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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96)화 (96/112)

096. 루블리안과 봉인 (25)

폭발로 인해 의식이 암전되었을 때, 잠시간 나를 깨운 주신은 다시금 기절한 나를 만나러 왔다. 마신이 성공적으로 봉인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고맙구나.”

“당신한테 감사 인사받으려고 한 일이 아닌데요.”

“그렇지. 너는 네 연인과 함께하고 싶어 그런 것일 테니.”

눈이 휘어지는 그 찰나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주신의 말에 깃든 따스하기만 한 감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눈을 두어 번 끔뻑이며 주신을 응시하다 맞붙은 입술을 떼어 냈다.

“들어주기로 했던 거나 잘 들어주시면 좋을 것 같네요.”

단조로운 끝 음이 떨어지자, 주신은 그건 당연하다는 듯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바라는 게 없냐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기까지 하는데, 그토록 좋아했던 마신이 돌덩이로 변한 게 슬프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미미하게 눈이 커졌다가, 도로 본래 크기로 돌아왔다.

“당연히 슬프단다.”

주신은 내 의문을 풀어주겠다는 양 아이를 대하는 상냥하고 친절한 투로 서두를 뗐다.

“그렇지만 내 애정의 척도에 따라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가 판가름 되는 게 아니지 않니. 나는 나의 형제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면 한단다. 마땅한 벌을 받는 게 옳다 생각하기도 하고.”

“그게 소멸이라도요?”

“그래, 소멸이라도.”

굳건한 의지를 담아 마침표를 찍는다. 어떻게 공과 사를 딱 잘라 구분할 수 있는 건지, 신은 신이라는 건가. 나는 그의 생각을 이해하길 곧장 포기했다.

“물론 소멸 전까지는 내 곁에 있으리란 사실이 날 기쁘게 만들기도 한단다.”

비밀이라는 듯 속삭이는 신에 더욱 생각이 굳어졌다.

신의 생각을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말자고.

곁에 있더라도 마신은 봉인이 된 채였다. 검은 돌 같은 모습으로 곁에 있는데, 그게 기쁠 수 있을까. 오히려 속상함이 밀려든다면 모르겠다만.

“사실 나는 인간의 의식에는 나타나지 못한단다.”

화제가 달라졌다. 맥락 없는 말이었지만, 저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네가 신과 엇비슷한 육체를 가지게 되어 간신히 이리 나타난 거지. 인간의 육체였다면 너는 아마 죽었을 거란다.”

“원래 인간의 육체로 다시 돌려놓으실 생각이신가요.”

간단한 물음에 주신의 고개가 미미하게 움직였다. 그렇다는 의미였다.

“내게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니, 힘 써 준 너를 위해 다시 돌려놓을까 하는데. 아이야, 너는 어떠니?”

인간은 유한한 삶을 살지만, 신은 무한하다. 그런 삶 중 어떤 쪽을 택하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였다. 루블리안은 인간이니 말이다.

이러한 내 속내를 들여다본 듯 신이 웃었다. 입꼬리에 서린 미약한 웃음기가 살며시 번져나갔다.

“규칙이라는 건, 한 번 지키지 않으면 다음에 또 그러기 쉬워지지. 아이야, 너는 규칙에서 많이 어긋난 자란다.”

“……여러모로 많은 일에 휘말렸으니까요.”

평행 세계 루블리안과 마신이 그 주원인이었다. 주신은 다 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의 불찰도 기여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앞으로도 신계는 너를 주목할 거라는 것이며,”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들이켠 주신이 아주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듯 나를 응시했다. 모든 생명을 품은 것처럼 보이는 눈동자가 밝게 빛났다.

“너를 축복할 거라는 말이기도 하단다. 남은 네 인생에 행복만이 가득하길.”

잘가렴. 다음에는 만나지 말자꾸나, 아이야.

그 말을 끝으로 밀려나는 감각이 나를 덮쳤다. 내 의식인데, 왜 내가 나가는 건지. 어이없다는 감상이 들기도 잠시, 일시적으로 빛을 잃었던 시야가 화려한 색감을 되찾았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열렬히 반짝이는 금빛 머리칼이 있었다.

얽힌 시선.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는 침묵. 그 고요한 눈 맞춤 속에서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윽고 목구멍에서 울림이 나타난다.

“……안녕, 루블리안.”

루블리안이 헛숨을 터트렸다. 꼭 지금 자신이 그 인사를 달갑게 받아들일 것 같냐는 눈빛이 따라붙었다. 그가 상당히 저조한 상태라는 걸 바로 알아차렸다.

