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90)화 (90/112)

090. 루블리안과 봉인 (19)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상당히 짜증이 난 상태였다. 눈앞에서 또 다른 자신에게 백시현을 빼앗긴 것도 그랬지만, 머릿속을 마음대로 읽고 휘젓는 마신이 주요인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게 그의 머릿속을 점령한 마신은 시간이 되돌려지기 전의 기억을 모두 주지 않았다. 단편적인 기억과 감정만을 전하여, 그를 제 입맛대로 굴리려 들었다.

[왜 따라가지를 않지?]

생각을 더 잇지 못하도록 마신이 끼어들었다. 그는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그들을 따라가길 원했다.

무릇 인간이란 간절히 원하는 게 있을 때 더욱 멍청해지는 법이었다. 계약 당시 기억을 제대로 전해 주지도 않아 놓고서 마신은 그가 백시현에게 미치기를 바랐다. 자기가 또 다른 계약을 제안했을 때, 덥석 물만큼.

“네가 원하는 게 빤히 보이는데, 그걸 들어주고 싶지 않으니 당연하지 않나.”

읊조리듯 말한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검지를 움직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톡톡 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자꾸만 까먹는 것 같은데, 우위를 점하고 있는 건 네가 아니야.]

말이 끝맺는 순간, 눈앞에 환각이 아른거렸다. 고인 핏물 위에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창백한 백시현의 모습이 머리를 어지럽히며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통증에 인상을 찌푸린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미간 사이 콧대를 엄지와 검지로 꾹 눌렀다.

“그놈의 페널티.”

그러고는 짜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마신에게 벗어나고 싶었으나, 생각이 읽혀 무리였다. 조금만 허튼 수를 부려도 곧바로 미약한 제재가 들어 온다.

그 강도가 심하지 않을 걸 보니 계약서에 제재에 관한 조항이 있는 모양인데…… 모든 기억을 주지 않아 알 수가 없었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 그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내게서 벗어날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어차피 그럴 수도 없을 테지만.]

“머릿속 적당히 더럽혀.”

[진정 더러운 건 너희지. 나같이 고결한 신이 아니라.]

더럽힌다는 소리에 마신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는 지금도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죽어 버렸으면 했다. 목표를 위해서라지만, 인간의 몸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끔찍하게 싫었다.

“고결한 신이라…… 웃기지도 않는 소리군. 살면서 들은 말 중 가장 어이가 없어.”

원래라면 불같이 화를 냈을 마신은 인내했다. 모든 기억을 주지 않았더니 이게 문제였다. 시간이 돌려지기 전보다 어리숙한 놈은 틈만 나면 기어올라 자신과 맞먹으려고 했다.

“애초에 고결한다는 말의 뜻은 알고 쓰는 건지 의심이 들 정도야.”

[한낱 인간 주제에 혀가 길어.]

“인간의 혓바닥 길이에 관심이 많은 줄은 몰랐는데…… 취향 한번 괴랄하군.”

신랄하게 말한 그가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이내 깨달았다는 듯한 투로 말을 덧붙였다.

“아, 고결하신 신의 취향은 그런 건가?”

[감히……!]

일순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조금 전보다 두통이 강하게 일었다. 그러나 기절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버틸 만하다고 여긴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마법을 써 자신의 기억을 들여다보았다. 페널티라는 방해가 있었으나, 그것을 감내했다.

‘몬트리오 알레스칸.’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기억 속, 몬트리오 알레스칸만이 백시현을 알고 있었다. 지워진 과거의 기억과 감정을 모조리 알고 있었다. 침대에 엎어지듯 한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계속해서 기억을 되짚었다.

마신에게 벗어나려는 시도를 하도 해서 그런지 고통에 익숙해졌다. 덕분에 버티는 시간이 길어졌다. 부분부분 잘린 기억을 파헤치고, 맞추던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양쪽 눈을 감았다. 찡그린 탓에 그의 눈가에 잔뜩 주름이 졌다.

‘여기다.’

마신이 더욱 철저하게 막으려 하는 걸 보니, 좀 더 들여다보면 나올 것 같았다.

슬슬 숨이 턱 막혔고, 손이 달달 떨렸다. 항시 따뜻함을 유지하던 체온이 내려갔다. 하얗게 질린 손으로 이불 시트를 쥐어뜯을 듯이 잡은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끝내 해답을 찾아내고 마법 시전을 그만뒀다.

“허억. 헉, 후우…….”

크게 숨을 내뱉고 들이마신 그가 무심결에 웃었다. 낯은 밀가루를 바른 것처럼 새하얘 혈액순환이 되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였으나, 올라간 입꼬리만큼은 이보다 더 만족스러울 수 없으리란 감정을 담고 있었다. 그에 아프기는커녕 무슨 계획을 짜고 있는지 무섭게 보이기만 했다.

언제든 그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어, 그가 모든 기억과 감정을 얻어낼 방법을 찾았단 걸 바로 알아낸 마신이 수를 썼다. 그러나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마법진을 그리는 속도가 더 빨랐다.

억지로 머릿속에서 뇌가 끄집어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졌다.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 들었고, 속에 있는 모든 걸 게워 낼 것만 같았다.

역한 감각이 한차례 지나가자, 감정이 제멋대로 날뛰었다. 눈물이 났다가, 웃음이 났다가, 인상을 찌푸렸다가. 제 감정이, 몸이 도통 제어가 되지 않았다.

“후…….”

차츰 모든 게 가라앉기 시작했을 무렵, 루블리안 벨리텐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신의 수가 먹히긴 한 모양인지, 몇몇 기억에 빈틈이 생겼다. 어떤 기억은 그때의 감정이 소멸하기도 했다. 또, 몇 개의 기억과 감정은 따로 놀았다.

