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2. 루블리안과 봉인 (21)
단조로웠으나, 확실히 짜증이 담긴 목소리였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일순 멈칫했다. 그 틈을 타 마법진을 전개했다. 그러고는 실패 시, 루블리안 셀턴에 대한 감정을 모조리 잃는다는 내용을 첨가한 마법사의 맹세를 시전했다.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일어난 일이었다. 격렬했던 감정이 한풀 꺾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아주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잠시간 사라졌다가 드러난 심해를 닮은 눈동자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후회이기도 했고, 희열이기도 한. 하나로 통일되지 않는, 그런 감정들이.
“네가 모르는 사이에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든, 네 말대로 맹세를 했으니 방해할 생각하지 마.”
붉은 입꼬리가 유려하게 올라가는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자신이 모르는 새 많은 일을 겪은 게 여전히 짜증이 났으나, 얻을 걸 얻었으니 한발 물러서 주겠다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갑을을 따진다면 누가 갑이고, 을인지가 명확했다. 단순히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머리가 더 잘 돌아가고, 정보가 많다는 이유로 판도가 뒤바뀌었다.
“시현.”
뒤에서 그다지 빠르지 않은 속도로 다가오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팔이 잡히고, 자연스레 끌어당기는 힘에 몸을 맡기자 등 뒤로 탄탄한 무언가가 닿는다. 루블리안의 상체가 분명했다.
“실패해도 괜찮아요.”
“……그걸 말이라고 해?”
실패하면 너에 대한 모든 감정을 잊는데. 어떻게 그런 태평한 말을 할 수 있어. 고개를 젖히자, 살랑이는 금발이 만든 그림자 안에 갇힌다.
커튼 같은 머리카락의 주인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감정을 날것 그대로 내비쳤다. 그에게서 옮겨온 듯한 간질거림이 손끝을 움츠러들게 했다.
“다시 절 좋아할 거잖아요.”
“낙관적이기도 해라……. 그렇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하나 봐.”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는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바로 치고 들어온다. 민들레 홀씨 같은 간질거림은 바람결에 또 다른 곳으로 날아간 지 오래였다.
“아아. 아저씨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낭만을 모르네.”
“어린 애새끼는 현실을 모르고.”
두 루블리안이 웃으며 으르렁거렸다. 익숙한 장면을 관망하며 혀를 내둘렀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곧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안색으로 잘도 싸운다. 그것도 툭 치면 무너질 정신력 하나로 버티면서.
그들 사이에 껴있던 내가 소파로 이동하자, 방 안을 메우던 똑 닮은 두 목소리가 뚝 끊긴다. 이내 졸졸졸 따라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졸졸졸이라는 귀여운 의태어와 루블리안은 잘 어울리는 편에 속했다.
하는 행동이 애 같아서 그럴 수도 있고, 얼굴 덕분일 수도 있고. 잠시 다른 길로 새는 생각을 바로잡았다.
마법사의 맹세로 거래를 끝냈으니, 이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어떻게 할지, 그의 처우를 결정해야 했다.
신전으로 데리고 가는 건 무리가 있었다. 다른 이들에게 얼굴이 거의 똑같은 두 사람을 설명해야 했으며, 특히 평행 세계 백시현이 걸렸다.
방황하는 어린아이 같이 굴던 그가, 과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나타나면 어떻게 할까. 죽이고 천국 가겠다며, 예의 그 수분기 하나 없는 낯으로 검을 휘두를지도 몰랐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아직 파악이 덜 된 사람이었다. 어떤 짓을 할지 쉬이 가늠되지 않았다.
그렇게 처한 상황을 상기하며 선택지를 하나, 하나 지워 나가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이다.
“슬립 마법을 걸어 줄게. 한동안 여기서 자.”
한쪽 팔을 소파 등받이 위에 올리며, 맞은편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내 말을 듣고는 눈썹을 치켰다. 얌전하게 앉은 루블리안과 달리 반항아 같은 방탕한 자세였다.
“자기야, 나는 동물이 아닌데. 지금은 겨울도 아니고.”
이내 들려오는 여유작작한 음성에서 불만이 묻어났다. 한동안 잠을 자라는 소리에, 겨울철 동면에 빠지는 동물을 떠올린 모양이었다. 크게 다를 게 없긴 했다. 봉인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잠이나 자라는 뜻이었으니 말이다.
“다른 방법은 있고?”
삐딱하게 구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가만히 물었다.
그저 새하얗기만 한 피부는 혈색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식은땀이 가득했다. 손끝이 미약하게 떨리기까지 하는 게 상태가 좋지 않음을 여실히 나타냈다.
그런데 저 몸으로 뭘 하겠다고. 마신이 그를 통해 우리를 관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젠 상관없었다. 봉인의 진척을 알기 위해 알리한테 무언가 수를 쓸 테니까.
“네 지금 몸 상태,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여상스레 입꼬리를 올릴 뿐이었다. 맞는 말이긴 했으나, 소리 내 인정하기는 싫다는 의사가 들어간 미소였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설득으로 시간 낭비를 할 바에는 차라리 무력을 이용하는 게 나았다.
그러한 생각으로 마법을 쓰려던 차였다. 스멀거리며 넓게 움직이는 마력이 느껴졌다. 안개처럼 퍼진 마력이 빠르게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덮쳤고, 그의 눈꺼풀이 감겼다.
