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5. 루블리안과 봉인 (24)
넋을 놓지 않고 발 빠르게 움직였다. 잔해물 너머에서 커다란 기운이 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아공간에서 성물을 꺼내어 든 나는 힘을 흡수하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타인에게 마력을 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모든 정신력을 힘을 흡수하는 데에 집중시켰다. 혈관을 타고 마력인지, 신성력인지, 그것도 아니면 오러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마력과 신성력의 근본적인 힘이라 그런지 확실히 더 강대했다. 육체가 신처럼 바뀌어 흡수할 수 있다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차라리 미리 흡수하고 오지 그랬어요.]
빠르게 마지막 성물을 흡수 중일 때, 초조한 목소리가 울렸다. 신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루블리안에게 봉인을 제안한 건, 본인이면서.
정신력 유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했기에 지금 당장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나는 힘을 모조리 흡수한 뒤에야 답을 했다.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던 것 중 하나가 성물이라며.’
그것도 성물에 담긴 주신의 힘 때문에 유지되던 거였다. 그런데 내가 그 힘을 다 삼켜버리면? 껍질만 남은 성물이,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데 기여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갑자기 세계의 균형이 무너져 누군가 죽지 않으면 다행이지, 절대 유지될 리가 없었다.
이러한 내 속뜻을 알아차린 건지 신이 탄식했다.
[그 상황에서 이런 걸 생각한 시현도 정말……. 하아아, 받으세요.]
내 손에 떨어진 건 주신의 힘이 느껴지는 성물이었다. 있으면 좋기야 하지만, 이걸 더 주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내가 무어라 묻기도 전에 신이 선수를 쳤다.
[시현의 육체를 바꾼다고 하니, 주신님이 주셨어요. 어떤 방법으로 싸울지 알겠다고 하시면서요. 애초에 현재 흡수한 주신님의 힘은 봉인에 이용되어야 하니까요.]
시간을 끌면 끌수록 내가 불리해져, 바로 봉인을 시도할 생각이었는데. 손안에 있는 세 개의 성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힘을 흡수할 때였다.
몸을 가리고 있던 잔해물이 부서졌다. 허공에 부유하는 회색빛 가루 사이로 나부끼는 길게 늘어진 흑발이 보였다. 이내 마주한 핏빛 눈동자가 가늘어진다.
그 순간, 몸 전체에 소름이 돋아났다. 머릿속에서 위험하다는 적색경보가 울렸다. 느껴지는 격 차이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조금이지만, 거리가 벌어졌다.
“무슨 작당을 했길래 당당히도 나를, 그것도 본래 몸의 나를 부르는가 했더니…….”
선혈을 굳혀 만든 듯한 눈동자가 느리게 굴러 나를 훑어내렸다. 그 탓에 발끝부터 시작해 나를 천천히 옭아매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느껴졌다. 턱 끝까지 새빨간 피가 차오른 것만 같았다.
“신의 밑에서 기어야 할 인간이, 언제부터 신의 육체를 가질 수 있게 되었지?”
무료하기 짝이 없다는 듯했던 낯짝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불쾌감이 가득 서린, 신의 영역을 넘본 인간이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그런 감정이 가득한.
긴장감이 짙게 깔렸다. 공기가 무거워 숨을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숨통이 막힌 기분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골로 간다는 게 확실히 와닿았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나는 바로 힘이 남은 성물 두 개를 아공간에 넣었다. 하나는 흡수를 시도조차 하지 못했고, 하나는 3분의 1정도의 힘이 남았다. 최대한 빠르게 힘을 빨아들인 결과였다.
“네 동료를 데려오지 않은 걸 보아하니…… 걸림돌이라는 걸 알고 있나 보군. 아쉽게 되었어. 인질로 잡기 딱 좋은데 말이야.”
사라지는 성물을 증오스럽다는 눈으로 바라보던 마신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거역하면 죽음이 도사릴 듯한, 그런 힘.
입술이 바싹 말랐다. 주신의 힘이 체내에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이 달랐다. 마신은 나보다 훨씬 긴 기간을 살았으며, 이런 힘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더불어 두뇌 회전 또한 빠른 걸로 추측된다.
긴장의 끈을 한순간이라도 놓는다면, 실패할 게 자명했다. 신성력이나 마력을 길게 뽑아냈던 것처럼 신의 힘을 실체화시켰다. 두 손에 신의 힘으로 된 새하얀 검을 쥐자, 마신이 새빨간 입술을 주욱 끌어올렸다.
“신의 힘을 얻었다고 해서, 네가 신이 된 것 같나?”
“…….”
“주제를 알아야지. 힘을 얻었다고 이리 날뛰는 꼴이란……. 하찮고 멍청하기 짝이 없어. 그러나 가지고 놀기에는 그런 것들이 제일 적당하지.”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 마신이 팔을 움직였다. 거대하고 날카로운 힘이 둥근 칼날처럼 뻗어져 나왔다. 힘을 변형하여 내 몸을 보호하자, 일대가 모두 가루로 변한 게 보인다. 듬성듬성 조각난 대리석은 원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이를 행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몸을 차지했을 때보다도 훨씬 강력하다는 사실이 몸소 체감되었다. 봉인이 겁나지 않는다면, 본체로 오라는 도발에 순순히 응한 이유도 알겠다. 그만큼 자신이 있었던 거다. 봉인 시도를 하는 한낱 인간 정도야 당연히 제압한다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 했다.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다. 딱 한 번, 닿기만 하면 됐다. 나는 내 몸에 들어찬 힘을 느끼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가늠했다. 죽일 생각이었으면 곧장 죽였을 테니 가지고 논다고 치면…….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 이제 와서 무섭나? 죽을 것 같아서?”