그래도 얻을 건 다 얻었다. 덕분에 시간이 돌아가기 전보다 비교적 멀쩡했고.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그걸 위안으로 삼았다.

[계약 사항을 알아내 봤자지. 네가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마신이 차갑게 일갈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루블리안이 이를 짓씹으며 식은땀으로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계약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인간계를 모조리 몰살하거나, 계약 기간을 만료해야 했다.

‘하필 그 계약 기간이 행복한 스물두 살의 백시현 곁에 내가 있기라니.’

무슨 자신감으로 괜찮다고 여겼는지 알 길이 없다.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헛숨을 내뱉었다.

‘영원히’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아니었으니 곁에 있어야 한다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행복한 스물두 살의 백시현이었다. 지금 시간과 차원을 조절해 스물두 살인 백시현의 고유 세계로 간다고 해도, 그 시기의 그가 행복할 거라는 증거가 없었다.

‘거기다 죽을 운명을 타고났지.’

계약 내용을 알게 되었으나, 답이 없었다. 우선 차원을 이동해볼까 했던 시도조차 막혔다. 결계 마법진인 것 같은데, 마신의 방해 때문에 완전한 해체까지 얼마나 시간이 소요될지 모르겠다.

빌어먹을. 루블리안 벨리텐트는 목 끝까지 차오른 험한 말을 삼켜냈다.

_oOo_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일어났다는 알림에 루블리안과 함께 마탑으로 돌아갔다. 곤히 자는 둘을 깨울 수는 없어 평행 세계 백시현에게 마법으로 전령을 보내놨다. 신전 내에서 마법을 발동한 탓에 경보가 울리긴 했으나, 그다지 크게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순간 이동으로 도착한 마탑주의 방에는 소파에 앉아 있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보였다. 여전히 마신이 말을 걸며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지 낯빛이 좋지 않았다.

“안녕, 자기야.”

느릿하게 손을 흔드는, 나긋하기 짝이 없는 행동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척 봐도 좋지 않은 상태인데 여유롭기도 하다.

루블리안이 나를 뒤에서 안아왔다. 훅 익숙한 체향이 끼쳤다.

“그래서 도와줄래?”

쓰러지기 전에 말했던 걸 언급하는 것이었다. 신의 축복과 가호를 없애 달라는, 그 요청을.

봉인을 어떻게 진행할지 만으로도 충분히 머리가 아팠으나, 간간이 강제로 신의 축복과 가호를 거두는 방법 또한 떠올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봉인에 성공하는 것 이외에 이렇다 할 만한 방법이 없었다. 쉽게 찾을 수 있다면 저 미친놈 얼굴도 볼 일이 없었겠지. 머릿속으로 뇌까리다 신을 불렀다.

[네, 시현.]

‘마신을 일시적으로 잠들게 하는 방법, 최초 세계 때 창조된 신들한테 물어본다고 했었잖아. 아직도 답이 없어?’

[명목 없지만, 네. 높으신 분들인지라 바쁘신 것 같더라고요…….]

울적한 목소리로 답하는 신에 적당히 대답한 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바라보았다. 식은땀 때문인지 그의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엉겨 붙어있었다.

“그것보다는 우리가 얻게 될 이득이 뭔지가 먼저지. 그걸 말하다 쓰러졌잖아, 네가.”

“터무니없는 건 못 들어줘서 듣고 답해 줄게. 뭘 원해, 자기야?”

대답이 떨어졌다. 나른한 자세로 편히 몸을 소파에 기댄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어떤 무리한 요구든 들어줄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터무니없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기준이 주관적이라면 무엇이든 다 들어주기는커녕 제대로 해주리라 생각되는 게 없었다.

그만큼 현재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 대한 신뢰도와 믿음은 0에 가까웠다. 전에는 나한테 미친 덕에 날 죽이지 않으리라는 믿음 정도는 있었지만, 시간을 돌리면서 그 믿음은 말소된 지 오래였다.

“늙다리 아저씨가 저랑 제 여보 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거요.”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산뜻하게 웃는 얼굴이 보인다. 웃는 낯이었음에도 어쩐지 성격 나빠 보였다.

“자기도 같은 걸 원해?”

아니라는 답이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내가 원한다면 정말 들어주겠다는 소리 같았다.

‘그’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무슨 다른 의도가 있는지 의구심부터 들었다. 그런 나를 빤히 안다는 듯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린 그가 친절히도 답을 주었다.

“다른 목적 따위는 없어. 그저 온전하지 않을 때 쐐기를 박아 놓으려는 거야.”

“온전하지 않다?”

저게 무슨 소린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말을 잡고 늘어지자,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을 했다. 행동을 읽힌 게,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기억과 감정을 얻기는 했는데…… 마신 때문에 문제가 좀 생겼거든. 자기한테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는 건 여전한데, 마음이 전보다 깊지 않아서. 오히려 원망이 조금 더 큰 것 같기도 하고?”

탁하게 변하는 듯한 푸른 눈동자가 나를 담아냈다. 한차례 숨을 들이마신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튼 마신이 수를 쓰기 전에 되도록 우리 자기한테서 멀어지고 싶거든. 모든 감정과 기억이 제대로 되살아나면 또다시 모든 걸 반복할지 몰라.”

가령 자기를 가두고, 발목이랑 손목에 예쁘게 족쇄를 채운다든가.

가늘게 휘어진 눈매 아래 미미한 광기가 일렁이는 눈동자에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미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걸 보니, 더욱 생각이 굳어졌다.

들어주려는 마음이 있을 때 확실히 받아 내야겠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맹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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