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6. 루블리안과 봉인 (15)
“무슨 근거로요?”
일순 내가 말을 멈추자, 데드리언이 물었다. 그의 웃는 낯에는 의심의 기색이 역력했다. 데드리언에게 난 방금 막 알게 된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의 경계를 이해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했던 걸 조금 더 정리하고 설명을 하려던 차, 머리에 무게가 실렸다. 느껴지는 감각 상, 루블리안의 얼굴인 듯했다. 일부러 턱으로 머리를 쿡쿡 찍는 걸 보니, 무슨 불만이 있는 게 자명했다. 무시하면 계속 이러리라는 걸 알아 입을 열었다.
“왜.”
그러고는 옆으로 머리를 기울여, 루블리안의 턱 밑에서 빠져나왔다. 그의 얼굴을 눈에 담자마자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눈매가 둥근 곡선을 그리고는 있지만, 눈동자는 곧 마을을 휩쓸 쓰나미처럼 위험한 빛을 냈다.
그 형형한 눈빛이 향하는 건 데드리언이었다. 내게 약간은 적대적으로 경계를 내비치는 데드리언이, 적잖이 아니꼬운가 보다.
“전에는 방금 막 알에서 나온 병아리 취급을 하더니…… 웃기다 싶어서요.”
웃긴다는 표정이 전혀 아니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긴 했기 때문이었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데드리언은 내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생전 처음 가족애가 이런 건가 싶을 정도로 지극히 나를 챙겼다. 지금과 확연한 차이가 난다는 소리다.
“방금 막 알에서 나온 병아리 취급? 그게 무슨 소린지 나는 모르겠는데, 설명 좀 해줄래요~?”
“그렇게 평생 모른 채로 살지 그래. 다시는 어미 닭 행세하지 말고.”
나긋한 목소리로 살벌하게도 말한다. 능글맞은 데드리언과 미려하게 웃는 루블리안의 신경전을 보다 몸에 힘을 뺐다. 자연스레 루블리안의 어깨에 내 뒷머리가 닿았다.
이쯤 하라는 내 의도를 알아차린 건지 루블리안은 입을 열었다가 닫고는 살살 애교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또 어떤 요구를 하려다가 멈춘 게 분명했다. 계속 이리 굴다가는 며칠간 내게 말도 못 붙이게 되리란 걸 알아차렸나 보다.
“……저놈을 단단히 붙잡고 있군.”
“내가 단단히 붙잡히긴 했지.”
몬트리오의 작은 중얼거림을 들은 루블리안이 내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이어 그의 목에 가져다 대고는 아까의 형형함은 쏙 빠진 순종적인 눈으로 나와 시선을 맞춘다.
그러자 곳곳에서 어이없다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탄식이 들려왔다. 루블리안은 그런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는 듯 굴었고.
그 꼴을 가벼이 훑은 나는 손을 움직여 내 목에 가져다 댔다. 손가락끼리 얽힌 상태라 당연하게도 루블리안의 손이 딸려왔다.
“말은 바로 해. 내가 너한테 잡힌 거지. 네가 아니라.”
여전히 마주하고 있는, 드넓은 바다를 품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뺨이 새빨갛게 변한 루블리안이 내 머리에 이마를 댔다. 사라진 얼굴이 있던 자리를 보다 다시금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손을 떼어 냈다. 그러자 원래 하얗던 목이 꽃물이 든 것처럼 변한 게 보인다.
“지금 저 얌전히 있으라고 그런 거죠…….”
“그것도 있고.”
진심으로 말하기도 했다는 걸 알아차린 건지 루블리안이 이마를 비비적거렸다. 형체를 알 수 없을 만큼 뭉뚱그려진 웅얼거림을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다 꺾어진 고개를 바로 했다. 묘한 눈으로 날 직시하는 세 명이 보인다. 왜 저렇게 나를 보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저걸 신경 쓸 때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신은 머리가 잘 돌아가거든.”
“뭐?”
“흐음, 단순히 머리가 좋다는 거 하나만으로는 납득이 어려운데요~ 그건 시현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요.”
당최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반응의 몬트리오와 상반되게 데드리언은 곧바로 대화의 흐름을 눈치챘다. 이게 조금 전 대화의 연장선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계속해서 날 쳐다볼 뿐, 다른 행동은 취하지 않았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살피다, 내 옆구리를 노리는 팔에 허리를 내어 주었다. 무언의 허락을 알아들은 루블리안이 기쁘다는 양 나를 더욱 단단히 끌어안았다. 차츰 허리 밑에서 딱딱함이 느껴졌다.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린 나는 그 느낌을 기분 탓이라 되뇌며 생각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알지.”
덕분에 늦게 답하게 되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저 말을 고르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여기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데드리언. 너도 어느 정도는 그러리라 생각하고 있잖아.”
