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83)화 (83/112)

083. 루블리안과 봉인 (12)

“확실히 똑같군.”

더 이어지려던 생각을 막은 건, 귀에 흘러들어온 익숙한 목소리였다.

잘 숨기긴 했지만, 그가 놀랐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지워진 시간이 되어 버린 과거의 잔재였다. 내 앞의 몬트리오는 기억도 못 할 3년이라는 시간은 그가 숨기는 속내를 눈치챌 수밖에 없게 했다.

“그만 보지?”

한차례 후드가 아래로 당겨지고, 순식간에 시야가 차단됐다. 눈가에 따스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루블리안이 내 눈을 가린 게 틀림없었다.

이제는 홀로, 아니 루블리안과 나만이 기억하는 추억을 반추하다 보니 무심결에 몬트리오와 계속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루블리안은 그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질투와 적의가 선명한 음성이 이를 뒷받침했다.

“허…. 보면 닳기라도 하나?”

“닳지 않으면 뭐, 계속 보고 있기라도 하려고?”

반문에는 삐딱함이 가득했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갔다. 루블리안이 적대적으로 굴 때를 잘 알고 있으니 당연했다.

나는 보드라운 손을 쥐고 내렸다. 버티지 않고 순순히 내 뜻을 따라줘서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시야에 여러 색이 들어찼다.

“여기서 실랑이할 시간 없어.”

“네에. 근데 삐진 남편은 안 달래 줄 거예요?”

내게 잡힌 손을 움직여 자연스럽게 깍지를 낀 루블리안이 애교를 떨어 댔다. 잡은 손을 들어 올리고는 입술을 지분거린다. 곧 간헐적으로 살갗을 깨물며 재촉까지 한다.

저 모양새가 귀여워 보여 잠시 놓쳤던 정신을 다잡았다. 당장 제대로 된 답을 해주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저럴 게 분명했다. 나는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이야기 끝나고, 둘만 있을 때.”

눈꺼풀과 애교살의 거리가 벌어진다. 청아한 눈동자가 제 모습을 다 드러냈다. 도대체 내 말을 또 얼마나 제멋대로 해석한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어라 하기도 전에 눈동자가 다시금 반절 가려졌다. 곱게 눈을 접어 웃은 루블리안이 장난기와 애정을 섞어 만들어 낸 합작품 같은 목소리를 낸다.

“단둘이요? 제가 삐진 걸 어떻게 풀어주려고……. 괜찮아요, 전 엉큼한 여보도 좋아요.”

슬쩍 후드 안으로 손을 집어넣은 루블리안이 쓰라린 살갗을 매만졌다. 그러고는 요사스럽게 눈웃음친다.

유혹의 의도가 분명한 행동이었다.

“……미쳤군. 혹시 지금 내가 꿈을 꾸는 중인가? 그렇다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악몽을 꿔야 하는 거지?”

굳이 정신을 차리려 애쓰지 않아도 되었다. 친우의 애정 행각을 직관한 몬트리오의 기겁 덕분이었다.

시도 때도 없는 꾐에 헛숨을 내뱉고는 뜨거운 손을 옷 밖으로 빼내었다. 루블리안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몬트리오를 응시하고 있었다. 자기가 날 데려와 몬트리오를 만나게 한 주제에 끼어들었다고 저런다.

‘애인’이 되어 관계가 공고해졌기 때문인 건지. 루블리안은 전보다 서슴없이 질투하고, 견제했다. 내가 자신만 성애적으로 좋아한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그랬다.

나는 텅 빈 손을 뻗었다. 루블리안은 뺨에 차가운 게 닿아서 그런지 내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칼바람이 불던 바다가 한순간에 한낮의 바다로 변모한다. 뜨거운 햇빛에 의해 따뜻해진 바닷물 같은 눈동자에 내가 담긴다.

“가자.”

