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9. 루블리안과 봉인 (18)
사라지기 전에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으나,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어떠한 말을 해줘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나는 평행 세계 백시현이 아니었고, 그가 겪은 일의 단편적인 부분만 알 뿐이었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으니,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상하게도 시린 겨울의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미약한 바람에 부유하는 머리카락이 만든 그림자 아래 연갈색 눈동자가 텅 비어 보였다. 산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활기가 없었다.
나는 차분히 머리를 식혔다. 그리고 기억을 되짚으며 스스로에게 물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이 나를 관찰한 이유는 무엇일까.
시간을 돌린 주체가 나인 걸 모를 테니, 아마 내게 시간을 돌리기 전의 기억이 있는지 그 여부에 대해 알아보기 위함일 거다.
그렇다면 내게 뭘 원하는지 본인조차 모르면서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가 무엇일까.
위의 질문에 대한 답과 달리 쉬이 답하기 어려웠다. 메마른 얼굴로, 그저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를 나열할 뿐이었으니 말이다. 굳이 내 대답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 순간 무언가 뇌리에 스쳤다. 곱씹고, 또 곱씹다 천천히 달라붙은 입술을 떼어 냈다.
“네 이야기, 들어 줄게.”
“…….”
“왜 그랬냐고 벨리텐트한테 따지고 싶어서 왔다며. 근데 그것뿐만이 아닌 거잖아.”
자칫하면 생각 없이 말했다 오해할 수 있는 단조로운 투였으나, 오래도록 고심하여 내보낸 문장이었다. 이를 그가 알아차렸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 네 말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거잖아. 그것도 널 미친 사람 취급하지도 않고, 시간이 돌려지기 전의 기억을 가진 사람이.”
내 말이 맞을지, 틀릴지 확신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 나 또한 백시현이었으나, 우리는 다른 사람이었다. 겪은 시간이 달랐고, 가진 기억이 달랐다.
평행 세계 백시현이 손을 말아 쥐었다. 힘줄이 도드라진 주먹은 펴면 손톱자국이 깊게 남아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힘이 많이 들어간 게 보였다.
“……왜? 난 네가 그럴수록 더 모르겠어.”
힘없는 작은 중얼거림에 무채색의 가루가 허공에 흩날리는 착시가 일었다. 그 재가 마치 평행 세계 백시현 그 자체 같았다.
“모르면 생각해서 알아내든가.”
“……뭐?”
“적어도 너랑 이곳에 같이 있는 한은 네 얘기 들어 줄 테니까. 그동안 생각해. 날 원망하고 싶은지, 부러워하고 싶은지, 아니면 다른 감정이 드는지.”
[와……. 유죄 대사.]
난데없이 감탄사를 흘리며 헛소리를 하는 신은 자체적으로 무시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이 입을 벙긋거리다 소리를 낼 무렵, 점차 가까워지는 기척이 감지됐다.
일부러 좀 더 크게 내던 발걸음 소리 위로 드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등에 온기가 전해진다. 아까까지 거의 한 몸처럼 붙어 있던 루블리안이었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눈을 뗄 수가 없네요. 응, 떼면 안 되겠어요.”
내게 엉긴 채로 하는 말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이번에는 뭐야.”
“뭐가요?”
“뭐에 도청 마법 걸었냐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저런 말을 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의 대화를 엿듣다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들은 게 분명했다. 좀 전에 뱉은 문장 중 어느 부분이 거슬린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루블리안은 평행 세계 백시현을 일별하더니, 날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다른 말을 일절 하지 않는 게, 미소로 때우려는 속셈이 틀림없었다. 화려한 낯짝에서 대답을 종용하더라도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묻어나, 묻기를 포기했다.
나중에 소지품 점검 좀 해야겠다.
루블리안은 추위와 더위, 둘 다 타는 편이 아니었으나, 우선 데리고 들어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감기는 걸리지 않을 확률이 높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 말이다.
넓은 어깨에 기댄 머리를 뒤로 젖혔다. 루블리안에게 이제 돌아가자는 말을 하려던 때, 소매가 잡혔다. 고개를 내리자 묘하게 긴장감이 어린 낯이 보였다.
“……둘만?”
상당히 축약된 말이었으나,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의 이야기를 들어 줄 때, 나와 그, 둘만 있냐는 거였다.
“아니. 애인이 질투가 심해서 그건 안 되겠는데.”
척 봐도 평행 세계 백시현은 나를 성애적인 감정으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은 그저 어린아이의 소유욕에 불과했다. 간신히 얻어 낸 곰 인형을 빼앗길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그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점이라면 나는 그의 곰 인형 같은 게 아니었다. 사람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건 별로지만, 애초에 준 적도 없었다.
“그렇구나.”
“어차피 병풍처럼 있을 테니, 신경 쓰지 마.”
그래, 웬만해서는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다. 단칼에 나온 말에 평행 세계 백시현이 멈칫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루블리안이 온 이상 대화는 끝났다.
나는 갑작스럽게 기분이 좋아진 루블리안과 어쩐지 낯에 그늘이 진 평행 세계 백시현을 챙겨 안으로 들어왔다. 따뜻한 공기들이 몸에 달라붙었다. 찬 기운을 녹이는 느낌이 좋았다.
잠시 쉬는 사이에 결국 잠이 든 모양인지 몬트리오는 소파에 깊게 얼굴을 묻고 있었다. 데드리언은 불편하게 앉아 졸고 있었다. 그의 고개가 꾸벅꾸벅 움직였다.