마지막으로 본 얼굴은 웃고 있었으나, 사나웠다. 움직이는 마력을 느꼈으면서 몸 상태가 좋지 않은 탓에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게 상당히 분한 모양이었다. 내가 굳이 관심 둘 부분은 아닌지라, 루블리안과 함께 자리를 떴다.
다시 순간 이동을 통해 신전 내로 오자 비상음이 울렸다. 몇 시간 지나지 않았는데도 깨어난 데드리언이 우리를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윽고 방문을 열고는 차분하게 말한다.
“마탑주가 사고 친 겁니다. 형제님, 다른 신관님들께도 이 사실을 전해주시겠어요?”
사무적이고 정중한 투였다. 우리와 대화할 때는 딴판이었지만,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 하도 본 터라 그다지 새롭지 않았다. 몬트리오는 아닌 듯했지만 말이다.
“너도 이 자식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문이 닫히자마자 한 소리가 저거였다.
예법을 배운 게 분명한 걸음걸이로 소파에 당도한 데드리언이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러고는 짜증이 짙게 밴 목소리로 말한다.
“기분 나쁘니까 마탑주하고 비교는 하지 말아 줄래~? 게다가 원래 사람은 이래. 넌 연회에서도 지금처럼 예의 없게 굴어?”
말에 형태가 있다면, 방금 세상 빛을 본 데드리언의 말은 틀림없이 뾰족하기 그지없을 테다. 그만큼 날카로웠다. 루블리안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한 게 매우 불쾌하다는 듯이.
몬트리오는 할 말을 잃은 얼굴이었다. 옳은 말을 직격으로 맞은 탓인 듯했다.
“너희 언제 일어났어?”
“너희가 사라졌을 때.”
비상음 때문에 일어났나 보다. 더 자지 않은 게 의아했으나, 내버려 두었다. 떠나기 전 앉았던 자리에 다시 착석한 나는 다시금 데드리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어난 김에 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이야. 성물의 기운을 가릴 만한 게 있을까?”
“내가 아는 한, 없어.”
하물며 주신이었다. 이 세계를 창조한 신의 기운은, 세계의 근원이나 다름이 없는데 그걸 감출 수 있을 리가 있나. 아무리 떠올려봐도 역시 없다는 답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신전으로 유인한다면 어느 정도 가리는 게 가능하긴 해.”
“신의 은총이 가득한 곳이니까. 그렇지만 여기로 유인이 가능할 것 같아?”
이 또한 염두에 두고서 성물의 기운을 가릴 만한 게 없다고 한 거였다. 유인에는 써먹지도 못할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지.”
한숨 소리가 짙어졌다. 데드리언이 골치 아프다는 낯으로 말을 잇는다.
“지금 우리한테 문제는 수도 없이 많지만, 굳이 꼽자면 세 가지로 들 수 있지. 첫 번째, 정확한 방법이 없다. 다양한 방법은 나왔지만, 다 너한테 퇴짜를 맞았지. 아, 탓하는 건 아니야. 기회가 한 번밖에 없으니까 신중한 거 이해해.”
데드리언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날 경계하거나 날 선 눈빛이 아니었기에 나 또한 그가 탓하려고 꺼낸 말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저 되짚는 거였다.
“두 번째, 앞서 이야기했듯 성물에 깃든 신의 기운을 감출 방안도 없어. 억눌려 있다고는 하지만, 잠깐 봐도 커다란 힘의 기운이 느껴지더라. 네가 했던 말대로 한낱 인간도 눈치채는 기운을 마신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지.”
맞는 말이었다. 방법을 정하는 것도 정하는 거지만, 이를 고려하여야 했기에 더 복잡했다. 이외에도 마법진을 여러 개 이용할 시 성물의 힘이 분산되는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꽤 있었다.
“세 번째, 시간이 한정적이다. 마왕이 여전히 여러 도시를 파괴하고 있는 와중에 이렇게 있을 수야 없는 노릇이지. 마신의 수작에 당한 알리가 돌아오기 전에 방법을 정해야 하기도 하고.”
신이 마왕을 처치할 용사를 내려 줬다는 소문이 최근에 퍼졌다. 신전에는 귀족이 많이 방문했으니, 어쩌다 들은 누군가 소문을 흘린 모양이었다. 그래서 도대체 언제 마왕을 처치하냐는 말이 나오고 있다고도 했고.
꼽은 문제를 들을수록 머리가 아파져 왔다.
“그런데요, 시현. 마신이 나타났을 때, 다른 공간과 연결한 아공간에서 성물을 꺼내면 되는 거 아닐까요? 엄연히 다른 공간이잖아요. 그렇게 하면 마법진 근처에 미리 성물을 놓는 건 불가능하겠지만요.”
내 무릎에 누워 있던 루블리안의 말을 들은 순간, 데드리언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둘 다 눈을 커다랗게 떴다.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이 얼얼했다.
여태 복잡하고 어려운 방법들만 생각해서 그런 건지 이리도 쉬운 방법을 생각해내질 못했다. 물론 실제로 저 방법을 이용하는 건 어렵겠지만, 생각을 못 했다는 점에서 온 충격이었다. 어려운 수학 문제는 잘만 풀다, 쉬운 문제에서 막힌 기분이었다.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게 날이 갈수록 멍청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