“그다지. 죽는 게 두려웠으면, 네 앞에서 내가 시간을 돌렸겠어?”
다리가 굳은 듯 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으나, 입은 자유분방했다. 마신의 기세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도발에 퍽 쉽게도 넘어온다.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으나, 속은 말이 아니었다. 잘못 디디면 떨어질 듯한 낭떠러지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무겁게 내리누르는 공기에 조금 힘을 빼면 몸이 축 늘어질 듯했다.
“제 다리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게 입만 살았어. 그래, 이런 걸 인간들 말로는 물에 빠져도 입만 뜬다고 하던가.”
진심으로 화가 난 듯 거세지는 공격을 버티기 빠듯했다. 그는 움직이지도 않는데, 나는 막는 데 급급하여 밀려나기만 했다. 종종 자잘한 상처가 생겼으나, 신과 닮아진 육체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계속해서 몰아치는 공격에 신의 힘이 훅훅 깎였다. 순간 이동을 하면, 마신 또한 순간 이동을 한다. 근접 공격은 일절 하지 않는다. 죽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 육체를 바꾸고 신의 힘을 받아들인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 이미 파악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마법진처럼 봉인진을 전개하고 거기에 힘을 불어넣으면 어떨까. 쇄도하는 공격을 피하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안 된다는 답만이 나왔다. 그야 그럴 것이 어디로 가든 마신이 피하기만 하면 딱 한 번 가능한 봉인 시도가 실패로 막을 내리기 때문이었다. 방어만으로도 버거운데, 그를 잠시라도 묶어놓는 건 불가능하다.
생각해. 생각해내야만 해. 좀 더 신중히, 괜찮은 방안을 떠올려야 했기에 스스로를 다그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가 점차 깊어졌다. 상처 입고 피 흘리는 내 모습이 흡족한 듯 웃는 게 보였다.
치료는 신성력으로, 이동은 마법으로. 방어와 공격은 신의 힘으로. 가진 힘을 체계적으로 나눠 효율적으로 방어하고 공격했으나, 마신에게 제대로 닿는 건 없었다. 특히나 방어 열 번에 공격 한 번꼴이었다.
커다란 벽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부서지지도 않는 강철 벽. 서서히 줄어가는 신의 힘이 느껴졌다. 아공간에서 나머지 성물을 꺼내 힘을 흡수하는 것도 무리였다. 생각보다도 더 고전할 성싶었다.
그때 하늘에서 이상 현상이 발견되었다. 공간이 어긋났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가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것도 여러 곳에서.
“널 죽이는 걸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 않지.”
마신의 중얼거림이 귀에 들려옴과 동시에 공간이 어긋났다. 이윽고 그 포탈 속에서 나타난 건 금빛 머리카락, 그러니까 루블리안이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 나는 그 모습에 정신이 팔렸다. 그리고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폭발음이 일대에 울렸다. 귀에서 삐 소리가 나고, 그대로 시야가 점멸했다.
_oOo_
루블리안 셀턴이 신을 닦달해 최초의 세계로 발을 들이자마자 보게 된 건, 뿌연 회색 가루들이 흩날리는 모습이었다. 마법으로 그 가루들을 가라앉히자, 쓰러진 백시현과 그 곁의 마신이 보였다.
시현의 옷은 붉은 액체로 온통 젖어 있었다. 피였다. 루블리안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마신을 응시하다, 그대로 달려들었다. 그의 스태프에는 시현의 아공간에 있던 성물이 박혀 있는 채였다.
캉― 날카로운 금속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여파로 마신의 곁에 있던 백시현에게 상처가 났다. 의식을 잃었으니, 스스로 방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상처는 금세 나았지만, 루블리안은 그가 다친다는 사실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놈의 사랑. 모든 신이 믿고 따르는 내 형제였던 신도 그깟 감정 하나 미쳐 있었는데. 다르질 않아.”
루블리안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백시현이라는 걸, 마신 또한 알고 있었다. 평행 세계라지만, 루블리안인 자에게서 기생했던 그였다. 그 감정이 얼마나 사람을 멍청하게 만드는지를 알았다.
“그 때문에 이리 목숨을 쉽게 버리는 거 아닌가.”
당연히 마신에게 죽으리라는 투였다. 쓰러진 백시현과 같이.
루블리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가 다시 달려들려던 때였다. 백시현의 손끝이 움찔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포착한 것은 루블리안뿐이었다.
옛 생각에 빠져 증오를 키우던 탓에 원래라면 먼저 눈치채고 손가락을 으스러트렸을 마신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루블리안은 그것을 기회라고 여겼다.
짧은 고민 끝에 그는 성물의 힘을 모두 스태프에 실었다. 이어 창처럼 던져 마신이 피하게끔 했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마신이 막아도 뚫릴 테니 움직이리라는 계산 하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 정도를 내가 못 피할 거라고, 설마.”
일대가 흔들린 순간, 백시현이 가까워진 마신의 발목을 잡았다. 마신이 반응하기도 전에 머릿속에 각인시킨 봉인진을 손바닥에 떠올린 뒤, 몸에 있는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아아아아아악! 당장 놔!”
계속해서 비명이 울렸다. 마신이 천천히 검은 돌로 변하기 전까지.
마신이 봉인된 후, 백시현은 다 끝났다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모든 기력을 소진한 탓이었다. 그런 그를 챙긴 건 루블리안이었다.
“포탈 다시 열어.”
[이제야 연결이 되네요. 열었어요.]
백시현을 추슬러 안은 루블리안이 푸른 빛이 도는 포탈에 발을 디디려 할 때였다. 신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루블리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는 백시현을 더욱 세게 안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