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1. 루블리안과 봉인 (20)
“자기야, 다시 한번 물을게. 자기도 저걸 원해?”
금빛 머리카락의 그림자 속 어둑한 눈동자가 나를 직시한다. 그 속에 깃든 양가감정이 엿보였다. 다시는 나와 보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 싶은 동시에 하고 싶지 않다는.
하지만 그게 내 알 바인가.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내게 무슨 감정을 품든지, 나는 다시는 날 안 보겠다는 맹세만 얻어내면 됐다. 몇 시간 전, 신이 그가 차원 이동을 통해 스물두 살의 나를 만났다고 했으니, 한 번쯤은 물러 줘야 할 성싶지만 말이다.
“그래. 마신이 네게 건 축복과 가호를 없애 줄 테니, 이후에는 보지 않는 걸로 해. 한 번을 제외하고.”
“아아. 자기, 알고 있구나? 내가 스물두 살의 자기한테 다녀온 거.”
굳이 시치미를 떼고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었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파란 펜으로 가는 선을 그린 듯한 눈동자가 나를 살폈다. 스물두 살의 나에게 다녀온 이유 혹은 그 전후 상황을 모두 알고 있는지 확인하려는 듯이.
“아는 사실은 그것뿐인가 보네. 물을 생각은 없어 보이고.”
궁금해 보이긴 하는데.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느릿하게 말을 덧붙였다.
전후 상황이 궁금하긴 했다. 스물두 살의 나에게 간 이유는 예상이 갔으니. 그러나 그가 말했듯 물을 생각은 없었다. 지금 상황과 크게 관련이 있지 않는 한, 시간 낭비였다.
“계약은 언제 해요?”
훨씬 더 부드러운 목소리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심통 난 얼굴을 미소로 감추고 있는 루블리안이었다.
“이제 해야지.”
루블리안의 목소리라는 사실 하나에 무심코 돌아갔던 고개를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낯빛이 아까보다 좋지 않았다. 올라간 입꼬리 또한 병색이 짙은 환자처럼 변해 있었다. 그런 와중에 눈꼬리만큼은 예민하기 짝이 없어, 아직 버틸 정신이 남아는 있구나 싶었다.
“바로 마신의 축복과 가호를 풀어주는 건 불가능해.”
마신이 내린 축복과 가호는 그를 봉인하면 저절로 사라질 거였다. 그러니 당장은 불가능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따라 올라간 눈 끄트머리가 날카롭기까지 하다. 머릿속을 뒤집는 고통에서 지금 당장 벗어나지 못하는 것 때문이 분명했다.
“자기야, 무기한이라는 양심 없는 기간으로 할 건 아니지?”
“그렇게 해 줘?”
기가 찼다. 누굴 불공정 계약을 체결하는 불한당으로 보고 있다.
“양심 없는 자기도 좋긴 한데…… 자기가 더 좋아질수록 내가 양심이 없어질 수도 있어서.”
똑같이 양심 없게 굴기 전에 똑바로 하라는 협박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과 비슷하지만, 확실히 달랐다. 마신이 수를 쓴 탓에 마음이 전보다 깊지 않다더니, 그게 나한테는 행운이었다.
“그런데 여보.”
마신을 얼마 만에 봉인할 수 있을지 어림잡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차 익숙해지고 있는 낯간지러운 호칭도 함께였다.
“어. 왜.”
“굳이 확실한 기한을 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길게 설명 좀 해 줄래?”
루블리안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 이유 없이 저런 말을 할 놈이 아니었다.
옷에 손을 넣어 내 옆구리를 살살 매만지는 그의 손을 쳐냈다. 미리 신성력으로 치유해 놔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입술 새로 민망한 소리가 흘러나올 뻔했다.
“매정하네요. 그렇더라도 당신이 좋은 건 변하지 않지만.”
살짝 올려다본 루블리안은 너무 달아 이가 아릴 정도로 웃었다. 위로 솟은, 혈색 도는 양 뺨을 보다 시선을 돌렸다.
“……낯간지러운 소리 그만하고. 기한을 왜 안 정해.”
“그야 저 아저씨한테 걸린 축복과 가호를 없앤 뒤에, 다시는 우리를 보지 않겠다는 맹세의 효력이 발동하게 순서를 정하면 되니까요.”
확실히 좋은 생각이었다. 봉인이 언제 끝날지 모르니 더욱 그랬다. 어쩌면 영영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넌 어때.”
“확실하지 않은 게 걸리긴 하지만, 괜찮네. 자기도 그렇고…… 저 애새끼도 날 싫어하니 동기 부여가 확실하겠어.”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뜬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허락했다. 마법사의 맹세를 할 생각인지 마법진을 발동시킨다. 이내 내가 자신에게 걸린 마신의 축복과 가호를 푼다면, 나와 루블리안 앞에 딱 한 번을 제외하고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곧 마법진으로 손을 넣어 팔목까지 들어가자, 마법진이 스미듯 흡수된다. 맹세가 체결된 것이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내가 맹세를 해야 했다.
마법진을 전개하려던 때였다. 팔짱을 끼고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고래를 모로 기울였다.
