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4. 루블리안과 봉인 (23)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으나, 전과 같지는 않다는 게 느껴졌다. 천천히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를 몇 번.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앉았다. 묘하게 몸이 가볍다.
“일어났어요?”
내 무릎 맡에 엎드려있던 루블리안이 내가 일어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쳐들었다. 조금 졸린 지, 눈을 느릿하게 끔뻑인다. 이내 눈을 비비려 들어 그 손을 막았다. 그에게 없던 습관이라, 일부러 그랬다는 걸 알았다.
“너 안 잤지.”
눈꺼풀이 무거워 보이는 게, 딱 졸음을 참는 모습이다. 애당초 내가 잠들었을 시간 동안 루블리안이 가만히 잠을 잤으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루블리안을 진득하게 바라보며 피로의 흔적을 찾는데, 그가 입을 움직였다.
“자긴 잤어요. 그렇지만 이렇게 걱정할 거였으면 전령 말고 얼굴을 보고 말해줬어야죠, 시현.”
다정하게도 나무란다. 방금 내가 그런 것처럼 나를 샅샅이 훑는 루블리안이 사랑스러웠다.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건네자, 제가 다 늙겠다는 양 한숨을 내쉰다. 조금만, 조금만 하며 무어라 더 말하는 그를 바라보다 보니 시간이 잘도 흘러갔다.
“우선 시현이 부탁한 이야기는, 다 전달해 놨어요. 그런데 무슨 생각이에요?”
“…….”
“시간을 돌렸으니 그간 들였던 노력의 흔적이 다 사라졌다는 거 알아요. 전보다 확실히 약하잖아요, 걔네. 그래서 훈련 좀 봐주라는 당신의 말을 들었어요.”
아직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으나, 어떠한 말이 나올지 알았다. 내가 사흘간 잠에 빠지리라는 걸, 다른 부연 설명 없이 전했으니까. 그로서는 굉장히 황당했을 테다.
“저한테 해 줄 말은 없어요, 시현?”
“이미 알고 있잖아.”
내가 의식을 잃었던 동안 루블리안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을 리는 만무했다. 오히려 신과 연관됐을 게 뻔하니, 신을 탈탈 털어먹었다면 모를까.
푸른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내게 직접 듣고 싶다는 확고한 의사가 읽혔다.
“육체를 바꿨어.”
그렇기에 결국 내 입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거였다. 루블리안이 원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계획한 봉인 방법부터 며칠간 잠든 까닭까지, 모든 걸 토로했다. 루블리안의 표정은 좀처럼 변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화났네. 이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다. 말이 끝났음에도 입꼬리만 올리고 있는 걸 보니 확실했다. 내 손등을 만지작거리며 먼저 입을 열지 않는 루블리안에 짧게 숨을 뱉었다.
“……나는 그냥 너랑 있고 싶었어. 마신, 마왕, 평행 세계. 이제는 지긋지긋하기도 하고, 다른 거에 신경을 쏟을 필요 없이 너만 신경 쓰고 싶었어.”
형체 없는 진심을 문장으로 만들어 세상 빛을 보게 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속내를 잘 꺼내지 않는 사람인 나는 더더욱 그랬다.
심사숙고하여 문장이라는 형태가 생긴 진심의 한 조각은 루블리안을 무너지게끔 했다.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은 그가 내 손을 조금 더 세게 그러쥐었다. 말소리가 들려왔으나, 심히 뭉뚱그려져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마지막 평화를 맞이하듯이.
“나가자.”
“약속해요, 시현.”
“뭐를?”
“봉인이 실패하면 도망치겠다고요.”
잡힌 손에 의해 질질 끌리듯 내 뒤를 따라오던 루블리안이 한 말에는 잔뜩 힘이 실려있었다. 확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선명했다.
도망, 갈 수 있으려나. 솔직히 실패하면 그대로 끝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저번에 마신을 대적할 때 느꼈던 힘 차이를 줄였는데도 지면, 그건 그냥 세상이 멸망할 징조로 보는 게 맞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을 루블리안에게 전하지 않았다.
“그럴게.”
그저 사귄 이래, 잘 하지 않던 거짓을 고할 뿐이었다. 나를 잘 아는 루블리안이라면 이게 진심인질 가늠하며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터라, 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왔네~.”
잠들기 전, 모두와 있던 방으로 가자 데드리언이 손을 설렁설렁 흔들었다. 몬트리오는 거의 영혼이 빠진 낯이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나를 보더니, 아닌 척 눈을 키웠고.
그리고 알리는…….
“안녕하세요! 그간 잠시 어디에 가셨다고 들었는데, 이제 오셨네요!”
여전히 티 없이 해맑았다. 수작에 당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훈련은 잘했나 봐.”
적당히 인사를 받아 주며 말하자, 몬트리오가 경악에 찬 낯을 하고서는 크게 소리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냐고. 어찌나 목소리가 크던지 꽤 거리가 있었음에도 귀가 얼얼했다. 그 옆에 앉아 있던 데드리언은 태연하게 귀를 막고 있었다.
“쟤는 악마다! 마왕도 이보다는 사악하지 않을 거다!”
