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또라이의 집착을 얕봤다 (82)화 (82/112)

082. 루블리안과 봉인 (11)

애매하게 됐다. 득실 관계없이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걸린 마신의 축복과 가호가 풀린다는 거 아닌가. 나와 루블리안의 최종 목표가 마신 봉인이니 말이다.

축복과 가호가 남아 있는 이상, 그 미친놈은 마신의 감시 카메라나 다름없었다. 우선 봉인에는 도움이 일절 되지 않는다. 그 잘난 머리를 이용하려 해도, 적이 그걸 실시간으로 엿듣고 있는 거니까.

“시현, 표정이 왜 그래요?”

루블리안이 상체를 수그리며 나와 눈높이를 맞췄다. 후드 때문에 좁아진 시야를 그가 차지한다. 다른 건 하나도 들어가지 못하게.

[그래도 다행이네요.]

달빛이 내리쬐는 밤바다의 환상을 깬 건, 뇌리에 울리는 신의 목소리였다.

루블리안은 자신에 의해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단 걸 진작에 눈치채고는 더 예쁘게 웃고 있었다. 의식을 차리자, 아쉽다는 듯한 눈길이 살갗에 달라붙는다. 여하간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뭐가?’

[루블리안이 정신을 붙들어서요. 저는 정말 루블리안이 거리 한복판에서 시현에게 키스할 줄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내게 말 걸기 전, 루블리안은 나와 키스하고 싶은 걸 참는다고 그랬다. 어둑해지는 하늘 아래, 그가 너무 빛난 탓에 홀린 게 문제였다. 그래서 전 상황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직이 한숨을 흘리는데, 루블리안이 내 손목 안쪽을 뭉갤 것처럼 둥글게 어루만졌다. 따로 성적인 의도가 있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저 눈에 가득한 욕구를 갈무리하려는 행동인 듯했다.

문제는 그 손목 안쪽이 그가 열심히 깨물어 자국을 만든 곳이라는 거다. 누를 때마다 어쩐지 아릿하면서도 기묘한 감각이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왔다. 발가락이 오므라들고, 손끝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한번 외설적인 접촉을 했더니 틈만 나면 분위기가 정조를 위협하는 식으로 흘러 버렸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이.”

순식간에 신의 역작에 불퉁한 기색이 어렸다. 내 허리를 끌어안고는 체중을 싣는다. 이야기를 해야 할 건 아는데, 또 이러한 분위기에서 평행 세계 루블리안을 언급한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심술을 부리는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농밀해졌던 공기가 가벼워졌다. 내 목표는 달성했다.

“그 아저씨가 뭐요?”

“축복과 가호를 없애도록 도와달라고 했잖아.”

“네에. 그랬죠.”

“그거 우리가 마신 봉인하면 자연스럽게 없어진대.”

내 말을 들은 루블리안은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모양이었다. 그가 틈만 나면 내 몸을 노린 탓에 나만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아아.”

귀에 익은 달콤함이 밴 목소리에 별생각 없이 입을 벌리자, 매콤함이 입에 퍼졌다. 이건 또 언제 산 건지. 내 허리에 위치하던 손 중 하나에는 닭꼬치가 들려 있었다.

삼키기 위해 우물거리자, 입과 볼이 함께 움직였다. 그런 나를 빤히 응시하던 루블리안이 불시에 입을 맞췄다. 쪽 하는 젖은 소리가 귀에 울렸다.

“……참는다며.”

꼭꼭 씹어 삼킨 뒤, 기가 막힌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자 루블리안이 굽혔던 상체를 핀다. 순식간에 내 시야를 차지하던 푸른색과 금색이 빠져나간다.

“으음. 그게 제 마음대로 되지 않네요. 시현이 그만 좀 귀여우면 가능할 텐데…….”

말끝을 질질 늘어뜨린 루블리안이 곤란하다는 투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입가에 그렸다. 굴곡진 입매는 즐거움과 애정만 존재했다.

“어쩔 수 없네요. 당신이 평생 뽀뽀 받으며 사는 수밖에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지.”

“으응. 좋은 거 나도 알아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여도 루블리안은 제 말만 했다. 좋지 않은 건 아니었기에 대꾸는 하지 않았다.

대신 또 다른 곳으로 샌 대화를 제대로 된 방향으로 돌렸다.

“평행 세계 루블리안은 몰랐을까. 마신이 봉인되면 축복과 가호가 다 사라진다는 걸.”

말하면서도 그럴 리 없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내 옆에 있는, 일부러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는 루블리안 또한 그 사실을 파악했다. 모르리란 생각은 역시 들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어째서 우리에게 협조를 바라지? 머리를 바삐 굴리며 루블리안의 입가를 훔쳤다. 엄지에 묻은 소스를 클린 마법으로 없앴다.

내게 없애 달라고 애교를 부릴 모양이었는지 놀란 낯이 눈에 들어온다. 그의 손목을 잡아 내려 닭꼬치를 한 입 베어 물자, 얼굴을 붉힌다.

뚝딱거리기 전에 대답을 종용하듯 그의 손목 안쪽을 문질렀다. 얼빠진 낯을 수습하며 어물어물 루블리안이 입을 연다.

“알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손목을 만지던 걸 그만두자, 내 손가락 사이사이에 열감이 들어찬다. 나는 루블리안이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기며 귀를 기울였다.

