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88)화 (88/112)

088. 루블리안과 봉인 (17)

의심이 사라지자, 마신과 봉인 등 현재 상황 설명이 속전속결로 끝났다. 루블리안이 간간이 끼어들기는 했으나, 날 꽉 껴안거나 머리를 비비적거리는 게 다였다. 데드리언이 나를 적대적으로 보는 걸 그만두었기 때문이었다.

“봉인진 작게 해서 지뢰처럼 까는 건 어때?”

“봉인진 주변에 성물을 놓는 이유, 내가 말했잖아.”

“말했지. 봉인진에 신의 힘을 흐르게 하려고 그러는 거라며.”

마신을 어떻게 봉인할 것인지에 대해 토론하는데, 끝이 없다. 벌써 아침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까의 미묘한 신경질을 냈던 모습을 떠올리기 힘들 정도로 온화해진 데드리언은 그 고된 3년을 겪지 않아 그런지 좀 모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러니까 같이 전략을 짜기에 그의 한계가 명확하게 보였다. 마왕 토벌을 한 세월이 그를 많이도 낡게 한 동시에 성장시켰다.

“그걸 알기는 하는데, 성물이 개수는 적어도 그 안에 담긴 힘은 꽤 되잖아. 그걸 하나의 봉인진에 쏟지 말고 넓게 퍼트리면 안 돼?”

“성물에 담긴 힘을 한 봉인진에 쏟는 건 위력 때문이야. 작게 여러 봉인진을 만들어 지뢰처럼 깐다 해도 위력이 약해져서 마신이 그 봉인진을 한 번에 모조리 밟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어.”

“아아~ 어렵네.”

허벅지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던 데드리언이 몸의 중심을 뒤로했다.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은 그의 얼굴에는 밤샘의 흔적이 묻어났다. 겉으로 티는 잘 나지 않지만, 3년간 함께 했기에 모를 수 없었다.

도통 해답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정신적으로 피로해진 게 분명했다.

그에 반해……. 나는 연신 뒤를 힐끔거렸다. 루블리안은 데드리언과 신경전을 할 때와 다를 바 없는 낯이었다. 똑같이 반지르르하고 화려했다.

“이제 끝이에요?”

“아니.”

단 한 번도 나를 허벅지에서 내려놓지 않은 루블리안은 다리가 저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내 말에 희망이 무참히 부서진 듯한 몬트리오가 보였다. 그냥 자라고 해도 의리가 있다며 자지 않더니. 상태가 영 말이 아니다.

만난 지 하루도 안 된 사이에 의리는 무슨. 어지간히 여기 있는 이들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게 아니라면 또 루블리안과 데드리언이 싸울까 걱정했거나.

“좀 쉬다가 다시 할 거야.”

쉰다는 대목에서 몬트리오의 안색이 밝아졌다. 미미한 변화였으나, 데드리언 또한 안색에 생기가 차올랐다. 다른 이들이 본다면 도대체 뭐가 다르냐며 틀린 그림 찾기를 하겠지만 말이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역시 고3이라 그런지 비교적 멀쩡했다. 대화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고, 흩날리는 풍경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처럼 나를 관찰하기만 했다.

“다른 세계의 나.”

부름의 근원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허공에서 시선이 얽힌다. 어쩐지 침잠한 것처럼 보이는 연갈색 눈동자에서 눈을 떼기 힘들었다. 루블리안을 볼 때와는 다른 느낌으로.

“할 얘기가 있는데.”

고갯짓으로 밖을 가리킨다. 말을 제대로 완성하지 않아도 뒷말을 알 수 있었다. 나가서 쉬는 동안 둘이서 이야기를 하자는 거였다.

“갈 거예요?”

평행 세계 백시현이 기억이 있으리란 추측을 루블리안이 하지 못했을 리 없다. 데드리언에게 그랬던 것처럼 살살 긁지 않고, 내게 가지 말라며 떼를 쓰지도 않는다는 게 그 증거였다.

저렇게 구는 제일 큰 이유는 아마, 내 의사를 존중하기 때문일 테다. 나는 평행 세계 백시현과 한 번쯤은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고, 이러한 사실을 루블리안은 진즉 눈치채고는 내내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알잖아.”

“그렇긴 하지만, 직접 듣고 싶었던 거예요. 저는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정적인 게 좋거든요. 제가 당신의 의중을 재고 판단하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요.”

목소리가 뚜렷했다. 작은 숨소리 하나 이탈하지 않고 귀에 들어오는 기분이다. 따뜻한 미풍이 나를 덮치는 듯한 느낌에 절로 발가락이 곱아들었다.

“까딱하다 맞지 않으면 어떡해요. 당신한테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게 싫어요.”

그 순간 분위기가 확 깨졌다. 순간 주체하지 못하고 톡 쏘아댈 뻔했다.

내가 상처받을 걸 알면서, 제 죽음을 보여 준 놈이 말은 많다. 뇌리에 깊게 박혀, 그때를 상기하면 지금도 숨이 턱 막혔다.

찬란히 타오르는 황금빛 반짝임 속 죽어가는 루블리안. 온통 회색빛인 곳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던 이의 죽음. 나는 잘게 떨리는 손을 말아 쥐고,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이다.