“시현도 좀 자는 게 어때요?”
“난 안 잘래. 신한테 궁금한 것도 있고.”
거기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일어나면 알림이 오게끔 했기에 깨어있는 게 좋았다. 혼자서 생각 정리도 할 겸.
“저는 졸린 데…… 재워 주세요.”
“안 잘 거잖아, 너.”
또 전처럼 안 자고 나를 물고 빨 게 뻔했다. 거짓말도 정도껏 하라는 눈빛을 보내자. 침음을 흘린다. 그러고는 아쉽다는 투로 말한다.
“안 통하네요.”
“통하겠냐고.”
기가 막혔다. 잠 안 자고 나를 자극하던 게 몇 시간 전이었다. 그런데 저게 통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이러한 내 심정을 눈치챘으면서, 루블리안은 모르는 척을 해댔다. 늘 누구보다 빠르게 내 의도를 알아챈 뒤, 그에 맞춰 행동했으면서 말이다.
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지체가 되게 생겼다. 나는 루블리안을 등에 매단 채로 아까 앉았던 소파로 향했다. 소파에 앉자, 푹신함이 아닌 딱딱함이 느껴졌다. 또다시 그가 날 자신의 허벅지에 올린 탓이었다.
“내려놔.”
“싫어요. 아까 얌전히 있었으니까 이번만요. 네에?”
머리가 말랑한 것에 마구 문질러졌다. 루블리안이 뺨일 게 뻔했다. 그 행동이 귀엽게 느껴졌다. 헛웃음이 입술을 가르고 나왔다.
“맘대로 해.”
그리 대답하고 신을 불렀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가 잘 작정인지 우리가 소파에 앉자마자, 방을 나섰다.
[왜 부르세요?]
‘세계의 균형, 지금 어떻게 유지가 되는 거야?’
평행 세계 루블리안의 세계에서는 그의 몸속에 마신이 기생한 탓인지, 나나 루블리안이 한 세계에 있더라도 큰 무리가 없었다. 균형이 맞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평행 세계 백시현과 평행 세계 루블리안, 그리고 내가 있는데 균형이 멀쩡할 수 있는 걸까. 의문이 가시질 않았다.
[잘……?]
‘장난해?’
[아니요. 이례적인 일이라 확실하지는 않은데, 주신님께서 내려 주신 성물이 이 세계에 있다는 것과 더 막강해진 루블리안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성물? 루블리안까지는 이해가 가도, 성물은 예상외였다. 분리된 퍼즐 조각들이 머릿속에 나열됐다. 그것을 하나로 맞추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사이, 신이 말을 덧붙여 설명했다.
[마왕은 백시현, 그러니까 다른 쪽 시현이 있으면 균형이 맞아요. 시현도 용사를 했었으니까 알잖아요. 현재 이 세계에 나타난 마왕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요.]
‘그렇지.’
[그리고 사실 한 세계에 신이 성물을 내리면, 그건 이 세계에 속하는 거랑 별반 다를 게 없어요. 그래서 시현과 다른 쪽 루블리안이 여기에 있어도 균형이 무너지지 않는 것 같아요. 100% 확실한 건 아니지만요.]
의문이 해결됐다. 더 궁금한 게 없었기에 말을 걸지 않고, 스며드는 체온을 느끼며 상념에 잠기려 했다. 신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 머릿속을 헤집지 않았다면 필시 그랬으리라.
‘그만 좀 불러.’
[이제야 답해주는 거예요? 평소라면 그만두겠지만, 진짜로 궁금한 게 생겨서요. 시현은 다른 사람한테 관심 많은, 오지랖 넓은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평행 세계 백시현에게는 왜 그렇게 다정하게 말해줬어요?]
다다다. 말을 내뱉는다. 덕분에 머리가 찡 울렸다. 찡그린 미간을 펴 주는 손길을 받으며 말을 골랐다. 신이 왜 이런 반응을 보이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그냥.’
[네? 그냥이요?]
‘뭘 기대한 건지 모르겠는데, 정말 그냥 한 거야. 몇 시간 전에 얼굴 처음 본 사람인데, 뭘 바라.’
그냥 이라는 말이 가장 알맞았다. 동정과 미안함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했다. 이번 봉인에 함께해야 하기도 하고, 평행 세계의 ‘나’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신경이 쓰였다.
다른 사람이 무슨 사이냐고 묻는다면, 비즈니스 관계라고 하지 않을까. 몬트리오와 데드리언이 여전히 내 동료인 것과 다르게.
[하긴 시현이 그렇죠. 사실 루블리안보다 시현이 질이 나빠요. 알아요?]
‘무슨 헛소리야.’
[시현은 뭐랄까. 무심한데 다정한 면모가 있거든요. 그러면서 그어둔 선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하고요. 그에 반해 루블리안은 시현에게만 다정하고 유순하죠.]
신은 혼자 납득한 듯 연신 “그렇고말고요.”하고 긍정의 말을 내뱉었다. 덕분에 내 머릿속만 어지러워졌다. 두통이 일어, 이제 좀 가라고 대꾸하려던 때였다.
발가락 끝부터 시작하여 머리끝까지 소름 끼치는 전율이 일었다. 팔에는 닭살이 돋아났다. 울리는 알림을 온몸으로 체감하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