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84)화 (84/112)

084. 루블리안과 봉인 (13)

몬트리오의 말에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전이었다. 루블리안이 좀 더 움직여 내 품을 파고들었다. 차라리 나를 끌어안지, 커다란 체구를 구기면서까지 이럴 필요가 있나 싶었으나, 개인 취향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곧 루블리안은 턱을 치켜들고는 야살스럽게 눈을 휘었다.

“아아. 부럽나 봐?”

그러고는 놀리는 게 명백한 목소리를 내었다.

방금까지 토할 것 같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보던 몬트리오의 표정이 한순간에 변했다. 김민식의 ‘쫄?’ 소리를 듣고, 그대로 도발에 응했던 박시찬과 닮아 있었다.

“그럴 수 있지. 몬트리오, 너는 여태 연애를 제대로 한 적이 없으니…….”

말꼬리를 늘이는 어조에는 안쓰럽다는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그게 결정타였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몬트리오가 벌떡 일어나더니 소리를 내질렀다.

“아니다!”

“뭐가 아닌데?”

“연애를 제대로 한 적이 없다는, 네 말 말이다! 나는 로리엔사 영애와도 연애했었고,”

“하긴 했지. 며칠도 가지 않아 차였지만.”

가늘게 바람이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건 비소가 확실했다.

루블리안의 말이 사실인지, 몬트리오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한 대 치고 싶다는 심정을 감추지 않은 그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이를 악문 듯했다.

“그러고서는 마탑에 찾아와 술주정이란 술주정은 다 부리고,”

“그러는 너는!”

흑역사나 다름없을 과거를 언급하자 몬트리오가 나와 나머지 사람들을 보더니, 재빨리 루블리안의 말을 토막 냈다. 이미 다들 들을 건 들은 후였지만 말이다.

“나는, 뭐?”

당당하게 물은 루블리안이 내 품에 안긴 상태로 꼬물꼬물 움직이더니, 내 한쪽 손등을 제 손등으로 덮는다. 손가락 사이사이, 벌어진 구간에 원래 제 자리였다는 양 손가락을 끼워 넣는데, 그 꽉 끼는 느낌이 묘하게 안정감 있다.

“…….”

“더 할 말 있나?”

생략된 ‘없을 텐데’라는 말이 들리는 듯했다. 아닌 척, 빈정거린 루블리안은 고개를 돌렸다. 잠시간 몬트리오에게 향했던 시선이 내게 멎었다.

푸른 눈에 내가 담기자, 곧장 애정이 흘러넘친다. 방금까지 남을 비웃던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못 할 정도였다. 순식간에 개그였던 장르가 멜로로 바뀌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난 너처럼 가벼이 마음 주고, 몸 주는 새끼가 아니라서. 여보한테 내 처음을 모조리 주려고 정조를 얼마나 지켰는데.”

겉보기로는 몬트리오에게 하는 말 같았으나, 실상은 내게 하는 말이었다. 몬트리오에게는 시선 한 점 주지 않고, 내 시선을 단단히 옭아맨 것과 보란 듯한 태도가 확신을 주었다.

이내 루블리안은 칭찬해 달라고 조르는 아이처럼 내 손등을 덮은 손에 힘을 주었다가 빼기를 반복했다. 어깨와 가슴팍 중간 부분에 있는 얼굴을 살살 움직이며 비비적거리기까지 하는데, 그 애교스러운 몸짓에 함락당하지 않는 건 심히 어려운 일이었다.

“루블리안, 이제 그만해.”

그리고 나는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손등을 뒤집어 희고 고운 손과 제대로 깍지를 껴, 어느 정도의 불만을 완화도 했다.

그때였다.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가는 목소리가 귀를 울렸다.

“헉. 저도 모르게 너무 재밌게 보고 있었어요!”

소리의 근원으로 고개를 돌리니, 알리가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그 옆 소파의 데드리언은 낭패가 아닐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그의 성격상, 몬트리오와 루블리안의 대치로 인해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도 모르게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는 그 두 가지 사실 때문에 저런 듯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어딘가 미묘한 낯이었고, 몬트리오는 영혼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보였다. 가벼이 마음 주고, 몸 준다는 말이 꽤 충격이었나 보다.

그리고 이 사태의 주원인은…….

“그렇게 뜨거운 시선으로 보면 부끄러워요, 시현.”

양 뺨을 미미하게 붉히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었다. 부끄럽지도 않으면서 그런 ‘척’을 너무도 잘했다.

“그럼 계속 부끄러워 좀 하고 있어 봐.”

바뀐 신탁에 대해 물은 건, 몇 분 전인데 여태 그에 대해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루블리안이 계속해서 이리 군다면 머리를 맞대기는커녕, 정보 공유도 어려울 것이다.

이런 내 속뜻을 훤히 읽었을 루블리안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건 싫은데요. 시현은 제 눈 안 봐도 좋아요?”

“갑자기 눈이 왜 나와.”

“그야 좋아하잖아요, 제 눈.”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누군가 루블리안의 외모 중 어디가 가장 좋냐고 묻는다면, 고민 없이 답할 수 있었다. 어떨 때는 청명한 하늘 같고, 또 어떨 때는 드넓은 바다 같은, 푸르디푸른 것들을 모조리 삼킨 저 눈이라고.

“물론 제 얼굴도 좋아하고요.”