“목소리 듣고 싶어. 들려줘.”

내 침대 아래에 앉아 있는 루블리안의 뺨에 손을 올렸다. 보드라운 뺨을 살살 매만지자,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리움, 안도, 미약한 괘씸함. 여러 감정이 섞인 복잡한 낯의 주인은 끝내 말소리를 내었다.

“일부러 이러는 거죠.”

“뭐가.”

“지금 이렇게 구는 거요.”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고는 내 허리를 감싼다. 익숙하고 포근한 향이 코를 찔렀고, 따뜻한 체온이 몸을 녹였다. 그 상태로 있기를 잠시, 루블리안이 내 어깨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당신한테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았는데…… 첫 마디가 인사라서 힘이 다 풀리네요.”

“…….”

“화를 낼까, 애원을 할까, 일어나줘서 고맙다고 할까. 당신이 잠든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끝없이 고민했거든요.”

가만히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멈칫했다. 한 달? 기껏 해봐야 일주일 정도를 잠들어 있었을 줄 알았다.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을지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미안해.”

우선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해 입을 움직여 소리를 냈다. 루블리안은 살짝 고개를 틀고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이유를 읊어 보라는 것 같았다.

“걱정하는 너를 놓고 간 것도, 육체를 바꾸기 전에 마신을 봉인할 때 같이 갈 동료들의 힘을 길러주라는 거짓을 첨가한 전언을 보낸 것도. 그리고…….”

기억을 되짚으며 하나씩 미안했던 것을 말하자, 내 입술에 말랑한 것이 닿았다. 루블리안의 입술이었다. 과장 없이, 정말로 그가 코앞에 있었다.

곧 아랫입술이 깨물리고 뜨거운 열기를 품은 것이 입속으로 침투했다. 거칠기보다는 느릿하고 다정했다. 여전히 투박한 움직임이었으나, 어쩐지 애틋함이 느껴졌다. 질척이는 소리가 귀를 점령하고, 숨이 차오를 무렵 루블리안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그는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잠깐의 숨 쉴 틈을 주더니, 다시금 입술을 맞대어왔다. 젖은 입술은 끊임없이 내 입술을 베어 물었다. 벗어나지 말라는 듯 단단히 나를 붙잡은 팔에서 묘한 불안감이 전해졌다. 그에 나는 숨을 허덕이며 입을 맞출 뿐이었다.

“으응…….”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는 타액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른 채로 삼켰다. 서서히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거의 그의 팔에 몸을 지탱한 채로 숨을 나눴다. 그 오랜 입맞춤이 끝났을 때, 내 등에는 푹신한 침대가 닿아있었고, 위에는 루블리안이 있었다.

“당신이 일어나지 않는 한 달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몰라. 숨 쉬는 걸 매일 확인하고, 심장 소리를 매일 듣고.”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떨렸다. 나는 팔을 움직여 루블리안의 등을 끌어안았다. 그의 상체가 아래로 내려오고, 우리 사이에는 틈이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의 무게가 내 몸 위로 쏟아져 내렸다.

“내가 잘못했어.”

“이렇게 말하고 당신은 또 뛰어들겠지.”

맞는 말이었다. ‘루블리안 셀턴’이라는 이유가 뒤따르면 나는 또 그렇게 할 테니. 그렇지만……. 잠시 생각에 잠겨 대답이 없는 사이, 루블리안이 미치겠다는 낯을 했다.

“거짓말이라도 해 주면 안 돼요?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명백한 애원이었다. 바스러질 절벽에 서 있는 것처럼 위태로운 루블리안을 보자, 자연스럽게 생각이 멈췄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넘기며 말했다.

“노력할게. 너랑 같이 살기로 했으니까.”

“…….”

“이런 일이 생겨도 혼자 하려 하지 않을게.”

속내를 꺼내 드는 건 꽤 힘든 축에 속했으나, 루블리안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느린 속도로 한 말을 들은 루블리안이 팔에 힘을 실었다. 그의 품에 갇혔으나,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그냥 루블리안이 안정될 때까지, 진심으로 한 말이라는 걸 체감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시계의 똑딱거림이 방 안을 울리고, 커튼이 걷힌 창 너머로 햇볕이 스민다. 훈훈한 공기가 방 안을 맴돌았다.

“……약속이에요.”

“약속할게. 그런데 너는.”

