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3. 루블리안과 봉인 (22)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들어 올려지는 눈꺼풀이 묘하게 무거워, 느리게 시야가 넓어졌다.
체력적으로 한계가 온 게 아닐까 싶긴 했다. 짧은 기간 내에 여러 일이 있었으니 말이다. 잠도 제대로 못 자기도 했고.
“시현, 우선 좀 쉴래요?”
“그래. 나도 좀 더 자게, 쉬고 와~”
평행 세계 백시현은 이미 자러 갔다며 데드리언이 말을 더했다. 저 둘의 반응과 더불어 평소보다 머리가 더디게 돌아가는 걸 보니, 확실히 상태가 좋지 않은 듯했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함께 자리를 뜨려는 루블리안의 어깨를 꾹 누른 채.
“……시현?”
세상이 무너졌다 해도 이토록 허망한 표정은 짓지 않을 것 같은데. 먹구름이 끼어도 화려한 낯짝을 유심히 살피다, 이내 입을 열었다.
“혼자 잘 거야.”
“왜요?”
“네가 있으면 잠자기가 어려워서.”
진심 반, 거짓 반이었다. 자러 간다고 하고서는 해결책을 찾을 생각이었으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내 온 신경을 전부 가져가 버리는 루블리안이 곁에 없어야 했다. 정말로 내가 잠에 빠졌는지, 아닌지도 빠르게 눈치채 버리니 말이다.
그림자가 걷히고, 부드러운 색을 입힌 낯이 보인다. 곧 애교스럽게 자신이 좋아서 그렇냐고 할 게 뻔했다. 그에 속절없이 휘둘리기 전에 먼저 행동했다.
“따로 배정된 방, 있지?”
“당연하지. 앞에 신관 있을 거야. 데려다 달라고 해.”
걸음을 옮기려 들자, 루블리안이 내 팔목을 잡았다. 커다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순간 마음이 약해질 뻔했으나, 마음을 다잡았다.
같이 가면 안 된다.
“여기에 쟤네들이랑 있어. 조금만 자고 다시 올게.”
“잘 거 아니죠.”
낮은 울림이 귀에 박혔다. 내 행동 양상을 확실히 알고 있다. 루블리안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 침묵으로 답하자, 그가 숨을 내뱉는다. 걱정과 비탄으로 이루어진 숨이었다.
말리고 싶어 하는 게 훤히 보였으나, 그는 내 결연한 눈을 보더니 입을 딱 다물었다. 그의 고집이 센 만큼, 나 또한 한 고집했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그 고집이 아주 가끔만 나타났다는 거였다. 나타나면 누가 어떠한 소리를 해도 그다지 듣는 편이 아니었고.
그 사실을 아는 루블리안이 내 손등에 입술을 한번 지분거리더니, 잡고 있던 손을 풀었다. 이내 조금이라도 자두라며 걱정스럽게 이른다.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데드리언과 몬트리오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이어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신관 한 명에게 배정된 방을 안내해달라고 요청하자, 그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지나가면서 이 신전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는데, 시간을 돌리기 전에 이미 질리도록 들었던 것이라 흘려들었다.
“그럼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신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전에 배정된 방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침대에 앉을까 하다, 나무로 된 1인용 의자에 앉았다. 등받이가 있었지만, 푹신한 소파보다는 딱딱했다. 적어도 기절하듯 잠이 들지는 않으리라. 나는 눈을 감아 볼록 튀어나온 눈 뼈를 살살 문질렀다.
잠이 조금 깼다. 이내 눈을 끔뻑이다 아프지 않게 혀를 잘근거리며 상념에 빠졌다.
봉인진으로 유인하는 건, 신의 힘이 흐르는 봉인진과 마신을 접촉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봉인진을 작게 만든다는 데드리언의 의견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축에 속했다.
그걸 지뢰처럼 깔면 신의 힘이 분산되고, 성물의 위치가 애매해지는 게 문제일 뿐이지. 그렇다면 작은 봉인진을 하나만 놔두고 밟게 하는 건 어떨까. 이것도 성물의 위치가 애매했다. 나는 침음을 삼켰다. 도통 괜찮은 생각이 나오지를 않았다.
