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5. 루블리안과 봉인 (14)
시간을 돌리기 전, 용사일 적에는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를 보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다. 그렇기에 동료들의 의외인 점 하나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루블리안에게 삐진 몬트리오 또한 여러 번 봤던 터라 그다지 생소하지 않았다.
기억이 확실하게 지워진 데드리언과 알리는 달랐지만 말이다. 둘은 무게를 잡던 몬트리오의 아이 같은 면모에 상당히 놀란 듯했다. 기억이 있으리라 추측되는 평행 세계 백시현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는, 평온한 낯이었고.
“그러든지.”
머뭇거림 없이 심드렁한 투로 대꾸한 루블리안은 몬트리오를 제대로 보고 있지도 않았다. 푸르른 시선은 작게 팬 땅바닥을 굴러 내게 박힌 것처럼 꼼짝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일이 끝나면 다시는 이곳에, 루블리안의 고유 세계에 오지 못할 테다. 아마 그러한 생각으로 더 쉬이 답한 것 같은데, 곤란하게 됐다. 몬트리오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단단히 삐진 낯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친우라고 생각했다, 루블리안. 그런데 이제 보니 그건 내 착각이었나 보군.”
“친우라고는 생각하는데…….”
말이 끝으로 갈수록 흐려졌다. 루블리안이 다음 말을 바로 잇지 않고 시간을 끌자, 그 사이를 잇는 이음새처럼 침을 꼴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가 아닌 긴장으로 인해 힘이 들어간 몬트리오의 주먹이 보였다.
“내겐 우리 여보가 더 우선일 뿐이지.”
말을 끝맺은 루블리안이 기습적으로 내 뺨을 한 손으로 잡고, 입을 맞췄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떨어져 있던 시선이 다시 제게로 향한 게 마음에 드는지 둥근 반달을 그리는 입술에는 흡족함이 가득했다.
“나 보고 무어라 할 게 아니지 않은가!”
어쩐지 허망해 보이던 몬트리오가 크게 소리쳤다. 그의 행동을 예측한 루블리안이 빠르게 내 귀를 막았기에 귀가 얼얼하지는 않았다.
“이자를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텐데, 너 또한 마음과 몸. 둘 다 쉬이 내어 주고 있지 않은가!”
다른 이들은 아까의 앙갚음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래 알고 지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지금 우정보다 사랑이라고 한 루블리안한테 서운해서 괜히 저러는 거였다.
토벌을 거듭할수록 성숙해졌던 몬트리오가 익숙해서 그런가, 지금의 그는 철부지 도련님 같았다. 토벌 초반의 그를 생각하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인공적인 조명 아래, 찬란하게 빛나는 금발이 괜히 괘씸해 아프지 않게 당기고는 소파에 등을 묻었다. 여기서 내가 끼어들면 역효과가 날 게 분명했기에 루블리안이 끝을 맺도록 기다려야 했다.
“몬트리오, 추하니 그만 부러워해.”
“허, 그게 지금 무슨 소리지?”
“아무리 세레티니 클란 영애한테 세 번이나 차였다지만, 이렇게까지 공격적으로 나올 필요가 있나 싶은데.”
‘세 번? 와…… 질척거리는 거 대박이네요.’, ‘알리, 쉿. 다 들려.’ 루블리안의 말에 저들끼리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몬트리오의 얼굴이 창피로 물들며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일부러 나와 만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를 언급하지 않기 위해 화제를 약간 튼 걸 텐데, 이러다가는 사이만 나빠질 듯했다. 봉인도 물 건너가고.
“루블리안.”
나서지 않기로 마음먹은 지 얼마나 됐다고, 나는 이 난장판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흥미진진하게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아침 드라마를 보는 김민식 같아 상당히 어이가 없었다.
“너 몬트리오 꽤 좋아하는구나.”
“……네?”
“……무슨.”
반 박자 늦게 입을 여는 것도 그렇고. 루블리안과 몬트리오의 반응이 유사했다. 나는 동공 지진을 일으키는 둘을 번갈아 가며 물끄러미 응사하다, 몬트리오에게 초점을 두었다.
“누구한테 몇 번 차였고, 누구랑 사귀었고, 그 기간이 어떻게 되는지 상세히 기억하고 있잖아.”
높낮이가 없어 심심하다 느껴질 수 있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꽤 진정성과 설득력이 있었는지 몬트리오의 눈이 확장되었다. 힘이 빠진 듯 그의 주먹은 보자기가 되었다.
“시현, 그건,”
“물론 놀리려는 의도가 가득하긴 할 거야.”
살짝 힘을 주어 금발을 내리누르고는 정정하려는 루블리안의 말을 끊어냈다. 말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뜻을 읽은 건지 그는 말이 없었다. 그저 내 손바닥 아래에서 부드러이 움직이는 머리칼이 느껴졌을 뿐이다.
그에 한숨을 한 번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일종의 관심이지. 루블리안이 다른 사람한테 이러는 거 봤어?”