“시현…… 몬트리오가 저 모함해요. 그렇게 빡세게 굴리지도 않았는데 말이에요.”
턱을 아래로 당긴 탓에 금빛 속눈썹이 따라 내리깔렸다. 파르르 떨리는 게, 온 세상의 처연함을 끌어모은 듯했다.
그 모습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몬트리오가 입을 떡 벌렸다가 길길이 날뛰었다.
“허, 어이가 없군. 그게 심한 게 아니면 어떤 게 심하다는 말인가!”
“소리 지를 힘이 가득한 걸 보니, 강도 올려도 되겠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투덕거리는 루블리안과 몬트리오를 바라보다, 맞잡은 손을 움직였다. 빠져나가려는 걸 감지하자, 곧장 조금 더 힘을 주는 루블리안에 빈손으로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렸다. 놓으라는 소리였다.
“꼭 그래야 해요?”
“그래야 하니까. 놔.”
입술을 삐죽 내밀어 삐졌다 시위한다. 자유로워진 손으로 둥그렇게 튀어나온 입술을 꾹 눌러 집어넣고는 알리에게 향했다.
“나랑 이야기 좀 할래?”
“저요?”
“어.”
느닷없는 호명에 알리는 얼떨떨한 기색이 역력했다. 싫냐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바로 괜찮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는 다른 이들을 이 방에 남겨두고, 알리와 방을 나섰다.
같이 가겠다 조르는 루블리안과의 실랑이가 있었으나, 이번에 진 건 루블리안이었다.
“가서 계약했어?”
“네?”
“새로운 정령하고, 계약했나 해서.”
한적한 복도에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 예상대로 흘러갔다면 간접적으로 마신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었으니 당연했다.
“아니요? 그런 일은 없었어요.”
눈을 두어 번 끔뻑거린 알리가 고개를 꺄우뚱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는지 의아하다는 듯이.
“안타깝네. 그렇다면 말 좀 전해 달라고 하려 했는데.”
좀 만나자고.
말을 끝맺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던 때였다. 내 걸음을 멈추려는 건지 팔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를 피하지 않고, 잡혀 주었다. 뒤를 돌자, 입술을 꽉 깨문 알리가 보인다. 이윽고 그녀가 묻는다.
“어디서요?”
조종하는 정령을 통해 마신이 알리에게 말을 전한 게 분명했다. 정말 이러고 싶지 않다는, 일그러진 낯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느릿하게 대꾸했다.
“최초의 세계에서. 아, 그리고 본래 육체로 오면 더 좋을 것 같네. 물론 봉인이 겁나지 않는다면.”
“……미쳤어요?”
저 말은 마신이 내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알리의 단독적인 행동이었지. 제정신이 아닌 사람을 바라보는 눈과 마주하다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니, 확실히 그렇지. 애초에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싶었다면 용사를 하면 안 됐다. 늘 말하지만, 용사가 사람을 망친다.
“언제요?”
“지금 당장.”
“……진짜 미쳤어요?”
[시현, 제정신이에요?!]
갑자기 들이닥친 목소리에 머리가 아파 살짝 눈을 찡그렸다가 폈다. 신 때문이라는 걸 모르는 알리는 자신의 걱정을 귀찮게 여긴다고 생각한 건지, 흉흉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본다.
아니라고 해명하지 않자, 눈을 더욱 부릅뜬다. 붉은빛을 띠는 눈동자에는 걱정과 짜증이 담겨 있었다.
‘마신을 인간계로 불러들일 수는 없잖아.’
[첫 세계에 마신이 올 수는 있을 것 같아요?]
‘주신은 여전히 마신을 좋아한다며. 그 신이라면 언제든 돌아오라고 거기만큼은 열어놨을 것 같은데.’
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그럴듯해서 그런 모양이었다. 그때 앞에 빛을 등지고 서 있던 알리가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내 대답이 떨어진다.
“……알겠대요.”
저리 말하는 걸 보니, 되는 게 맞는 것 같다. 신은 할 말을 잃었고, 나는 마법을 사용했다. 눈을 동그랗게 떴던 알리가 한순간에 잠에 빠졌다. 또다시 울리는 비상음 속에서 그녀를 바닥에 제대로 눕히고는 신에게 요청했다.
‘저번처럼 포탈 좀 열어 줘.’
[먼저 사고치고, 부탁하면 다 되는 줄 아세요? 하지만 시현은 특별 대상이니까 들어주는 거예요…….]
공간이 비틀어지고 포탈이 나타났다. 그 안으로 발을 디딜 무렵, 비상음 사이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투박하지만, 우아한 모순적인 걸음걸이.
루블리안이다.
“시현!”
고개를 돌리자, 여러 감정으로 얼룩진 낯이 보인다. 어딘가 허망하기도 했으며, 울분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마법으로 나를 저지하는 것보다 내가 이동되는 게 더 빨랐다.
익숙한 울렁거림이 나를 덮쳐들었고, 그것이 사그라들었을 때 나는 회색빛 하늘 아래에 있었다. 저번과 다르게 유일하게 색채를 가진 사람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