그 말을 끝으로 가벼이 뺨에 입을 맞췄다가 떼어 냈다. 이어 루블리안이 넋을 놓은 틈을 타 그를 이끌었다.

새하얀 계단에 발자국을 찍듯 올라가자, 멍한 낯의 몬트리오가 보인다. 내가 루블리안을 이렇게 다룰 줄은 몰랐다는 것과 친우의 새로운 면모에 당황했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안내, 안 해?”

“어, 어어. 할 거다. 따라오도록.”

짧은 고민 끝에 반말을 내뱉었으나, 몬트리오는 내가 말을 높였는지, 낮췄는지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얼이 빠져있었다.

앞서 걷는 몬트리오를 따라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잡힌 손에서 힘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만개한 꽃을 달고 다니는 착시를 일으킬 만큼이나 환한 낯의 루블리안이 보였다. 볼에 입 맞춘 것 하나로 기분이 좋아진 듯했다.

단순하기 짝이 없었으나, 루블리안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귀엽기만 했다.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

“여기다.”

더는 못 참겠다는 듯 몬트리오가 재빨리 문을 열었다. 박시찬이 연애할 때마다 무시로 일관했던 나와는 정반대의 반응이었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던 환한 빛이 방 안에도 가득했다. 연푸른색 소파는 널찍한 직사각형 테이블을 빙 둘러싸듯 놓여 있었다.

그 소파에는 알리, 데드리언, 그리고.

“늦었네.”

평행 세계 백시현이 있었다.

그는 천천히 눈알을 움직였다. 몬트리오에게서 이동한 시선은 루블리안에게 닿았다가 끝내 내게서 멎었다. 여러 감정이 뒤섞인, 그야말로 잠잠한 소용돌이라는 모순적인 말이 허용되는 눈이다.

쟤 기억이 있구나. ‘어떻게.’라는 생각보다도 먼저 들이닥친 건, 우습게도 걱정이었다. 이 파티가 제대로 굴러가 마신을 봉인할 수 있느냐는.

“앉아서 인사부터 하자.”

나와 만만치 않게 저쪽도 말에 고저가 없었다. 평행 세계 백시현을 일별한 나는 깍지를 풀어내려 애썼다. 상처받은 척하는 루블리안의 칭얼거림은 못 들은 척하려 노력했다.

“왜 거기 앉아요?”

결국 손의 자유를 얻어 낸 내가 동료들 가운데쯤에 자리 잡자, 루블리안이 충격받은 낯을 했다. 야트막하게 벌어진 입술 너머로 보이는 속이 온통 붉었다.

몇 번이고 저 붉음에 먹힌 적이 있는 터라 괜한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하려 했다. 귀에 들러붙은 건지 질척이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다. 잡념을 털어 내기 위해 고개를 휙휙 저었다.

“몬트리오가 네 옆에 앉고 싶다고 해서.”

“뭐?”

3년간의 내공으로 몬트리오를 팔아 먹자, 그가 펄쩍 뛰어오르며 반문했다.

그걸 익숙하게 무시한 뒤, 혼자 서 있는 루블리안에게 몬트리오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그러자 수려한 낯이 마구잡이로 구겨진다.

저래도 외모가 빛난다. 도대체 신은 얼마나 정성스럽게 루블리안이라는 인간을 빚은 건지 모르겠다.

“시현은 다른 사람이 제 옆에 서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쉽게 넘겨줄 거예요?”

“말이 왜 그렇게 돼.”

기가 막히는 소리다. 어떻게 저리 연관을 지을 수 있는지. 비상한 두뇌를 이상하게도 쓴다.

“지금 상황이 그렇잖아요. 어떻게 제가 아닌 사람을 옆구리에 낄 수 있어요, 여보.”