“……아니. 보지 못했다.”
몬트리오는 무언가 깨달은 눈을 했고, 일은 적당히 풀렸다. 이제 이야기를 마저 하면 될 것 같은데, 멍하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알리가 퍼뜩 고개를 쳐들었다.
“헉!”
“왜 그래?”
옆에서 구경하던 데드리언이 물었다. 그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이었지만, 반쯤 포기한 기색이 엿보였다. 좀처럼 생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아 그런 듯했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용사님들의 동료로 선택받을 거라고는 상상치도 못해서 완전히 잊고 있었는데요. 제가 지금 정령계에 다녀와 봐야 해서요……. 빠질 수 있다면 빠지고 싶은데, 정령왕님하고 만나는 거라서 그럴 수가 없어요. 진짜 죄송해요.”
면목 없다는 듯이 알리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고 쳤다고 생각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 낯이 창백했다.
“음~ 그럼 언제 다시 오는데?”
“날마다 달라서 애매하지만, 평균적으로 한 3일 걸려요. 정령계랑 인간계랑 아무래도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보니까요.”
미약하지만, 알리의 목소리에서 가는 떨림이 느껴졌다. 소리의 울림 때문이 아닌 무언가에 겁을 먹은 것처럼.
이를 알아챈 건, 나밖에 없어 보였다. 그야 그럴 것이 여기 중 미세한 떨림을 잡아낼 만큼의 능력이 있는 사람은 루블리안과 나뿐이었다. 저들은 시간을 돌리기 전의, 토벌로 인해 성장한 동료들이 아니었다. 아직 나와 루블리안에 비하면 약하기 그지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그런 상황인데, 루블리안은 연인인 내게는 지대한 관심을, 친우인 몬트리오에는 소량의 관심을 쏟아붓는 것이 다였다. 아무리 동료였다지만, 알리는 그의 경계선 안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고?”
무미건조한 질문에 소리의 근원지로 시선을 옮겼다.
평행 세계 백시현이 지긋이 알리를 바라보고 있는 게 내 시야에 들어왔다. 나와 똑같은 연갈색 눈동자는 아무런 빛을 띠지 않았으나, 그래서인지 더욱 그녀를 관찰하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목소리의 떨림을 잡아냈나 싶기도 했다.
“원래도 이맘때쯤 한 번 불려 가요. 별일 아니에요.”
“내년에도 이맘때쯤 가?”
나는 좀 뜬금없을 만한 질문을 했다. 대답을 기다리는데 루블리안은 소외된 기분이라도 느낀 건지, 방금보다도 세게 나를 덮치듯 껴안았다. 그의 허벅지에 올려지다시피 한 나는 반쯤 포기한 채로 따끈한 몸에 몸을 맡겼다. 그러자 일순 몸이 멈칫했다.
“내년, 이요?”
“어.”
“……정령왕님이 바쁘시지만 않다면 그렇겠죠?”
눈을 도로록 굴리다 알리가 수긍했다. 얻을 걸 다 얻은 나는 그 뒤로 입을 열지 않았다.
몇 번의 질의응답이 더 오간 뒤에야 그녀가 떠났다. 마력과 정령이 쓰는 힘을 다르기에 신전 내부의 알림을 울리지 않았다.
“마신이 수작을 부린 것 같은데.”
갑작스럽게 조용해진 공간에서 먼저 말문을 튼 건 나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천천히 그들의 얼굴을 훑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속을 알기 어려웠고, 데드리언은 뭔가 있다고 짐작한 모양새였다. 이상하다는 낌새를 느끼지 못한 몬트리오만이 혼자 놀랐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지?”
“마신은 우리가 봉인 시도를 하려 한다는 걸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어.”
내 말을 들은 데드리언은 그저 가만히 나를 관찰하듯 지켜보았고, 몬트리오는 시끄럽게도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떻게 알았냐고 묻고 싶어 하는 게 훤히 보였다.
그러나 말을 걸지는 않았다. 한 마디를 얹으면 얹을수록 시간만 잡아먹는다는 걸 드디어 깨달은 듯했다.
“용사와 그 동료들이 마왕을 처치하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예상했겠지.”
내가 나를 신전으로 데려와 몬트리오를 마주하게 한 루블리안의 의도를 짐작한 것처럼.
“이번에는 신탁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구나. 용사와 그 동료들이 봉인에 힘쓰도록.”
애초에 용사는 신이 보낸 자였다. 신의 말을 따를 수밖에는 없었다.
그리고 그 신이 아끼는 나와 루블리안은 봉인 시도를 하려 하고 있었고, 봉인 방법을 알아내려면 필연적으로 수억 년 전의 세계의 일을 알아야 하니 신계의 개입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거기다 마신을 처치하면 마왕 또한 사라진다는 걸, 본인이 모를 리도 없고.
그는 생각하고, 또 생각한 끝내 결론을 내렸을 거다.
용사와 그 동료들이 나와 루블리안과 함께 자신을 봉인하려 하구나,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