“그런데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그러고서는 하는 말이 저거였다.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비스듬히 했다.
“뭐가.”
“이 축복 같지도 않은 축복을 자기가 풀면, 나는 영영 자기를 안 보는데…… 실패하면? 실패하면 내게 오는 것도 있어야지.”
느슨한 시선과 마주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어조로 사실을 짚어 주었다.
“애초에 부탁을 들어주는 대가였다는 사실을 그새 까먹었나.”
누가 불공정한 계약을 맺으려는 불한당인지. 이 사실을 알면서 한 번 찔려 본다는 양 수작질이다.
“글쎄…….”
소파 표면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리던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입술을 움직였다. 둥글게 말렸다가 가로로 늘어진다. 말소리는 나지 않았으나, 그의 말을 알아듣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봉인. 그가 한 말은 봉인이었다.
“이미 마신은 어느 정도 확신 중이지. 나 또한 그렇고.”
“…….”
“나는 자기가, 그리고 애새끼가 그리 모험심 있고,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 제 사람만 지극히 챙기는 부류지.”
어울리지 않게 친절한 목소리다. 무언가 파악하고 짐작하여 맞추는 것에 도가 튼 사람처럼 구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그렇다면 불확실한 걸 시도하려는 이유가 뭘까. 뭘 받기로 한 걸까…….”
“…….”
“난 정말 궁금해.”
대부분 그게 정답이라 더 그랬다.
나는 너희가 봉인 시도를 하려는 걸 알고 있고, 그냥 그걸 해줄 만큼 희생정신이 뛰어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지금 봉인에 대해 말하는 의도를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내게 저리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걸 한 줄로 정리하자면 신과의 거래로 너희가 마신을 봉인하려는 것과 봉인에 성공하면 축복 및 가호가 풀릴 거란 사실을 알고 있다, 정도 되겠다.
“뭘 원하는데.”
우리가 마신을 봉인하면 축복과 가호가 풀릴 걸 알면서도 도움을 요청한 건, 아마 아까 말한 온전하지 않을 때 쐐기를 박아놓겠다는 이유 때문일 테다. 갑작스럽게 불공평하다며 무언가 더 추가하려는 건, 양가감정에서 나온 심술일 게 분명했고.
원래는 생각에도 없었겠지. 그다지 알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의중을 헤아리는데 능통했다. 특히 대상이 루블리안이라면 더욱 알아맞히기 쉬웠다. 저쪽도 다르지만, 루블리안이긴 해서 그런지 사고회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예상이 갔다.
“글쎄……. 아, 그렇지. 실패하면 애새끼에 대한 감정을 싹 지우는 거야.”
내가 뭘 들은 거지? 잠시 머릿속에서 뇌가 있던 부분이 비워진 느낌이었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봐?”
“당연하지, 자기야. 기억과 감정을 떠올리게 하는 마법진도 있는데. 못 할 게 뭐가 있어.”
여유로움이 한가득한 대답이 떨어졌다. 아픈 안색이라는 걸 잊게 할 만큼 잔잔하고, 평화롭다는 느낌이 들 음색이었다.
본인의 의지가 아니었으나, 이미 한 번, 하나의 세계를 파멸로 이끌었던 이인지라 상당히 어울리지 않았다. 혼이 죽고, 마신이 그의 육체를 차지하여 저지른 것이긴 했지만.
“해요, 여보.”
선뜻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데 루블리안이 먼저 답을 내렸다. 그것도 긍정으로.
루블리안의 품에서 벗어나 등을 돌렸다. 정면으로 마주한 화려한 낯은 별다른 기색을 띠고 있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애정과 신뢰가 가득할 뿐이었다.
“저 미친놈이 이미 맹세를 했으니 사실 이대로 튀어도 상관없어.”
요지는 정말 해도 괜찮냐는 거였다. 사랑스럽다는 감정을 가득 담아 루블리안이 웃음을 흘렸다. 이내 내 눈가를 살살 매만졌다. 그의 입이 열리는 순간, 소파 쪽에서 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언제 이렇게 뻔뻔해졌어? 내가 모르는 사이에 많은 일이 있던 것 같은데…… 이거 기분 더럽네.”
으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으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일어서기도 힘든 상태면서 그는 기어코 내게 당도했다. 이윽고 내 어깨를 잡아, 나를 자신과 마주하게 한다. 그 집념이 무서울 정도로 강했다.
“그냥 이대로 자기를 여기에 붙잡아 둘까.”
방해하지 않겠다는 건, 맹세하지도 않았는데.
포식자의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였다. 나른하지만, 어딘가 형형해 일순 섬뜩함이 온몸을 덮쳤다. 잠잠한 심해에서 어류끼리의 거친 싸움이 일어나는 느낌이기도 했다.
쉬이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감정에 잡아먹힌 모습이었다. 한숨을 한번 내뱉은 나는 루블리안이 만졌던 눈가를 만지는 손을 쳐낸 뒤, 이 미친 새끼가 정신을 차릴 만한 말을 골랐다.
“시간 돌리기 전이랑 같은 루트 타고 싶지 않으면 좀 닥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