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 루블리안과 봉인 (16)
“싫은데?”
그리고 그 예감이 들기가 무섭게 루블리안의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 고개를 조금 틀자, 루블리안은 제 얼굴을 맘껏 감상하라는 듯이 얼굴을 옆으로 빼내었다. 수려한 미소로 무마하고 있긴 했으나, 시선이 얽히는 눈동자에서 짜증이 읽혔다.
내가 데드리언에게 그다지 좋지 못한 대우를 받는 게 탐탁지 않아 저러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봐도 미심쩍은 나를 아닌 척 비꼬는 데드리언이나, 대신 짜증을 내는 루블리안이나. 둘의 입장 모두 이해가 갔다.
“아~ 그러세요?”
“응, 그런데?”
둘 다 더욱 환히 웃는데, 오싹하기 짝이 없다. 저들을 보고 그리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닌지, 몬트리오는 한쪽에서 시든 꽃 같은 낯으로 내게 제발 말려 보라며 보디랭귀지를 하고 있다.
손을 현란하게 휘적거리는 게 얘네 눈에는 안 띌 거라고 생각하나. 시간을 되돌리기 전과 다를 게 없다. 몬트리오, 저 녀석은 둘이 싸우기만 하면 지능이 떨어진다. 웃기지도 않는 몸짓을 보며 잠시 추억에 잠겼다가 헤어 나왔다.
“그럼 다 때려치우던가~ 그냥 다 죽어 보자고.”
열이 머리 끝자락까지 다다른 건지 존댓말을 때려치웠다. 좀 더 화나게 하면 다 엎고 나갈 것 같은데 루블리안은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루블리안. 성질 좀 죽여.”
“으응. 저한테는 시현을 사랑하는 성질밖에 없어서 안 되는데요.”
낯간지러운 말을 내뱉은 루블리안은 눈을 부드러이 접었다. 가느스름한 눈꼬리에 봄꽃이 아롱아롱 매달린 착시 현상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애교살을 최대한 끌어모아 눈웃음치는 그는 작정한 것 같았다.
일순간 홀린 듯이 시선을 빼앗겼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 정신인데 루블리안이 마음대로 가져갔다가 돌려놓는 게 다반사였다.
“……그 성질이 아니잖아. 네가 물건이야?”
“시현 남편이죠.”
고개를 기울이며 한 손을 제 볼에 가져다 댄다. 활짝 핀 꽃의 잎을 한 장 가져다 붙인 모양새였다. 혼나지 않기 위해 아양을 떠는 거라면 반쯤 성공했다. 귀여워 보였으니까.
“아니에요?”
저 말에 긍정하면 끝없이 매달려 웅얼댈 게 눈에 훤했다. 부러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들어 올려 금빛 속눈썹을 돋보이게 하는 모습에 헛숨을 내뱉었다. 내가 자신의 얼굴에 약하다는 걸 알고 효과적으로도 이용한다.
시각적, 청각적 자극에 진 나는 괜히 루블리안이 괘씸해졌다. 금빛 실타래 사이로 보이는 하얀 이마를 손등으로 한 번 치자, 그가 울상을 짓는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맞으니까, 제발 그만 삐딱하게 굴어.”
고저 없는 음성에는 탓하는 기색이라고는 하나 없었다. 그걸 루블리안도 알았다.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감정이 이런 거구나 싶은 웃음소리가 귀를 흠뻑 적셨다. 맞닿은 몸으로 전해지는 얕은 떨림과 숨결이 귀보다도 심장 부근을 간질였다.
더는 저 미소를 보고 멀쩡할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그러자 말싸움할 의욕이 완전히 소진된 낯과 펭귄이 하늘을 나는, 그런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목격한 낯 그리고 어쩐지 싸늘하게 식은 눈빛이 보인다.
“그렇지만요, 시현.”
그때 살근살근 뜨거운 입바람과 다디단 음성이 귀를 건드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루블리안이 웃고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을 저리 대하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요.”
그 말에 데드리언의 고개가 움직였다. 루블리안과 서로를 노려보는 듯했다.
“저쪽 백시현한테는 안 그러는데, 우리 여보한테만 그러니까 속상하잖아요.”
둘 사이에 끼어들기도 전에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는 게 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나는 루블리안에게 약하디약했으니 말이다.
눈에 루블리안이 담기자마자, 그가 한쪽 뺨에만 꽃받침했던 손으로 내 뺨을 둥글게 어루만졌다. 그러고는 의도적으로 꾸며낸 게 확실한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설마 여보가 너무 예뻐서 관심받으려고 일부러 저러는 걸까요? 안타깝네요……. 우리 여보의 심미안에 충족되는 건 나밖에 없는데. 그렇죠?”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다가 축 늘어뜨리고 정말 안쓰러워 못 견디겠다는 시선을 한번 보내는 게…… 진짜 또라이 그 자체였다.
노골적인 저격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는 데드리언이 주변을 밝힐 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싸움 한번 안 해 봤을 듯한 흰 손은 주먹을 쥔 채로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루블리안.”
“네에.”
“그만해. 더 하면, 알지.”
이 이상하면 진짜 며칠간은 무시당하게 되리란 걸 알아차린 듯 루블리안이 입을 딱 다물었다. 이내 무해한 낯으로 배시시 웃는 게, 어떻게 봐도 선처해달라는 모양새다.