봉인진에 성물에 담긴 억눌린 주신의 힘을 흐르게 하기 위해서는 위치가 중요했다. 최초의 세계에서 봉인진 주변 사각 석상 위에 성물이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작은 봉인진, 접촉, 성물에 담긴 힘……. 머릿속에 둥둥 중요한 키워드가 떠다녔다. 마법진을 풀어헤치고 조합하던 것처럼 여태까지 나왔던 방법을 쪼개고 붙이기를 몇 번. 불현듯 그나마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지는 방법이 떠올랐다.
‘신.’
[네, 시현.]
계속해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신이 빠르게 답을 해왔다. 잠이 부족한 탓에 골이 더 울리는 느낌이었다. 이를 최대한 무시하고 방금 떠올린 것에 관해 물었다.
‘성물에 담긴 신의 힘을 인간이 흡수하는 건 무리일까?’
마력과 신성력, 오러 또한 신의 힘이었다. 물론 희석되고, 세분됐기에 성물에 담긴 본연의 신의 힘보다는 훨씬 약하지만 말이다.
[……네? 당연하죠. 인간의 육체가 신의 힘을 받아들이기에는, 잠시만요. 설마 아니죠, 시현?]
언제나 내가 물어보는 이유는 그걸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였다. 한낱 인간보다는 많은 걸 아는 신에게 사전 조사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그리 짧지 않은 시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신이 호들갑을 떨며 기겁했다.
[제정신이에요? 오, 세상에. 루블리안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할지 시현이 가장 잘 알잖아요! 저는 말리지 못했다는 죄로 몇 달간 시말서에 묻혀 살게 되겠죠. 으, 끔찍해라!]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 탓에 머릿속에 탁구공이 팅팅 돌아다니는 느낌이 들어 이맛살을 구겼다. 아프기도 아프고, 정신도 없다.
‘머리 깨질 것 같으니까 진정 좀 해.’
[시현,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요! 인간의 육체로 신의 힘을 받아들이는 건 무리예요. 가뜩이나 주신님의 힘이잖아요! 창조신!]
끝내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손바닥에 이마를 묻은 나는 신이 흥분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렸다. 지금 반응으로 봐서는 제재해 봤자일 테다.
예상대로 몇십 분이 흐르자, 신이 알아서 차분해졌다. 그는 한차례 갈라진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몸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올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시현이 생각하는 방법이 뭔지 말해 줄 수 있어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솔직하게 그 방법을 추천하고 싶진 않지만요.]
‘마신을 우리가 봉인하기에는 힘이 터무니없이 약해.’
더군다나 데드리언과 몬트리오는 토벌 경험이 전무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보다 하향된 실력을 갖추고 있었고, 평행 세계 백시현은…… 싸우는 걸 보지 못해서 가늠되지 않았다. 즉, 우리의 총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그 상태로 봉인을 하려고 해 봤자라는 거지. 최초의 세계가 그랬듯 우리도 다 죽을걸.’
[그걸 그렇게 태평하게 말해요……?]
‘사실이니까.’
습관적으로 손톱끼리 맞부딪혔다. 다른 손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성물의 힘을 흡수하는 거였어. 마신과 힘이 비등해지니, 한 번 닿는 것쯤이야 할 수 있겠지.’
[닿아요? 아, 손바닥에 봉인진을 그려 두려고요?]
저리 쉽게 유추해내는 걸 보면 자리를 뜨지 않고, 우리의 대화를 다 들은 모양이다. 나는 점점 무겁게 떨어지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피곤하다 하더라도 지금 잠들 수는 없었다.
‘맞아. 마신에게 닿았을 때 성물에 담긴 힘을 쏟으면 되니까.’
성물을 미리 배치하고, 봉인진으로 유인할 때는 그 힘을 어떻게든 가려야 했다. 그야 성물의 힘이 느껴지는 곳 주변에 봉인진이 깔려 있을 게 자명하니 말이다.
그러나 마신이 이미 자신을 봉인하려는 작당인 우리를 알고 있고, 그를 봉인진으로 유인하지 않아도 되는 이상 힘을 숨길 필요가 없어진다.
