세계로 돌아온 지 9일째. 루블리안에게는 미친놈, 미친 새끼, 또라이 말고도 새로운 호칭이 생겼다.

“짐승 새끼…….”

바로 이거였다. 짐승 새끼.

돌아온 첫날은 금요일인지라 학교를 다녀와야 했다. 아직 전학 절차를 밟지 않은 루블리안을 겨우겨우 떼어 내고서. 그리고 그날 저녁, 날이 새도록 시달렸다.

‘당연히 제가 하는 거 아니에요, 시현?’

‘헛소리하지 마.’

서로의 오해로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진짜 안 돼요? 제 동정 시현이 떼,’

‘그런 말 좀, 그만해.’

‘뭐요? 동, 으읍.’

루블리안의 애교와 음담패설로 내가 패배를 선언했다.

나는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는 얌전히 자는 척을 하는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변함없는 외모를 보며 한탄했다. 신이 저 얼굴을 내려 준 게 문제였다. 꿀 떨어지는 목소리를 내려 준 것도 문제였고.

‘하아. 시현, 너무 좋아요……. 따뜻해서 계속 이러고 있고 싶어요…….’

순간 떠오르는 달뜬 숨결과 목소리에 얼굴에 열이 몰렸다. 맞부딪히는 소리와 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목소리의 향연이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그러했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얼굴이 빨개졌어요?”

자는 척을 그만둔 루블리안이 살그머니 움직였다. 그 탓에 짧은 탄식이 입술 새로 새어 나오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아직 붙어있는 상태였으니 당연했다.

“너, 읏, 움직이, 후우, 지 마.”

“그럼 종일 이러고 있어요? 저는 따뜻하고 좋은데……,”

예쁜 모양새의 입을 닫은 건 본능적인 행동에 가까웠다. 저 입에서 나올 말이 며칠 동안 흐느낀 것과 결이 비슷하단 사실을 뇌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린 게 틀림없었다.

“으읏, 응.”

입을 막은 채로 몸을 움직였다. 느껴지는 감촉이 적나라해 내 것 같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움직이는 목울대에서 찡그린 얼굴까지 훑는 시선이 노골적이다. 흥분이 가득한 푸른 눈동자를 보자, 불현듯 불안을 감지했다.

“움, 직이지 마. 하지, 읏, 마. 너 더 하면 각방 쓸, 으응 거야.”

“으응. 사랑해요.”

달짝지근한 음성이 한 차례 이어지고, 새하얗게 변하는 시야가 뒤를 이었다.

_oOo_

루블리안 셀턴은 옆에서 색색 숨을 내쉬며 잠든 백시현을 응시했다. 하얀 피부에는 울긋불긋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 그는 그 사실이 만족스러웠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기절한 걸 보니 조금 심했나 싶기도 했지만, 어쩌겠는가. 돌아오면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한 건 시현이었고, 자신은 시현을 너무나 사랑할 뿐이었다. 늘 그랬듯 루블리안은 뻔뻔했다.

‘아, 못 참겠다.’

고요히 잠든 시현을 보던 루블리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탓에 뒤처리를 하며 새로 꺼낸 이불이 말려 올라갔다. 이어 시현이 몸을 옹송그렸다. 살갗에 닿는 공기가 차가워 그런 듯했다.

“으…….”

추운 듯 시현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는 앓는 소리에 루블리안이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 그러고는 화장실로 향했다. 아무리 뻔뻔하다지만, 기절한 사람에게 또 하자 하는 건 무리였다. 적어도 그 정도의 양심은 있었다.

“후우…….”

샤워기를 틀어 찬물을 맞으며 루블리안은 요즘 들어 시현이 입에 달고 사는 ‘흉측한 것’을 식히기 위해 애썼다. 시현이 조금이라도 예뻐 보이거나 혹 귀엽기라도 하면 번뜩 자기주장을 하는 게 문제였다. 안 귀엽고, 안 사랑스러운 순간이 없어서 더 큰 일이었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지난 뒤, 화장실을 빠져나온 루블리안은 먼저 침대를 확인했다. 여전히 시현은 잘 자고 있었다.

‘오늘은 뭘 해야 하나.’