“알면서도 온 건 시현이 보고 싶었기 때문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마신을 봉인하려 한다는 걸 확신하지 못할 리도 없으니까요.”

날 보고 싶어 온 게 아니냐는 대목에서 루블리안은 심기 불편한 낯을 했다. 차라리 다른 이유가 있길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시현이 시간을 되돌리기 전이랑 성격도 점점 동화되는 것 같던데, 감정이라고 그러지 않을 이유도 없고요.”

감정이 가장 동화되기 쉽긴 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날 살리겠다고 시간을 돌리고 또 돌린, 그 케케묵은 감정에 휘말린다면 큰 이유 없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가 아닌 애정이 다시 생기는 건,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적어도 우리에겐 그랬다.

“우선 시현이 말했듯, 다시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걸 조건으로 걸어 봐요. 응할 가능성이 적기는 한데, 시도 자체는 나쁘지 않으니까요.”

“그러든지.”

선선히 수긍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게 그것 말고 얻어 낼 게 있기는 한가 싶었다. 그에게는 어떠한 기대도, 바람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현.”

부름에 후드를 잡고 고개를 들었다. 루블리안은 여상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띄고 있었지만, 어쩐지 조금 부루퉁해 보였다.

“저에 대해서는 안 궁금해요? 그 새끼 얘기만 계속하고.”

그러니까 대화 주제가 바뀌어도 평행 세계 루블리안에 대해서는 끈질기게 이야기하면서, 왜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냐는 거다.

루블리안이 부러 더 서운한 척 고개를 떨군다. 그 움직임에 따라 찬란한 금발이 우수수 아래로 쏠렸다. 서서히 밤이 되어가서 그런지 머리카락의 살랑거림이 유독 눈에 띈다.

“안 궁금한 게 아니란 거, 알잖아.”

“으음. 모르겠는데요.”

부드러운 실타래 같은 금빛 머리카락 사이 사이로 보이는 청명한 눈동자에는 장난기가 어려있었다. 시무룩하기는커녕 즐거워 보이기만 했다. 조화로이 섞이는 색들을 눈에 담고 있자, 말이 이어진다.

“그러니까 얼른 말해 주세요. 제 이야기가 더 듣고 싶다고요.”

“그건 원래도 그랬어. 내가 말했잖아.”

나 너 좋아한다고.

망설임 없이 한숨처럼 흘러나온 말이었다. 좀 더 과장되게 행동하고 있긴 한데, 장난기 아래에 깔린 섭섭함은 진짜였다. 그래서 조금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너라는 걸 뻔히 알면서 당연한 소리를 한다. 바로 답이 되돌아오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낯이라, 다시금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한다고.”

한 어절마다 진심을 꾹꾹 담아서.

모닥불 가까이에서 불을 쬔 듯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식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원래 흰 피부를 가졌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이나 루블리안의 피부는 붉게 물들어있었다.

나를 꼭 껴안는 루블리안의 등에 손을 올려 마주 안아 주고는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래서 우리 어디 가는데. 여긴 왜 왔어?”

길 한복판이긴 했지만, 인식 장애 마법을 걸었으니 상관없지 않으려나. 이미 입맞춤도 했는데 포옹쯤이야. 혈기 왕성한 루블리안을 막는 건 어려웠기에 이미 반쯤 체념했다.

“예전에 제가 어린 절 기절시켰잖아요.”

“그랬지.”

좀 전까지 있던 골목에서 눈물을 떨구기까지 했지. 그때 얼마나 당황했는지 모른다. 그의 애원에 심장이 얼마나 저릿했는지까지도.

“한 열네 살이었나. 그때쯤 생각했어요. 미래의 저인 줄도 모르고, 보란 듯이 시현과 이 번화가를 돌아다녀 주겠다고요.”

“그걸 지금 하는 거야?”

“그렇죠. 지금 아니면 못할 것 같아서요. 볼 일도 있고요.”

“볼 일?”

내 반문에 루블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바닥에 황금빛으로 타오르는 마법진이 생겨났다. 순간 이동 마법진이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몰라 의아해하는데, 시야가 뒤바뀌었다. 익숙한 술렁임이 잦아들자 보이는 건, 백색의 신전이었다.

어린 루블리안이 신의 축복과 가호를 받았던, 그 신전.

“여긴 왜,”

“루블리안. 너무 늦는 거 아닌가.”

내 말을 자르는 목소리와 어투가 상당히 익숙했다. 신전 앞 계단을 느긋하게 내려오는 이는 어두운 하늘과 어울리는 밤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눈동자는 샛노란 색으로, 매를 떠올리게끔 했다.

몬트리오였다.

시간을 되돌리기 전, 내 동료였던 몬트리오.

나는 몸을 굳힌 채로 머리를 굴렸다. 왜 여기로 나를 데려온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기다렸다고 말하는 걸 보니, 몬트리오와 나를 만나게 하려는 게 ‘볼 일’인 것 같긴 한데…… 마왕을 토벌할, 아.

“쟤네가 우리를 돕기로 했구나.”

생각을 잇다 보니 깨달았다. 마왕은 마신에게서 파생되니, 마신을 봉인하면 마왕 일 또한 저절로 해결된다.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도와도 이상할 게 없다.

대답을 바라는 시선으로 루블리안을 응시하니, 그가 반달을 그리듯 눈을 휘었다. 막힘없이 올라가는 입꼬리가 말한다.

내 생각이 맞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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