이 타이밍에 이걸 물어봐도 될까? 선뜻 말문을 트고 나서야 의문이 들었다. 무엇에 대한 머뭇거림인지 알아차린 루블리안이 조금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숨을 흘렸다.

“어떻게 마신한테 대적했는지, 그게 궁금한 거죠.”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이 내 의식에 침투하여 나를 잠시간 깨웠을 때, 분명 루블리안이 마신을 움직이게 했다. 그건 창처럼 날아오는 스태프를 방어할 수 없다는 것처럼 보였다.

“주신이 말하더라고요. 당신의 아공간에 남은 성물이 있다고. 인간계에 내릴 수 있는 성물의 수가 한정되어 다시 줄 수 없으니 그걸 어떻게든 꺼내 보라고도요. 저는 그걸 찾았고, 스태프에 그걸 달아 신의 힘을 깃들게 한 거예요.”

“……내 아공간을 찾았다고? 그게 가능해?”

“으음, 시현. 저는 마탑주예요. 마법은 시현보다 잘하죠.”

한마디로 알아서 찾아냈다는 거다. 나를 보자마자 바로 따라오지 않은 이유도 저것 때문일 터였다. 부러 소리를 낮춘 달달한 속삭임을 듣다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나를 껴안은 몸이 우뚝 굳는 게 느껴졌다. 루블리안의 뺨에 혈색이 아주 잘 돌았다. 뜨거운 햇빛에 익은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런데 데드리언하고 몬트리오, 알리는? 아, 평행 세계 미친놈하고 백시현도.”

한동안 끙끙거리던 루블리안이 내 말에 번뜩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 이름이 나온 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으나, 그는 순순히 그들의 상황을 말해 주었다.

“마신이 봉인되었으니, 균형이 무너질 일만 남았잖아요. 평행 세계 백시현은 신에 의해 급히 돌아갔어요.”

여기 있는 동안만큼은 이야기를 들어주겠다고 했는데, 들어주긴커녕 말 한 번 나누지 못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서도 그리 살 걸 생각하니, 그래. 솔직히 미약한 죄책감과 동정심이 들었다. 나 또한 사람인지라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마왕 문제도 해결되었으니, 몬트리오는 황궁으로 돌아갔어요. 데드리언하고 알리도 제각기 할 일을 하러 떠났고요.”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니 그럴 만했다. 돌아가기 전에 인사 한번은 하고 가려 했는데 아무래도 무리일 성싶었다.

“그리고 아저씨야…… 봉인이 끝났으니 볼 일이 없죠. 그 성격 더러운 새끼한테 관심 가지지 말아요, 시현. 네에?”

“안 가져. 네 말대로 이제 볼 일도 없잖아.”

스물두 살에 만날 거, 그거 딱 한 번을 빼면. 그러나 그 생각을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저 속으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들 시현에게 편지를 남겼어요.]

기회를 엿보고 있던 건지 조심스럽게 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메웠다. 활달하기보다는 차분한 음성에 의아하기도 잠시, 의문이 들었다. 편지?

[방금 막 깨어난 시현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루블리안은 나중에 말해 줄 것 같아서요. 나중에 달라고 하세요. 루블리안이 가지고 있으니까요.]

루블리안을 바라보자, 그는 신이 내게 말을 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기색이었다. 당장 뭐라도 할 기세라 괜찮다는 의미를 담아 좌우로 고개를 두어 번 저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해요, 시현. 당신이 용사여서 저 또한 즐거웠어요. 다시 볼 수 있다면 좋겠지만…… 신계의 규칙이 있거든요. 용사가 아닌 당신에게 말을 걸 수야 없죠,]

시간을 되돌리기 전, 용사 시절 그랬던 것처럼 신은 내게 이별을 고했다. 다시 시간을 되돌릴 일도 없을 테니, 완전한 이별이었다.

[당신의 앞날에 기쁨이 가득하기를.]

진심이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가득 찼다. 이내 바로 앞에 포탈이 생겼다. 아마도 내 고유의 세계로 연결된.

“드디어 떠나네요. 가요, 시현.”

상체를 들어 올린 루블리안이 후련하다는 듯이 말했다. 기쁘다는 감정을 담아 나를 응시하는 푸른 눈동자는 바다 같았고, 금빛 머리칼은 그 바다를 비추는 달빛 같았다. 잔잔히 일렁이는 밤바다의 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가는 기분이다. 한여름의 밤바다가 눈앞에 생생히 펼쳐지는 듯한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옅게 웃었다.

“그래.”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는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루블리안과 함께였다.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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