[이해했어요. 봉인진이 잘못되지만 않는다면 성공할 확률이 높겠네요. 주신님의 힘으로 마신을 대적하는 거니, 시간이 돌아가기 전처럼 당하기만 하지도 않을 테고요.]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듯하여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다. 신이 고민하는 듯 눈을 굴리는 소리가 울렸다. 고요 속에서 서서히 눈꺼풀이 눈동자를 덮을 때였다.
[시현이 말을 꺼냈을 무렵에 바로 안건을 올려서 그런가. 답은 빨리 왔어요. 그런데요,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인간이지만, 신과 비슷한 육체를 가지게 되는 건 여러 문제가 잇따라요.]
‘없어, 다른 방법. 마왕이 날뛰고, 곧 마신의 수작에 당한 알리도 돌아오겠지. 이미 여러 의견이 나왔었지만, 다 애매해서 퇴짜를 맞혔던 거. 당신도 보고 있었으니까 알 거 아니야.’
나를 염려해서 하는 말이란 걸 알았다.
대충 어떤 문제가 있을지 예상이 가기도 했다. 보통 인간은 자신과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대상과 거리를 둔다. 그 대상을 꺼림칙하게 여기기도 한다.
하물며 인간과 신에 가까운 인간이다. 이질적인 부분을 못 느낄 리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상처도 잘 나지 않는 단단한 육체일 테고, 상처가 나더라도 빠르게 수복될 것이라 예상할 수 있었다.
잘못하다 잡혀가 실험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마치 내 상황이 아닌 것 같은 관조적인 태도였다.
[시현은 왜 그렇게 자신을 희생하고 그래요?]
그에 감정적으로 구는 건 신이었고.
그다지 희생이라고 할 게 있나. 내 인간관계는 상당히 협소했다. 박시찬, 이리형, 김민식은 내가 자기네들과 조금 다르다고 해서 배척할 인물이 아니었다. 루블리안 또한 마찬가지였다. 즉, 내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신과 비슷한 육체를 갖는다는 건, 죽는 게 어렵다는 것을 뜻하기도 해요. 당신은 루블리안이 죽고도 몇백 년을 더 살아가야 할 수 있어요. 신에게 몇백 년은 그다지 길지 않으니까요. 오히려 짧은 편에 속하죠.]
루블리안의 부재. 그것을 언급하는 신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봉인은 루블리안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하려는 일이었다. 그 일로 인해 후일 그의 부재를 겪게 된다면, 나는 그 공허함을 견딜 수 있을까?
내게 생각할 시간을 주려는 건지 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루블리안의 부재. 상실감. 그로 인한 모든 것들. 너무 깊어 어두컴컴한 생각의 바다에서 겨우 빠져나왔을 무렵,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건지 느끼지도 못했다. 그만큼 오로지 생각에만 집중했다.
‘그래도 할 거야.’
[……어째서요?]
‘이 방법 외에는 떠오르는 건 없고, 봉인은 해야겠으니까. 미래의 상실도 중요하지. 그런데 난 지금 루블리안이 곁에 없으면 죽을 것 같아.’
마음을 보이지 않았더라면, 연인이라는 관계로 발전하지 않았더라면 루블리안이 곁에 없더라도 나는 괜찮을 수 있었을 거다. 그러나 그는 지금 내 연인이었고, 내 전부였다. 내 숨을 틔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해 줘.’
미래도 중요했지만, 지금 곁에 있는 게 훨씬 중요해졌다. 어차피 미래의 겪을 상실은 오롯이 내가 감당할 테니 꽤 괜찮지 않은가.
아, 희생이 맞는 것 같기도 하네. 작은 깨달음 하나가 들이닥쳤지만, 선택을 바꿀 마음은 없었다. 공고한 내 뜻을 눈치챈 건지 신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피조물을 이기는 창조주는 없다더니. 좋아요. 우선, 루블리안한테 전령을 보내주세요. 시현은 이미 신의 영역에 한 발 걸쳐있는 존재이니, 한…… 3일 정도는 잠에 빠질 거예요.]
나는 신의 말대로 전령을 보냈다. 마법 때문에 또다시 비상음이 울렸으나, 곧바로 잠에 빠진 덕에 소리는 아득히 멀어졌다. 변화로 인한 울림이 닿지 않는 심연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후. 미묘하게 달라진 몸 상태를 느끼며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