말을 이은 루블리안은 고개를 푹 숙이고는 세상의 온갖 처량함을 끌어모은 사람처럼 굴었다. 누가 보면 내가 바람이라도 핀 줄 알겠다. 나란히 앉으면 또 손을 뻗을 테고, 그렇게 되면 원활한 대화가 불가능할 게 뻔해 그저 딴 곳에 앉은 것뿐인데.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긴 소파에 혼자 앉은 몬트리오를 이동시켰다. 이어 일어서 있는 루블리안을 챙겨, 그와 나란히 앉았다.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럴 거라는 확고한 의지를 엿봤기 때문이었다.

한 소파에 같이 앉게 된 루블리안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띠고는 내 허리에 팔을 둘렀다. 놀란 기색이 역력한 동료들과 평행 세계 백시현은 그의 관심 밖이었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먼저 운을 뗐다. 루블리안의 기행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은 탓이었다.

“신탁이 어떻게 내려왔지?”

평행 세계 백시현과 똑같은 내가 나타났음에도 놀라지 않은 것, 봉인에 협조하는 것 등. 짧지만, 그들이 여태까지 내보인 반응을 곱씹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된다.

용사와 함께 마왕을 물리치라는 신탁이 바뀌었구나, 하고.

특히나 루블리안의 말만 듣고 이들 모두가 따를 리 없었다. 이 시점에서는 아마, 몬트리오를 제외한 나머지와 친분도 없을 테니 말이다.

또, 데드리언은 신전에 속한 신관이었다. 여전히 그런지 알 길이 없긴 하지만, 지워진 과거에서 차기 교황으로 꼽힐 만큼 뛰어나던 그는 신탁을 지킬 수밖에 없다.

신탁이 변하지 않았고, 루블리안이 이를 이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앞서 말했듯 이들이 과연 따를까 하는 의문이 뒤따라온다.

내 말에 데드리언이 속내는 뒤로 감추고, 웃음을 내보였다. 아직 앳되어 감정의 파편이 보였지만 말이다.

“신기하네요. 이쪽 시현은 꼭 저희 세계에서 오래도록 지낸 것만 같아요.”

예리한 말이었으나, 나는 그다지 큰 반응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저 내 어깨에 내려앉는 무게감을 느낄 뿐이었다.

“셀턴과도 오래 알고 지낸 것 같고요. 제 착각일까요?”

“내 대답이 어떨지에 따라 달라지는 게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

비꼬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그리 생각한다는 듯이 단조롭게 말했다.

이윽고 생글거리며 의심과 경계가 얕게 어린 눈으로 날 보던 데드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넘어가 주겠다는 제스처였다.

날 모르는 동료들에게서 익숙한 습관을 발견하고, 무심결에 속내를 파악할 때마다 조금씩 그리움이 쌓이는 기분이다. 봄이 저가며 벚꽃잎이 하나씩 떨어져 수북이 쌓이듯이.

“시현.”

“어.”

“저는 다 기억해요.”

내 생각의 흐름을 읽은 것만 같은 말이었다. 루블리안다운 위로에 모든 걸 게워낼 듯이 울렁이던 속이 안정되어갔다. 이윽고 귓불에 폭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문질러졌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루블리안의 입술이라는 걸 알았다.

“……입술이나 떼.”

“네에.”

“그리고 고마워.”

기어가는 목소리로 덧붙인 내 감사 인사에 루블리안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여기가 제 자리라는 듯이 다시금 내 어깨에 머리를 올린 터라 온기를 머금은 숨결이 귀를 간지럽혔다.

맞닿아 있는 부근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내 심장 박동 소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루블리안은 다른 이들을 잊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러니 자꾸만 다 받아 주고 싶게 되는 거 아닌가.

어쩐지 손끝이 움칠거리는, 그런 간질거리는 분위기 속에서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쯤 하지. 시현, 그대에게는 미안하지만 계속 보고 있다간 내가 실례를 저지를 것 같네.”

그러한 분위기의 끝을 선언한 건, 다름 아닌 친우의 애정 행각을 못 견뎌 하는 몬트리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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