데드리언의 입꼬리가 움찔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걸 놓칠 리 없었다. 정곡을 찔린 그가 제 입가를 매만지며 참 의아하다는 듯이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이쪽 시현은 왜 이 세계뿐만이 아니라 저희까지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을까요. 그리고 그걸 굳이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고요.”
예리한 말이었다. 나는 내가 저들을 안다는 걸 구태여 숨길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철저히, 단서 하나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감췄을 테다.
수상하게 보이리란 걸 알면서도 숨기지 않은 이유는 단순했다. 나는 이 봉인만 끝나면 떠나갈 이였고, 몬트리오가 욱하며 지적했듯 루블리안과의 관계가 심상치 않아 보일 게 뻔했기 때문이다.
지워진 과거 속, 내가 용사일 적 루블리안은 늘 나를 예외 취급했다. 하물며 이제는 애인이라는 관계가 되었으니 그 취급이 더 심하면 심하지, 덜하지는 않았다.
“아니면 말고요~ 마왕이 봉인을 눈치채고 수작을 부렸다고 하면. 이제 어떻게 하려고요?”
잠시간 내가 입을 다물자, 어떠한 기색이라도 느낀 건지 데드리언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을 넘겼다.
나머지 둘은 마왕이 수작을 부린 것 같다고 했던 내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한 명은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천천히 되짚는 중인 것 같았고, 한 명은 대놓고 관망만 하고 있다.
나는 데드리언을 힐끔 쳐다보고는 신을 불렀다.
‘신.’
[네, 시현.]
‘마신은 정령계에 직접적인 간섭을 못 하지?’
거의 확신에 가까운 물음이었다. 만약 직접적으로 간섭하는 게 가능했다면, 신이 용사의 동료로 정령의 영향을 크게 받는 정령사를 뽑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나온.
[네. 맞아요. 정령계는 주신님의 가호와 정령들의 보호 아래 있거든요. 인간계를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거랑 똑같다고 보시면 돼요.]
역시나. 이어 신에게 추측한 것에 관해 더 말하려 하자, 내 얼굴에 강하게 박히는 세 쌍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째서 저러는지 이유를 알았으나, 익숙하게 시선을 무시했다. 용사일 적 겪은 무수한 시선과 루블리안을 무시하던 경험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인간을 마왕으로 만든 것처럼, 정령을 마왕처럼 만드는 건 가능해?’
[어…… 그랬던 사례가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정령은 정령왕의 보호 아래에 있고, 인간보다 훨씬 욕망이랄 게 없어서요. 그들은 자연 친화적인 청렴하고 깨끗한 존재라 예측이 잘 안 되네요. 시현은 마신이 정령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 생각에는.’
직접적인 간섭도 하지 못하는 마신이 부릴 수작은 한정적이다. 그중 실현 가능성이 가장 큰 게 이거였다. 욕망을 부추겨 드물게 세계를 넘은 인간을 조종했듯 정령을 이용하는 것.
여태 사례가 없는 건, 귀찮게 정령을 이용할 필요를 못 느껴서겠지. 인간들은 마왕만으로도 벅차하니.
[창조신이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정령계는 주신님이 약간 덜 신경 쓰시기는 해서…… 정말 모르겠네요. 할 수 있을 것도 같고, 불가능할 것도 같고.]
진심으로 예상이 가지 않는다는 투였다. 원하던 정보를 얻은 나는 신에게 다시 조용히 해달라 요청했다. 매정하다며 찡얼거리기도 잠시 머리가 어지러워 더욱 인상을 쓰자, 신은 내 말을 들어주었다.
“또예요?”
“어.”
주름진 미간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둥글게 문지르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자, 투정이 들려온다.
“그만 좀 오라고 하면 안 돼요? 기생충도 아니고 진짜……. 마음에 안 들어요.”
신이 들었다면 어디 한낱 미물이랑 비교하냐며 날뛸 말이었다. 몸을 살짝 비틀고, 고개를 돌리자 한껏 짜증이 난 낯이 보인다.
아무래도 나를 통해 상황을 지켜보던 신이 우리의 말을 들은 모양이다. 지금은 루블리안에게 따지고 있는 듯하고. 어떻게 된 게 예상에서 벗어나질 않는다.
“너희만 아는 얘기 그만 좀 하지 그러나.”
“맞아요~ 둘만의 이야기는 나중에 꽃 피워 줄래요?”
데드리언이 오른손을 들어 올려 설렁설렁 흔들었다. 마치 자기 차례라는 듯한 손짓에는 미약한 비꼼이 어려있었다. 시선을 느꼈을 게 분명한데도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기에 저러는 모양이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에는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기에, 내가 잠시간 말을 멈추면 익숙하다는 양 내버려 뒀다. 더 좋은 방안을 들고 오리라는 걸 아니까.
그러나 지금 저쪽은 기억이 없다. 그러므로 신뢰도도 낮다. 봉인을 몇 년에 걸쳐서 하는 것도 아니니, 신뢰와 믿음을 줄 시간 또한 없고.
과연 제대로 협동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봉인까지 순탄치 않으리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