루블리안은 방문을 살며시 닫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요즘 저렇게 관계를 맺다 시현이 기절하는 일이 빈번하다 보니, 대부분의 식사는 제가 챙기게 되었다.

시현은 뭐든 잘 먹었다. 가리는 음식이 있긴 한가 싶을 정도였다. 물론 좋아하는 게 있긴 했다. 맵고 얼큰한 것.

고민 끝에 루블리안은 어제 산 생선과 채소, 양념들을 꺼냈다. 이내 능숙한 손놀림으로 매운탕을 끓이기 시작했다. 시현이 좋아할 만한 음식을 매번 검색하다 보니, 처음엔 어색하던 휴대폰 터치 실력이 꽤 빨라지기까지 했다.

숱한 경험에 힘입어 조리는 빠르게 이어졌다. 완성한 뒤, 맛까지 본 루블리안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시현이 맛있게 먹을 만한 맛이었다.

‘잠든 지 얼마 안 되겠으니까…… 좀 더 재운 뒤에 깨울까.’

시계를 슬쩍 확인한 루블리안은 국자를 내려놓고 시현이 자는 방에 다시 들어갔다. 그러고는 그의 옆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진 않을 듯했지만, 옆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숨소리가 좋았다. 편안했다.

_oOo_

눈을 뜨자 보이는 건 루블리안이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기절하고, 그 사이 루블리안이 정리 정돈을 한 뒤 내 곁에 있고.

이번에는 잠옷까지 입혀놓은 걸 보니 더 괴롭힐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다행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도 버거운데 더 했다간 죽을지 몰랐다. 장난이 아니라 이대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루블리안은…… 컸다. 심각할 정도로.

“일어났어요?”

그때 다정하게 울리는 음성이 들렸다. 감고 있던 눈을 뜬 루블리안이 예쁘게 눈을 접어 웃고 있었다. 심장이 멋대로 술렁였다. 방금까지 기절할 만큼 해댄 인간이었음에도 그랬다.

“몇 시간 지났어?”

“다섯 시간 정도요. 더 자도 돼요. 원래는 밥 먹고 더 자라고 하려 했는데 너무 곱게 자서 깨우질 못했네요.”

루블리안은 자는 게 보기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며 솔직한 심정을 털어놨다. 그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뭐라도 그가 좋아할 만한 대답을 해 주고 싶었지만 이런 말에 태연하게 반응하는 건, 아직 무리였다.

그런 날 보며 루블리안이 웃음을 흘렸다. 즐겁다는 감정이 여실했다.

“……밥 먹을래.”

“좋아요.”

자연스럽게 루블리안이 나를 안아 들었다. 처음에는 공주님 안기에 당황하고 벗어나려 발버둥도 쳤으나. 이젠 포기했다. 발버둥 치다 허리가 영영 나갈 뻔하기도 했고, 그간 경험을 비롯해 반항해봤자 루블리안이 고집을 꺾지 않으리란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식탁으로 옮겨진 나는 곧 식사를 시작했다. 데우기만 하면 된다고 한 매운탕은 예상대로 맛있었고, 의자 밑에는 방석이, 의자 등받이에는 쿠션이 있어 꽤 편안했다. 바로 옆에서 루블리안이 날 도와주기까지 했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이다.

……익숙해지고 싶지는 않았는데. 돌아온 지 9일밖에 안 됐는데 그렇게나 해대서 눈에 안 익으려야 안 익을 수가 없었다. 순간 뇌리에 살 색 가득한 장면이 스쳤다. 양 뺨이 후끈했다.

“무슨 생각 하길래 얼굴이 그렇게 붉어져요?”

내 생각을 훑어본 것처럼 루블리안이 눈꼬리를 휘었다. 유려한 곡선을 그리는 것뿐인데, 그 모습이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매번 저렇게 웃으며 유혹했기에 더 그랬다.

“응? 여보야아. 무슨 생각 했어?”

애교스러운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 숨겨진 장난기와 열기가 느껴졌다. 간지러움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동시에 인상이 팍 구겨졌다. 아침에 한 번 했으면서, 또? 괜히 짐승 새끼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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