“떠올리지 마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 이상 반응을 바로 알아차린 루블리안이 나를 돌려 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지고, 일정한 속도로 뛰는 심장이 느껴졌다. 한차례 숨을 길게 내쉰 뒤,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걱정스러운 눈길에는 미약한 아쉬움이 묻어났으나 자기가 한 잘못을 알아, 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나 또한 루블리안에게 내 죽음을 보여주긴 했으나, 의도가 달랐다. 나는 잊을 걸 예상했었고, 루블리안은 내가 결코 잊지 못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잘못을 안 했다는 건 아니긴 하다만.

“가자.”

평행 세계 백시현의 곁으로 걸어가 말하자, 그가 걸음을 옮겼다. 테라스로 향하는 나와 그를 말리거나, 한시가 바쁜데 왜 쉬냐며 반발하는 이는 없었다. 우리 둘 사이에 흐르던 묘하게 묵직한 공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니 당연했다.

커튼 밖, 투명한 문이 열리자 시원한 공기가 폐부에 들어찼다. 점차 밝아지는 하늘을 바라보다, 시선을 내렸다. 빛을 맞고 있는 평행 세계 백시현이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렇게 죽었어야 했던 걸까.”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들어가지 않은, 심히 버석하게 메마른 목소리였다. 그 탓에 상당히 두서없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난간을 훑는 흰 손에 시선을 주다 느릿하게 입을 뗐다.

“……미안해.”

굳이 따지자면 내가 한 잘못은 아니었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내 앞에 있는 이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 그러나 굳이 이유를 파고들자면 내가 나왔다. 내가 중심에 있었다.

깊이 엮어있는 나는 사과를 안 할 수 없었다. 내 인간성이, 양심이 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모든 게 기억이 났어. 처음에는 하필 내가 왜 기억이 있는 건지. 그대로 잊었으면 좋았을 텐데. 왜 나한테는 망각이라는 축복이 찾아오지 않은 건지….”

약간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내 시야에 검지로 난간을 가벼이 두드리다 훑는 손이 잡혔다가, 오아시스는 찾을 수 없는 갈라진 사막 같은 얼굴이 들어온다.

나는 그저 귀를 기울였다. 가만히, 건조하다는 말 그 자체인 음성에.

“처음에는 신을 욕하다가, 잊게 해 달라고 기도하다가, 울었어. 그걸 계속 반복했어. 그러다 점점 내가 미쳐 간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그냥 운이 없는 내 잘못이라며 계속해서 나를 탓했어. 그게 가장 쉽고, 편하더라.”

모든 걸 놓아 버린 사람이 이럴까. 아무런 감정을 띠지 않아 더욱 위태로워 보이는 평행 세계 백시현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지금 무슨 말이 입 밖으로 나오든, 그 말은 비교적 훨씬 가볍고 쉽게 나온 말일 테니까.

햇빛을 직격으로 맞던 몸이 움직였다. 그 때문에 그의 얼굴이 어둠 속에 갇혔다. 아슬해 보여서인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너도 기억이 있지. 너는, 알았어? 내가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알았다면 막았겠지.”

친히 그런 헛짓거리를 하는 꼴을 보고 있었을 리 없다. 그 말은 들은 평행 세계 백시현의 눈동자에 돌연 이채가 돌았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그가 숨을 길게 뱉어 냈다.

“……나도 미안해. 심술 좀 부렸어.”

“알면서 당해 준 거야.”

아까보다 감정이 차오른 얼굴에 태연하게 대꾸했다. 분위기를 조금 환기하고 싶어 하는 게 보였기에 맞춰 준 거였다. 그리도 진실한 버석 마른 음성에, 심술이라는 귀여운 단어를 찾아내는 건 무리였다.

칠흑 같은 흑발이 바람결을 타고 일렁였다. 나와 같지만, 더 피곤해 보이는 평행 세계 백시현이 닫았던 입을 벌렸다. 이내 소리가 새어 나온다.

“나 이 세계로 다시 오기 싫었어. 신도 원치 않는다면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는데…… 왔어. 나를 그렇게 만들었던 벨리텐트한테 왜 그랬냐고 따지고 싶기도 했고.”

다른 이유가 더 있는 듯했으나, 그것에 신경을 기울일 수가 없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연갈색 눈동자가 심히 공허했다. 혼이 빠져나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무어라 말을 하려던 차였다. 평행 세계 백시현이 난간에 팔을 걸치고 얼굴을 묻었다. 이어 들릴 만한 크기로 중얼거린다.

“사실 네 애인을 보자마자, 토할 뻔했어. 몸이 으슬으슬 떨리고, 머리가 아프고, 이대로 쓰러질 것 같았는데 네가 있어서 괜찮아졌어. 너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같지만, 다른 사람이라는 게 확실히 차이 나더라고.”

말이 끝맺자, 한동안 침묵이 가득했다. 어떻게 말해도 평행 세계 백시현에게는 닿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말했듯, 내 말의 무게는 그의 말의 무게보다 훨씬 가벼웠으므로.

날이 제법 쌀쌀한데 밖에 오래 있었다.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다면 이제 들어가자고 하려던 때,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있잖아. 사실 나는 너를 원망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모르겠어. 사랑받는 네가 부러운 건지, 여전히 원망하고 싶은 건지.”

자기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것처럼 횡설수설 이야기를 꺼내던 평행 세계 백시현이 숨을 들이켰다. 이내 방황하는 아이 같은 얼굴을 쓸어내리며 입을 연다.

“내 마음인데, 정말 하나도 모르겠어.”

한 줌의 재가 되어 사라져 버릴 듯한 음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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