어이가 없었다. 내가 말린 탓에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는 못했지만, 웬만큼 했으면서. 이미 저질렀으면서 저리 나온다. 당연히 봐주리란 신뢰가 묻어나는 눈빛에 루블리안의 뺨을 잡아당겼다.
“아하요.”
“안 아프잖아.”
엄살에 약하게 잡았던 뺨을 놓았더니 그대로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딱 달라붙었던 그의 가슴팍과 거리가 벌어졌다.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이는 걸 내버려 두고, 시선을 돌렸다.
“얘 말은 앞으로 무시해.”
이어 이제는 질린다는 듯이 우리를 쳐다보는 몬트리오와 데드리언 그리고 조금 전보다 더 싸늘해진 평행 세계 백시현을 향해 말했다.
검지로 루블리안을 콕 집어 가리키자, 하나둘 고개를 끄떡인다. 자꾸만 묘하게 거슬리는 평행 세계 백시현을 무시한 채, 루블리안과 데드리언이 싸우기 전의 대화를 떠올렸다.
“알리가 돌아오면 모르는 척해.”
“수작에 당한 걸 말하는 건가?”
“어. 그거.”
부연 설명 없는 간결한 말이었다. 그러나 셋 모두 그 까닭을 나름대로 생각한 뒤, 이해하고 있는 듯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결이 다르긴 하겠지만 말이다.
솔직한 심정으로 터놓자면, 마신은 이미 눈치챘을 테다. 적어도 나만큼은 본인이 알리에게 수작을 걸었다는 사실을 간파했으리란 걸.
그야 그럴 게 나는 미래를 알았다. 이제는 오지 않을 미래이긴 하다만.
알리가 정령계로 떠나기 전, 내년에도 가는 거냐고 물어봤던 것도 이러한 이유였다. 내 기억상에서는 토벌 중 그녀가 정령왕의 부름에 의해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
“마신은 예상하고 있을 거야. 자기가 수작 부린 걸, 우리가 알고 있을 거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신한테 이야기를 들었는데.”
[네? 저요?]
신의 이름을 팔아먹으려 들자마자, 높게 째지는 목소리가 머리를 강타했다. 서서히 통증이 미미해져 가는 게 느껴졌다. 신과 소통할 수 있다고 운을 뗀 직후, 눈을 크게 뜨며 놀라는 이들을 보다 말을 이었다.
“정령계에는 그런 행사가 없대.”
“정령왕한테 불려가는 거?”
“그렇지.”
루블리안에게 말을 놔버린 순간, 내게도 말을 놓기로 했나 보다. 물론 이편이 더 익숙했기에 상관없었다. 동료들이 말을 놓든 높이든 그들이라는 건 변치 않아 그다지 신경 쓰는 부분도 아니었고.
“흐음. 그런데 그것도 마신이 너와 신이 소통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어떠한 방식으로 신과 말을 주고받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딴 곳으로 샐 것을 우려하여 못 묻고 있는 티가 났다. 확실히 어리다.
“네 예상대로 마신을 만나 본 적이 있어.”
“더 설명해 줄 생각은 없어 보이네.”
여전히 의혹이 가득한 눈빛이었기에 우선 루블리안의 입부터 막았다. 말리긴 했지만, 지금 툭 튀어 나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미 몇 번이고 그러지 않았던가.
루블리안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고는 한동안 내 손을 유심히 바라보는데, 무슨 고민을 하는 듯했다. 그것도 지금 대화와는 관련도 없고, 쓸모도 없을.
아무런 짓도 하지 않는 루블리안이 수상해, 그를 살피다 손을 거뒀다. 이윽고 어깨 위에서 느껴지던 무게감이 사라지자, 내 등과 그의 가슴팍이 조금의 틈 없이 맞붙는다.
“수상하게 여길 거 알아.”
루블리안이 내게 매달리는 탓에 앞으로 쏠리는 무게를 느끼며 입을 뗐다. 그 무게감이 왠지 모르게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줬다. 묘한 안정감을 받으며, 곱다고는 하지 못할 눈빛을 마주했다.
“나 같아도 그럴 거야. 근데 더 할 말은 없어.”
굳이 아는 사이였다는 사실을 감추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걸 밝힐 생각은 없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도 느꼈지 않은가. 말뿐인 설명을 들은 평행 세계의 알리와 데드리언이 어떠했는지. 그리움에 차서 날 보던 평행 세계 몬트리오와 얼마나 달랐는지를.
시간을 돌렸고, 너희는 나와 마왕을 토벌했다는 걸 말해봤자 신뢰는 얻을 수 없었다. 믿음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득보다 실이 더 큰 선택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다.
굳건한 내 의지를 알아차린 모양인지 데드리언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마치 들으라는 듯이.
“그렇게 보면 할 말이 없잖아. 미안해. 계속 의심스럽게 본 거.”
평소랑 다를 게 없을 텐데. 내가 어떠한 눈을 했다는 건지 알 길이 없었으나, 저 사과는 진심이었다. 나를 더욱 꽉 붙드는 팔을 느끼며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괜찮아. 이해하니까.”
그런 뒤, 사과를 받았다.
신뢰를 얻으리라는 기대가 없어서 그런가, 의심을 벗으니 묘하게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