장난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콧잔등이 짧게 들썩이듯 찡그려졌다가 펴지는 과정이 눈에 박혔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었다가 내쉬며 빈손의 검지로 루블리안의 콧잔등을 꾹 눌렀다. 이어 골치 아프다는 듯이 대꾸했다.

“알면 좀, 그만 써먹어.”

“좋아하면서.”

이어지는 말은 빈약했지만, 알 수 있었다. 자기가 얼굴 쓰는 걸 좋아하지 않냐는 말이었다.

“저기 연애는 나중에 이야기 다 끝내고 해 줄래?”

불쑥, 나와 비슷한 음색이 끼어들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은 벌써 모인지 몇십 분이 지났는데도 이야기의 진척이 없었다는 걸 상기시켰다.

그 말을 듣자, 정신이 확 들었다. 마탑주, 그러니까 루블리안의 방 안에 있는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아마 마신도 원래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갔으리라 추정되고. 지금 이렇게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루블리안.”

“네에.”

“얼른 끝내고 같이 살자.”

그러니 봉인에 관해 이야기 좀 하게 가만히 있으라는 말이었다. 부가적인 설명 하나 붙이지 않았지만, 루블리안이라면 충분히 알아들었을 테다.

깍지를 낀 손과 내 허리에 둘린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조절이 안 되는지 으스러트릴 것처럼 힘을 주다가도, 멈칫하고는 알아서 풀기를 반복하는 게 꼭 인내하는 것 같았다. 그런 그에게 별다른 말을 얹지 않고, 정면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놀람과 비슷한 감정들을 띤 일동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신탁은?”

“……아~ 그러고 보니 저희 그 얘기 중이었죠.”

정말 잊고 있던 모양인지 한 박자 늦게 답이 돌아왔다. 데드리언은 예의 그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으로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러고는 편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던 자세를 바로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신탁이 바뀌었어요.”

“신탁이 바뀌었다?”

“원래는 마왕을 저지할 용사를 보내니, 용사가 아는 네 명의 동료와 함께 토벌하라는 거였는데. 한순간에 그 신탁이 지워지면서 다르게 바뀌었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본 게 아니고 들었다는 식이었다. 하긴 내가 용사로서 이 세계나, 평행 세계로 이동될 때도 본 대신관 중 데드리언은 없었다.

[그때 좀 급했었거든요.]

갑작스럽게 사라졌다가 등장하는 게 일상인 신은 이번에도 예고 없이 머릿속을 울려댔다. 절로 미간이 구겨졌지만, 그건 찰나였다. 소리를 지르거나, 끝 음을 높이지 않은 덕이었다.

[루블리안이랑 이야기하는데, 그때가 딱 신탁 내릴 때여서…… 아무 생각 없이 시현이 시간을 되돌리기 전의 신탁을 내보내 버린 거예요! 옆에서 절 보좌해 주던 천사가 빠르게 알려서 망정이었죠.]

수습하기 힘들었다며 신이 머릿속에 얼쩡거렸다. 그 탓에 데드리언이 무어라 말했지만, 제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끊기듯 들려오는 말과 입 모양으로 알아들어야 했다.

‘우선 가. 쟤네 말 안 들리니까.’

[아, 그걸 생각 못 했네요. 계속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필요할 때 불러요, 시현.]

신이 왔다가 갔다는 기색을 느낀 건지 루블리안이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말을 걸면 또다시 아까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리란 생각에 괜찮다는 걸 행동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의 머리에 머리를 붙였다가 떼어 냈다.

그리고 새로 내려온 신탁이 또 다른 용사 한 명이 나타날 예정이며 함께 마신을 봉인하라는 거였다는, 적당히 알아들은 정보를 머릿속 한구석에 정리해두었다.

“그런데 마신이 이 일을 저지르는 목적은 뭘까요? 신께서 막으라고 하시는 거면 큰일이라도 벌이려는 걸까요?”

데드리언의 말소리가 끝나자, 알리가 질문했다. 내가 아는 그녀의 성격상, 여태 궁금했던 의문을 풀려는 것이 분명했다.

“인간 몰살.”

아는 사실을 간단명료하게 답하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루블리안은 원래부터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밀가루를 덧씌운 건가 싶을 정도로 창백해진 몬트리오가 헛웃음을 흘렸다. 알리나 데드리언, 평행 세계의 백시현 또한 다를 바 없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너는, 너는 그런 걸 어찌 그리 태연하게 말하는 건가!”

“네가 심약한 건데, 왜 우리 여보한테 소리를 지르지?”

나보다도 루블리안이 먼저 반응했다. 형형하면서도 싸늘한 게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대형견이 따로 없다.

“아니, 이 사실에 안 놀랄 수가 있으리라 생각하나? 이건 내가 심약한 게 아니다!”

“어떡하죠, 시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는데도, 이렇게 놀라는 새가슴을 가진 사람이 봉인에 도움이 될까요?”

방금과 달리 온순하게 묻는 루블리안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눈이었다. 도움이 될까요? 라는 묻는 부분에서, 특히.

노골적인 의혹을 몬트리오가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루블리안의 친우였으니까.

몬트리오는 주먹을 쥐고는 화를 참으려는 듯 부들거렸다. 그러나 무리였는지 악물었던 입을 열었다.

“다시는 내 궁에 찾아오지 마라, 루블리안!”

그리고 삐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